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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 외전-17화 (완결) (168/168)

외전 17화 황태자가 내게 집착한다(7)

“건국 기념 연회?”

그러고 보니 곧 건국제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연중 가장 큰 행사 중 하나라 성년이 지난 수도 귀족들은 빠짐없이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다.

“네. 아가씨도 황궁 연회는 올해가 처음이시죠?”

“응, 그렇지.”

“제가 주워듣기로 건국제 동안 황궁에서는 자그마한 등을 빼곡히 달아둔대요. 그게 꼭 별처럼 아름답다고 하더라고요.”

에밀리는 잔뜩 신나 제가 들은 것들을 조잘조잘 풀어놓았다.

“다녀오셔서 꼭 어땠는지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알았죠?”

엘레노어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이번엔 정말 신경 써서 꾸며드릴게요!”

평소였다면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즈멜도 참석하리라 생각하니, 그에게 예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졌다.

“그래. 너만 믿을게, 에밀리.”

***

연회 날 저녁.

한낮부터 곱게 단장한 엘레노어는 봄의 요정 같았다. 꽃잎을 여러 겹 포개놓은 듯 사랑스러운 느낌이 드는 드레스가 엘레노어와 잘 어울렸다.

엘레노어가 드와이트 앞에서 빙글빙글 돌며 물었다.

“나 진짜 괜찮아? 제대로 봐 줘. 대충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드와이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응, 잘 어울려. 그런데 오늘따라 그런 걸 다 묻네. 그런 쪽으론 별 관심도 없던 애가.”

예쁘다는 칭찬을 스무 번쯤 듣고서야 엘레노어는 배시시 웃었다. 그녀를 보고 놀랄 이즈멜을 상상하니 기분이 들떴다.

그러던 중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누구랑 참석하시지? 오늘 연회는 꼭 파트너를 동반해야 한다면서…….’

엘레노어의 궁금증은 그리 오래지 않아 해결되었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이즈멜이 이젠트 공녀와 함께 계단을 내려온 것이다.

이젠트 공녀에 대한 소문은 엘레노어도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그녀는 소문 이상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같은 여자지만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는 미모였다.

‘기분이 좀 이상하네.’

경쾌한 곡이 연주되고, 두 사람은 가장 먼저 춤을 시작했다. 이즈멜은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교본처럼 정확하게 움직였다.

엘레노어는 드와이트의 곁에 서서 이즈멜을 빤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보던 엘레노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른 여자 곁에 있는 이즈멜을 지켜보는 것은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이즈멜이 공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전하의 곁에 다른 사람이 선다는 상상은 못 해 봤는데.’

그때 우아하게 방향을 틀던 이즈멜과 엘레노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당황한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내내 흐트러짐 하나 없이 차분하던 이즈멜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엘레노어가 그런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눈빛으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전하.’

‘기다려 줘. 오해하지 말고.’

‘글쎄요…….’

‘제발.’

엘레노어를 발견한 이후로 그의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못 박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엘레노어도 그런 이즈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 섞여 있지만, 엘레노어와 이즈멜은 오로지 서로만을 의식하고 있었다. 주위는 안개에 휩싸인 듯 부옇게 흐려지고, 오롯이 서로만이 선명하게 빛났다.

엘레노어가 슬쩍 치맛자락을 구겨 쥐었다. 평소와 다른 심장 고동 소리가 귓가에 쿵쿵 울렸다.

‘이상해. 내내 다른 사람들이 떠들어댈 말들이 신경 쓰였는데……. 지금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

첫 번째 춤곡이 서서히 끝을 향해 다가갔다. 옆에 있던 드와이트가 슬쩍 귓속말로 물었다.

“어떡할 거야? 우리도 한 곡 출까?”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대답했다.

“아니. 난 잠시 테라스에 나가 있을까 해서.”

“테라스? 같이 나갈까?”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넌 여기 있어.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춤도 좀 청하고.”

“너나 좀 그래 봐라.”

드와이트가 장난스럽게 핀잔했다. 이즈멜과 눈을 마주친 엘레노어가 작게 속삭였다.

“……응, 그러려고.”

엘레노어의 안에서 서서히 결심이 섰다. 닥쳐올지도 모를 일들을 미리 걱정하느라 지금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엘레노어가 드와이트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미리 파트너 구해 둬. 다음부터는 너랑 같이 못 올 것 같으니까.”

두 번째 곡이 시작되고, 엘레노어가 천천히 홀의 중심을 벗어났다. 느릿느릿 떼는 걸음은 한 사람에게 보내는 은밀한 신호였다.

엘레노어가 테라스에 들어서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커튼이 열렸다.

상기된 얼굴의 이즈멜이 테라스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전하.”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에게 인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설 텐데, 어떻게 이렇게 바로 도착한 걸까.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그렇게 웃고 돌아서는데, 당장 따라가지 않고 배길 수가 있어야지.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왔어.”

이즈멜이 입꼬리를 슥 끌어 올렸다.

“눈치 빠르게 달려왔으니 칭찬해 줘.”

“으음, 글쎄요…….”

미묘하게 말끝을 늘이던 엘레노어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오늘은 별로 칭찬해드리고 싶지 않던데요.”

“아.”

엘레노어의 의중을 읽어낸 이즈멜이 당황한 듯 이마를 긁적였다.

“요즘 정신이 없어서 사실 오늘 연회가 있다는 것도 얼마 전에 알았어. 그대에게 파트너를 청하기엔 좀 늦은 시점이기도 했고, 부담스러워할 것 같기도 하고.”

횡설수설하며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던 그가 힐끔 엘레노어의 눈치를 살폈다. 엘레노어는 별다른 반응 없이 이즈멜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고개를 푹 떨군 이즈멜이 작게 중얼거렸다.

“요약하자면, 미안하다는 소리야.”

“네, 알겠어요.”

엘레노어가 짧게 대답하며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 엘레노어를 힐끔 쳐다본 이즈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경 쓰였어?”

엘레노어가 솔직하게 고백했다.

“안 쓰였다면 거짓말이죠.”

그러자 이즈멜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엘레노어가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그러게. 왜 자꾸 웃음이 나지. 나도 모르겠네.”

그때 난간을 붙잡고 바깥을 내다본 엘레노어가 탄성을 내질렀다. 에밀리의 말대로, 황궁 하늘에 금빛 등이 빼곡하게 달려 있었다.

“와, 진짜 예쁘다. 이런 풍경은 처음 봐요!”

“그래?”

“네. 전하도 오셔서 하늘 좀 보세요. 어서요.”

들뜬 엘레노어가 이즈멜을 향해 손짓했다.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풍경이 엘레노어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즈멜이 픽 웃었다. 엘레노어는 언제 새초롬했었냐는 듯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즈멜은 느릿하게 한 발짝을 옮기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그대에게서 두 걸음 떨어져 서 있으려면 이 이상 갈 수가 없는데.”

“……잠깐만 보고 다시 멀어지시면 되죠.”

“아, 그건 안 돼. 나는 한 번 좁힌 거리는 그걸로 끝이거든.”

엘레노어가 황당함을 가득 담은 눈으로 이즈멜을 바라보았다. 이즈멜이 씩 웃으며 물었다.

“엘레노어, 내가 그대에게 더 다가가도 돼?”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이즈멜의 말에 엘레노어가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즈멜이 기다렸다는 듯 엘레노어의 옆에 섰다. 난간에 팔꿈치를 기댄 그가 발갛게 달아오른 엘레노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냥, 예뻐서.”

“아, 정말!”

“알았어. 그만하고 하늘 볼게. 멀어지지 마.”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나란히 붙어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적당히 선선한 밤공기,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낭만적인 풍경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손, 잡고 싶은데. 부담스러워하려나.’

이즈멜은 난간 위에 나란히 놓인 제 손과 엘레노어의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백 번쯤 망설였을까. 이즈멜이 용기를 내 엘레노어의 손을 잡았다.

곧바로 격렬한 반응이 돌아오리라는 이즈멜의 예상과 달리, 엘레노어는 여전히 밤하늘만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궁금함을 참다못한 이즈멜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엘레노어.”

“네.”

“아까부터 눈치 보다가 은근슬쩍 손을 잡았거든.”

엘레노어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이즈멜과 눈을 맞췄다. 마른침을 꼴깍 삼킨 이즈멜이 말을 이었다.

“혹시 몰라서 가만히 있는 건가 해서.”

“알아요. 한 10분은 고민하시던데.”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해?”

엘레노어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웃었다. 이즈멜이 초조한 얼굴로 답을 재촉했다.

“자꾸 그렇게 웃기만 하면 나 오해하는데.”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오해 아닌 것 같은데요.”

“장난치지 말고.”

“장난도 아니었는데.”

난간에서 몸을 조금 떼어낸 엘레노어가 이즈멜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엘레노어가 입술을 뗐다.

“저도 전하가 좋아요.”

이즈멜이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노어가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괜히 긴장이 되었다.

“여전히 조금 걱정되기도 하고,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것도 많지만…….”

“…….”

“천천히 더 알아가고 싶어요. 앞으로 열릴 황궁 연회에서도 늘 전하와 함께 있고 싶고요. 전하만 괜찮으시다면.”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하게 뱉어낸 엘레노어가 슬며시 시선을 들었다. 이즈멜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티가 날 만큼 붉어져 있었다.

“뭔가 근사한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잘 안 나와.”

이즈멜이 한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엘레노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대답은 해 주셔야죠. 저 부끄러운데.”

“당연히, 좋아.”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천천히 다가갈게. 조심스러운 마음 충분히 이해하니까.”

“얼마만큼 천천히요?”

“오늘은 딱 이만큼만 더 욕심내 보려고.”

이즈멜이 싱긋 웃었다.

“이제는 이즈멜이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어. 전하라는 말 대신. 이 정도 속도는 어떤 것 같아?”

당당하게 제안해 놓고 뒤늦게 긴장이 되는지, 이즈멜이 강아지 같은 눈으로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루비처럼 예쁜 눈동자가 달빛 아래 반짝반짝 빛났다.

엘레노어가 픽 웃었다.

‘참 욕심도 없으시지. 그보다는 조금 더 바라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엘레노어는 이즈멜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으며 생각했다. 앞으론 그가 더 많은 것을 욕심내게 해 주고 싶다고.

“좋아요, 이즈멜.”

다섯 걸음, 세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이제는 조금의 틈도 없이 꼭 붙어선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활짝 웃었다.

두 걸음, 세 걸음, 다섯 걸음. 함께 손잡고 걸어갈 내일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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