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일단 소리를 질러라. (2) >
*
종남파는 명문정파다.
언제나 구파에 속했고, 강호의 대소사에 개입했다. 도가와 속가의 중간 입장을 취했지만, 어느 쪽에나 영향력을 발휘했을 정도였다. 종남파 출신이라는 한 마디에 거금을 내놓을 부호들이 줄을 섰고, 교분을 맺기 위한 무인들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하나 섬서성의 주인은 화산파였다.
심지어 화산파가 쇠락한 지금도 세인들은 섬서성을 논할 때 화산파를 먼저 거론했다. 이로 인해 종남파의 문도들은 태생적으로 화산파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한데 당금 강호에서는 어떠한가?
종남파는 구파의 한 축으로 든든히 자리 잡았고, 화산파는 끝 모르게 쇠락한 상태였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외적에게 본산을 허락하는 굴욕까지 맛봤다.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오랜 이웃의 혈사를 반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정도는 될 터였다. 종남파의 힘으로 화산파를 일으킨다면 천하는 섬서성의 주인을 새롭게 정할 것이라 믿었다.
무량패검 장치결과 청관, 소연명은 선봉대였다.
화산파의 현재 상황을 은밀하게 파악한 후 본 파로 돌아가 계획을 세우고자 했다. 한데 기세 좋게 떠났던 그들은 수십 일이 지났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 화산에 입산한 건 확인됐다.
- 화산파는 모른다고 잡아뗀다.
종남파는 이전의 계획을 수정했다.
그 전에는 오랜 이웃이라는 일말의 자비를 남겨뒀다면 이제는 강압적으로 화산파를 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대답? 지금 내게 대답을 원하는 겐가?”
청절검(靑節劍) 소부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청죽(靑竹)을 호신부로 삼았기에 청절검이라 불렸다. 오랜 강호행을 통해 경륜과 식견이 상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방불명된 소연명이 소부의 질녀였다. 그러니 종남파의 입장에서는 화산파를 압박할 수 있는 최적의 주인공인 셈이다.
“장문인, 내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오?”
서황종은 난색을 표했다.
청절검 소부는 종남파의 자랑이라 불리는 칠대검호(七大劍豪) 중 둘 째였다. 종남파의 원로인 진명삼성(眞命三聖)을 제외하면 가장 강하고, 유명했다.
‘하아, 이럴 때 다들 어디에 간 건지······.’
관윤화산의 대표인 서평은 신념이 강하고, 생각이 올곧아 흔들리지 않는다. 진박화산의 대표인 태극관주는 성정이 불 같아서 상대의 윽박에도 주눅들지 않을 터였다. 작은 도맥들의 집합체인 만류화산(萬流華山)의 대표인 각상동주는 현인과 같아서 도의로서 저들을 설득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나 세 명 모두 진무궁을 비운 상태였다.
만매만전의 깨달음은 도학이 깊을수록 영향을 드러냈다.
그렇기에 서평과 각상동주는 자신의 도관으로 돌아가 잠시 깨달음을 정리하는 중이다. 그리고 태극관주는 도관들을 돌아다니며 화산연맹과 함께 할 것을 설득하는 중이다.
‘허허, 벌써부터 그들이 큰 의지가 되었구나.’
서화종은 인덕이 넘치고, 자애로워서 모든 사람과 쉬이 어울렸다. 그러니 평화로운 시기이거나, 화산의 중흥이 계속 됐다면 좋은 장문인이 됐으리라. 하나 화산파가 쇠락하고, 강호가 하수상한 시기에서는 오히려 대가 약한 느낌을 주었다.
“장문인, 지금 웃음이 나오시오?”
소부의 짜증 섞인 외침에 서화종은 표정을 달리했다.
취선관주인 이훤이 등장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편한 마음을 가졌다.
‘아니지. 지금은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취선관에게 더 이상의 짐을 지우면 안 될 것이야.’
화산파를 혈겁에서 구해준 것도 모자라 만매만전이라는 희대의 기서를 전해주기까지 했다.
서화종은 이훤에게 눈짓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청절검. 지금까지는 같은 맹도이며 섬서성의 오랜 이웃으로 예의를 다했소. 한데 장문인이라 칭하면서도 숫제 죄인 취급을 하고 있으니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구려. 화산의 산세는 여산을 지나 종남산까지 이어지는 것을 모르지 않을 터! 그대의 지인이 화산에서 사라졌다고 어찌 진무궁에서 목소리를 높인단 말인가!”
조근 조근하던 목소리가 끝내 외침이 되어 울렸다.
소부는 서화종을 노려봤다.
그도 오늘 일이 억지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장치결이 실종된 건 사실이고, 종남파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소부를 따라온 종남파의 문도들도 그러했다.
스무 명에 달하는 그들은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여차하면 출수를 하겠다는 무언의 압박이다.
그 때 관망하던 자가 나섰다.
무림맹 섬서지부의 지부장은 수염에 벌레라도 붙은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쓸어내렸다.
“장문인! 감정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외다. 종남파의 장로가 사라졌소. 함께 실종된 소연명이 소 장로의 질녀잖소. 그러니 장문인이라도 진정하시오.”
누가 누구 편을 드는 지 모르겠다.
서화종이 헛웃음을 짓는 사이 섬서지부장은 소인배들이 즐겨 쓰는 방법을 사용했다. 한 걸음 슬쩍 물러선 후 화려한 무복을 차려 입은 노인을 가리켰다.
“맹의 외단 순찰단에서 나오신 분입니다.”
노인은 구파 중 한 곳인 화산의 장문인을 대함에도 행동거지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존장의 대우를 받고 싶은 듯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순찰단에서 강서를 책임지고 있는 순이외다. 장문인과는 몇 년 전 인사를 나눈 듯하군요.”
서화종의 입매가 실룩였다.
“그 때와는 영 분위기가 다르시군요.”
몇 년 전 무림맹 순찰단의 강서당주로 임명됐다며 인사를 했던 사이다. 하나 당시에는 화산의 상황을 제대로 몰랐기에 명문으로 대우했다. 한데 선양풍노(扇陽楓老) 순자락은 화산의 실정을 알게 된 이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듯 보였다.
“클클, 강호의 풍진을 마주하다보니 순찰당의 임무를 더욱 뼈에 새겼을 뿐이외다. 그나저나 듣자 하니 종남파의 장로가 사라졌다면 응당 모두가 힘을 모아서 찾아야 하지 않겠소이까. 화산파가 화산을 포기했다면 종남파나 섬서지부가 나서도 상관이 없을 것이오. 반대로 화산파가 화산의 주인임을 자처한다면 응당 수색대를 꾸려 장 장로를 찾아야 하지 않겠소. 아닌 말로 수색대를 꾸릴 여력이 없다면 맹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 믿소이다.”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종남파의 편을 들었다.
서화종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황을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면 수색대를 꾸리는 것이 옳았다. 아이 손이라도 빌려서 실종된 사람부터 찾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수색을 허락하는 순간 저들은 가장 먼저 화산파의 전각을 뒤질 터였다.
그것을 알기에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후 서화종은 어깨에 힘을 빼며 축 늘어진 채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강자존이라.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처럼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주장이었군요.”
소부와 섬서지부장은 미간을 좁혔다.
혼잣말보다 대답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잊고 있었던 이훤에게로 향했다.
이훤은 검지를 내민 채 입술을 오물거렸다.
“서른두 명이네.”
“······.”
“죽고 싶으냐는 물음에 답하지 않았으니 살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종남파의 문도 중 한 명이 검배에 손을 올린 채 다가왔다.
“화산파의 무복을 입지 않은 것으로 보아 외인이겠구나.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미치기라도 한 것이더냐?”
이훤은 종남파의 문도가 어깨를 잡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어깨를 털었다. 그 순간 종남파 문도의 무릎이 반대쪽으로 꺾였다. 문도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순간 종남파의 문도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차차차차차차차창!
요란한 쇳소리 사이로 나직한 한 마디가 들렸다.
“이제 서른한 명이다.”
“놈! 감히 종남파의 문도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성 싶더냐?”
이훤은 소부가 일갈을 내지르는 순간 더욱 큰 소리로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네 놈은 화산에서 더러운 협잡질을 하고도 살아남을 성 싶더냐?”
“뭐, 뭐라?”
소부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마치 소림의 사자후나 아미의 항마음처럼 귀를 파고들어 혼백을 뒤흔드는 일갈이 아닌가.
섬서지부장은 눈치가 빠른 자였다.
이훤의 무위가 심상치 않고, 서화종이 안도하는 모습을 보자 빠르게 머리가 회전했다.
‘저 자의 말에 장문인이 대답한 거로군. 장문인이 의지할 정도라면 은거기인이 분명하다.’
섬서지부장은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무림맹은 중원 곳곳에 지부를 세웠다.
섬서지부장의 위치는 어지간한 방파의 주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듯싶소!”
그 순간 이훤의 손에서 무언가 번뜩이더니 섬서지부장의 귓불을 스쳐갔다. 종남파의 문도임을 증명하는 명패가 진무궁의 기둥에 박혔고, 수많은 파편이 흩날렸다.
‘이게 무슨······.’
섬서지부장은 그제야 귓불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는 사색이 됐다.
이훤은 그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네가 섬서지부장이지. 너는 기다려. 여기 있는 놈들 중에서 네 죄가 가장 무겁다!”
섬서지부와 종남파가 화산파를 추궁하기 위한 자리다.
한데 이훤이 등장하는 순간 추궁의 주체가 바뀌었다.
“사제의 원수를 갚아라!”
종남파 문도들이 가을 철 메뚜기처럼 날뛰며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화산에 혈겁이 일어나 피가 마르지도 않았거늘 안전한 곳에서 칼 싸움이나 하던 것들이 감히 원수를 논해?”
이훤의 두 눈에서 귀화가 일렁였다.
“매화의 이름으로 용납하지 않겠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여덟 개로 나뉘더니 사방에서 달려드는 종남파의 문도들을 닥치는 대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퍼퍼퍼퍼퍼퍼퍽!
소부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일 사이에 종남파에서 데리고 온 문도들이 모두 쓰러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오른쪽 무릎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인 상태였다.
“다시 묻겠다.”
이제 이훤의 질문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화산에 올라 주제도 모른 채 협잡질을 자행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으렷다?”
그때 선양풍노 순자락이 철선을 펼친 채 흔들었다.
촤라라라락!
철부채의 살이 암기처럼 튕겨나가 이훤을 노렸다.
“감히 무림맹의 순찰당을 앞에 두고 패악을 부리다니! 네 놈은 사마외도가 분명하겠구나!”
일단 누명을 씌운 후 무림맹의 이름으로 압박을 하면 모든 것이 통한다고 여겼나 보다.
따다다다당!
혈륜을 휘감은 주먹은 내력이 담긴 철부채살을 모조리 튕겨냈다. 그리고 순자락이 후속 공격을 이어가려는 순간 붉은 안개가 좌우에서 짓쳐들더니 아래턱에서 뭉쳐들었다. 그리고 순자락은 어느새 멱살을 잡힌 채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끄으으.”
멱살을 잡히는 순간 마혈을 점혈당한 것처럼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훤은 장문인보다 나이가 많은 순자락을 아랫사람처럼 대했다. 코가 닿을 만큼 지근거리로 잡아당긴 후 입꼬리를 올렸다.
“너도 부채를 쓰네. 너, 위태교와 무슨 사이냐?”
순자락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탈명선협 위태교는 무림맹 외단의 여섯 부단주 중 한 명이다. 게다가 얼마 전 산서성의 개미굴을 토벌하는 공을 세워서 실세가 된 중진이었다.
이훤은 혀를 찼다.
“쯧, 아니지. 네가 높으냐? 위태교가 높으냐?”
“다, 당연히 부단주가 높다.”
“그럼 너는 맞아도 되겠다.”
“그, 그게 무슨 논리······.”
하나 순자락은 아들 뻘인 이훤에게 턱을 얻어맞고 눈이 풀린 채 혼절해야 했다. 애초에 내력을 금제당한 상태에서 육체적인 충격을 받았으니 앞으로 노환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장문인. 장문인! 보고만 있을 셈이오?”
섬서지부장은 순찰단의 강서당주가 얻어맞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나 서화종은 오히려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파는 취선관주께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었소이다. 본파의 큰 은인이 일을 행하시는데 돕지는 못할망정 방해할 수는 없지 않겠소.”
“맹에서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외다!”
이훤은 순자락을 내던지고, 섬서지부장을 향해 걸었다.
성큼성큼 내딛는 모습마다 빈틈이 보였다.
하나 섬서지부장도 소부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너! 천룡전이냐?”
섬서지부장은 영문 모를 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소리요?”
“천룡전도 아니면서 화산에 외적이 들이치는 걸 방관한 이유가 무엇이지?”
“그건 또 무슨······.”
쾅!
이훤이 발을 구르는 순간 진무궁 내부의 청석이 가루가 되었다.
“이미 비선각의 부각주인 종초홍을 통해 전달됐을 것이다. 역탑지대인 개미굴은 의문의 세력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기 위해 만들어 냈으며 무당파가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이야. 하여 내가 직접 매화검주인 노군에게 위험을 알리고, 경고했다. 그래서 그가 너와 대비책을 논의하려 한 것이야. 한데 네가 어떻게 했지?”
섬서지부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대비책을 논의하자는 말에 거절부터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매화검주를 섬서지부로 불러들였다. 한데 공교롭게도 그 사이 화산파가 멸문할 뻔했다.
“그, 그건······.”
단순히 자존심 싸움이며 화산파를 욕보이기 위함이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이훤이 시뻘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너는 화산의 적인가?”
< 35, 일단 소리를 질러라. (2) > 끝
ⓒ 김태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