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어머. 오늘은 날씨도 완벽하네요, 아가씨!”
창밖을 내다본 에밀리가 감탄을 터뜨렸다. 푸른 하늘에 생크림 같은 구름이 뭉실뭉실 흘러가고 있었다.
“물론 우리 엘레노어 아가씨만큼 완벽하지는 않지만요. 오늘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우세요, 아가씨!”
“너도 참. 아직도 아가씨라니. 이제는 공작 부인이신데.”
공작 부인.
낯선 호칭에 엘레노어가 얼굴을 붉혔다. 엘레노어가 연분홍빛 부케를 손에 꼭 쥐었다.
엘레노어가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려 화제를 돌렸다.
“바깥이 좀 시끄럽네.”
“벌써 밖에 사람들이 많아요. 대로가 가득 찼어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네요.”
“정말?”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은 곧장 결혼식 장소를 광장으로 옮겨왔다. 장소를 섭외하는 데는 이즈멜의 도움이 컸다.
학원 건물이 신부 대기실이 되고, 광장까지 걸어가는 대로 전체가 버진로드가 되었다. 그야말로 수도 중심가가 전부 두 사람을 위한 결혼식장으로 꾸며진 셈이었다.
“와!”
창밖을 내다본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색색의 천과 리본으로 꾸며진 거리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고 있었다.
“엘렌.”
그때 문간에서 백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노어를 본 백작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오늘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이 예쁘구나, 우리 딸.”
“아버지도 근사하세요.”
“그 핏덩이가 언제 이렇게 큰 건지…….”
목이 메는지 백작이 손으로 빗장뼈 주변을 꾹 눌렀다. 엘레노어의 눈시울이 순간 뜨거워졌다.
“저 울리시면 안 돼요, 아버지. 오늘은 끝까지 예쁘고 싶단 말이에요.”
“그렇지. 이 좋은 날 울면 안 되지.”
큼큼. 목을 다듬은 백작이 활짝 웃으며 엘레노어에게 팔을 내밀었다.
“준비되었으면 출발하자꾸나. 밑에 아이들도 모여 있다.”
“좋아요. 가요, 아버지.”
엘레노어가 생긋 마주 웃으며 그의 팔짱을 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자 시에나와 루카스, 데미안이 서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얘들아.”
화관을 쓰고, 연한 하늘색으로 맞춰 입은 세 아이는 천사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와!”
“예뻐요, 선생님!”
“진짜 예뻐요. 우와!”
아이들이 엄지를 척 치켜들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엘레노어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수줍게 웃었다.
“오늘 잘 부탁해.”
“걱정 마세요!”
화동을 맡은 아이들이 꽃잎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하나씩 야무지게 챙겨 들었다. 마리가 신호를 보내자, 밖에서 부드럽고 경쾌한 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와아아!”
엘레노어가 계단을 내려가 버진로드를 밟자마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함성에 엘레노어가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너를 축복해 주려고 모였다니.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다, 엘렌.”
백작의 말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러게요. 이렇게 많이 와 주실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큰 규모가 될 줄도 몰랐고…….”
“내가 생각해도 네 신랑의 사랑은 좀 지나친 감이 있는 것 같다.”
엘레노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백작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니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하지만 널 적당히 사랑하는 남자였다면 난 절대로 허락해 주지 않았을 거야. 암, 네가 얼마나 귀한 딸인데.”
“자꾸 눈물 나게 하실 거예요?”
“미안하다. 왜 자꾸만 감상적이 되는지…….”
백작이 손등으로 눈가를 슥슥 문질러 닦아냈다.
“아무튼 이렇게 요란한 결혼식을 올렸으니, 거창할 정도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알았니?”
“네, 아버지.”
“원 없이 사랑하고, 그보다 더 많이 사랑받고…….”
두 사람의 앞에 타원형의 광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가운데, 카이델이 우뚝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쩌면 좋으냐. 네 신랑은 벌써 울 것 같은 얼굴이구나.”
백작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말이에요. 왜 웃고 있지 않고…….”
“너무 행복하면 웃는 법도 잊을 때가 있지.”
그의 말대로 엘레노어를 본 카이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요동치고 있었다. 시야에 엘레노어가 들어온 순간부터 카이델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평소의 냉정을 유지하고 있던 얼굴이 서서히 무너졌다. 조각 같던 얼굴이 조금씩 흐트러지고, 힘주어 그러쥔 주먹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
엘레노어와 카이델의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생긋 웃어 보였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긴 베일을 쓴 그녀는 그를 구원하러 내려온 천사였다.
카이델은 저보다 큰 무엇에 압도당한 사람처럼 입술을 조금 벌렸다. 누군가 심장을 손으로 꽉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백작이 그런 카이델을 조용히 불렀다.
“카이델.”
카이델이 놀란 눈으로 장인어른을 마주 보았다. 백작이 그를 이름으로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버님.”
“이젠 이렇게 불러도 괜찮겠지요?”
백작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카이델에게 엘레노어의 손을 넘겨주었다.
“우리 엘렌, 잘 부탁합니다.”
톡.
카이델의 커다란 손 위에 엘레노어의 손이 얹혔다.
“안녕, 카이델.”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보며 활짝 웃었다.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안녕, 엘레노어.”
언젠가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처럼 심장이 거세게 공명했다.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오늘 두 사람은 가족과 친지, 벨리움의 시민들 앞에서 맹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대신전의 사제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결혼 생활에 대해 짧은 설교를 했다.
하지만 카이델도 엘레노어도 사제의 말은 듣고 있지 않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바람에 들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반쯤 넋을 놓고 결혼식 절차를 따랐다.
‘무슨 정신으로 서 있는지도 모르겠어. 너무 떨려……!’
엘레노어의 서약서 낭독이 끝나고, 카이델의 차례가 되었다.
“사랑하는 엘레노어.”
카이델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언젠가 홀로 반짝이는 그대를 보며 생각했어. 그대는 빛이고 나는 어둠이라, 우리는 섞일 수 없을 거라고.”
한때는 엘레노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고, 둘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때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대는 빛이고 나는 어둠이지. 하지만 우리는 공존할 수 있어. 아니, 그래서 더욱 함께해야만 해.”
카이델은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빛이 있는 곳에는 늘 그림자가 있지. 나는 언제나 그림자로서 그대의 뒤를 든든히 지킬 거야.”
엘레노어가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까지도 카이델은 그녀를 뒤에서 조용히 지켜왔기 때문이다.
“햇볕이 강한 날엔 그늘이 되고 장막이 되어 줄게. 낮이 그대의 시간이라면 밤은 나의 시간, 그대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잠들 수 있도록 곁을 지킬게.”
카이델이 축하해 준 첫 생일, 그에게서 선물 받았던 오르골이 생각났다. 그때도 카이델은 같은 말을 했었다.
「그대는 고민도 걱정도 없이, 그저 단잠만을 잤으면 해.」
참 한결같은 남자였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그는 조금도 변함없이 그녀를 위해 주었다.
“그대가 날 빛 속으로 인도했으니, 나는 그대를 편안한 꿈속으로 이끌겠다 맹세해.”
카이델이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엘레노어는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우리 생의 마지막까지. 아니, 영원의 영원까지…… 그대를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엘레노어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제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신랑과 신부는 하늘과 땅 앞에서 입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의 입술이 이끌리듯 맞붙었다.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지켜보던 이들의 환호성이 벨리움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막 부부가 된 연인은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카이델이 부드럽게 엘레노어의 뒷목을 감아 당겼다. 두 사람은 익숙하게, 또 달콤하게 서로의 입술을 얽어 갔다.
“두 사람 행복해 보인다, 그렇지?”
“응, 잘 어울린다.”
“최고로 잘 어울려.”
하객석에서 그런 카이델과 엘레노어를 바라보던 아이들이 작게 속살거렸다. 자그마한 얼굴들이 복숭아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예쁘다, 엘레노어.’
첫 줄에 앉아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무슨 느낌일지 궁금했는데…….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다른 생각을 할 새가 없네.’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환호하며 힘껏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아드리안도 기꺼이 두 사람에게 박수를 보탰다.
‘행복해야 해, 내 친구.’
엘레노어의 앞에 남은 모든 날이 오늘만 같기를, 그녀의 발아래는 늘 보드라운 꽃잎만 놓이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신랑 신부, 행진!”
웅장하면서도 경쾌한 곡이 울려 퍼졌다. 엘레노어는 카이델의 손을 잡고 꽃으로 장식된 아치 아래를 천천히 걸어갔다.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가족들과 힐데가르트, 버나데트와 달리아, 아드리안과 블레이크 후작 부부가 차례대로 시선에 담겼다.
‘이즈멜도 와 줬구나.’
엘레노어가 그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즈멜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활짝 웃었다.
융단 위를 걷던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엘레노어, 나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엘레노어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대답했다.
“안 돼요. 오늘 결혼했는데, 벌써 남편 심장이 터져 버리면 어떡해.”
“남편…….”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 카이델이 못 미더웠는지, 엘레노어가 잔소리를 덧붙였다.
“당신은 건강해야 해요. 다쳐도 안 되고, 아파도 안 돼요. 그렇다고 아픈 걸 숨기는 건 더 안 돼요! 알았어요?”
“알았어.”
“아주 오래오래 살아서 내 옆에 있어 주세요. 지금처럼.”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환하게 웃었다.
“난 그거면 돼요.”
당신이 내 곁에서 숨을 쉬는 것, 그것보다 내게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엘레노어의 고백에 카이델의 안에서 뜨거운 감정이 용솟음쳤다.
“그대는 정말…….”
카이델이 그대로 엘레노어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이내 사르륵 휘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행복해.’
환호성이 짙어졌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둘을 향해 꽃잎을 뿌려 주었다.
붉은 꽃잎이 눈처럼 벨리움의 푸른 하늘을 뒤덮고, 이내 두 사람 위로 쏟아져 내렸다. 어지러이 쏟아지는 꽃잎 속, 엘레노어와 카이델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뺨 위에 앉은 꽃잎을 떼어 주며 물었다.
“엘레노어, 행복해?”
이미 알고 있는 걸 굳이 왜 또 묻느냐는 듯, 엘레노어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델의 눈이 미끈하게 휘었다.
“얼마만큼?”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날 사랑하는 만큼.”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