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15화 (115/226)

< 48, 태산(泰山)의 절대자. >

48, 태산(泰山)의 절대자.

산동악가의 가주는 일선경천(一線驚天)라는 별호로 유명했다. 창을 내지르는 순간 얇은 선이 번뜩이고, 그로 인해 하늘이 놀란다는 의미였다. 한 마디로 창에 대한 성취가 천하제일임을 자부했다. 그러니 어지간한 소식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무림맹 산동지부와 산동의 중소방파 서른 곳이 모였습니다.”

일선경천 악오춘은 칠순을 넘긴 노인으로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반 계단 아래에는 소가주 악운이 표정을 굳힌 채 침묵했다.

총관이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황보세가주와 신공부주가 합류했습니다. 놈들이 황보태웅과 공소의 행방불명을 악 소저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중소방파들은 사정도 모르면서 부화뇌동하고 있고요.”

악오춘이 눈을 뜨는 순간 칠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형형한 눈빛이 번뜩였다.

“설아는?”

“현재 행방이 묘연합니다.”

총관의 말에 악오춘의 입매가 실룩였고, 소가주인 악운이 말을 받았다.

“설아를 찾아야합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아가씨의 안위가 가장 중요함을 모르지 않습니다.

소가주와 총관의 얼굴에는 애틋함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악설은 악오춘이 오십을 넘긴 후 낳은 늦둥이였다. 소가주인 악운과 남매지간이지만, 나이 차가 이십 년에 이르렀다. 그러니 산동악가 내에서 악설의 위치란 단순히 직계가 아니라 상징과 같았다. 그녀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동악가가 오대세가에 속했으니 보물처럼 애지중지하며 가솔들이 키워온 셈이다.

악운이 표정을 굳혔다.

“가솔들을 바깥으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예비 통로를 활용한다면 용휘대, 오십 명 정도는 내보낼 수 있습니다.”

용휘대(龍揮隊)는 세가의 외단 오대 중 세 번 째로 강한 조직이다. 단창을 사용하는 무인들로 진형보다는 독립적으로 싸우는데 능했다. 그리고 경신술에 조예가 깊어 평지보다 산이나 좁은 곳에서 싸울 때 위력을 보였다.

“보내세요.”

총관은 고개를 끄덕인 후 기다란 명패에 일필휘지로 명령을 적었다. 기다렸던 수하가 명패를 받아들고는 빠르게 내달렸다. 소식을 전하는 가솔임에도 경공의 성취가 범상치 않았다.

“아버님, 설아부터 찾아야 합니다.”

악오춘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수십 년 동안 벽력창 악재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무인이다. 이미 초절정은 오래 전에 이르렀고, 그 다음도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하나 늘그막에 얻은 딸에 대한 애착만은 떨쳐낼 수 없었다.

“무림맹은 무대응으로 일관하게.”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장 오랜 세월 동안 가장 가까이서 산동악가의 발전을 지켜봤다. 그렇기에 산동악가에 대한 신뢰도는 무한할 정도였다. 한데 그런 그조차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상대가 존재했다.

“가주, 무림맹의 극양도군이 빈객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맹 서열 삼십 위 근처의 무인이라면 오대세가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다.

“천풍삼군과 독린왕이야 제쳐두더라도 남궁세가의 창무검제만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만약 월담이라도 한다면 큰 일이 일어날 겁니다.”

“그 누구라도 허락 없이 본가의 담을 넘는다면······.”

악오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형형하던 정광이 좁은 눈매 사이를 비집고 번뜩이는 순간 불똥이 튀었다. 마치 뇌기(雷氣)가 육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신위였다.

“살려 보내지 않는다.”

총관은 고개를 조아리며 손을 모았다.

“하면 저는 아가씨의 신병을 확보하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악운은 자신의 딸아이와 비슷한 나이의 여동생을 떠올리며 한 숨을 흘렸다.

“하아, 설아에게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

“들어가 봐.”

이훤의 말에 악설은 눈을 끔뻑였다.

“네?”

“여긴 모두 벽력창 악재가 만들었잖아. 그러면 산동악가의 핏줄인 너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 리 없지.”

“고작 그런 이유로 여기를 지나가라고요?”

악설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하나 이훤은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시험해볼 가치가 있잖아. 혹시 알아? 네가 지나가는 순간 알아서 진법이 열릴 수도 있어. 피에 반응하거나, 심법의 영향일 수도 있지.”

“그래도······.”

“언제까지 공짜 밥만 먹을 수는 없잖아.”

악설은 외나무다리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내딛었다.

일 장 남짓한 넓이의 좁은 계곡이다.

그래서인지 아래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더욱 서늘했다.

하나 그녀가 건너갈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진짜 알아보는 건가?”

탈마가 헛웃음을 지었다.

색마는 지금껏 듣도 보도 못했던 기사에 모든 정보를 기억하려는 듯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예영영은 애걸했다.

“정말 도와주지 않으실 건가요? 벌써 두 명이 죽었어요. 이 대협이라면 손쉽게 도와주실 수 있잖아요!”

이훤은 자신의 가슴팍에 닿을 것처럼 접근한 예영영을 내려다봤다.

“손쉽게? 도움? 이 세상에는 말이야. 저것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아무 것도 아닌 위협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해. 한데 지금껏 호의호식하면서 수련까지 게을리 한 놈들을 왜 챙겨줘야 하지? 내가 네게 관심을 보인 건 딱 하나, 빈자리를 채워야 할 것 같은 의무감 때문이었어. 딱히 전마가 아니어도 돼. 비마, 혼마, 장마, 창마, 도마, 뭐가 됐든 아무나 데려다가 이름을 붙여놔도 상관없다고. 왜 그런지 알아?”

예영영은 이훤이 분노하며 쏟아내는 언어의 홍수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대괴마보다는 육대괴마의 어감이 좋아서야. 그러니까 건방지게 요구하지 말고, 알아서 살아.”

무슨 말이라도 매섭게 대꾸하고 싶었다.

하나 뒤이은 이훤의 말에는 말문이 막혔다.

“최소한 나는 너희들을 미끼로 삼지는 않잖아. 약자를 미끼로 쓰는 건 정말 개 같은 짓거리거든.”

강호의 명문정파나 거대표국과 같은 곳이라면 한 번쯤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버렸던 경험이 있다. 상단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작금의 상황에서는 이훤이 자신과 후기지수를 미끼로 쓰지 않음에 감사해야 할 상황이었다.

예영영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좋아요! 거래해요. 전마가 될 게요.”

“······.”

“시켜주세요. 전마 하고 싶어요. 열심히 할 게요.”

이훤은 그제야 탈마를 향해 손짓했다.

“돈 줘.”

탈마는 이훤과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전표를 건넸다.

“이십사만오천 냥이야. 잔돈은 넣어둬.”

예영영은 엄청난 거금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훤은 그런 예영영에게 목표를 정해줬다.

“중추절까지 오십만 냥으로 불려놔.”

아무리 돈이 돈을 번다지만 벌써 여름이다.

중추줄까지 두 배로 불리는 건 불가능했다.

“잔돈 필요 없어요! 그리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 네 돈으로 메워 놔. 뭐가 됐든 오십만 냥만 되면 돼. 그 대신 우리는 하나다.”

이훤의 진득한 웃음에 예영영은 미간을 좁혔다.

살기 위한 거래란 언제나 손해일 수밖에 없다.

그녀는 이 와중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가 아플 만큼 생각을 했다. 이훤이 돌아서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러니 그가 움직이기 전에 손해를 메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대신 저들도 챙겨주세요.”

이훤은 예영영이 후기지수들을 가리키자, 입꼬리를 올렸다.

“왜?”

“제 돈 줄입니다. 기왕이면 이런 모양새로······.”

예영영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훤은 그녀의 제안을 듣고 후기지수들을 모았다.

“지금부터 내 곁에 있어라.”

후기지수들은 그 짧은 사이 거지 행색을 했다.

사방이 함정이고, 기관이었다. 화살과 죽창이 끊이지 않았고, 독무마저 땅 속에서 쉼 없이 솟구쳤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 용했고, 정상까지 갈 수 없다는 패배감에 젖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니 그들은 절이라도 할 기세였다.

“감사합니다! 대협.”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보고 살았던 이들에게 태산은 지옥과도 같았다.

한데 이훤이 손을 슬쩍 내밀며 말을 덧붙였다.

“나한테 고마워할 일이 아니야. 예 소저가 너희들을 거둬주기로 했다.”

후기지수들은 감사의 대상을 바꿨다.

“그런데 말로만 그러는 건 아니지?”

이훤의 물음에 후기지수들은 눈을 끔뻑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태산은 본래 태산부군의 딸인 벽하원군의 거처가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옥황묘로 가고 있으니 이 기회에 모임을 만들자! 모임 이름은 당연히 옥황회겠지? 회주는 누가 좋을까?”

후기지수들은 바보가 아니다.

일제히 예영영을 추천했다.

“그래, 좋아. 너희들이 염치가 있구나. 예 소저를 원군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너희들 모두 소속될 거지?”

“당연합니다!”

이훤은 후기지수들의 수결을 받은 후 목소리를 깔았다.

“옥황회의 규칙은 딱 하나다. 회주가 너희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닌다. 어때?”

“그건······.”

손가락을 튕겼다.

손톱만한 돌이 나무에 박히는 순간 허공에서 십여 개의 창이 내리꽂힌다. 후기지수들은 코앞에서 내리꽂힌 창을 보고 대경실색하여 수락했다.

“하겠습니다. 모든 걸 맡길게요.”

“예 소저, 아니 원군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이훤의 눈가에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좋아! 나중에 다른 말을 하면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조금 전에 했던 이야기 들었지? 이제 취마와 전마는 하나다. 그러니 전마에게 손해를 끼친다면 내 술병을 걷어차는 것과 마찬가지야. 알겠어?”

“아닙니다! 사내가 어찌 일구이언을 하겠습니까.”

“예 소저와 함께 산동강호의 중흥을 위해······.”

예영영은 후기지수들 모르게 눈인사를 했다.

이훤은 그녀를 지나치며 웃었다.

“별호는 선물이다. 머리 좋은 걸 보니 충분히 두 배 이상 불릴 수 있겠네.”

예영영은 이훤의 뒷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단순히 술을 좋아하고, 강한 무공을 지녔다고만 생각했는데······.’

어째서 시험을 당한 듯한 기분일까.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시험에 통과한 듯한 찜찜함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색마의 외침이 들려왔다.

“형님! 저러다 악 소저가 죽겠어요.”

예영영은 뒤늦게 다리 건너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십여 명의 복면인들이 합격진을 펼치며 악설을 공격하고 있었다. 탈마는 도와주기는커녕 다리만 지키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이훤의 시큰둥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절명곡의 생존자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전한 무위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어수룩할 리가 없지.”

조금의 다급함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즐기는 한 마디에 예영영마저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그리고 악설은 이훤의 말처럼 힘겨운 상황을 넘기고, 서서히 공세를 펼쳤다.

푹!

처음 한 명을 죽이는 것이 어려웠다.

하나 합격진에 구멍이 생기는 순간 그녀의 창은 유성처럼 복면인들의 몸뚱이를 헤집었다.

“다, 당신!”

악설은 곱게 빗어 넘겼던 머리카락을 산발한 채 이훤을 보며 외쳤다. 하나 이훤은 악설의 외침을 귓등으로 흘린 채 다리를 건드리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이 다리에는 아무 기관도 없는 것 같아.”

예영영은 한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이훤은 기관이 없는 것만 알았던 것이 아니라 계곡 건너에 적이 매복한 것도 알아차린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짧은 시간 악설과 자신을 동시에 시험한 것이 분명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한데 도대체 뭘 하고 살아온 거야?’

이훤은 싱긋 웃으며 계곡 건너를 가리켰다.

“옥황회! 가자!

예영영은 산동성을 아우를 수 있는 사조직을 얻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한평생 남을 조종하며 살아왔거늘 어느새 꼭두각시가 된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전마라며? 내 돈 잘 불려줘.”

탈마(奪魔)였고, 찜찜함은 배가됐다.

“흥! 당신이 막내요. 하지만 막내라고 해서 애교를 부리거나,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용납하지 않을 거야.”

색마(色魔)였고, 어처구니없는 경고였다.

‘이렇게 된 이상 산동성이 아니라 중원 전체의 금력을 내가 쥐어야겠어!’

전마(錢魔)의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결의였다.

“열심히 싸움을 지켜본 내게 상을 줘야겠어. 제일 비싼 술 한 병 다오!”

그리고 대형이어야 할 취마(醉魔)의 주정뱅이 같은 외침이었다.

“술 마실 때에는 건드리지 말아야지!”

이훤이 손바닥을 휘두르는 순간 허벅지 굵기의 나무가 산산조각 나며 전방으로 쇄도했다.

퍼퍼퍼퍼퍼퍼퍼퍽!

수백 개의 나뭇조각이 복면인들의 육신을 헤집었다.

그리고 조금 더 걷는 순간 마침내 벽하원령칠채대진(碧霞元靈七彩大陳)의 마지막 진법이 나타났다. 뇌기가 일렁이듯 안개 속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가득했다. 호풍환우라도 일으킬 것처럼 서늘한 기세에 절로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 이훤은 다른 의미로 거친 호흡을 흘렸다.

진법의 입구에는 소마와 꼭 닮은 얼굴을 한 청의인의 팔다리가 잘린 채 널브러져 있었다.

“하아, 이 영감탱이가 지금 나 도발하는 거지?”

< 48, 태산(泰山)의 절대자.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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