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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58화 (58/226)

< 23, 여섯 명이 아니었어! (3) >

몇 번이나 벽에 새겨진 아홉 글자를 읊조렸다.

‘절명곡에서 신마가 전한 의념처럼 뛰어넘으리라.’

읽고, 또 읽었다.

이제 확실한 것부터 정리를 해보자.

“신마가 깨달음을 전할 때 당신도 있었군.”

우습게도 확실한 건 이게 전부였다.

이훤은 이마를 짚고, 장탄식을 했다.

“여섯 명 중 하나일까? 아니면 제 칠의 생존자일까?”

해골의 유품을 살펴봐도 구파의 문도 같지는 않았다.

오대세가일수도 있지만, 본능적으로 그렇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들이라면 안전한 문파와 세가를 두고 오태산에 숨어서 수련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하! 그럼 더 복잡해지는데.”

아무래도 제 칠의 생존자 쪽으로 무게가 실렸다.

돌이켜보면 이훤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정보는 전문지식이다.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망아취자를 통해 전해들은 내용이다. 한데 당연하게도 그 모든 정보를 확인하지 않고, 진실로 받아들였다.

여기서부터 어긋났으리라.

망아취자와의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떠올렸다.

그가 말한 대로라면 여섯 명이 함께 들었지만, 각자 생각한 바가 다르다고 했다. 그렇다면 신마를 만났던 그 날의 기억 또한 제각각일 터였다.

“그럼 당신은 누구란 말입니까?”

이훤은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해골을 응시했다.

낡아서 썩기까지 한 무복은 검은색이다. 두건은 있지만, 복면은 없다. 신분을 숨기고 다니던 자는 아닐 터였다. 그것을 제외하면 해골의 신분을 확인할만한 어떠한 유품도 찾지 못했다.

“아!”

이훤은 잠시 생각하다가 무릎을 꿇었다.

천공혈륜겁을 전해준 건 무암자지만, 만든 건 해골이 아니던가.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고 싶었다. 하나 스승으로 여긴 건 아니기에 세 번의 절을 했다.

“······.”

이훤은 마지막 절을 하던 중 미간을 좁혔다.

바닥은 청석마다 초승달 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한데 눈앞에 있는 청석에는 무늬가 아니라 초승달 모양의 손잡이가 존재했다. 오랜 세월 먼지와 흙이 쌓여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장소였다.

“하하, 이건 너무 구닥다리 방식인데.”

절을 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비밀장소.

저자의 이야기꾼들이 영웅담을 논할 때 주인공이라면 빠지지 않고 겪게 되는 과정이 아니던가. 하나 무암자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도 그럴 것이 태상노군을 모시는 그가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절을 할 리 없지 않은가.

이훤은 예기치 못한 발견에 입꼬리를 올렸다.

조심스럽게 고리를 당기는 순간 청석 아래 좁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작은 보합이 세월의 흔적을 이겨낸 채 자리했다. 팔황지보(八荒之寶)라 새겨진 보합의 뚜껑을 열었다.

“죽간?”

대나무 조각을 엮어 만든 죽간은 관부나 맹과 같이 오랜 세월 정보를 보관해야 하는 조직에서 주로 사용했다.

촤라라락-

이훤은 조심스럽게 죽간을 폈다.

세월에 풍화되어 확인하기 힘든 부분을 제외해도 많은 글자가 남아 있었다.

‘팔황의 후계자로서 중원을 방문하여······.’

해골은 스스로를 팔황무극존(八荒無極尊)이라 칭했다.

무극존은 새외를 의미하는 팔황의 제일고수란다. 그런 그가 중원의 무학과 겨뤄보고 싶은 건 당연했으리라. 한데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은 여정을 해야 했다. 산서 북부의 장성을 몰래 넘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겨뤄보려던 항산파와 오태산의 일백청사(一百淸寺)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항산파는 백 년 전에 멸문했고, 일백청사는 그냥 중들의 모임이었을 텐데······.’

아무래도 무극존은 새외에서 살아왔기에 강호의 정세에 어두운 듯했다. 죽간의 내용은 대부분 자화자찬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고, 조만간 강호의 모든 방파를 무릎 꿇린 후 천하제일인으로 숭배받기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팔황일대기를 출간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고자 했다.

이훤은 입꼬리를 흘렸다.

“그것 때문에 죽간을 사용했군. 이 양반도 정상은 아니네.”

한데 죽간의 마지막 내용이 의미심장했다.

새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절경이 산서성 남부에 있다니 유람을 하러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산서성 남부의 절경이라면 삼문협이 유일하지 않은가.

“설마.”

이훤은 탄식했다.

일지(日誌)나 다름없는 죽간의 내용을 보아하니 저간의 사정이 그려졌다.

“하, 삼문협을 구경 갔다가 신마를 만난 거요? 그리고 못이길 것 같아서 몰래 지켜보다가 깨달음을 얻고 여기서 수련을 한 거고?”

이제야 강호에서 팔황무극존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까닭을 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중원을 정벌하겠다고 기세등등하게 장성을 월담한 사람이 절과 명승지나 찾아다니다가 폐관을 하게 된 것이다.

“이걸 얘기해도 누가 믿기나 할까?”

이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천공혈륜겁의 위력은 익힌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던가. 대성하지도 못하고, 팔 성의 경지였던 절름발이를 종횡천하하게 만들어준 무공이다. 무극존은 회귀 전의 자신보다 대단했으리라. 그런데 뜻을 펼치기는커녕 이름도 알리지 못한 채 죽을 때까지 폐관을 한 것이다.

웃음 반, 안타까움 반.

이훤은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은 채 히죽거리며 천공혈륜겁의 비급을 살폈다. 회귀 전 기억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급을 뜯어 낱장 째로 살폈고, 표지 사이의 공간까지도 확인했다.

아무 것도 없다.

이훤은 손바닥 사이에 비급을 끼우고 혈륜을 휘돌렸다.

화르르륵!

극성으로 휘돌린 혈륜이 불꽃처럼 일어나며 비급을 재로 만들었다. 이제 강호에서 천공혈륜겁을 지닌 자는 오직 이훤 뿐이다. 그 후 밀실을 샅샅이 수색했다. 팔황제일의 고수라면 뭐라도 하나 지니고 있지 않겠는가. 그러던 중 일지가 담겨 있던 상자를 양 손에 쥐고 흔들었다.

팔황지보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평범한 상자였다.

“아! 이러면 기껏 비급만 확인하고 끝나는 거잖아.”

애초의 목표는 비급의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다. 하나 죽은 스승까지 발견한 마당에 이대로 돌아가는 건 너무나 아쉬웠다.

“에잇!”

이훤은 입맛을 다시며 상자를 집어던졌다.

아쉬움을 가득 담아 술이나 진탕 마셔야겠다.

하나 돌아서는 순간 눈을 가늘게 떠야 했다.

반쯤 부서진 상자의 모서리를 덧댄 쇳조각이 문제였다.

“저게 저렇게 길었나?”

상자를 아예 가루로 만들었다.

그 순간 듣도 보도 못한 기사(奇事)가 벌어졌다.

촤르르르륵!

상자의 좌우측을 감쌌던 쇳덩어리는 떨어져 나오는 순간 이리저리 꺾였던 상태에서 둥그렇게 말려들어갔다. 아무리 봐도 팔찌의 형태가 분명했다.

이훤은 뱀을 말아놓은 듯한 팔찌를 들었다.

양 손으로 잡아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공혈륜겁을 운용하는 순간 말랑말랑한 엿처럼 늘어지는 것이 아닌가. 양 손에 하나씩 끼고, 혈륜을 멈추는 순간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하, 신기하네.”

강도(剛度)만 봐도 투갑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이훤은 팔찌를 낀 채로 이리저리 몸을 놀렸다. 주먹을 뻗거나 내력을 운용해도 조금의 위화감이 없다. 마치 자신의 피부처럼 찰싹 달라붙은 모습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 쓸게요.”

진심을 담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해골, 아니 무극존이 남긴 아홉 글자를 살폈다. 그에 대하여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 전과 느낌이 사뭇 달랐다.

신마는 추격대를 모조리 죽인 후 여섯 명을 남겼다.

그들은 구파오가의 장로 중 말석일 만큼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만만한 사람들만 남겨서 조롱을 하듯 깨달음을 전한 게다.

하나 무극존은 달랐다.

그는 팔황제일을 자처하고, 중원일통을 꿈꿨다. 그런 사람이 단순하게 신마에게 휘둘렸을 리 없다. 분명 신마로 인해 한 단계 위를 바라보게 되었으리라.

“즉 내가 익힌 건 신 천공혈륜겁이 되는 건가?”

이훤은 탄성을 흘렸다.

천공혈륜겁은 숨만 쉬어도 성취가 올라갈 것이고, 대성 또한 자연스럽게 이뤄지리라. 한데 무극존은 무엇을 뛰어넘으려 한 것일지 의아했다.

‘확인할 방법은 한 가지.’

그 날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의 유진을 확인하면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그걸 위해서라도 만나야 할 사람이 존재했다.

이제 망아취자와 주도가 아니라 무도를 논해봐야겠다.

“언제 돌아가셨는지 알 길이 없으니 해마다 제사는 못 지낼 것 같고요. 가끔 생각날 때마다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그럼 저승에서라도 부디 염라를 이기시고 지옥일통 하시길 기원합니다.”

이훤은 밀실 자체를 무너트렸다.

밀실이 무너지면서 보고도 함께 허물어졌으며 이내 균형을 잃은 인왕전 전체가 기울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쾅!

“이게 무슨 조화야?”

“적의 기습인가?”

이훤은 난리법석을 떠는 산서지부의 무인들을 피해 인왕부를 빠져나왔다.

고천락은 이훤의 처소 앞을 배회하다가 반색했다.

“형님!”

“벌써 다 옮겼어?”

“그럼요.”

“몇 개 버린 건 아니고?”

이훤의 장난기 섞인 말에 고천락은 발끈하여 소리쳤다.

“그럴 리가요!”

몇 가지를 버렸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돈이란 술을 마실 수 있을 만큼만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물론 누가 마시는 술이냐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말이다. 앞으로는 고천락에게 술 공급을 맡길 생각이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화산으로 갈 거야.”

고천락이 미간을 좁힌 채 입술을 삐죽였다.

“또 밀어인가요?”

“아니, 진짜 간다.”

이훤은 고천락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 후 처소에 들어섰다. 그리고 상의를 벗은 후 입꼬리를 올렸다. 무복의 겉면에는 ‘고천락은 멍청이에 도둑질도 못한다.’는 내용을 적어 놨다.

하나 고천락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회귀 전과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문맹이었고, 글자를 그림처럼 인지한다.

‘그래서 너는 홍천기공을 찾아야 하는 거고.’

다만 약간의 아쉬움은 숨길 수 없었다.

지금의 고천락이라면 분명 천문진인의 무명비급을 잠깐이라도 살폈을 터였다. 도둑놈이 훔친 물건을 확인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나 읽을 수 없는 글자가 가득하니 망설임 없이 무당파에게 넘겼을 터였다.

“쩝, 결국 무당산에서 차 한 잔을 마시기는 해야 한다는 거네.”

다음 날 이훤은 종초홍을 찾아가 이별을 고했다.

“저도 이삼 일 내로 복귀하려 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보자고. 내가 무당을 가든, 네가 화산을 오든 말이야.”

종초홍은 헤죽 웃으며 손목을 꺾었다.

“여산의 온천에서 한 잔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이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것도 좋지.”

“후훗, 큰일을 끝냈으니 자리를 좀 비워도 되겠지요. 제가 떠나기 전에 인편을 보내겠습니다.”

“그래.”

고천락은 말없이 고개만 까딱거렸다.

아직도 두 사람 사이의 서열이 정리되지 않은 듯했다.

종초홍 역시 자신의 주량을 자랑하듯 간이 있는 부위를 크게 매만졌다. 그리고 고천락을 가리키며 입꼬리를 올리며 도발을 했다.

“흥!”

이훤은 돌아서면서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말을 건넸다.

“아! 그 무명비급이라는 게 도대체 뭐였던 거야?”

종초홍의 다양하던 표정이 잠시마나 굳었다.

“본파의 어른께서 남기신 유진이지요.”

“그래, 그게 잘 돌아갔으니 다행이다.”

이훤의 말에 종초홍은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모두 형님의 덕분입니다. 무당은 이번 일을 잊지 않고, 견마의 노고를 다하듯 보은할 것입니다.”

“좋은 술이나 준비해둬라.”

“살펴가십시오.”

종초홍은 이훤이 사라질 때까지 예를 갖췄다.

반면 이훤은 종초홍의 처소를 나서는 순간부터 미간을 좁혔다.

‘화산은 망아취자 외에 아무도 신마의 일을 알지 못해. 하지만 무당은 너무 많은 사람이 알고 있네.’

그렇다면 다른 네 명의 생존자 또한 약속을 지켰다는 보장이 없지 않겠는가. 혹은 소마의 배후가 다른 네 명의 생존자 중 한 명일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었다.

고천락이 능숙하게 말을 다루며 입꼬리를 올렸다.

“형님, 말 탈 줄은 아세요?”

회귀 전에는 한 쪽 다리를 쓸 수 없기에 지겹도록 말을 타고 다니지 않았던가.

이훤은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고 읊조렸다.

“집에 가자.”

< 23, 여섯 명이 아니었어!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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