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붉은 안개가 산을 덮다. (3) >
휘엉청 밝은 달 아래 아늑하게 뒤덮인 어둠.
마치 집처럼 사방을 두른 협곡.
술꾼이라면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최고의 호사로 칠 터였다. 이름 모를 협곡 안에서 백 명의 사내가 술잔을 나눴다.
이훤과 용천대주를 제외한 구십구 명.
술자리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건 당연했다.
분위기를 깨는 몇 명의 발목을 부러트리고, 입을 막아버렸더니 마치 잔치를 하듯 활기가 넘쳤다.
이훤에게는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제 술 없나?”
수십 명의 용천대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집에 갈 시간이군.”
용천대원들은 억지웃음을 짓느라 경련을 일으키던 입술에 힘을 더했다.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훤의 말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자! 그럼 한 명씩 와서 혈도를 내밀자.”
용천대원들의 얼굴이 목석처럼 굳었다.
“우리가 술 한 번 같이 마셨다고 믿을 수 있는 사이가 된 건 아니잖아.”
이훤의 말에 대원들은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억지로 삼켜야했다. 지금껏 자신들에게 형제 운운하며 정보를 캐내던 자가 아닌가. 물론 그들 역시 이훤을 믿지 않았지만, 믿는 척이라도 해야 살 길이 열린다고 여겼다. 적반하장을 겪는 짜증과 분노는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내가 갈까? 술 취한 사람이 갑자기 움직이면 힘 조절이 안 될 수도 있는데······.”
이훤이 말끝을 흐리는 순간 용천대원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달려들었다. 그리고 저들끼리 순서를 정하여 등을 보였다.
“좀 아플 거야.”
명문혈을 찍을 때마다 대원들은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혼절했다. 내력에 혈륜을 담았기에 한두 시진으로 풀리지 않는 점혈법이다.
이훤은 용천대원들을 잠재운 후 발걸음도 가볍게 협곡을 벗어났다.
“눈이 또 내리네. 그래도 괜찮겠지.”
혈륜이 흩어지려면 최소 삼 일 정도 거릴 터였다.
하나 저들은 저마다 위세를 부리는 무인이 아니던가. 삼 일 정도는 눈을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에 하나 죽는다면 평소 수련을 게을리 한 자기 자신을 탓해야 할 것이다.
“우리 동생은 불을 얼마나 잘 질렀는지 볼까?”
이훤은 협곡을 벗어나 여산을 바라본 후 탄성을 흘렸다.
여산의 중턱에서 지붕이 보일 만큼 화려하던 화청궁은 오늘따라 불야성처럼 밝았다. 곳곳에서 화광이 충천하여 사람들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자식, 야무지게 잘 냈네.”
이훤은 화청궁으로 향하는 내내 하오문 여산 지부장과 용천대원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되새겼다.
‘복천적이 궁 안의 일을 맡긴 여자가 있다고······.’
공교롭게도 백매선자(白梅仙子)라 불리는 여인의 표정이 울상이란다. 마치 옛 미인인 서시처럼 미간을 찡그린 채 눈시울을 붉히고 있어서 잊지 못했다고 했다.
“핫, 진짜 우는 새끼가 있었네.”
이러다 화내는 놈도 나오고, 즐거워하는 놈도 나올 기세였다. 물론 농담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뭐가 됐든 보이는 족족 때려잡으면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차라리 잘됐지.”
이훤은 속도를 올렸다.
이미 개미굴을 통해 신비조직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수 년 간 개미굴이라는 거대한 공간을 만들어놨음에도 필요에 의해 한순간에 버려버렸다. 그 필요란 문후가 분명했다. 놈은 목표를 얻을 수 있게 되고, 신변에 위기가 닥치는 순간 개미굴을 버렸다.
‘관음동에서 놈들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
백매선자만 잡으면 개미굴에서 그랬듯 관음동도 포기할 것이 분명했다.
이훤은 가볍게 뛰었고, 이내 그림자가 따르지 못할 만큼 빠르게 화청궁 쪽으로 사라졌다.
파파팟!
*
금검노호 복천적은 화청궁의 심처인 연화전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의자에 새겨놓은 연꽃무늬를 매만지며 미간을 좁혔다. 하나 그가 불편한 심경을 내비쳤음에도 대전 내부는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복화동의 인원은 모두 대피했나?”
“참찬정사의 첩과 일가족이 머물고 있어서 일순위로 대피시켰습니다. 한데 그곳 보다 청위각 쪽이 문제입니다. 지휘사사의 부인과 도독첨사의 부인이 상대보다 늦게 나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신분이 낮은 쪽이 먼저 나가서 길을 열어야 한답니다.”
“지휘사사가 도독첨사보다 높잖아!”
“한데 도독첨사의 처가가 감찰원의 좌도어사입니다.”
학사는 고객의 명부를 살피다가 한숨을 흘렸다.
“젠장할! 벽을 뚫어서 길을 내게. 그리고 양쪽으로 보내버려. 불이 더 옮아 붙기 전에 모두 대피시켜야 해. 관부 쪽에서 사상자가 나오는 순간 폐업이다. 폐업!”
복천적은 화청궁을 관리하는 학사들을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관부나 군부의 인사들에 대한 생사를 개의치 않았다. 이미 강호의 고수들은 무슨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하고 자리를 피했을 터였다. 그러니 관음동만 멀쩡하다면 다른 것은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삼황칠괴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어.’
그런 와중에 일견하기에도 방화가 분명한 불길이 사방에서 솟구쳤다. 청해성에서 곤륜파를 피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그에게는 너무도 낯익은 상황이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적을 괴롭히며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관음동만은 지켜야 해.’
그는 애매에 대한 연정을 진심이라고 여겼다.
그렇기에 목숨을 바쳐서라도 관음동을 지키려 했다.
“궁주, 적의 꼬리가 잡히지 않습니다.”
화청궁을 지키던 경천대주(驚泉隊主)가 다가와 속삭였다. 잠시 후 기천대(奇泉隊)와 염천대(炎泉隊)의 대주들이 학사들을 비집고 다가왔다.
“불길이 잡히지 않습니다. 기름을 붓고 고의적으로 불을 질렀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목을 끄는 방법을 아는 자입니다.”
실화가 아니라 방화임이 확정됐다.
염천대주가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이라도 관부의 명사들을 모아놓고, 벽으로 써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천적은 고개를 내저었다.
애매의 의중은 화산을 향했다.
그러니 화산의 이목을 끄는 행위만은 피해야 할 터, 결국 적과 힘 싸움을 해야 문제가 해결될 터였다.
“만약······.”
“하명하시지요.”
삼개 대주가 눈을 빛냈다.
그들 또한 애매에게 홀린 지 오래였기에 그녀가 인정한 복천적의 명령이라면 불구덩이도 개의치 않으리라.
“관음동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려졌다면?”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저 부잣집 여인네들이 수다나 떠는 장소라고 알려졌을 뿐입니다.”
“화청궁 내에서 관음동의 목적을 아는 자가 열 명도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애매께 충성을 맹세했고요. 절대 새어나가지 않았을 겁니다.”
복천적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마지막 대주의 보고를 기다리는 중이다.
잠시 후 화천대(華泉隊)의 대주가 경공까지 펼치며 대전을 질주했다. 중간에 부딪치는 학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나갔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궁주!”
“어떻게 되었느냐?”
화천대주는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하오문 여산지부는 쑥대밭이 됐습니다. 하여 지부장이 사라지기 직전까지 올라온 정보만 확인했습니다. 화산의 동향이 심상치 않답니다.”
“뭐라?”
“장문인이 일대제자를 모두 소집했답니다.”
이훤의 말을 들은 노군이 장문인과 정보를 공유한 것이다. 하나 그것을 알 리 없는 복천적으로는 화산의 개입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언제 정보냐?”
화천대주는 한숨을 흘렸다.
“날짜와 시간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 아무리 빨리 왔어도 이틀을 넘기지는 않았을 겁니다.”
“화산이 비록 쇠락했다지만, 마음만 먹으면 여산까지는 반나절이다.”
네 명의 대주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밖에 화산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무림맹 섬서 지부에서는 별 말이 없었습니다.”
복천적은 입술을 질겅거렸다.
제아무리 노회한 그라고 해도 제한적인 정보만 가지고 판단을 내리기란 불가능했다.
그 때 짙은 천이 걷히며 한 여인이 들어섰다.
그녀는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슬픈 눈으로 대주들을 바라봤다.
“종사가 찾아와 개미굴의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그때 백의가 무림맹의 연줄을 조금 사용했나 봐요. 그래서 화산이 무림맹을 믿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움직였을 거예요.”
복천적을 비롯한 네 명의 대주들이 여인을 반겼다.
“애매께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관음동의 일은 어찌하시고요.”
애매는 한탄하듯 소매로 눈꼬리를 훔치며 말했다.
“하아, 하늘이 이 년을 돕지 않으시네요. 관음동은 잠시 닫아두었습니다. 삼 일! 아니, 이틀의 시간만 주어졌어도 홀로 일을 끝낼 수 있었을 텐데······.”
그녀가 말꼬리를 흐리자, 복천적을 비롯한 네 명의 대주들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녀의 감정에 자연스럽게 동조하는 게다.
복천적이 팔걸이를 치며 일어났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처음부터 밀법대종사와 혈천궁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화산이 주력을 이곳에 보냈다면 본산은 텅 비어있을 겁니다.”
네 명의 대주들도 호응했다.
복천적보다 빨리 생각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듯 격렬하게 맞장구를 쳤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관음동을 닫았다면 적은 위치를 확인할 수 없지요.”
“이곳에 관부와 군부의 명사들이 즐비하니 화산파는 떠나지 못하고 지켜야 할 겁니다. 정파니까요!”
애매는 장탄식을 흘리며 다가섰다.
그리고 복천적을 비롯한 대주들의 손을 잡으며 감사를 표했다, 눈물을 흘리며 애달프게 마주하는 모습은 사내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 수가 있었네요.”
복천적은 내력을 일으키며 맹세를 하듯 말했다.
“천천히 따라오시지요. 제가 연화봉 정상에 애매의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애매가 고개를 끄덕이자, 학사들을 밀치며 빠르게 연화전을 벗어났다. 애매는 손을 들어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했다.
그 후 창을 통해 연화전을 빠져나온 후 지붕에 올랐다.
“너무 쉬워서 보는 재미도 없더군요.”
애매에게 말을 건 사람은 연화전 지붕에 앉아서 술병을 기울이던 흑의인이다. 애매는 흑의인을 일별한 후 혀를 살짝 빼물더니 옷을 벗어던졌다.
티끌 하나 없이 매끈한 나신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흑의인에게는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아름답군요.”
“당신이 울면서 하는 말이라면 믿을 게요. 하지만 웃으면서 하는 말은 믿지 않을 겁니다.”
애매는 기와를 들어내고, 아래에 숨겨진 옷을 입었다. 소매에 새겨졌던 매화가 난초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전과 똑같은 옷이다.
“같은 얼굴에 같은 능력을 지녔다는 건 참 슬프네요. 몇 년 동안 사랑하고, 충성을 맹세한 사람마저 이처럼 쉽게 가지고 놀 수 있으니까요.”
애난은 흑의인의 곁에 다가가 엉덩이를 붙였다.
“오늘 애난에게 하나 배워가는군요.”
“빈말은 됐어요. 종사와 혈천궁은 어찌되었지요?”
밀법대종사는 애매에게 혈천궁이 소화산에 머물고 있다고 했으며 약속된 시간이 움직일 것이라 장담했다.
하나 현실은 달랐다.
“이미 화산 아래에서 대기 중입니다. 복천적과 사백 명의 궁도가 산문을 통해 진입하는 순간 서현동 방면으로 은밀하게 종사와 혈천궁이 움직일 겁니다.”
“좋네요. 저도 한 잔 주실래요?”
두 사람은 술잔을 가득 채운 후 허공을 향해 들어올렸다.
“애매의 파멸을 위하여.”
“그 친구의 행보를 응원하며.”
애난이 한 숨을 흘리며 물었다.
“아! 신마의 유산보다 더 탐난다는 그 사람이요?”
흑의인은 고개를 끄덕인 후 여산 쪽을 가리켰다.
“네, 지금 저기로 가는군요.”
애난의 입매가 기이하게 변했다.
슬픈 표정을 한 채로 웃고 있는 게다.
“관음동이군요. 참 잘 됐네요.”
< 27, 붉은 안개가 산을 덮다.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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