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84화 (84/226)

< 34, 미래를 알기에 움직이련다. >

34, 미래를 알기에 움직이련다.

강호는 넓고, 사건은 많다.

이 한 마디로 화산파에서 일어난 혈겁의 사후처리를 이해해야 했다. 화산파 본산이 습격을 당했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예전이었다면 무림맹은 마교의 준동을 우려하면서 긴급회의를 열었을 것이고, 강호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무림대회라도 열었을 터였다.

하나 무림맹은 소속 맹도들을 파견하는 대신 장문의 서찰을 보냈다. 무려 열 장이 넘는 서찰로 맹주의 친필 서신이다. 하지만 회신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 맹 전체가 화산파의 건재함을 반긴다.

- 중추절 무림대전의 중요 안건으로 삼는다.

- 화산파의 재건과 중흥을 위해 돕겠다.

한 마디로 지난 일이니 이제 와서 무림맹이 해줄 것은 없다는 의미였다. 또한 중추절 무림대전은 연례행사가 아니던가. 결국 화산파의 영향력으로 인해 구파에서 쫓아내지는 않겠지만, 진짜 구파로 대우할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광녕화산의 대표인 서화종은 빙긋 웃었다.

“차라리 잘 됐군요.”

그는 장문인의 거처가 아니라 진무궁의 심처에서 자리했다. 한데 상석이 아니라 사각의 탁자 중 한 쪽 면을 차지했을 뿐이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관음화산의 대표, 서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의 배려로 화산이라는 한 지붕 아래 우리가 모였습니다. 하나 외부의 시선은 곱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필요 없는 외인들이 출입하지 않는다는 점은 낙관적입니다.”

다른 두 면 또한 주인을 정했다.

진박노조의 도맥을 이은 진박화산은 태극관의 관주가 맡았다. 무당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태극을 이름으로 쓰는 사람이지만, 이견이 없었다. 심지어 서화종과 서평마저 태극관주가 아니면 진박노조의 도맥을 대표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송대의 진희이는 주자와 더불어 태극의 묘리를 논했던 거인이다. 주자가 주역을 남겼고, 진희이는 진박노조라 불리며 양생장수지도(養生長壽之道)를 설파했다. 진박노조는 화룡진인에게 양생장수지도를 전했는데 그의 제자가 바로 무당의 중시조라 불리는 장삼봉이다. 어쩌면 무당의 절예삼기(絶藝三技) 중 태극류(太極流)는 진박노조에게서 갈라져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야사에 불과하지.”

태극관주는 작은 도관을 운영하면서도 기름으로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넘겼고, 방금 다림질을 한 것처럼 빳빳한 대괘의를 걸쳤다.

“하나 태극은 본 도맥의 근원이자, 전부라 할 수 있소. 음과 양이 섞이고, 충과 허가 어우러지면 마땅히 안정되는 것이 세상의 순리요. 화산연맹은 이 탁자처럼 네 개의 굳건한 다리로 지탱될 터이니 외인의 도움은 필요치 않소.”

서화종은 태극관주가 배꼽까지 기른 검은 수염을 쓰다듬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수염에도 기름을 바르려면 많이 필요하겠어.’

조만간 화산연맹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수뇌부들에게 선물을 돌릴 요량이었다. 이렇게 진박화산에 대한 선물이 해결됐다.

“각상동주께서도 한 말씀 하시지요.”

서평의 배려에 각상동주는 빙긋 웃었다.

그는 화산의 주요 도맥으로 인정받지 못한 소수의 도맥들을 총괄하는 네 번째 대표로 추대됐다. 각상동(覺像洞)의 교리는 만물의 조화를 추구하며 합일을 제안하는 방식이다. 그러니 화산연맹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대표인 셈이다.

다만 그는 무공보다 도학에 심취한 탓에 노군과 비슷한 연배였지만, 훨씬 더 늙어 보였다. 하나 눈빛의 따스함과 많은 주름에서 느껴지는 인자함은 마치 득도한 고승을 대하듯 존경심을 끌어냈다.

“격하면 격하고, 격한 것을 격하게 되었으니 화산의 내일은 지금보다 나을 게요.”

마치 선문답과 같은 한 마디였다.

바로 잡을 격(格)에 부딪쳐 흐를 격(激)을 더하여 사이가 뜰 격(隔)과 날 벽돌 격(墼)을 썼으니 화산의 쇠락이 사실이나, 곧 부딪침과 벌어진 것을 벽돌로 메워 바로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태극관주는 득도한 진인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주먹질에만 일가견이 있었다 그렇기에 각상동주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서평을 바라봤다. 마치 이쯤 되면 알아서 해석을 해줘야 한는 것이 아니냐는 표정이다.

서평은 빙긋 웃으며 말을 보탰다.

“굽지 않은 벽돌로 벌어진 것과 부딪치는 것을 막을 수 없지요. 그러니 이제 화산연맹은 벽돌을 굽듯 내부적으로 화합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닌가요?”

각상동주는 대답 대신 만족스런 미소를 띄웠다.

서평은 말을 덧붙였다.

“원하는 이들에게 화산파에서 처소를 내어주고, 귀한 경전도 아낌없이 나눠보고 있는 형국입니다. 또한 이 순간에도 화산 곳곳에 퍼져 있는 도관들이 모여들고 있으니 위령제를 끝낸 후 화산의 위엄을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서화종은 서평이 말끝을 흐리자, 한 숨을 내쉬었다.

“만매만전의 필자가 함께 해야겠지요.”

다른 세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화검주인 노군이 만매만전을 전한 것이 불과 달포 전이다. 한데 그 짧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수많은 사람이 탈태환골이라고 할 만큼 변화를 이뤘다.

도학의 깨달음, 삶의 전환점, 무공의 상승.

노군의 말처럼 만매만전은 읽는 이에게 무궁한 가르침과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이 정도였다면 단순히 상승비급 정도로만 여겼으리라.

얼마 전 도학자 중 한 명이 평소 교류하던 이에게 만매만전을 보여준 적이 있다. 노군의 말처럼 숨기지 말고, 아낌 없이 전하라는 말을 따른 게다. 한데 제법 식견이 높던 친우는 만매만전을 읽어보고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화산파의 도경 중 몇 가지를 섞은 내용이 아니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단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만매만전은 단순한 비급이 아니게 되었다.

자격이 있는 자가 준비가 되면 무한한 성장의 원동력이 되어준다는 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만매만전을 만든 자가 화산연맹과 함께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으리라.

한데 서화종은 곤란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흐음, 취선관주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서평이 황급히 말을 보탰다.

“아! 절대로 광녕화산이 고인을 숨겨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하나 취선관주의 등장이 아무래도 가장 쉬운 길이다보니 욕심을 내게 된 게지요.”

서화종은 연거푸 한 숨을 내쉰 후 제안을 했다.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오늘은 비도 오지 않고, 선선하니 이렇게 된 김에 함께 가보시지요. 노군동에 가서 노군께 우리의 대화를 전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태극관주는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였다. 하나 각상동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복잡한 일일수록 쉽게 생각하고, 쉬운 길일수록 복잡하게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취선관주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우르르 몰려가서 압박을 하는 건 선인의 할 일이 아닙니다.”

태극관주가 손가락을 튕겼다.

“상선약수!”

아무래도 오랜만에 아는 것이 나와 신이 났나 보다.

서평은 한 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렇습니다.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가지씩 해보지요. 지금 이 순간의 기쁨만 해도 예전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 각상동주의 말씀대로 물처럼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네 사람은 취선관주에 대한 일을 잠시 미뤄두고, 화산의 산적한 업무를 논의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취선관주에 대한 호기심이 끊이지 않았다.

*

“취선관주 있는가!”

망아취자의 외침에 이훤이 사립문을 열고 나섰다.

“그만 좀 하시지요?”

“허허, 술친구를 보기 위해 먼 길을 왔거늘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겐가?”

이훤은 똥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머무는 곳은 본래 망아취자의 처소였고, 그곳에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지면 매화가 숲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매화 숲은 망아취자의 처소이기도 했다.

“경공을 펼치시면 한 걸음에도 올 수 있는 거리잖아요. 주원경을 빼앗긴 것이 그렇게 아까우세요? 그냥 돌려드릴 테니 매일 아침마다 이러시지 좀 말라고요.”

“허허! 멀쩡한 집을 빼앗기고, 술 창고도 빼앗겼지. 이제 빈도에게 남은 건 지붕도 없는 숲이 전부이거늘······.”

“언제는 밤하늘이 이불이고, 매화가 병풍이며, 돌바닥이 요라면서요?”

망아취자는 슬쩍 시선을 피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비가 너무 많이 오더라.”

“그냥 여기서 주무세요.”

“네가 주고 나니까 내 집 같지가 않더라. 나는 숲 속이 편해. 그러니 술이나 가져오너라.”

이훤은 평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 떨어졌습니다. 애초에 술 한 병 남아 있지 않은 주원경이니까 홀라당 넘기신 거지요? 생각해 보면 제 집이 되면 제가 손님을 접대해야 하니 술을 챙겨놓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합니다!”

“흥! 나는 네게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대령했다.”

“그거야 노군 형님한테 시키신 거잖아요.”

“너도 시키렴.”

이훤은 망아취자의 굳게 다물어진 입술을 보며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한 숨을 내쉬었다. 노군에게 심부름을 시킬 수도 없지만, 현재 그는 노군동에 칩거하다시피하며 만매만전에 심취한 상태였다.

“후, 술 사 올 게요.”

있을 땐 몰랐다.

아니 많을 땐 몰랐다.

밤새도록 마셔도 술은 가득했다.

마시는 게 반이고, 버리는 게 반이어도 좋았다.

그래도 주원경은 이름처럼 술이 넘쳐흘렀다.

한데 한 번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니 비탈길을 구르는 수레처럼 멈추는 것이 불가능했다. 온 몸이 주충으로 되어 있는 두 사람이 경쟁하듯 술을 마시니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처럼 어느 순간 바닥이 보였다.

“진짜 사오려고? 나는 지금 당장 마시고 싶은데.”

이훤은 망아취자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노군동의 술까지 다 마셨습니다. 심지어 반쯤 상한 술까지 마셨다고요. 지금 담가놓은 술은 최소한 초겨울까지 못 마셔요.”

망아취자는 겉옷을 걸치고 있는 이훤을 보다가 혀를 찼다.

“쯧, 어쩔 수 없지.”

그러더니 뒷짐을 진 채 마당을 거닐었다. 그리고 나서는 한 곳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파라.”

“네?”

“파라고.”

“설마!”

“그래.”

이훤은 술을 숨겨놓은 망아취자를 탓할 여력도 없이 달려 나갔다. 그리고 양 손에 혈륜을 두른 채 두더지처럼 땅을 파기 시작했다.

“살살! 살살! 네 놈 손이면 철판도 찢겠다. 뚜껑 깨지면 네 몫은 없어!”

망아취자의 일갈에 이훤은 유물이라도 발굴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땅을 헤집었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대통을 끌어올렸다. 뚜껑을 여는 순간 잘 밀봉된 술이 보였고, 그것을 꺼내자 아래에 하나가 더 나타났다.

“오홍!”

이훤은 입맛을 다시며 평상 위에 술병을 늘어놓았다.

네 병이니 두 병씩 나눠 놓았다.

망아취자는 슬그머니 한 병을 자신 쪽으로 끌었다.

“집착은 미망이로되 쥔 것을 놓아야······.”

하나 이훤이 만매만전의 구절을 읊조리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둬야 했다. 이훤은 망아취자로 망아취자를 상대한 후 히죽 웃으며 술병을 기울였다.

“그런데 정말 배우지 않을 생각이냐?”

망아취자는 질세라 술병을 기울이며 물었다.

“무공이요? 괜찮습니다. 만매만전은 화산의 것이잖아요. 제가 함께 만들었다지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던 걸요. 나중에 시간 될 때 볼게요.”

“그거 말고 진짜 말이다.”

신마의 깨달음을 논하는 게다.

망아취자가 만들어낸 만매만전은 그가 오십 년 동안 궁구한 끝에 내놓은 결실이다. 신마의 깨달음 중에서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건 흔쾌히 배제한 후 남은 정수였다. 그러니 화산의 사람들에게는 천하에 비할 수 없는 보물일 것이다.

하나 이훤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매화 숲 위에서 암천군림보를 만들 때 신마의 깨달음을 엿보지 않았던가. 망아취자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걸 모아놓은 곳이 바로 매화 숲인 셈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만매만전을 본다 한들 달라질 것이 없다.

“지금이 마지막이다! 진짜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제안하지 않을 것이야!”

“술 한 병 더 주시면 생각해보고요.”

망아취자는 어느새 이훤 앞에 놓였던 두 개의 술병인 빈 것을 보고 혀를 찼다.

“됐다. 이 놈아!”

술이 아깝다기보다 이훤의 진심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훤에 대하여 한 번 더 감탐을 금치 못했다.

신마의 깨달음을 탐내지 않는 자가 눈앞에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자신을 비롯한 이들이 수십 년 동안 은거할 만큼 신마의 깨달음에 대한 유혹은 엄청났다.

‘대단한 녀석. 존경스러울 정도다.’

이훤은 슬그머니 속내를 꺼냈다.

“그거 말고 이제는 말해주시지요. 그 날 살아남은 여섯 장로에 대해서요.”

이미 무당과 화산, 제갈세가와 산동악가의 존재를 알았다. 다른 두 곳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지금 당장 중요치 않을 터였다. 아직 제갈세가나 산동악가에 대한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하나 그 당시 절명곡에서 벌어진 모든 대화와 행동을 알아야 천룡전의 흔적이나마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섯 장로의 행적을 알아야 제 팔의 존재가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으니까.’

망아취자는 이제 와서 숨길 것이 없다고 여긴 듯 순순히 입을 열었다.

“무당과 화산, 그리고 형산파와 제갈세가가 있었지. 그리고 산동악가도 있었고, 마지막이······.”

이훤은 여섯 장로의 사문을 들은 후 침묵했다.

그가 회귀하기 전 마교는 득세했고, 사파는 요란했으며, 정파는 뒤집혔다. 그리고 망아취자가 거론했던 방파는 각양각색의 이유로 멸문을 피하지 못했다. 오직 마지막 한 곳만이 남아서 천하의 중심으로 우뚝 섰을 뿐이다.

‘빌어먹을! 운명이라는 건가?’

첫 사랑의 실패가 오랜만에 술을 부른다.

이훤은 입맛을 다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사 올 게요.”

< 34, 미래를 알기에 움직이련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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