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5화 황태자가 내게 집착한다(5)
「에버렛 영애에게
곁에 두고 지켜보기로 했던 것 같은데, 며칠째 내 곁은 비어 있어.
루카스에게 약속했던 대가인 쿠키 다섯 통은 이미 정산이 완료되었는데, 조금 허탈하군.
이 문제에 대한 영애의 고견을 듣고 싶어. 가능한 한 빨리.
시름시름 앓고 있는,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황태자 전하께
안녕하세요, 전하. 재촉하셔서 편지를 받자마자 바로 펜을 듭니다.
저는 ‘곁에 둔다’는 건 일종의 비유라 생각했는데요. 심리적 거리감을 좁혀 허물없이 우정을 나누자는 뜻으로 이해했답니다.
혹 전하께선 물리적 거리에 대해 말씀하셨던 걸까요?
해석에 따른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앞으로는 조금 더 명확하고 직관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도 기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마음만은 지금도 전하의 곁인,
엘레노어 에버렛 올림」
***
「칼 같은 엘레노어에게.
답장을 읽다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어. 마음만은 정말 내 곁인 게 맞아?
나는 둘 다 원해. 심리적인 거리도, 물리적인 거리도 모두 가까워졌으면 좋겠어. 욕심일까?
일부러 좋은 홍차를 들여놓았어. 오로지 그대가 좋아할 것 같아서야. 다른 이유는 없어. 난 홍차를 즐기지 않으니까.
그러니 찻잎이 떨어질 때까지 부지런히 궁에 걸음해 주길 바라. 이맘때 마시는 게 가장 맛이 좋다는데, 이번 주말은 시간 어때?
욕심 많은,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황태자 전하께
은근슬쩍 호칭이 제 이름으로 변한 걸 보면, 전하께서도 제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제 전용 홍차를 들여놓으셨다니, 찻잎이 상하기 전에 부지런히 들러야겠네요. 설탕과 우유도 부디 잊지 말아 주세요.
그럼 곧 봬요, 전하.
몹시 기대 중인,
엘레노어 에버렛 올림」
***
엘레노어와 이즈멜은 하루에 한 번, 자연스럽게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이즈멜은 매일 엘레노어의 답장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 저도 모르게 히죽거리다가 화들짝 놀라 표정을 갈무리한 게 여러 번이었다.
“오늘도 거절. 예상은 했지만…….”
엘레노어는 여전히 서너 번쯤 청하면 한 번 정도 승낙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상하게 엘레노어에게 거절당하는 것은 전혀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애가 탈 뿐.
“거절당할수록 점점 더 원하게 된다는 게 이상하군. 무슨 심리인지…….”
그래도 둘 사이 관계에 조금씩 진전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즈멜은 엘레노어가 가끔 넋을 놓고 제 얼굴을 보는 것을 느끼면서도 모른 척 시침을 뗐다. 괜히 말을 걸며 눈을 맞추면 당황한 듯 붉어지는 얼굴이 귀여웠다.
이즈멜은 엘레노어를 향한 마음이 우정과는 결이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확실한 연애 감정이었지만, 지금껏 그가 알던 것과는 또 조금 달랐다.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년처럼, 그는 엘레노어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어떻게든 엘레노어의 눈에 들고 싶었고, 그녀를 알고 싶었다.
처음이라 이렇겠지.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차분하게 진정되겠지.
그렇게 이즈멜이 스스로를 다독인 지 두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이상형이요?”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즈멜은 가끔 무척 뜬금없는 것들을 물어올 때가 있었다.
“글쎄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봐.”
이즈멜이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재촉했다. 엘레노어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야 당연히, 잘생기고 몸 엄청 좋은?”
“잘생기고 몸…….”
엘레노어가 직설적으로 뱉은 말에 이즈멜이 슬쩍 얼굴을 붉혔다. 엘레노어가 얼른 덧붙였다.
“농담이에요. 갑자기 물어보시니까, 그런 것만 생각날 수밖에요.”
“진담 같던데.”
작게 중얼거린 이즈멜이 제 배를 슥슥 문질렀다. 아무래도 운동량을 좀 늘려야 할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음, 우직한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끔 해요.”
뜻밖의 대답에 이즈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우직하다고?”
“그냥 그런 느낌 있잖아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저를 외롭거나 불안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면 좋을 것 같아요.”
이즈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사람, 만나 본 적 있어?”
엘레노어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이상형은 세상에 실존하지 않아서 이상형인 거예요.”
“찾아보면 만날 수 있을 수도 있잖아?”
“글쎄요. 어딘가엔 있을 수도 있겠죠?”
엘레노어가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별다른 기대감이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연애에 대한 관심 자체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 내가 좀 곤란한데.’
턱을 괴고 엘레노어의 얼굴을 빤히 보던 이즈멜이 슬쩍 물었다.
“원래 연애할 때도 그렇게 차분한 편인가?”
“일단 연애를 좀 해 봐야 대답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전하.”
“그렇군. 실수.”
엘레노어의 대답에 이즈멜이 눈을 휘며 웃었다. 별것 아닌 그 대답에 왠지 입꼬리가 자꾸 솟았다.
엘레노어가 가볍게 되물었다.
“그럼 전하께서는 따로 이상형이 있으세요? 저한테 물어보신 걸 보면, 있으신 것 같은데.”
“나야 있지.”
이즈멜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엘레노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함께 있을 때 즐겁고, 웃으면 따라 웃게 되는 사람.”
“흐음? 좀 추상적인데요?”
엘레노어의 반응에 이즈멜이 억울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추상적이라니. 이 이상 구체적일 수가 있나? 누구 하나를 딱 집어서 말하고 있는 건데.”
이즈멜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어쩐지 간질간질한 기분에 엘레노어가 두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괜히 좀 쑥스러워진 엘레노어가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누군데요?”
그러자 이즈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 같은데.”
“아닌데요.”
“혼자 잘 생각해 보시지요. 안 가르쳐 줄 거니까.”
두 사람은 차가 다 식도록 한참이나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혹시 찻잔이 빈 것을 알면 이만 파하자고 할까 봐 이즈멜은 빈 찻잔을 제 앞으로 바짝 당겨 놓았다.
늘 더디게만 가던 것이 시간인데, 왜 이 사람과 함께 있을 땐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는지. 돌아보면 특별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엘레노어는 어떻게 느낄까? 나랑 비슷했으면 좋겠는데.’
누군가의 감정을 기민하게 읽어내는 것, 상황에 적당한 대답을 꺼내놓는 것, 상대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 호감을 끌어내는 것.
이즈멜에겐 너무나도 쉽고 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엘레노어와 있을 때는 이상하게 그게 맘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 이즈멜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엘레노어, 잠깐 실례하지.”
이즈멜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엘레노어가 약간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즈멜은 자리에서 일어나 뻣뻣하고 반듯한 걸음을 뗐다. 어린 시절 그를 가르쳤던 노스승을 향해서.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즈멜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넸다.
“페르난도 공. 그간 격조했습니다.”
“가문 일은 이제 제 아들에게 거의 일임했으니까요. 영지에 내려가 휴식을 좀 취했습니다. 이젠 저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건강을 돌보지 않을 수 없군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하던 공작이 이즈멜의 어깨너머를 힐끗 눈짓했다.
“한데…… 에버렛 가의 여식을 가까이하신다더니, 사실이었나 봅니다.”
이즈멜의 눈매가 순식간에 매서워졌다.
“문제가 됩니까?”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말끝을 흐린 그가 잿빛 눈동자를 빛냈다. 일흔이 넘은 나이임에도 그에게는 여전히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전하께서 장성하신 이후로는 따로 조언을 드린 적은 없었습니다만, 옛 스승으로서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허리를 반듯하게 세운 공작이 이즈멜과 눈을 맞췄다.
“전하. 황태자라는 자리의 무게에 대해 잊으시면 안 됩니다. 지켜보는 이가 많습니다. 한시라도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되는 자리입니다.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알고 있다. 어찌 잊을까. 어린 시절부터 질리도록 들어온 말인데.
이즈멜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황자 시절, 냉혹할 만큼 엄격하게 교육받았던 기억이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어른이 다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앞에만 서면 힘없는 어린애가 된 것만 같았다. 구름 위에서 땅으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피가 싸늘하게 식어 갔다.
그런 이즈멜의 심리를 꿰뚫어 본 듯, 공작의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
“사람에게는 맞는 짝이 있습니다. 백작 영애는…… 현실적으로 전하의 짝이 되기에 부족함이 많습니다.”
미묘하게 엘레노어를 낮잡아 보는 말에 이즈멜의 표정이 굳었다.
“페르난도 공.”
“감정은 한때고 권력은 영원한 겁니다, 전하.”
공작은 그에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젊은 혈기에 서로 가볍게 즐기는 것이라면 문제 될 것은 없지요. 하지만 진심이라면 그건 그 영애를 위해서도 좋지 않습니다. 수많은 반대가 예정되어있음을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이즈멜도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꿈같기만 하던 엘레노어와의 만남이 순식간에 현실로 다가왔다.
“괜히 어설프게 욕심냈다간, 상처만 주게 되실 겁니다.”
그런가.
이즈멜의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단번에 부정하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입술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주제넘은 말이었으나, 충심으로 드리는 간언이니 꼭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공작이 이즈멜을 향해 가볍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그의 예법을 지켜보던 이즈멜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가슴 위에 커다란 돌무더기가 쌓인 듯 숨쉬기가 버거웠다.
세월이 이토록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그의 스승 앞에서 약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