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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32화 (132/168)

132화

황제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무슨 뜻이냐, 이즈멜?”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지금 따로 교제하고 있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이즈멜이 고개를 돌려 엘레노어와 눈을 맞췄다.

이즈멜의 폭탄 발언에 놀란 것은 황제만이 아니었다.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페르체 남작, 미안해. 그대에게라도 미리 귀띔해 뒀어야 했는데, 나 때문에 괜히 곤란해졌군.”

이즈멜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평소와 달리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이즈멜은 더없이 우아한 태도로 차를 쭉 들이켰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한 모습이었다.

‘사실이 아니겠지? 그런 말은 따로 없으셨으니까……. 아닌가?’

엘레노어는 이즈멜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점점 긴가민가해졌다.

‘정말인가? 하긴 델른에 머물렀던 시간이 꽤 길었으니까 그사이에 누군가 만나셨을 수도……. 그런데 나한테는 별말 없으셨는데?’

이즈멜의 얼굴에는 미동조차 일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여유로웠고, 또 조금 차가웠다.

순식간에 부자 사이의 분위기가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엘레노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황제가 서걱거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즈멜.”

“예, 아버지.”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소리냐?”

황제는 분노를 간신히 눌러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엘레노어를 의식한 듯했다.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니까요.”

이즈멜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왜 진작 말하지 않았지?”

“말씀드리기 전에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무슨 소리냐는 듯,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한 남자이기 이전에 제국의 황태자라고. 제 감정보다는 늘 국익을 우선해야 한다고요.”

“그게 무슨 상관이지?”

“제 마음을 따르는 쪽,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쪽. 어느 쪽이 벨리움에 더 큰 이득이 될지를 계산해야 했으니까요.”

이즈멜이 피곤한 듯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오늘따라 그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페르체 남작이 워낙 뛰어난 재원이다 보니, 비교가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내내 황제에게만 고정되어 있던 이즈멜의 시선이 엘레노어에게 향했다.

그의 시선이 제게로 향할 줄 몰랐던 엘레노어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자 이즈멜의 눈썹이 살짝 풀어졌다.

“아, 그대를 그렇게 저울질한 것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할게, 남작. 기분 상하지 않았으면 해.”

엘레노어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

“이해해 줘서 고맙군.”

이즈멜이 설핏 미소 지었다.

“그래서, 결론은?”

황제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의 얼굴에 조급함과 짜증이 묻어났다.

‘이미 나는 안중에도 없으시군.’

이즈멜의 충격 선언 때문인지, 황제는 엘레노어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잠깐 잊은 듯했다.

이즈멜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조급한 황제와 달리 더없이 여유롭고 우아한 태도였다.

“저는 제 마음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네 마음.”

황제가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즈멜은 마주 웃지 않았다. 흔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황제를 똑바로 마주 보며 입술을 뗐다.

“예.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였다.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던 것은 아니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쌓이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러하셨듯이요.”

이즈멜의 말에는 웃음기가 없었고, 그의 눈빛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황제도 그것을 느낀 것인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만난 사이지?”

더는 이즈멜에게 연인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즈멜이 작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리 긴 시간을 함께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데 그리 많은 날이 필요하지는 않더군요.”

그녀를 떠올린 것인지, 금빛이 도는 찻물을 내려다본 이즈멜이 엷게 미소 지었다. 그의 손끝이 찻잔 둘레를 찬찬히 어루만졌다.

“볼 수 있는 모든 순간이 애틋해 눈을 깜빡이기가 싫고, 꿈에라도 보고 싶어 그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를 외울 때까지 읽고…….”

이즈멜의 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런 게 사랑이 아니라면 저는 사랑을 모릅니다, 아버지.”

이즈멜의 눈을 마주한 황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들은 사랑에 빠졌다.

저것이 사랑에 빠진 얼굴이 아니라면, 황제 역시 사랑을 모른다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영애는 내게 언제 소개할 생각이지? 난 오래 기다려 줄 수 없다.”

황제가 한발 물러섰다. 이즈멜이 자신 있게 말했다.

“오래 기다리실 필요 없을 겁니다. 곧 알게 되실 테니까요.”

이즈멜이 엘레노어를 보며 싱긋 웃었다.

“남작을 앉혀 두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길게 했군. 귀한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어 미안하게 됐어.”

황제도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는지 엘레노어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엘레노어를 아예 놓아주기는 아쉬운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일은 정말 미안하게 됐네. 조만간 식사나 한번 같이하지. 아직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있으니.”

“예, 폐하. 저의 영광입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황제가 이즈멜에게 명령했다.

“이즈멜, 마차까지 남작을 에스코트해 주도록.”

이즈멜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엘레노어에게 가볍게 팔을 내밀었다.

“가지, 페르체 남작.”

감정이라고는 묻어나지 않은 산뜻한 동작이었다. 그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은 채 엘레노어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황제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왔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즈멜의 얼굴에서 서서히 어색한 미소가 가셨다.

“…….”

“…….”

엘레노어는 발끝만을 보며 걸었다. 구름처럼 폭신한 잔디 위를 내딛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알고 있다.

그가 황제를 바라보며 하던 말은 사실 저를 향한 말이라는 것.

눈을 깜빡이는 시간도 아깝고,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 편지를 외울 때까지 읽게 하는 사람.

그에게 그런 사람은 여전히 엘레노어, 그녀인 것이다.

‘어쩌면 조금은 가볍게 생각했었나 봐. 나를 향한 전하의 마음을.’

엘레노어는 이즈멜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엘레노어.”

“네?”

“미안해.”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어 이즈멜과 눈을 맞췄다. 그가 복잡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미안하신데요?”

이즈멜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엘레노어가 작게 대답했다.

“제가 더 죄송해요.”

“그대는 왜?”

“……저도 그냥이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실없이 웃었다.

굳이 긴 말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더 이상의 사과도 필요 없었다.

그냥 서로를 보며 픽 웃어 주는 것, 지금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조만간 여기저기서 조금 시끄러워질 거야.”

“제가요?”

“아니, 내가.”

이즈멜이 씩 웃었다.

“아마 좀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데, 그냥 가벼운 촌극이라 생각하고 낄낄 웃어넘겨. 괜히 무겁게 곱씹지 말고.”

“그게 무슨…….”

아리송한 이즈멜의 이야기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가 지금까지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애써 왔던 것을 알아. 이제는 우리가 그대를 위해 애쓰는 거야.”

이즈멜이 픽 웃으며 엘레노어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여전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몰라도 돼. 곧 알게 될 테니까.”

이즈멜이 엘레노어를 보며 씩 웃었다.

“알게 되면, 그냥 받아들여. 유쾌하게. 약속할 수 있지?”

***

일주일 뒤, 엘레노어는 이즈멜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특종! 황태자 전하의 그녀는 뫼젠의 왕녀!>

<힐데가르트 칼리에르 아르 데 뫼젠, 벨리움과 사랑에 빠지다?>

<뫼젠과 벨리움의 뜨거운 만남 화제>

<측근 발언 입수! 편지로 키워간 사랑>

모든 신문 1면이 이즈멜과 힐데가르트의 열애 소식으로 도배가 되었다. 길거리를 거니는 모두가 두 사람에 대해 떠들어댔다.

두 사람이 얼마나 상극인 앙숙 관계인지 아는 엘레노어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식이었다.

‘그냥 날 위해서 나서 준 거야.’

힐데가르트는 동맹국인 뫼젠에서 가장 사랑받는 왕녀였다. 황태자비로 그 이상 완벽한 자격을 갖춘 여인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훨씬 이상적인 후보가 나타난 셈이니까, 폐하께서 나를 고집할 이유가 사라진 거지. 힐데라면 화제성도 충분히 가지고 있고…….’

엘레노어가 나서서 카이델과의 열애를 밝혔다면, 황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으리라. 당장은 물러선다 해도 추후에 카이델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질 가능성도 있었다.

이즈멜이 열애설에 휩쓸린다면 엘레노어는 그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가 엘레노어를 거절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감사하다…….”

엘레노어가 작게 중얼거렸다.

마음이 슬며시 무거워지려 하자 엘레노어가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즈멜이랑 약속했잖아. 그냥 유쾌하게 웃고 넘어가기로.”

엘레노어가 신문을 반으로 접어놓으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즈멜은 그녀가 이 일로 죄책감을 느끼거나, 괜히 조금 어색해지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편한 친구로 남아 주기 위해 애쓴다면, 엘레노어도 함께 노력해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게 이즈멜에게도 예의인 거야.”

엘레노어는 굳게 다짐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그냥 감사하자고. 이토록 그녀를 든든히 지켜 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에.

***

“그래서 두 사람이 연인 관계란 말이지.”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이즈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힐데가르트도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네.”

하지만 황제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나는 두 사람이 내게 달려와 서로의 욕을 퍼붓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는데.”

이즈멜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처음부터 사랑하지는 않았다고요.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다 보니, 조금씩 마음이 변했다고.”

이즈멜이 당당하게 덧붙였다.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나 그랬지, 힐데가르트가 돌아갈 즈음, 저희가 다투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고 보면 그랬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쩐지 떨쳐지지 않는 찝찝함에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왕녀가 이곳에 머물렀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랑에 빠졌다고?”

“예.”

씩씩하게 답한 이즈멜이 힐데가르트의 손을 잡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

그러자 힐데가르트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때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오래 알지 않았지만, 사랑에 빠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더라고요.”

황제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것도 그랬다.

지금 이즈멜에게서는 그때 느꼈던 애틋함이 보이지 않았지만, 상황은 묘하게 다 맞아떨어졌다.

“……일단 알겠으니 물러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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