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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34화 (34/226)

< 13, 이것이 기연이다. (2) >

13, 이것이 기연이다. (2)

노인은 이훤이 내공을 단전으로 인도하지 않고, 사지백해로 흩뿌리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단전을 활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이훤의 의도에 따라 내력을 일정하게 흘려보낼 뿐이다.

그는 이훤을 신뢰했다.

‘이 놈은 확실히 뭔가 있어.’

철부지가 아니라 나이를 떠나서 대가로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술로 시작한 인정이 사람마저 인정받게 만들었다.

역시 술의 힘은 대단하다.

“후우.”

이훤이 길게 호흡을 뺐다.

혈륜의 성취는 한순간 삼성에 이르렀다.

본래 이쯤 되면 감당하지 못할 빙정의 기운은 백회혈을 통해 빠져나갔으리라. 하나 노인이 내력으로 백회혈을 막은 탓에 여전히 몸속에는 빙정과 내력이 공존했다.

번쩍!

이훤의 두 눈이 지금껏 볼 수 없을 만큼 새빨갛게 번뜩였다.

‘놀고 있을 때가 아니야.’

만족스럽게 숙면을 취하려는 혈륜을 억지로 일깨워 다시 휘돌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모든 기운을 흡수한다면 오성의 경지도 어렵지 않을 터였다.

절정을 넘어서는 경지.

아닌 말로 유건평 정도는 그냥 찜 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노군을 이길 수 없을지언정 도망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강호를 종횡하기에는 충분하리라.

[더 하게?]

기왕 인심 쓰시는 거 팍팍 쓰시길.

[이 놈이 술 한 병에 남의 밑천을 털어가는구나!]

이훤은 혈륜을 더욱 가속화했다.

삼 성을 지나, 사 성에 도달하는 순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오 성을 향해 내달렸다.

뇌리에는 천공혈륜겁의 구결이 끊임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동시에 회귀 전 성취를 이룰 때마다 정리했던 깨달음도 스쳐갔다.

이훤은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오성에 도달하는 순간 반강제적으로 눈을 떴다.

지잉-

혈륜이 발동하며 기세가 외부로 분출됐다.

어지간한 사내는 오금이 저려서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흉흉한 눈빛이다. 한데 혈륜이 안정되는 순간 혈광(血光)처럼 새빨갛게 번뜩이던 눈빛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이렇게 쉽게 이뤄질 줄이야.’

이훤은 감회가 새로웠다.

회귀 전에는 천공혈륜겁을 얻는 과정도 힘들었지만, 수련하는 건 뼈를 깎는 고통이 동반됐다. 그 과정에서 죽다 살아난 횟수만 해도 열손가락이 모자랐다. 그가 취마라 불리고, 광야제라며 떵떵거린 게 칠 성의 경지였다.

‘벌써 십 년을 단축했구나.’

혈륜이 위로를 하듯 전신혈맥을 어루만지는 사이 빙정과 내공은 갈피를 잃었다.

이훤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어차피 북해빙궁의 빙정과 노인의 내공은 혈륜을 돌릴 수 있는 원동력으로 족했다. 그렇기에 수련을 끝내는 순간 대부분의 잔여 기운은 정수리를 향해 빠져나갔으리라.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이훤은 잠들려던 혈륜을 역(逆)으로 휘돌렸다.

정파의 무공은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순리에 맞춰 운기조식을 한다. 그렇기에 성취가 느려도 안정적이다. 반면 사마외도는 역으로 내력을 휘돌렸다. 그렇기에 성취가 빠르지만, 위험했다. 사마외도 중에서 광인이나 살인귀가 많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한데 천공혈륜겁은 제대로 돌려도, 거꾸로 돌려도 피해가 없다.

‘정사마 어느 무공과도 궤를 달리 하는 무공의 맛을 보시구려.’

혈륜이 일정한 속도에 이르자, 역으로 회전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지금까지는 기운을 빨아들였다면 이제는 내뱉는 상황에 이르렀다.

노인은 지금껏 자신이 밀어 넣었던 기운이 솟구치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이 놈아, 이거 뭐냐? 설마 나 먹으라고 주는 게냐?]

‘맛은 보여드릴 테니 양은 알아서 정하세요.’

이훤은 노인이 알아차릴 것이라 확신했다.

초절정 고수였던 자신도 알고 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아니나다를까 잠시 당황하던 노인은 정수리를 향해 빠져나가려는 기운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본래 자신의 것만 회수하려 했거늘 빙정의 기운까지 함께 빨려들었다. 이미 청천빙화주를 한 입에 털어 넣는 위인이다. 노인은 허공으로 흩어졌을 내력이 단전에 자리 잡는 순간 손을 뗐다.

이훤이 교대를 하듯 벌떡 일어나 노인을 응시했다.

그러자 노인이 피식 웃더니 한 마디를 내뱉었다.

“호법 좀.”

“예이!”

하나 이훤은 나무에 매달린 술병을 꺼내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리고 운기조식을 하는 노인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하아! 이제야 예전의 술맛이 좀 나는 것 같네.”

실상 술의 맛이라는 건 감각에서 비롯된다.

오감이 극대화된 사람이라면 술의 향과 맛을 더욱 깊이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오 성에 이르는 순간 술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천공혈륜겁이 팔 성에 이르면 아무 것도 섞지 않은 취금향을 마시면서 축하를 하자.’

그러려면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다.

이훤은 노인의 운기조식을 하는 내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

운기조식은 이미 끝났다.

노인은 이미 삼십 년 전 초절정 고수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던가. 그러니 빙정의 기운이 섞였다고 해도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내공을 갈무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있는 이유는 생각을 정리하고자 함이었다.

‘은혜를 베풀 생각은 아니었어.’

어차피 그는 낙안봉에 매인 몸이 아니던가.

죽을 때까지 산을 내려갈 생각이 없다.

그러니 인연을 맺어봤자 의미가 없으리라.

‘그냥 마음에 들었지.’

다행히 녀석은 화산의 문도가 아니다.

심지어 화산을 좋게 보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녀석을 돕기 위해 나설 수 있었다.

한데 이제 와서 보면 도왔다고 하기도 뭐한 상황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힘을 썼다고 해야 할 판국이다. 심지어 자신이 쑤셔 넣은 내공보다 많은 양을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가 고민하는 이유는 결국 하나였다.

‘놈을 어떻게 봐야 하나.’

그 때 이훤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주무시겠습니다.”

“흥! 방금 끝냈다. 눈치는 더럽게 빨라가지고.”

“어르신처럼 대단한 분이 운기조식을 끝냈는데 아무 변화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셨어요?”

노인은 어쩔 수 없이 헛웃음과 함께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의 이훤을 보며 지금까지의 고민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한 잔 하시지요.”

술 한 잔 하자는 놈이 칼을 쥐고 있었다.

노인은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몸을 썼음에도 날아갈 듯이 개운했다.

“좋지! 이런 날은 한 잔 해야지.”

그가 손을 뻗는 순간 수화검이 저절로 날아와 잡혔다.

술을 마실 수만 있다면.

술을 함께 할 수 있다면.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하자고요.”

이훤이 성큼 거리를 좁히며 칼을 휘둘렀다.

불과 반나절 전에 잡아왔던 놈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칼끝에 담긴 내력이 불처럼 붉게 일렁였고, 잔영은 부채처럼 쉼 없이 칼을 따라 이동했다. 간간히 이훤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번들거릴 때에는 노인조차 감탄할 만큼 위력적인 공세가 펼쳐졌다.

촤라라라라라랑-

검과 검이 긁히며 불똥을 튀겼고, 그 사이 술이 가득 담긴 두 개의 잔이 교차하듯 튀어 올랐다.

이훤과 노인은 그 술을 입에 던지듯 털어 넣고 폭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술잔을 던져 깨버린 후 재차 상대방을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솨아아아아-

매화가 두 사람을 응원하듯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휩쓸려 꽃비를 내렸다.

*

노군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 번씩 돌아가면서 운기조식을 하더니 이제는 술을 마시자면서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한데 사숙은 삼십 년 동안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매화검법을 다시 한 번 펼쳤다.

‘허어, 저러다가 아주 배우겠네. 배우겠어.’

이훤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지난 반 년 동안 함께 해왔던 놈은 운기조식 한 번에 다른 사람이 되어 날뛰었다. 저 정도면 화산의 이대제자보다 강했다. 어쩌면 장로 중에서도 비등하게 어우러지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화산파가 아무리 쇠락했다고 해도 저건 말이 되지 않았다. 물론 더 강해지고, 더 빨라지고, 더 섬세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던 상태에서 다양한 무공을 펼치고, 그것을 응용하는 모습을 어찌 현실이라 여길 수 있겠는가.

‘접신이라도 한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희대의 천재를 보고 있는 건가?’

주원경 밖에서 보는 것이 전부였기에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잠시 후에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계속됐다.

귀하디귀한 술이라면서 마시는 것이 반이고, 흘리는 것이 또 반이다. 웃고, 떠들고, 공격하고, 방어하고, 춤을 추고, 다시 마시고, 흘렸다. 심지어 노군이 오랫동안 공들여서 만들어 바친 술도 저런 취급을 당했다.

“술꾼이라는 족속은 내가 평생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렇게 몇 시진을 날뛴 후 오늘의 어처구니없는 장면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훤이 칼을 집어던지고 넙죽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노군은 눈을 부릅떴다.

‘안 돼. 안 돼! 배분이 망가져!’

하나 거나하게 취한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이훤의 어깨를 두드리며 외쳤다.

“크하하하! 네가 아니라면 누가 내 제자라 할 수 있겠느냐?”

*

나라를 잃은 대신의 표정이 저러할까.

노군의 비통한 감정이 듬뿍 담긴 일갈이 터져 나왔다.

“사숙! 안 됩니다!”

“시끄러운 녀석, 괜히 들여보내줬어.”

노인은 투덜거리면서 한 잔, 이훤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또 한 잔을 마셨다.

“멋있지 않습니까? 저야 문파에 몸을 담아본 적이 없지만, 역사와 전통이 깃든 화산의······.”

“그럼 네가 가르치던가.”

“사숙! 저는 본산의 사제들에게 허락 없이 제자를 받아 배분을 망가트리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흐음, 그럼 무엇을 시켜줘야 하나.”

노인이 침음을 흘리자, 노군은 눈을 부릅떴다.

“사숙! 저는 지금 질투하는 게 아닙니다!”

“아! 그래, 둘이 친하지 않았더냐. 그러니 이 기회에 호형호제나 해라. 아무리 내 제자라지만, 사제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저 녀석도 술 못 마시는 사형은 필요 없을 테고.”

노군은 배려하는 것처럼 으스대는 노인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배분이 망가지다 못해 거미줄처럼 꼬이고 있었다.

“후훗, 나이 많은 형님은 조금 불편한데요.”

이훤의 키득거림에 노군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는 이훤을 향해 노호성을 터트렸다.

“닥쳐! 이 놈아. 누가 보면 수십 년 동안 강호에서 구른 줄 알겠다. 이 모든 게 다 네 탓이다!”

이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가요?”

“그래.”

“왜죠?”

“이 놈아! 사숙이 너를 제자로 삼으면 어찌 되겠느냐? 거기에 더해 나를 형님이라고 부른다고? 내가 종남파 은검화와 제대로 정분만 났어도 너만 한 손자가 있어! 그러니 너로 인해 화산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으로 만들어진 배분이 무너진단 말이다!”

그 순간 노인과 이훤이 동시에 질색했다.

“화산하고 엮다니 그 무슨 망발이더냐!”

그리고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말을 덧붙였다.

“이 놈을 화산에 두기에는 아깝지.”

“화산파, 안 좋아한다니까요.”

노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훤이야 원래 그런 놈이라고 치자. 한데 사숙마저 저렇게 끼고돌 줄 어찌 알았겠는가. 불현 듯 삼십 년을 함께 한 사숙과 반 년 동안 마음을 주었던 이훤에게 서운함이 밀려왔다.

두 사람은 노군의 표정을 보고,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는 달래주려는 듯 황급히 말을 이었다.

“사질, 걱정 말게. 그저 주도나 가르치려는 것이야.”

“노군, 표정 푸세요. 저야 술이나 좀 얻어 마시려는 거지요.”

요철(凹凸)처럼 한 마음으로 움직이던 두 사람은 갑작스레 서로를 노려봤다.

“뭐라고 했느냐? 술을 얻어 마셔?”

“아니, 아직도 주도를 강요하십니까?”

노군은 눈을 끔뻑이며 노인과 이훤을 응시했다.

‘······.’

저들은 화산의 배분 문제는 어느새 기억에서 지웠는지 주도(酒道)를 놓고 말싸움을 벌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칼을 쥐더니 누구의 주도가 더 멋진지 우열을 가리겠단다. 멋진 건 뭐고, 주도에 우열을 가린다고 남는 건 무엇인가. 다시금 조금 전의 상황이 반복됐다. 칼춤을 추면서 술을 마시더니 어느 순간 서로를 칭찬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누가 옳고, 그른지도 내려놓자. 애초에 그걸 하려고 저 녀석과 함께 사숙을 찾아오지 않았던가.’

어차피 사숙은 낙안봉을 내려오지 않을 것이고, 이훤 또한 본산에 찾아갈 일이 없다.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 또한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만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아집과 편견을 버리고, 탈각(脫却)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허(虛)다.

비우는 순간 두 사람이 새롭게 보였다.

‘진정 즐거워 보이는구나.’

모종의 이유로 하산할 수 없는 사숙과 모종의 이유로 화산을 멀리하는 이훤이 저렇게 즐거울 수 있다면 내버려둬도 좋을 듯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구나.’

잠시 후 두 사람이 한껏 홍조를 띈 채 다가왔다.

“어디 가느냐?”

노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술만 드시면 몸 상합니다. 제가 술안주라도 만들어드리지요.”

노인과 이훤은 노군이 처소로 향하자, 빙긋 웃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역시.”

“술은 위대합니다.”

< 13, 이것이 기연이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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