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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34화 (134/168)

134화

【너에게 못되게 굴었던 거 알아. 내가 미울 것도 알아. 내가 이기적이라는 것도 알고 다 아는데, 그래도 내가 너를 너무 많이 좋아해. 진심으로.】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좋아해달라고 안 할게. 어차피 한동안은 이즈멜과 연기 합을 맞춰야 하고…….】

【…….】

【그냥, 시간 있으면 나랑 저녁 먹으러 가자. 네가 좋아하는 걸로.】

힐데가르트의 말에 드와이트가 나직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저녁을 먹었습니다.】

아까보다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에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기대감을 품은 그녀가 드와이트의 초록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다시 제안했다.

【그, 그럼 같이 차라도 마실래?】

【차도 마셨습니다. 시간이 꽤 늦었으니까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잇따른 거절이었다.

【그럼 산책, 아, 다리가 아프겠구나.】

힐데가르트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와 함께할 만한 것을 더 떠올려 보려 했지만, 머릿속이 백지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그럼……. 그러면…….】

더듬거리던 힐데가르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바닥까지 구질구질해져 보려고 했는데, 거절 몇 번에 나가떨어지다니 한심한 일이었다.

‘바보 같아. 뭘 기대한 거야.’

고개를 떨군 힐데가르트가 빠르게 속삭이며 돌아섰다.

【먼저 가 볼게. 들어 줘서 고마워. 귀찮았을 텐데, 시간 뺏어서 미안해.】

빙글 돌아서자마자 굵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에게 더 못 볼 꼴을 보이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그때였다.

【내일 점심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힐데가르트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드와이트가 멋쩍은지 작게 덧붙였다.

【……바쁘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혹시 그가 말을 다시 주워 담을세라, 힐데가르트가 재빨리 돌아섰다. 그녀의 고운 얼굴은 그새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 하나도 안 바빠!】

성큼성큼 다가선 드와이트가 젖은 힐데가르트의 얼굴을 손으로 살살 닦아냈다.

【울기는 왜 우십니까.】

뺨에 와닿는 손길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는 드와이트의 눈빛이 예전 그대로라, 힐데가르트는 바보처럼 웃어 버렸다.

【그냥, 너랑 점심 먹는 게 좋아서. 네가 너무…….】

좋아서.

남은 말은 드와이트에게 꿀꺽 삼켜졌다. 조금 뜨겁게 느껴지는 입술이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저번에는 왕녀님이 먼저 하셨으니.】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펑 터져 버릴 듯이 부풀었다.

【좋아합니다, 힐데.】

【거짓말.】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습니까?】

드와이트가 농담으로 던진 말에 힐데가르트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거짓말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너무 기뻐서.】

【진심입니다.】

힐데가르트가 두 팔을 벌려 드와이트를 힘껏 끌어안았다. 드와이트는 그녀를 말없이 꽉 마주 안아 주었다.

욕심이다. 탐하기에 과분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밀쳐내려 했지만, 더는 무리였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울며 고백해오는데, 그 말을 외면할 수 있을 리가.

【사랑한다는 말은, 제국어로 어떻게 해?】

“사랑해.”

드와이트가 또박또박 한 음절씩 내뱉었다. 힐데가르트가 그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사랑해, 듀이.”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조금만 걸어도 얼굴이 익는 걸 보니, 이제는 완연한 여름이었다.

엘레노어의 하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아가씨, 저희가 한다니까요?”

“같이 하면 더 빨리 끝나잖아.”

아침 일찍 출근해, 아이들이 도착하기 전 건물을 깨끗이 쓸고 닦았다.

내 돈 주고 산 내 건물이라 생각하니, 먼지 한 톨 내려앉는 것도 허락할 수 없었다.

“좋은 아침!”

“안녕, 버나데트.”

출근한 버나데트와 같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이 전부 돌아가고 나면 혼자 남아 다음 날 수업을 준비하는 게 일과였다.

처음엔 거의 매일 나와 일을 거들던 드와이트는, 어느 순간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틈만 나면 실실거리는 게, 뭔가 수상했지만 굳이 캐내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아이들과 지지고 볶는 일상은 그야말로 전쟁 같았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선생님은 내 거야!”

난 내 건데.

엘레노어는 남자아이 셋과 여자아이 하나에 둘러싸여 격렬한 소유권 다툼에 휘말렸다.

“까불지 마. 내가 한 달 먼저 태어났거든?”

“선생님이 나보고 예쁘다고 했어!”

“나한테도 그랬거든? 공부도 못하면서.”

“너는 잘하냐? 선생님이 모두가 똑똑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했거든?”

어찌나 목청들이 좋은지, 귀가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엘레노어가 말리는 말은 들리지도 않는 눈치였다.

엘레노어는 포기하고 의자에 앉아 아이들이 열을 올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귀엽군…….’

만 6세의 에너지란, 볼 때마다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커서 선생님이랑 결혼할 거야.”

“나랑 할 건데!”

“누구 맘대로!”

갑자기 똘망똘망한 눈들이 죄다 엘레노어에게 향했다.

“선생님이 고르세요!”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으응?”

“우리 중에 누구랑 결혼할 거예요?”

“누가 제일 좋아요?”

물어오는 얼굴들이 퍽 진지했다. 조금은 필사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엘레노어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음…… 선생님은, 이미 남자친구가 있는데?”

쿠궁.

아이들의 얼굴이 충격으로 돌처럼 굳었다.

“거, 거짓말!”

“미안. 진짜야.”

엘레노어가 손을 뻗어 아이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유난히 그녀를 잘 따르는 아이들이었다.

“여자친구는 없죠?”

곰곰이 생각하던 여자아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엘레노어가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친구면 결혼은 안 했잖아요!”

그때 시무룩해 있던 남자아이 하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 그렇지?”

“그러엄, 저 다 클 때까지 결혼하지 말고 기다려야 해요.”

엘레노어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해 보았다.

어디 보자, 네가 다 클 때까지 내가 기다리면…… 마흔이군.

“왜애? 로벨이 커서 선생님 남자친구한테 저리 가라고 하려고?”

“네! 엄청 멋있어질 거니까 선생님은 기다리고 있어요.”

일곱 살 꼬마의 박력 넘치는 청혼이었다. 엘레노어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카이델, 당신 긴장 좀 해야겠어요.’

엘레노어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그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늘 하루에만 무려 네 명의 귀여운 신사 숙녀들에게 청혼을 받았다고. 그러니 긴장하고 하루빨리 돌아오라고.

“역시 인기 많아, 엘레노어.”

아이들에 둘러싸인 엘레노어를 보며 버나데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느새 친해진 두 사람이었다.

엘레노어가 씩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내가 연하한테 좀 통하는 스타일인가 봐.”

버나데트가 엘레노어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그런데 진짜야? 남자친구 있다는 말.”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야.”

진짜라는 말에도 버나데트는 못 믿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 같은데……. 네가 데이트하는 걸 본 역사가 없어.”

엘레노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진짜래도? 진짜 애인 있어. 지금은 군에 있어서 그래.”

“아, 하긴.”

웬만큼 쟁쟁한 귀족가의 영식은 전부 장교로 참전 중이었으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엘레노어가 작게 얼버무렸다.

“그럴 수도 있고……. 다음에 소개해 줄게. 돌아오면.”

“약속한 거다? 아, 진짜 궁금해. 남자친구도 연하야?”

“아니, 연상.”

꺄아.

버나데트가 발을 동동 구르며 눈을 반짝거렸다. 엘레노어는 뭔가 연애사도 특별할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얼마나 됐어?”

“기간으로 따지면…… 1년 반쯤?”

버나데트의 말에 대답한 엘레노어가 새삼 놀랐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다니…….

“뭐야. 꽤 오래됐네? 진지한 사이야?”

“응? 진지한 사이냐니?”

“그렇잖아. 나만 해도 약혼은 한참 전에 했고, 이 나이면 보통 결혼을 하니까.”

결혼.

버나데트가 꺼낸 화제에 엘레노어의 가슴이 덜컥했다.

버나데트의 말이 맞았다. 엘레노어 또래의 영애들은 대부분 결혼을 했거나, 적어도 정해진 약혼자가 있었다.

“잘…… 모르겠어.”

엘레노어의 표정이 약간 멍해졌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왜? 너는 결혼 생각 없어? 그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카이델과의 결혼.

조금 갑작스럽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절대 싫지는 않았다.

연인으로 함께한 추억이 그리 많지 않기는 하지만, 카이델은 한 번도 그녀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카이델과 함께 있으면 솔직해졌다. 그는 엘레노어의 그늘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든든한 사람이니까. 내가 기대도 흔들리지 않을 걸 알아.’

이렇게 오랜 시간 떨어져 있는데도 조금도 불안하지 않다니. 그가 제게 심어 준 신뢰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아니야. 하고 싶어.”

엘레노어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그런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어.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카이델은 결혼을 원할까?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확신은 할 수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과 결혼에 대한 의사는 별개의 문제니까.

“돌아오면 이야기해 봐. 미치지 않고서야 널 거절할 리는 없겠지만.”

“그래. 그럴게.”

엘레노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바깥에서 커다란 북소리가 둥둥 울렸다. 책상이 덜컹거릴 만큼의 진동이 전해져왔다.

“무슨 일이지……?”

깜짝 놀란 엘레노어와 하녀들이 창으로 달려갔다.

누런빛의 종이가 하늘로 흩뿌려지고, 북 치는 소년들이 대로를 따라 행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광장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엘레노어?”

뒤에서 버나데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 뭔가 일이 터진 것 같아. 나가 보자.”

엘레노어는 문을 잠그고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혹시 무슨 일인지 아세요?”

엘레노어가 옆 사람을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전쟁터에서 전령이 왔답니다. 뭔가 새 소식이 있는 모양이에요.”

엘레노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쟁터에서 온 소식이라면 둘 중 하나였다.

아주 좋은 소식, 혹은 아주 나쁜 소식.

광장으로 향하는 엘레노어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중앙 광장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군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장교가 급하게 나무 상자를 쌓아 만든 단상 위에 올라섰다.

엘레노어가 마리와 에밀리의 손을 한쪽씩 꼭 붙잡고 단상을 향해 다가섰다.

“존경하는 벨리움 시민 여러분.”

남자가 단상 아래 모인 사람들을 죽 둘러보며 호흡을 골랐다.

“아르센의 총사령관이 항복의 뜻을 밝혔습니다. 금일부로 벨리움 연합군과 아르센 연합군 사이의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음을 알립니다.”

그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벨리움이 승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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