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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48화 (148/168)

148화

0표라니!

치욕스러운 참패를 경험한 엘레노어는 계단에 쪼그려 앉아 지난 삶을 돌아보았다.

‘내가 뭘 그렇게 주변에 잘못했담.’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 엘레노어. 한두 달쯤 더 기다리는 건 괜찮잖아.”

“결혼식이 문제가 아니에요!”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이 황당하다는 듯 픽 웃었다.

“……그럼?”

“어떻게 한 명도 저를 안 찍어 주냐고요. 너무해.”

엘레노어가 어깨를 축 떨궜다.

아드리안과 이즈멜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 밖에 만난 다른 사람들도 전부 장난치듯 드와이트의 손을 들어 주었단 말이다.

“그대 반응이 워낙 귀여워야지. 다들 이런 얼굴이 보고 싶으니 장난을 친 거야.”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불퉁해진 볼을 콕 누르며 말했다.

“다들 그대를 너무 아끼니까 그런 거야. 소중한 사람이니, 괜히 조금 더 붙잡고 있고 싶은 마음.”

“…….”

“난 이해해. 그대에게 내가 한참 부족하니까.”

카이델의 말에 엘레노어가 흠칫했다. 그를 올려다보는 엘레노어의 시선이 약간 미묘해졌다.

“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카이델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너무도 자명한 사실을 굳이 왜 확인하냐는 듯, 약간의 당혹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럼. 당연하잖아.”

그런 그를 빤히 보던 엘레노어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난 아직도 가끔 신기한데. 왜 당신 같은 사람이, 나같이 평범한 여자를 그렇게 애타게 사랑하는 건지.”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어깨에 고개를 툭 기대며 말을 이었다.

“내가 전생에 정말 열심히 살긴 살았구나, 그래서 이런 상을 받는 거구나……. 그런 생각도 하는데.”

“나야말로 그래. 그대를 보고 있으면, 내가 정말 억세게 운 좋은 놈처럼 느껴져.”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손을 깍지 껴 잡으며 약속했다.

“결혼식, 미뤄진 만큼 더 제대로 준비할 수 있어. 세상에서 제일 근사한 결혼식으로 만들어 줄게.”

엘레노어가 그를 슬쩍 올려다보며 물었다.

“진짜요? 정말 그럴 수 있어요?”

“그럼. 신부가 이미 완벽하니, 그거야 어렵지 않지.”

카이델의 너스레에 엘레노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드와이트 결혼식보다 열 배……까진 너무했고 두 배는 근사하게 해요, 우리가.”

“그래, 그러자.”

기분이 좋아진 엘레노어가 드와이트와 힐데가르트에게 줄 선물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둘 결혼 선물로는 뭘 해 줘야 하죠? 괘씸하긴 하지만, 그래도 둘 다 소중한 사람이니까 근사한 선물을 해 주고 싶은데.”

카이델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수도 저택 중에 하나를 내어줄까 생각하고 있었어.”

엘레노어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네? 그 정도로 근사한 걸 바라지는 않았는데요.”

“아무래도 뫼젠과 벨리움을 자주 오가게 될 테니까…… 그런 게 제일 필요할 것 같은데. 별로인가?”

“별로라기보다는 너무 과하지 않아요?”

“내겐 과하지 않아.”

카이델의 말에 엘레노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집 한 채를, 그것도 수도에 있는 저택 한 채를 내어주는 게 과한 게 아니라니.

“당신 전에 목걸이 내밀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거예요?”

카이델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게다가 저택 중에 하나라니…… 수도에 공작저는 한 곳 아니었어요?”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의 눈썹이 꿈틀했다.

“결혼식이 좀 늦춰진 게 다행스러운데.”

“어째서요?”

“약혼자에 대해서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서야.”

호사가들이 줄기차게 떠들어대고 다니던 이야기 중에는 카이델의 부에 대한 것도 있었다. 틀린 정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과장이 아닌 사실이었다.

소문에 빠른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조금만 알아보려고 했더라면 지금처럼 놀란 표정은 짓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니 내가 그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지.’

엘레노어는 카이델이라는 사람, 그 외의 것에는 정말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를 그렇게 있는 그대로 봐 주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일단 수도 안에 가지고 있는 저택은…….”

카이델은 엘레노어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주기 시작했다.

“이 정도고.”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홉 채……?”

“물론 상가 건물은 그보다 많지.”

엘레노어의 초록색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지금까지 하나 있는 것 가지고 그렇게 자랑했는데……? 나 뭐한 거지.’

그런 엘레노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이델은 진지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 갔다.

“수도에서 벗어나면, 그대의 손가락 발가락을 다 접어도 부족해져.”

“네에?”

“영토는…… 나중에 지도 보면서 설명해 줄게. 그 밖에도 그대가 알아야 할 것들이 좀 있는데…….”

엘레노어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손바닥에 쪽, 하고 가볍게 입 맞춘 카이델이 말했다.

“왜? 이제 다 그대 건데, 그대가 알아야지.”

“그게 어떻게 내 거예요. 다 당신 거지.”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그대 소유잖아. 내게 속한 건, 다 그대에게 속한 거야.”

“그건…….”

“익숙해지게 해 줄게.”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가 유월의 초목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왜 갑자기 등줄기가 싸하지.’

그리 머잖은 훗날 엘레노어는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그녀의 신랑은 제국 최고의 부호였고, 그녀에게 지나치게 후해지는 점이 유일한 흠인 남자였던 것이다.

참고로 엘레노어가 그의 씀씀이에 익숙해진 것은, 정확하게 10년하고도 7개월이 지난 후였다.

***

드와이트의 결혼식은 뫼젠에서 열렸다.

카이델이 뫼젠의 국왕에게 인사를 건네러 가자, 국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전쟁에서 카이델이 세운 무공은 뫼젠에도 아주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 발렌타인 공. 와 주어서 고맙소. 그러잖아도 꼭 만나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제게 맡겨진 소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그간 무탈하게 지내셨습니까?】

【다 공 덕분이지. 내 특별히 신경 쓰라 일렀으니 머무는 동안 편히 쉬시길 바라오.】

【더없는 영광입니다.】

카이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우리 힐데가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 하여 처음에는 고민이 많았어. 한데 사위 될 이가 공의 처남이라 하지 않겠소?】

【예, 맞습니다.】

국왕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 한번 믿어 보자고 생각했지. 전부터 그대와 더 깊은 인연을 맺고 싶다고 말했던 것은 진심이었소, 공.】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결정하신 겁니다, 폐하. 제가 지켜본 에버렛 영윤은 탁월한 자입니다. 그만큼 반듯하고 어진 이는 또 찾기 어려우시리라 보장합니다.】

【그대의 보장이라면 내 안심하고 믿지.】

접견실에서 나선 카이델은 곧장 숙소로 향했다. 그에게 주어진 숙소는 오로지 왕족들만 머물 수 있다고 정해진 공간이었다.

새하얀 울타리를 지나 안뜰로 들어서자, 긴 의자에 누워 과일을 야무지게 먹고 있는 엘레노어가 보였다. 카이델의 입꼬리가 살며시 솟았다.

“엘레노어.”

“앗, 드디어 왔다!”

“기다렸어?”

“네. 결혼식 늦는 줄 알았어요.”

엘레노어는 제가 먹어 본 것 중 가장 달콤한 과일을 까서 카이델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맛있죠?”

“응, 맛있네.”

“더워서 그런지, 과일이 다 엄청 달아요.”

“마음에 들어?”

카이델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엘레노어가 멈칫했다.

“……마음에 든다고 하면 또 왕창 사들일 거죠? 됐어요.”

카이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달마다 과일을 들여와야겠다는 계획이 그려지고 있었다.

“오늘 예쁘군.”

벨리움은 파스텔 계열의 색조를 선호하는 것에 비해, 뫼젠은 쨍한 원색을 사랑하는 나라였다.

엘레노어도 그에 맞춰 새빨간 색의 민소매 드레스를 입었다.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느낌의 옷이었지만, 엘레노어에게는 상큼하게 잘 어울렸다.

“그래요? 내 눈엔 아직 좀 낯선데.”

“예뻐. 잘 어울려.”

카이델이 엘레노어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럼 늦기 전에 가지.”

“좋아요. 왜 내가 다 떨리는지 모르겠네…….”

엘레노어는 카이델의 팔을 꼭 끌어안고 결혼식이 열리는 왕궁 정원으로 향했다. 화려한 원색의 꽃들로 장식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와! 예쁘다.”

엘레노어를 힐끔힐끔 지켜보던 카이델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야외 결혼식 선호.’

그는 결혼식장을 도는 내내 엘레노어의 반응을 살피며, 그녀가 유난히 좋아했던 것들을 기억해 놓았다. 다음 달 중에 있을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신랑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뫼젠 왕실을 상징하는 음악이 웅장하게 울리고, 팔짱을 낀 드와이트와 힐데가르트가 천천히 입장했다.

엘레노어는 있는 힘껏 손뼉을 치며 두 사람을 축복했다.

“드와이트 오늘 잘생겼다, 그렇죠?”

“그렇군. 근사해.”

“힐데가르트도 너무 예쁘다. 이렇게 보니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리네요.”

카이델은 잔뜩 들떠서 발을 동동 구르는 엘레노어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즐거워하니 그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조카가 태어나면 어떤 기분일까요? 두 사람을 닮았으면 예쁘지 않을 수가 없겠죠?”

“그렇겠지. 어느 쪽을 닮아도 귀여울 테니까.”

카이델이 고개를 숙여 엘레노어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아이도 그럴 거야. 기대돼.”

우리 아이.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인 말에, 엘레노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상하게 그의 입을 거치면 모든 게 조금 야하게 들렸다.

‘내 뇌가 조금 이상해진 건지도 몰라.’

엘레노어가 치맛자락을 꼭 붙잡으며 간질거리는 기분을 참았다.

결혼식은 조금의 실수도 없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신랑 신부가 서로에게 사랑의 서약을 읊을 때는 카이델도 뭔가 울컥하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서약서라……. 지금부터 준비해야겠군.’

엘레노어가 펑펑 눈물 콧물을 쏟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카이델은 손수건을 두 장 준비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부케를 던지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엘레노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앗, 나가 봐야겠다.”

부케를 던지는 것은 벨리움의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힐데가르트와 미리 정해 둔 대로, 엘레노어가 부케를 받기 위해 나섰다.

카이델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는 엘레노어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문득 불안감이 밀려왔다.

‘엘레노어는 믿지만, 엘레노어의 운동신경은 믿을 수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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