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내가 곧 운명이다. (2) >
*
삼문협(三門峽)
중원 전체를 관통하는 황하의 물줄기 중 가장 거세고, 복잡한 곳을 뜻한다. 세 개의 관문이 있는 협곡이라는 말처럼 삼문협의 물줄기는 지형에 따라 세 번 변했다. 깊고, 빠르고, 굽이지고, 방해물이 많았다. 한 해에 삼문협에 빠져 죽는 사람이 기십이다. 무인들이 싸움을 하고, 시신을 버리는 것까지 헤아리면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러니 노련한 뱃사공이라고 해도 삼문협을 오갈 수 없었다. 고작 해야 안전한 지점에서 강을 건널 뿐이다.
“여기가 어용협이군요.”
낯빛이 창백한 문사가 절벽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 어깨에 면포를 감고, 부목을 대고 있었다. 하나 새하얀 천에서 핏물이 아직도 번져 나왔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가에는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며칠 전까지 문후라 불렸던 자였다.
그리고 이훤에게 소마라 불린 자였다.
“어용협이라는 이름의 뜻이 뭡니까?”
도열하고 있던 수하들 중 수장이 나섰다.
“이곳은 수심이 깊고, 유속이 느립니다. 그리고 예부터 잉어가 많았지요. 용이 되고 싶은 물고기들이 모인다고 해서 어용협이라 합니다.”
소마는 몸을 돌렸다.
“잘 됐네요. 여기서 다 죽여 버리면 누구도 용이 되지 못할 테니까요.”
어용협의 정상에 모인 삼백 명의 무인들이 무릎을 꿇었다. 이들은 소마가 무당파에게서 무명비급을 빼앗기 위해 상부와 주변에서 지원받은 병력이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그들이 고개를 들고 소마를 응시했다.
한데 눈빛이나 기세, 복장만 봐도 각양각색이다. 마치 정사마(正邪魔)를 가리지 않고, 되는 대로 불러 모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일견하기에도 절정의 무인들이 즐비했고, 그 이상의 고수도 간간히 기세를 뽐냈다.
소마는 웃었다.
저들로는 무당파를 궤멸할 수도 없고, 저지할 수도 없다. 그저 약간의 시간만 벌어지고, 시선을 끌어준다면 죽할 터였다. 그가 상부에서 지원받을 진짜 고수들이 무당파의 백암자와 청암자를 죽여 버릴 것이다.
“그들의 위치는 어디쯤인가요?”
“삼문협 초입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다른 곳의 배를 소거했으니 이곳밖에 배를 탈 곳이 없습니다.”
소마는 어용협 아래 모래사장을 내려다봤다.
무당파가 협곡 사이를 지나 저곳에 도착한다면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지 않는 한 몸을 뺄 수 없으리라.
“지원이 도착하면 자리를 잡아 봅시다.”
그 때 어용협의 유일한 입구로 올라오는 자가 보였다.
전신을 흑의로 감쌌고, 머리에 검은 방갓을 썼다. 촘촘하게 얽힌 망사로 얼굴 전체를 가렸기에 어떤 사람인지 추측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소마는 웃는 낯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상부에 요청한 자들은 혈륜오괴(血輪五怪)였다. 장성을 넘나들면서 살육을 벌이는 자들로 이미 오래 전 무림공적에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살아서 활동할 만큼 고수였다.
흑의인을 따라 세 명의 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각기 정사마를 대표하는 사람처럼 보편적인 복장을 한 자들이다. 그들은 소마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릎을 꿇고 앉은 무인들 사이로 돌아다녔다.
잠시 후 약간의 웅성거림이 있었다.
그리고는 소마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려 어용협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다리세요.”
소마는 흑의인의 음성에 경계의 빛을 풀었다.
잠시 후 어용협 정상에 모였던 무인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야 흑의인이 말을 덧붙였다.
“문후. 개미굴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소마는 실패를 지적당하면서도 웃었다.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무대에 잠시 올랐을 뿐입니다. 다행히 제가 있을 때 천문의 비급이 나타났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나 흑의인의 이어진 말은 소마의 얼굴을 기괴하게 변화시켰다.
“방금 뭐라고 하셨지요?”
“손을 떼라고 했습니다.”
“이제 곧 무당파가 올 겁니다. 그들에게 천문진인의 무명비급이 있고요. 신마의 다섯 깨달음이야 말로······.”
흑의인은 검지를 들어 소마의 말을 잘랐다.
“제가 몇 가지 말씀을 드릴게요. 그 후에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하세요.”
소마는 웃는 듯 우는 듯한 기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경청하겠습니다.”
“첫 째, 당신은 부상을 당했어요. 우리가 활동하면서 가장 염두에 둬야 할 것은 통일성입니다. 누구 하나 엇나가거나, 튀어버리면 모든 사람이 보조를 맞춰야 해요. 아닌 말로 당신이 팔을 다쳤으니 우리 모두 팔에 칼이라도 맞아야 한단 뜻이지요. 그러기를 원하시나요? 당신은 원할 수 있어도 그분께서는 원하지 않으실 것 같네요.”
흑의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마치 노래를 하듯 음률처럼 전해졌다.
“둘 째, 당신이 보고한 자가 움직였어요. 개방과 산서지부도 함께요. 그리고 종초홍은 전서응까지 사용해서 하남지부에 지원을 요청했어요. 지금쯤이면 하남지부에서도 반응이 있을 겁니다. 과연 당신이 준비한 저들만으로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봐요.”
세 번째 이유를 거론했을 때에는 소마가 고개를 들고, 눈을 부릅 떴다.
“셋 째, 제가 이미 무명비급을 확인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제가 확인했으니 당신이 할 일은 없답니다. 그러니 손을 떼세요.”
“후우, 좋습니다. 당신이 확인을 했다면 믿어야지요. 당신도 그렇겠지만, 제 운명은 그분께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금하네요. 무명비급은 그분께서 원하시는 그것이 맞습니까? 도움이 되었나요? ”
흑의인은 침묵했다.
잠시 후 흑의인의 두 눈이 기이하게 번뜩였다.
촘촘한 망사를 뚫고 나온 광채는 환하게 웃는 눈매처럼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내 소마의 두 눈도 흑의인처럼 호선을 그리며 보기 좋은 미소가 완성됐다.
“맞아요. 우리의 운명은 그분의 뜻대로 이뤄지지요. 그거면 족하지 않나요?”
소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가 주제넘었네요.”
흑의인이 한 걸음 비켜서며 말했다.
“그 동안 고생했어요. 이곳 삼문협은 신마의 전설이 막을 내린 장소랍니다. 그러니 우리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지요. 잠시 머리를 식히고 돌아오세요.”
“오랜만에 절명곡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아주 좋아요.”
흑의인이 포권을 했고, 소마는 손을 모았다.
소마가 먼저 어용협 정상을 떠났고, 흑의인은 잠시 어용협 아래를 응시하다가 자리를 피했다.
쉬이이이이이이잉-
삼문협의 거센 물줄기를 자랑하는 듯 매서운 바람만이 어용협 정상을 휩쓸었다.
*
종초홍이 불러들이 무당파의 사제들은 무당십학(武當十鶴)이라 불렸다. 개개인의 무위도 뛰어났지만, 열 명이 함께 펼치는 십기무궁검진(十氣無宮劍陣)이야 말로 일절이었다.
하나 그들은 좌불안석이다.
이미 무림맹 정도는 지났어야 할 시기에 삼문협을 코앞에 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객잔 밖에 놓인 마차를 힐끔거리며 침음을 흘렸다.
“무암 사숙께서는 아직도 식사를 안하시나?”
“사숙이라니. 사문의 반도다. 옛 정에 휘둘리면 안 돼. 종 사형이 신신당부를 했잖아. 무당산에 도착할 때까지는 방심하지 말아야 해.”
“나도 그러고야 싶지. 하지만 두 분 사백께서 너무 여유롭잖아. 하긴 천양검선과 풍음검선이라는 별호만 내세워도 어지간한 것들은 근처에도 못 올 거야.”
“그래도 방심하지 마. 아! 백암 사백께서 오셨다.”
무당십학이 객잔 아래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산책을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한데 너희들의 표정에는 불안함이 가득하구나. 무당은 대도이고, 대도에는 문이 없다. 항상 당당하게 행동해야 할 너희들이다. 한데 이게 무슨 꼴이냐?”
백암진인의 노호성에 무당십학은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그 때 뒤따르듯 등장한 청암진인이 혀를 찼다.
“사형이야 무공도 높고, 아는 것도 많으니 산책을 할 만큼 여유가 있는 게지요. 저 아이들은 아직 많은 경험이 필요합니다.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우리 애들 기 죽습니다.”
“청암 사백께서도 다녀오셨습니까?”
“너는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오는 것이야?”
청암진인이 손에 든 술병을 흔들자, 백암진인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쯧쯧, 초홍이 어째서 도적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속가의 신분을 유지하나 했더니 다 네 탓이로구나.”
“사형, 이제 곧 삼문협이오. 강만 건너면 소림과 무림맹의 영역이지요.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맙시다. 하하하.”
백암진인은 고개를 내저으며 제자들에게 물었다.
“무암은 아직도 곡기를 끊었느냐?”
“예, 그렇습니다.”
“되었소. 저 녀석도 나름대로 사죄를 하는 모양이니 그냥 내버려둡시다. 모든 건 장문께서 결정하실 게요. 그나저나 날이 좋으니 슬슬 출발을 합시다!”
그 때 개방의 거지가 구르듯이 객잔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는 무당의 문도임을 확인하더니 밀봉된 서찰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뭐라? 사이한 자들이 감히 무당을 노려?”
“허허, 강호가 많이 평화로웠나 보오. 감히 무당의 행보임을 알면서도 날파리들이 날아들고 말이야.”
백암진의 진중한 얼굴과 청암진인의 해맑은 표정에 노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배는 수배되었느냐?”
“예.”
“출발한다.”
개방도로서는 놀랄 일이었다.
“무당의 고인들께서는 어째서 서찰을 보시고도 출발을 하신단 말입니까.”
백암진인은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무당은 대도무문이다.”
청암진인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좀 더 현실적인 이유를 밝혔다.
“나와 사형이 근처를 돌았음에도 적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적과의 거리가 상당할 터, 이대로 삼문협을 지나 하남성으로 향하는 것이 상책일세.”
잠시 후 무당쌍선과 무당십학, 그리고 무암자를 태운 마차 한 대가 어용협의 백사장을 밟았다.
백암진인은 지형을 살피더니 나직이 읊조렸다.
“발검.”
무당십학이 검을 뽑고, 재빨리 검진을 구성했다.
“배는?”
청암진인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개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십 장 밖에서 배가 오고 있소.”
그 때 미약하게나마 울림이 있었다.
쿵!
백암진인과 청암진인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쿵! 쿵! 쿵!
이제는 무당십학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모래사장이다 보니 울림의 전달은 더욱 가파르게 이어졌다.
“멈추세요!”
백암진인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허리춤에 올린 손을 내려놓았다. 청암진인 또한 경계를 풀고, 입꼬리를 올리며 낯익은 존재의 방문을 기다렸다.
쿵!
어용협의 초입을 한달음에 내달린 자가 모래알을 암기처럼 사방으로 흩뿌리며 멈춰섰다.
이훤이다.
그의 몸은 천공혈륜겁을 극성으로 휘돌린 탓에 여전히 불그스름한 기운이 맴돌았다.
“흐음.”
백암진인과 청암진인은 그것을 보고 잠시 미간을 좁혔다.
삿된 기운이 전해지지는 않았으나, 외형만 보자면 마치 좌도방문의 무공을 펼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나 이훤은 개의치 않았고, 쌍선도 지금 당장 거론하지 않았다. 이훤과 종초홍의 이름으로 전해진 서찰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자네가 고생이 많군.”
이훤은 잠시 어용협을 올려다보고는 인상을 썼다.
“자리가 좋지 않군요.”
“배가 오고 있네.”
청암진인의 말에 이훤은 본론을 꺼냈다.
“무암자와 무명비급은요?”
무당십학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무암자의 배신만 알 뿐 무명비급의 존재는 알지 못했다.
“사제는 마차에. 그리고 비급은.”
백암진인이 가슴을 두드렸다.
“이곳에 있네. 사제와 내가 하루씩 번갈아가면서 지켰네. 그러니 문제될 것은 없어.”
그 때 청암진인의 탄식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마차 앞에 선 청암진인의 뒤로 몰려들었다.
그리고는 일제히 탄식을 흘리며 도호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 있는 무암자는 자신의 가슴에 스스로 비수를 꽂고, 자결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옷자락에는 죽기 직전 피로 새긴 듯한 두 글자가 존재했다.
절명(絶命).
“못난 녀석, 끝까지 못난 선택만 하는구나.”
“절명이라니. 목숨을 끊는다고 죄가 없어지더냐! 닫아라. 더 볼 이유가 없다.”
이훤은 마차의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암자가 남긴 절명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 21, 내가 곧 운명이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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