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가 그녀의 물건을 제 물건 옆에 가지런히 정리해 둔 것이 보였다.
“하여튼…… 엉큼하긴.”
공작성에 딸린 카이델의 침실은 수도 저택에 있는 침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났다.
깔끔한 것은 같지만, 훨씬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여기저기 그의 손때가 묻은 것이 느껴졌다.
“어렸을 때부터 머물렀던 곳이라 그런가 보다. 안 쓸 것 같은 물건들이 꽤 많네.”
엘레노어가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어렸을 때 그가 가지고 놀았던 것으로 보이는 장난감과 동화책 같은 것이 구석에 놓여 있었다. 엘레노어가 작은 강아지 인형을 집어 들었다.
“귀여워라.”
장난감을 가지고 성안을 뛰어다니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동화책을 읽었겠지.
카이델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고 있자니 살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분명 엄청나게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이건 좀 더 컸을 때 물건 같고…….”
어느 순간 꽂힌 책들의 수준이 확 올라갔다. 책장 위에 목검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엘레노어의 시선이 연갈색 표지의 책 한 권에 닿았다. 아무런 제목이 없어 눈이 갔다.
‘이건 무슨 책이지?’
촤르륵.
엘레노어가 책을 빠르게 넘겨 보았다.
“어, 책이 아니라 일기였구나.”
익숙한 카이델의 글씨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내용을 보니, 아카데미 재학 시절 썼던 것 같았다.
일기의 한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책상 위에 내 것이 아닌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슬슬 지친다. 이게 몇 번째인지.
내 자리인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왜 이러는 거지? 피곤하다.」
짜증이 났는지 글씨가 평소보다 엉망이었다. 아마 이날도 제게 온 선물을 분실물 보관함에 넣고 온 모양이었다.
엘레노어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짝사랑했던 영애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눈치 없어 줘서 고마워요.”
덮고 다시 꽂아 놓으려는데, 일기의 마지막 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결혼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겠다.」
딱 한 줄의 일기.
엘레노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의 굳은 결심을 나타내는 것처럼 유난히 글씨가 크고 두꺼웠다.
‘카이델은…… 비혼주의자인가?’
일기장을 다시 꽂아 놓는 엘레노어의 눈빛이 멍했다.
그러잖아도 카이델이 돌아오면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결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 완벽하다는 말을 자주 하기는 했지.’
카이델은 그냥 이렇게 연인으로 남는 걸 원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직 벨리움에서는 흔치 않지만, 뫼젠 같은 나라만 보더라도 그런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엘레노어도 지금 그와 저의 관계가 무척 만족스러웠으니까.
‘하지만…… 나는 카이델이랑 결혼하고 싶은데.’
원래는 엘레노어도 결혼 생각이 많지 않았다. 드와이트에게 가주 자리를 떠넘긴 이유 중 하나도 그것이었다.
그런데 카이델을 만나고 생각이 변했다.
눈을 뜨자마자 그를 보고 싶었다. 열 시마다 헤어지는 건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런 그를 보고 있으면, 조금 궁금해졌다.
‘카이델과 날 반반씩 닮은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
카이델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엘레노어는 먼 미래의 그와 저를 숱하게 그려 보았다.
첫째는 딸이 좋을까, 아들이 좋을까. 의미 없는 고민에 잠기기도 했다.
“하지만 꼭 그런 관계가 되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 같아.”
그 사람이랑 같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엘레노어가 순간 동요한 마음을 다잡았다.
“엘레노어, 여기 있어?”
그때 문이 빼꼼 열리고, 멀쑥한 차림의 카이델이 몸을 반쯤 들이밀었다. 엘레노어가 활짝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카이델.”
“뭐하고 있었어?”
“당신 물건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괜찮죠?”
엘레노어가 늦은 허락을 구했다. 카이델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 거면 다 그대 거니까.”
카이델의 입술이 엘레노어의 뺨에 닿았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엘레노어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음…… 난 내 거면 다 내 건데.”
“그래도 돼. 그대 것도 내 것도, 다 그대가 가져.”
엘레노어가 피식 웃었다.
“겁도 없으셔라. 제가 나쁜 맘을 먹고 싹 벗겨 먹으면 어쩌시려고.”
그 순간 카이델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가 엘레노어의 척추를 슬쩍 훑어 내리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나야 그건 언제나 환영인데.”
“아, 정말!”
엘레노어가 질겁을 하자 카이델이 소리 내 웃었다. 그가 그제야 원래의 방문 목적을 밝혔다.
“오랜만에 말이나 탈까 하는데, 그대 생각은 어때?”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좋아요! 웬일이에요? 내가 말 타는 거 매번 말렸으면서.”
“대신 나랑 같이 타.”
카이델이 슬쩍 덧붙인 조건에, 엘레노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낙마 사고는 벌써 2년 가까이 지난 일이었다. 그런데도 주변 사람들은 엘레노어가 말 근처에만 가도 불안한 얼굴이 되곤 했다.
걱정하는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격렬한 반대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불안해요?”
“솔직하게? 조금은.”
카이델이 선선히 인정했다.
“그래도 그게 주된 이유는 아니야.”
“그럼요?”
엘레노어가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내가 그대를 안고 있고 싶어서 그래.”
사륵.
그 순간 마음이 녹았다. 어쩌면 말도 매번 저렇게 예쁘게 하는지, 뻗댈 수가 없었다.
엘레노어가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며 말했다.
“그런 이유라면 뭐……. 이해할 수 있죠.”
“가자.”
카이델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새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이따 손님이라도 오시는 건가? 오늘따라 더 근사한 것 같아.’
그가 손을 내밀며 웃으면, 엘레노어는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의 얼굴을 보면 매번 얼굴이 붉어졌다.
“……좋아요. 가요.”
아마 평생 그렇겠지.
엘레노어가 그의 손을 꽉 맞잡았다. 있는 힘껏. 조금의 불안감도 파고들지 못하도록.
***
“전보다 자세가 훨씬 좋아졌는데.”
“그거 봐요. 이제 진짜 잘 탈 수 있다니까.”
말에 익숙해져서인지, 그에게 익숙해져서인지 승마는 무척 편안했다. 카이델도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
그때 그가 숲으로 난 사잇길로 말을 몰았다. 어쩐지 익숙한 풍경에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 길은…….”
“기억해?”
엘레노어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당연히 기억하죠! 어떻게 잊겠어요.”
그날은 엘레노어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전생의 꿈을 꿨던 것도 강렬한 기억이지만, 그날이 정말 특별해진 것은 카이델 때문이었다.
“그날이 제게는 얼마나 특별한 날이었는데요.”
엘레노어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아마 당신에게도 특별한 날이었을 거예요. 기억해 둬요.”
“왜?”
“내가 그날 당신한테 반했거든요.”
담백하게 대답한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품에 등을 기댔다. 등을 통해 빠르고 힘찬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든든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그 순간부터, 엘레노어는 늘 어른스러웠다. 속만은 어른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드와이트를 가르치고, 아드리안도 살뜰히 돌봤다. 부모님이 걱정하실 일 같은 것은 조금도 만들지 않았다.
또 선생님으로서 아이들을 보살피고, 이즈멜의 고민을 들어주었다. 때로는 클로드의 사업 파트너로서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엘레노어는 늘 어른이었다. 기댈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사람.
“혼자 참고 혼자 삭이고……. 그게 습관이 돼서 나도 모르게 좀 지쳐 있었나 봐요.”
엘레노어가 담담한 목소리로 제 속 이야기를 건넸다. 카이델은 말없이 엘레노어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한테 그렇게 어리광을 부려 본 건.”
“…….”
“당신한테는 그래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나 하나 기댄다고 흔들릴 사람 같지 않아서.”
엘레노어가 싱긋 웃었다.
“그런 마음이 드는 사람은 처음 만나 봐서, 든든했어요.”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는 평소보다 말이 조금 없었다.
‘음, 좋은 향기.’
어느 순간 코끝에 휘감기는 숲의 향기가 강해졌다. 호수가 가까운 모양이었다.
아름다웠던 호수의 풍경을 떠올리던 엘레노어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땐 솔직히 좀 웃겼다. 코 풀라고 셔츠 벗어 줬을 때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손수건이 없는데 그럼 어떡하나…….”
엘레노어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콩하고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더라고요. 자기 전에 눈 감으면 생각나고, 일하다가 잠시 멍 때리면 또 생각나고.”
“그래?”
“눈앞에서 훌러덩 옷을 벗는데 그게 쉽게 잊히진 않죠. 더군다나 당신 같은 몸이면…….”
영영 잊고 싶지 않아지죠.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이 낮게 웃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좀 설렜어요. 그 순간 당신에게 중요했던 건, 내가 울고 있다는 그것 하나뿐이었던 것 같아서.”
“정말 그랬어.”
“아마 앞으로도 종종 생각날 것 같…….”
그때였다.
엘레노어의 말문이 턱 하니 막혔다. 눈 앞에 펼쳐진 호수는 분명 그때의 그 호수가 맞았지만, 아니었다.
“이게…… 무슨.”
엘레노어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공간이 꽃으로 가득했다.
카이델이 얼떨떨한 얼굴의 엘레노어를 말에서 내려 주었다. 엘레노어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제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손.”
카이델이 손을 내밀었다. 엘레노어는 습관적으로 착,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카이델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기억나? 붉은 제라늄. 내가 그대에게 처음 선물한 꽃이었지.”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걷자 또 다른 꽃이 나왔다.
“스위트피. 거실 테이블에 종종 올라가 있어서 그대를 기다리면서 자주 봤었어.”
카이델은 엘레노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백작저의 정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엘레노어가 좋아하는 꽃들로 가득했다.
카이델은 모든 꽃을 엘레노어와 연결 지어 기억했다. 따로 말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신기했다.
“라벤더는……?”
“그대에게서는 늘 라벤더 향이 나. 몸에서도, 머리카락에서도.”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췄다.
“엘레노어.”
“……네, 카이델.”
“그대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난 그대를 사랑하게 됐어. 그대가 웃는 게 좋아서, 어떻게 하면 그대가 웃을지 매일 고민했지.”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라벤더밭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치맛자락에 라벤더가 사락사락 스치며 달콤한 향기를 흘렸다.
“앞으로도 그 고민은 평생 내 것이었으면 해.”
“카이델.”
엘레노어의 손끝이 저도 모르게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예감한 듯,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댔다.
“세상 가장 좋은 것만, 가장 고운 것만 그대에게 안겨 줄게. 그대가 어떤 길을 걷든, 그 길이 가장 좋은 곳이 되도록.”
카이델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언제부터였는지, 그의 손에 작은 반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카이델이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뗐다.
“엘레노어, 나랑 결혼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