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이번 생은 다를 것이야. >
14, 이번 생은 다를 것이야.
이훤은 성무관을 벗어나면서 눈을 비볐다.
“아직은 환미술이 버겁네.”
그는 회귀 전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무공을 배웠다. 어차피 천공혈륜겁 아래 하나가 되었지만, 종수만 따져도 백여 개는 족히 될 터였다. 환미술(幻迷術)은 상대방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미혼술의 일종이다. 자신보다 월등히 약한 자라면 세뇌를 시킬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술법이다. 그래도 반덕구가 구결과 혈도의 위치를 외울 수 있었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으리라.
이훤은 성무관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웃었다.
“천공혈륜겁의 일부를 떼어서 가르쳤으니 열심히만 하면 굴러다니는 맹수쯤은 될 게다.”
하지만 그가 진정 기뻤던 순간은 무공을 가르쳐줬을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덕구가 만두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을 때 미소가 저절로 번졌다. 회귀 전의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어디 만두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저자의 만두 가게를 모조리 뒤져서 맛까지 보았으나, 애초에 회귀 전 만두 맛을 기억하지 못했다.
결국 가장 유명한 곳에서 가장 비싼 만두를 샀다.
녀석이 맛있게 먹어주는 순간 마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짐 하나가 사라진 듯했다.
이제 성무관을 뒤로 하고, 낙안봉을 눈에 담았다.
이제 화산에서 해야 할 일은 다 한 듯했다.
남은 것은 인연을 정리하는 것이리라.
그 중 첫 번째가 덕구였을 뿐이다.
“만두 정도면 좋아하시겠지.”
이훤은 남은 만두를 들고 피식 웃었다.
*
성무관도들은 돈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화산파에 기부금을 쾌척했다.
화산 인근에서 돈을 벌고 있으니 화산파의 이름을 빌리려 한 것이다. 그리고 교환 조건으로 자식들을 화산에 보냈다. 한데 그들은 무공을 가르쳐도 소질이 없고, 공부에 대한 열의도 없었다. 소질이 있었다면 이미 원가휘가 속한 진무관에 배정됐으리라.
결국 화산파 내에서도 손을 놓아버렸다.
유건평을 비롯한 강경파들이 초도각을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성무관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산파를 좀 먹는 한량이자, 식충이라고 욕을 할 정도였다.
하나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그들에게 화산파란 졸업 후 기녀에게 들려줄 자랑거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오전 독경을 끝낸 후라면 제멋대로 지내기 일쑤였다.
“출출한데?”
“그러게. 야! 저 새끼 시키자.”
관도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하인이나 노비의 보살핌을 받아왔다. 하나 화산파 내에서까지 하인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관도들 중 만만한 상대를 골라서 하인처럼 대했다.
그 상대가 바로 반덕구였다.
“야! 야!”
관도는 인상을 썼다.
평소였다면 말을 거는 순간 주인을 본 개처럼 꼬리를 흔들면서 다가오던 녀석이다. 한데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듯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에 짜증이 치밀었다. 결국 관도가 직접 가서 덕구의 어깨를 잡아챘다.
“야, 내 말 안 들려?”
“왜?”
평소와 달리 담담한 한 마디였다.
하나 관도는 덕구의 얼굴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소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면서 함께 놀아달라던 반편이가 아니었다. 호랑이처럼 부릅뜬 눈에서 묘한 기운이 흐르는 듯했다.
“왜 불렀냐고 묻잖아.”
덕구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관도의 시선이 점차 위로 향했다.
덕구는 둥글둥글한 체구에 소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지녔다. 그래서 순박해보였고, 만만하게 생각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있던 덩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돼지 새끼가 언제 이렇게 컸지?’
평소에는 구부정한 자세로 실실 웃고 다녔기에 몰랐다. 그렇기에 허리와 어깨를 편 덕구의 모습이 낯설 만도 했다.
하지만 낯설 뿐 두렵지는 않았다.
일 년하고도 몇 개월 동안 만만했던 녀석이 한순간에 바뀔 리 없지 않은가.
“야! 출출해서 그런데 먹을 것 좀 챙겨와.”
“아, 그런 거라면 네가 직접 하도록 해.”
덕구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관도는 저쪽에서 자신을 보고 키득거리는 친구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짜증과 분노를 담아 돌아선 덕구의 어깨를 잡았다.
“야! 누가 네 마음대로 가래?”
한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물렁물렁한 건 여전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달랐다.
덕구는 관도의 손을 가볍게 떼어냈다.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 후 읊조렸다.
“나는 지옥의 끝에서 악귀와 만나고 온 사람이야. 너마저 무저갱으로 끌려들어가고 싶지 않다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관도는 질색하며 말했다.
“뭐라는 거야? 미친놈아. 너, 우리 집이 어디인지 잊었냐? 장평상단이야. 혼양도 소륜이 우리 큰 형님이다. 너야말로 혼나고 싶냐?”
솨악-
그 순간 덕구의 커다란 손이 관도의 얼굴을 덮었다.
손이 떨어져나간 후 보인 덕구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맺혔다.
“우리 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휴, 아니다. 너희들이 감당할 일이 아니야.”
덕구는 관도를 내버려두고 먼 산을 응시했다.
“형님을 모신 것도 벌써 한 달이로군. 어서 빨리 성장해서 형님과 함께 염라대왕을 물리쳐야 하는데 말이야.”
그는 지난 한 달간 악귀가 알려준 심법을 시키는 대로 익혔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과정으로 인해 효과를 의심하기도 했다. 하나 한 달 사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본인은 느껴졌다. 물렁물렁한 살 속에서 숨어 있는 거대한 근육의 형체를 말이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을 담아 악귀를 형님이라 불렀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고마운 존재가 아니던가. 본래 신처럼 떠받들고 싶었지만, 친구와 형제가 없었기에 후자를 택했다.
꽈드득-
덕구는 주먹을 쥐락펴락 할 때마다 울리는 뼈마디의 비명을 즐기며 자리를 떴다.
“하아, 형님 생각이 나니 만두를 먹어야겠다.”
반면 관도는 덕구가 자리를 뜰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덕구는 형제가 없는 독자였고, 지금까지 만만한 상대였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그저 덕구의 손이 얼굴을 덮는 순간 해일처럼 밀려왔던 공포를 떠올릴 뿐이다.
‘아! 저 새끼가 어떻게 된 거지?’
그는 혀를 내두르며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한데 친구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야! 너 반덕구한테 쫄았냐?”
“무, 무슨 소리야! 돼지 새끼는 신경 쓰지 말고, 우리끼리 먹자.”
관도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친구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그럼 네가 가서 먹을 것 좀 챙겨와.”
“나는 고기 위주로.”
“술도 몇 병 가져와.”
*
낙안봉 정상은 오늘도 어제와 같았다.
매화나무는 계절을 비껴간 것처럼 풍성했고, 어디에나 있는 술은 매화향과 뒤섞여 좋은 냄새를 풍겼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망아취자가 앉아 술잔을 꺾었다.
“크아! 좋다.”
한데 언제나 맞은편을 지키고 있던 이훤이 보이지 않았다.
채채채채채채채챙!
노인의 시선을 좇으면 그제야 이훤과 노군이 보였다.
두 사람은 격렬하게 비무를 이어갔다.
“하아, 하여간 신기한 놈이야.”
이훤을 보는 눈빛에는 감탄이 섞였고, 노군을 보고 있을 때에는 회한이 가득했다.
“그렇지! 거기지. 아이, 좋아!”
노인은 이내 탄성을 흘리며 술잔을 비웠다.
반면 노군은 여느 때보다 굳은 표정으로 검을 놀렸다.
이훤은 처음 만났을 때와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오 성에 이르렀고, 그마저 시간이 꽤 흐른 상태였다. 그렇기에 회귀 전 무공을 어느 정도 펼칠 수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어.’
하나 단순히 강해졌다면 노군이 이처럼 경악하지는 않았으리라. 이훤은 검을 쥐고 있으니 응당 검법으로 상대했다. 한데 녀석은 검을 도처럼 쓰고, 때로는 창처럼 사용했으며 손발까지 섞어서 공세를 펼쳤다.
‘이건 임기응변의 수준이 아니야.’
마치 수십 년 동안 이런 싸움을 해왔던 사람처럼 능수능란하지 않은가. 그것도 밝은 쪽보다 어두운 쪽에 가까울 만큼 난폭했다.
“쯧!”
노군은 매화검법까지 펼쳐가며 이훤과 거리를 벌렸다.
만약 내공까지 사용했다면 벌써 이겼으리라. 하나 애초에 내공 없이 초식만 겨루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이훤이 귀찮기만 했다.
“이제 쓰러져라!”
노군의 일갈과 함께 수화검의 검 끝이 흩어졌다.
이훤은 그 순간 누가 뒷덜미를 잡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뒤로 밀려났다.
“그만!”
노인의 술잔이 두 사람 사이에서 깨졌고, 두 사람은 비무를 끝냈다.
“저 놈, 눈깔이 슬쩍 빨개졌어. 내공을 쓴 거다. 우리 사질의 승리야!”
노군은 이겼어도 찜찜했고, 이훤은 아쉬웠다.
천공혈륜겁은 내공처럼 넣다 뺄 수 있는 종류의 기운이 아니었다. 아예 몸뚱이와 하나가 되었기에 저절로 활동하며 주인을 지켰다. 그런 놈을 탓할 수도 없으니 그제 웃을 수밖에 없다.
“후우, 제가 졌습니다. 그러니 설거지는 제가 할 게요.”
“이제 와서 하기에는 우스운 소리겠지. 하나 너를 화산의 제자로 받아들이지 못한 게 너무 아쉽구나.”
노인은 노군의 말에 인상을 썼다.
“내 제자야!”
“어차피 사숙도 화산의 문도입니다.”
“하여간 화산은 안 돼. 그나저나 저 놈은 볼 때마다 능숙해.”
두 노인이 동시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단순히 강약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였다.
“휴우, 검을 섞을 때마다 느낍니다. 저 녀석은 천재가 분명해요.”
노인은 노군에게 물을, 이훤에게 술을 건넸다.
“모르지. 저 놈은 전생이라도 기억하나보다.”
“허허, 사숙, 어찌 그리 허황된 이야기를 하십니까.”
“봐봐. 저 놈의 이름에 날 일(日)자가 두 번 들어가잖아. 훤(昍)! 그러니 전생과 현생일 수도 있잖느냐.”
노군은 노인의 억지에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고 하시지요.”
이훤은 노인들의 대화를 들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밖을 힐끔 봤을 때 노인은 황급히 노군을 부르고 있었다. 귀엣말을 하며 훈수를 두는 것이 분명했다. 이훤은 스승이 노군의 편을 드는 모습에 빙긋 웃었다.
‘형님 챙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네. 어쨌든 저렇게라도 스승님의 깨달음을 전해 받는다면 형님도 얻는 것이 있겠지.’
설거지를 끝내는 순간 느껴졌다.
이제 화산에서 해야 할 일이 모두 끝났음을.
“여름도 이제 끝이네.”
*
이훤의 하산 날짜가 정해졌다.
이미 더위가 물러가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다. 하여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추(立秋)에 맞춰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3성만 찍고 바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고개를 돌려 낙안봉을 살폈다.
이제는 더없이 익숙하여 집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회귀 전에는 집도 절도 없이 떠돌며 술을 탐했을 때와 비교하자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매순간 느끼지만, 돌아와서 참 좋다. 집도 생기고, 스승과 형님도 생겼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더 있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즐거웠으니까.
좋은 사람과 술을 마실 수 있다면 삼생(三生)에 걸쳐 취해도 부족하지 않겠는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제는 외출 인사도 자연스럽다.
“저녁에 비가 올 게다. 늦지 않게 와.”
망아취자는 버릇처럼 무릎을 만지작거렸고, 노군은 주방에서 외쳤다.
“우산 가져 가!”
< 14, 이번 생은 다를 것이야.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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