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전설의 술, 또 등장. >
8, 전설의 술, 또 등장.
‘나는 누구인가?’
이훤은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살폈다.
주위에는 똑같은 옷을 입은 십여 명이 줄지어 걷는 중이다.
‘여긴 어디인가?’
육태천화서봉주를 마시고 돌아왔을 때만 해도 좋았다. 좋은 술은 영약이나 다름없다더니 밤새 혈륜이 한차례 더 성장한 듯했다. 이처럼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며 삼성의 성취를 이룰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고 여겼다. 하나 이른 아침 쳐들어온 양칠로 인해 짐을 싸야 했고, 잠이 덜 깬 상태로 초도각을 떠나야 했다.
즉, 여기는 안전한 초도각이 아니다.
‘나는 화산에 있어야 하는데.’
이훤은 싱글벙글 웃고 있는 관도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들은 하산한 후 마을에서 겪을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기대하며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도 모르고.
‘쯧쯧.’
이훤은 혀를 차며 산을 내려왔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하나 화산파의 명령을 거부한 후 초도각에 남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무슨 일이 생기든 삼 성의 성취를 이룰 때까지는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왜 하산하는 건지 얘기라도 해주지.’
이훤은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어보려다 포기했다.
회귀 전 그는 쥐뿔도 없는 관도였다.
그러니 화산파의 행사에 동원될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 정무관 내에서도 하위권에 속했으니 화산을 내려가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게다가 이 시기라면 부러진 다리를 붙잡고 끙끙 앓고 있을 때가 아닌가.
‘다리 생각하니까 그 새끼가 또 떠오르네.’
원가휘는 진무관 녀석들을 부추겨서 시비를 걸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십일향주를 헛되이 버려야 하지 않았던가. 최소한 한 모금이라도 마셨다면 이처럼 억울하지는 않았으리라.
육태천화서봉주처럼 전설적인 명주를 마셨어도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다. 명주는 명주라서 좋고, 싸구려 술은 싸구려서 좋지 않은가. 그에게 있어서 세상 그 어떤 술도 그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술은 술이라서 충분했다.
‘떠날 때 그냥 베어버려도 되겠네.’
이훤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이를 갈았다.
“벌써 지친 것이냐? 몸이 머리를 못 따라가는 건가?”
그 순간 서늘한 한 마디가 들렸다.
어느새 후미에 있던 유건평이 지척에 이르러 그를 흘겨봤다. 아무래도 울화로 인해 거칠어진 호흡을 체력 부족으로 여긴 듯했다.
오해하는 건 언제나 환영이다.
그래야 야반도주를 하더라도 쫓을 가치가 없을 테니까. 사라져도 찾지 않고, 없어져도 모를 터였다.
하나 유건평은 조금 불편했다.
능력 없이 영악하기만 한 녀석은 그냥 두지 않겠다고 협박처럼 전음을 남기지 않았던가.
이훤은 공손히 대꾸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의 일을 잊지 마라.”
유건평은 그 말을 남기고 땅을 박찼다.
나뭇가지를 밟고 뛰어오르더니 두 걸음으로 선두에 이르렀다. 이훤은 그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시며 한 숨을 흘렸다.
‘저 사람한테는 아직 안 되겠네.’
천공혈륜겁의 공능을 수치화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혈륜의 회전을 통해 어느 정도 힘을 가늠할 수 있었다. 혈륜이 한 번 회전하면 몸은 불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고, 멈추는 순간 제 모습을 찾는다. 이렇게 한 번 움지이는 것이 일 성의 경지였다.
이 성의 경지에 이르면 두 번을 반복한다.
그로 인한 내공과 육신의 한계 또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한데 삼 성이 되는 순간 세 배가 아니라 네 배 이상의 힘을 지녔다.
어렴풋이 배수로 증가하는 듯했다.
이 이야기를 들어도 호사가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명문의 상승무공(上昇武功)은 성취가 오를수록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힘을 발휘했다.
하나 천공혈륜겁은 그저 그런 상승무학이 아니다.
인체의 신비를 파헤치며 지고(至高)의 위력을 발휘하는 신공절학(神功絶學)이 분명했다.
그 위력은 사 성에 이르러서야 드러난다.
사 성의 경지에 이르는 순간 혈륜의 위력은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가 아니라 날개를 단 용과 같았다. 수치로 논하자면 네 배에서 여덟 배가 아니라 열여섯 배의 위력을 낼 터였다. 그러니 팔 성에 이른 것만으로도 제멋대로 천하를 종횡할 수 있었다. 이훤보다 강한 자가 존재했지만, 숨거나 피하면 문제 될 것이 없을 정도였다.
이훤으로서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감히 구 성의 위력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봤자 지금은 유건평도 이길 수 없지.’
그 뿐이랴.
화산 밖에는 두려운 것 천지였다.
그러니 경계하는 것이 옳다.
이훤은 조심스럽게 사마충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어디 가는데?”
사마충은 대답 없이 고개만 까딱였다. 고독한 검객 놀이에 맛 들린 것처럼 가슴에 목검을 품고, 시선은 정면보다 조금 높은 곳에 고정됐다. 허세 가득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순박한 양칠이 그리웠다. 행렬에 끼이지 못한 양칠이 있었다면 이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정보를 물어왔으리라.
“야!”
포대웅은 이훤의 시큰둥한 목소리에 목을 자라처럼 웅크렸다. 몇 대 맞은 이후 아예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멍청이가 되었다.
“어?”
“어디 가냐고?”
“나도 들은 게 없어.”
이훤은 혀를 찼다.
“쯧, 쓸모없는 녀석.”
포대웅은 억울한 표정을 짓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내가 언제까지 네 짐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거야? 아까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자기 물건은······.”
이훤이 흘겨보는 순간 녀석은 말꼬리를 흐렸다.
“몰라서 물어? 양칠이 없잖아.”
포대웅은 이훤의 비틀린 사고방식에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한 채 걸음을 재촉했다.
‘아! 화산 밖은 위험한데.’
이훤은 회귀 전의 삶을 통해 약자의 강호와 강자의 강호를 골고루 맛봤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약자의 강호는 지옥이고, 강자의 강호는 천국이다. 흔히 들어본 매담자의 영웅담은 언제나 강자의 강호였다.
약자?
‘어디가 갑자기 튀어나온 칼에 찔려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신세지.’
이훤은 고개를 들어 행렬의 구성을 확인했다.
일대제자 맹염채는 산적 같은 덩치와 어울리게 파산검호(破山劍豪)라는 별호를 지녔다. 호탕한 성격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좋아하는 호인인 셈이다. 하나 저런 사람이야 말로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알아서 잘 할 것이라 믿고, 방치하는 성향일 터였다.
‘그리고 내가 말 섞을 위치도 아니고.’
맹염채의 뒤를 따르는 자는 이대 제자는 세 명이다.
유리검 유건평과 청색비(靑索臂) 정표, 그리고 도학사인 청요자(晴遙子)였다.
무인인 두 사람은 이훤과 어울려 줄 리가 없다.
하나 화산의 도학사는 달랐다.
그들은 화산파의 무공은 익혔지만, 구도자의 길을 걷는 도사인 셈이다. 그들로 인해 화산파 내에 진법을 설치하고, 교리를 정립할 수 있었다. 초도각주도 그렇듯 도학사들은 대부분 타인과의 교류를 즐겼고, 온화했다.
무인이 홀로 수련에 힘쓰는 것과 달랐다.
이훤이 다가가자, 청요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허어, 허리가 곧고, 좌우의 균형이 맞으며 발걸음이 신중한 것으로 보아 수양이 얕지 않구나. 무릇 인간이란 발끝의 방향과 보폭의 넓이, 그리고 발자국의 깊이로 의지를 드러낸다. 이것은 곧 의지의 무게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니 네 마음이 얼마나 단단한지 알 수 있구나. 초도각에 너 같은 이가 있는지 몰랐다.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이훤은 잠시 정신이 혼미했다.
무인이었다면 쓸 만한 녀석이라고 하며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을 터였다. 한데 이름을 묻기 전에 어찌 저렇게도 길게 떠들 수 있단 말인가.
“이훤이라 합니다.”
“아! 너로구나. 사형의 말처럼 눈여겨봐야 할 관도로구나. 그래, 무인의 길을 걷고자 하는 네가 어인 일로 세월에 묻힌 빈도를 찾아온 게냐?”
이훤은 진저리를 쳤다.
지금 이 순간만은 추위가 아니라 청요자에 대한 거부감 이 더 컸다. 주둥이가 그야 말로 전설 상의 적토마 급이다. 회귀 전 드물게 음공을 쓰는 자와 싸운 적이 있지만, 충격의 강도는 이쪽이 더 심했다. 오늘 이후로 다시는 말을 걸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행선지를 물었다.
질문의 방식은 귀찮았지만, 청요자의 방식을 따랐다.
“행자는 혼미함을 멀리하고, 곧게 가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여 출발과 도착을 명확히 하고, 그 과정에 삿됨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한데 저는 지금 아무것도 모른 채 화산을 내려왔으니 안개 속에 갇힌 듯 어지럽기만 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닭살이 돋을 지경이다.
그래도 끝까지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을 내뱉은 후 눈치를 봤다. 다행히 청요자는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게 되어 만족스러운 듯했다.
“섬서성에 화북장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의 은 장주께서는 본파와 인연이 깊으신······.”
< 8, 전설의 술, 또 등장.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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