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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42화 (142/168)

142화

드와이트의 말에 엘레노어가 울상을 지었다.

“그래…….”

부엌에 간 엘레노어가 얼른 물을 따라 드와이트에게 건넸다.

“얼른 마셔.”

“너는 안 마셔?”

엘레노어가 뒤늦게 저도 몇 모금을 들이켰다.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은 드와이트가 제안했다.

“방까지 데려다줄게.”

“집 안인데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어차피 내 방 가는 길이잖아. 가자, 늦었어.”

당황한 엘레노어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이 도움 안 되는 자식!’

엘레노어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너 먼저 올라가. 난 생각을 좀 정리해야겠어.”

“그럼 우리 여기서 얘기나 할까? 잠도 안 오는데.”

오늘따라 드와이트는 끈질겼다. 하지만 은근히 보수적인 구석이 있는 드와이트가 그녀와 카이델의 만남을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여자친구만 생겨 봐라……. 나도 괴롭혀 줄 거야.’

엘레노어는 어쩔 수 없이 드와이트의 손에 등 떠밀려 방으로 돌아왔다. 엘레노어가 얼른 창을 열어젖혔다.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서 있는 카이델이 보였다. 그는 현관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다.

“카이델.”

엘레노어가 소리 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는데도 카이델은 곧장 고개를 돌렸다.

카이델이 창가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못 나갈 것 같아요. 드와이트 때문에.”

“저런.”

“진짜 얄미워 죽겠어.”

엘레노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쩜 좋지?”

고요하고 선선한 밤공기를 타고 카이델의 나직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약간의 허탈함이 담긴 웃음소리가 가만히 따라붙었다.

‘듣기 좋다.’

엘레노어의 어깨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오늘은…… 그냥 이렇게 보고만 있어야 하나 봐요.”

카이델이 슬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이것도 좋아.”

“맞아요. 이것도 좋네요.”

기대와는 달랐지만, 이렇게 그를 바라만 보고 있는 것도 좋았다. 달빛이 환해 그의 얼굴을 잘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약간 흐릿하게 전해지는 목소리도 나쁘지 않았다. 꼭 자기 전에 휴대폰으로 전화 통화를 주고받는 기분이 들었다.

잔잔하게 밀려드는 행복감에 엘레노어가 싱긋 웃었다.

“왜 그렇게 웃어?”

“그냥…… 새삼 신기해서.”

엘레노어가 고개를 느른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누가 믿겠어요. 그 대단한 벨리움 총사령관님께서 야밤에 몰래 담벼락을 넘으셨다는 말을…….”

“생각보다 많이들 믿을걸.”

카이델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길게 휘었다.

“내가 그대에게 미쳐 있다는 걸 아는 이가 한둘이 아니라.”

엘레노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별 의식 없이 툭 던진 말에 엘레노어의 심장은 직격탄을 맞았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소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피곤했던 엘레노어가 작게 하품을 했다. 그러자 카이델이 가볍게 턱짓했다.

“들어가서 자. 출근해야지.”

“아쉬운데…….”

“가서 누워. 잘 때까지 여기 조금 더 있을게.”

사실 아까부터 눈꺼풀이 무겁기는 했다. 잘 시간이 세 시간은 훌쩍 지났으니까.

그래도 아쉬워 미적거리자, 카이델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바로 옆에 같이 있다고 상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할 테니.”

“좋아요. 아! 잠깐만요.”

엘레노어가 후다닥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거울 앞에 선 엘레노어가 입술에 립스틱을 슥슥 발랐다.

‘내가 이 나이에 이런 유치한 짓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엘레노어가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입술 도장을 꾹 눌러 찍었다. 창가로 달려간 엘레노어가 꼭꼭 뭉친 손수건을 툭 떨어뜨렸다.

팔랑, 펼쳐진 손수건이 카이델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굿나잇 키스예요.”

손수건에 붉게 찍힌 입술 자국을 발견한 카이델의 얼굴 근육이 허물어졌다. 그가 너른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웃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입술 자국 위에 제 입술을 가만히 포갰다.

“잘 자, 엘레노어.”

***

그런 엘레노어와 카이델의 밀회를 지켜보는 시선들이 있었으니, 에버렛 백작 부부였다.

엘레노어가 드와이트를 만나 진땀을 빼고 있던 그때부터, 백작 부부는 정원에 선 미려한 청년 하나를 발견했다.

카이델을 보던 백작 부인이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오래 서 있는데 그냥 들어오라고 할까요?”

백작이 작게 툴툴거렸다.

“괘씸하니 그냥 두지. 어디 밤중에 남의 집 귀한 딸을 불러내려고.”

“얼마나 같이 있고 싶었으면 저러겠어요. 귀여워라.”

“열 시까지 얼굴 봤으면 됐지.”

백작 부인이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타박했다.

“또 맘에도 없는 소리 한다. 엘렌이 열 시에 꼬박꼬박 들어올 때마다 은근히 서운해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내가 언제 또 서운해했다고…….”

두 사람은 발코니에 나란히 서서 카이델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엘레노어가 창밖으로 몸을 쭉 내밀었다.

백작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엘렌은 왜 안 나가고 도로 방으로 갔지?”

“좀 더 크게 말했으면 좋겠다. 잘 안 들리네요.”

두 사람은 엘레노어와 카이델이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카이델이 손수건 위에 입 맞추는 것을 본 백작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참…… 헤어진 지 몇 시간이나 되었다고 저리 애틋한지.”

“어머, 로맨틱하기도 하셔라.”

백작 부인이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그녀가 남편을 툭 치며 말했다.

“저 둘, 아무래도 빨리 결혼시켜야겠죠?”

“……그 몇 시간도 떨어져 있는 게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조금씩 준비해 둬야겠네요. 우리 각하 속 타서 돌아가시기 전에 식은 치러야죠.”

백작 부부는 팔짱을 꼭 낀 채 카이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엘레노어가 들어가고 나서도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렌이 딱 맞는 짝을 만난 것 같네요.”

“둘은 행복할 거야. 내가 그대를 만나고 지금껏 행복한 것처럼.”

백작 부부가 가볍게 입을 맞추며 웃었다.

***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선생니임.”

아카데미 방학이 시작되었다. 벨리움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곧장 엘레노어를 만나러 왔다.

“루크, 그새 키가 이만큼이나 컸어? 데미도 그렇고!”

현관에 선 엘레노어가 양팔로 아이들을 꽉 끌어안았다. 못 본 사이 아이들은 훌쩍 자라 있었다.

엘레노어가 시에나의 복숭앗빛 뺨을 슥슥 쓸어 주며 말했다.

“우리 에나는 예쁜 숙녀가 다 되었네?”

“그러게 말이야.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큰다더니, 못 본 새 몰라보게 쑥 자랐어.”

“또 다음 방학이면 얼마나 더 자라 있을지 가늠도 안 됩니다.”

오늘 백작저를 방문한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카이델과 아드리안은 물론, 이즈멜까지도 백작저를 찾았다.

엘레노어가 이즈멜에게서 꽃다발을 받아 들며 인사를 건넸다.

“꽃다발까지. 감사합니다, 전하.”

“그새 또 전하로 돌아갔어? 서운한데.”

“아…… 맞다. 이즈멜.”

엘레노어가 머쓱하게 웃으며 뒷덜미를 긁적였다.

사석에서는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전하라는 호칭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집 안에 들어선 아드리안이 가볍게 코를 킁킁거렸다.

“음, 미트로프 냄새난다.”

“어떻게 알았어?”

“당연히 알지. 내가 백작저에서 식사를 한두 번 해 봤게?”

씩 웃은 아드리안이 아이들을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카이델이 들어섰다.

“식사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정신이 없군.”

“그래도 전 좋은걸요. 복작거리고, 따뜻하고.”

“그대가 좋으면 나도 좋지.”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가 안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아버님은 계셔?”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집을 비워 주셨어요. 편하게들 어울리라고요. 왜요?”

카이델이 한 손에 든 와인을 슬쩍 들어 보이며 말했다.

“좋아하시는 와인이 하나 들어와서 가져왔는데.”

“저한테 주세요. 나중에 전해드릴게요.”

카이델은 저택에 방문할 때마다 백작 부부가 좋아하는 것들을 잊지 않고 챙겨오곤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엘레노어가 싱긋 웃으며 와인병을 받아 들었다.

복도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던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사귀는 사이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친밀하고 다정한 연인 말이다.

시에나가 작게 뇌까렸다.

“진짜였어…….”

루카스가 제 팔을 슥슥 쓸어내리며 말했다.

“닭살 돋아!”

카이델과 엘레노어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당신이 애들한테 말했어요?”

“응. 데미한테 편지로 알렸지. 직접 말하고 싶었어?”

“아니에요. 잘했어요.”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입술에 보란 듯이 쪽, 도장 찍듯 입술을 내렸다.

“으악!”

“공작님 미워!”

가볍고 산뜻하기까지 한 뽀뽀였지만, 아이들에게는 입을 맞춘다는 게 무척 생경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시에나와 루카스가 눈을 꼭 가리고 응접실 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데미안도 방긋방긋 웃으며 두 친구의 뒤를 따랐다.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발을 꾹 밟으며 타박했다.

“애들 앞에서 뭐 하는 거예요! 짓궂게 굴긴.”

“확실히 해 두는 거지. 선생님은 이 삼촌이랑 연애 중이라고.”

카이델이 고개를 슥 기울이며 말했다. 퍽 진지한 목소리였다.

“애들 무시하면 안 돼. 나만 해도 데미 덕을 꽤 많이 봤거든. 동생 잘 둔덕에.”

엘레노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돌아보면 정말 그랬던 것 같았다.

시에나와 루카스, 데미안 모두 사랑의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아이들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었다.

‘돌아보면 아이들 중간에서 정말 애썼구나. 귀여워.’

엘레노어가 속으로 쿡쿡 웃었다.

‘데미가 사랑의 큐피드였네.’

애초에 카이델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데미안 때문이었고, 그와 가까워진 계기도 데미안이었다.

“그건…… 사실이죠. 데미한테 평생 잘해요.”

“예, 선생님.”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보며 눈을 휘었다.

요망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엘레노어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때 복도 끝에서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참 대낮부터…….”

아드리안이 두 사람을 보며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진심으로 넌더리가 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알겠으니까 적당히 합시다.”

이즈멜이 아드리안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며 동조했다.

“염장 그만 지르고 식사나 하지, 두 사람. 배고파 죽겠는데.”

아드리안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불충도 저런 불충이 없습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차인 것도 서러운데 이젠 밥까지 굶기는군. 내가 대체 어디까지 관대해져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차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지 말입니다.”

내내 어색하던 아드리안과 이즈멜은 요즘 부쩍 가까워졌다. 실연이 두 사람 사이에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듯했다.

두 사람이 코너를 돌아 사라지고, 엘레노어가 작게 속삭였다.

“우리도 저녁 먹으러 가요.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특별히 준비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엘레노어와 카이델은 그저 달콤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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