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천룡(天龍). (2) >
태극관주의 말처럼 사파나 마도에서 온 서찰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찰을 보낸 곳과 서찰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파급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진위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서평이 서찰을 내밀고 물었다.
서찰에는 가벼운 덕담을 시작으로 화산연맹의 발족식에 참석하겠다는 내용이 적혔다. 대부분의 서찰처럼 평범한 내용이었지만, 마지막에 찍힌 서명과 직인이 평범하지 않았다.
- 주산군도(舟山群島) 불정(佛頂)
절강성 동쪽 바다인 동해에는 마치 작은 쪽배가 수없이 늘어진 듯한 다도해가 존재했다. 그곳을 가리켜 주산군도라 불렀다. 주산군도의 중심부에는 불문의 성지 중 한 곳인 보타암이 자리하여 더더욱 위명을 자랑했다. 하나 단지 그 뿐이었다면 연맹의 수뇌부가 놀랄 이유가 없다.
바로 ‘불정’이라는 두 글자였다.
여중제일인이자, 주산군도의 주인.
그리고 당대 검후(劍后)였다.
그런 불정신니(佛頂神尼)가 삼십 년의 은거를 끝내고 연맹의 발족식을 축하하러 오겠다는 것이다.
신니는 큰 덕과 깨달음을 얻은 비구니에게만 허용되는 칭호였다. 아미파의 장문인조차 신니가 아니라 사태라 불렸으니 불정신니의 이름값은 무림맹주나 소림의 장문인과 비견될 만했다.
하물며 그녀의 나이가 무려 백여 세에 이르렀다.
그러니 낙안봉에 은거한 망아취자와 같은 배분의 노강호였다. 삼십 년 전 혈교의 준동을 막아낼 때 등장한 이후 은거했던 그녀의 등장에 수뇌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허허.”
만류종의 각상동주는 구도에 심취하여 수뇌부 중에서도 가장 수양이 깊다. 그런 그조차 말을 잇지 못한 채 헛웃음만 흘렸다.
“따로 사람을 정해서 불정신니를 보필해야겠군요.”
“그분이라면 그렇게 해야지요.”
연맹주인 서평은 장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벽을 빼곡하게 채워 넣은 참석자 명단을 바라봤다.
“취선관주에게 정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와 그가 만든 만매만전으로 인해 연맹의 앞날은 창창하군요.”
수뇌부는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하나 이훤의 천명으로 인한 여파는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주산군도와 더불어 오대금지라 불린 사자림에서 참석하겠다는 서찰을 보냈다. 그리고 무림맹은 이훤의 억지를 들어준 것도 모자라 총단주가 참석을 알려왔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마지막 참석자는 빙궁이었다.
수뇌부의 입가에 웃음꽃이 피는 건 당연했다.
“유례가 없을 만큼 성대한 발족식을 열자꾸나!”
*
이훤의 일행은 배를 탔다.
장강을 통해 호북성에 이른 후 북상하면 곧장 화산이다.
“괜찮아요?”
탈마는 마음의 정리를 한 듯 말을 높였다.
종초홍은 팔다리에 부목을 대고 있었지만, 비틀거리면서도 선미(船尾)로 다가왔다.
“아프지. 술까지 먹었더니 더 아파.”
“상처가 곯으면 평생 가요.”
탈마의 말에 종초홍은 입꼬리를 올렸다.
“평생 갈 수 있게 된 거지. 영락없이 죽을 줄 알았거늘 이렇게 살아 있을지 어떻게 알았겠어?”
“그러고 보면 종 형은 무당파 출신인데 천문진인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겁니까?”
종초홍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나는 무당의 무학으로 최고가 될 거야. 천문 사숙조께서 신마의 심득을 얻으셨다고 하지만, 그건 신외지물과 같아. 나는 아직 무당의 무학도 제대로 파고들지 못했는데 다른 걸 욕심내는 건 어불성설이지.”
탈마는 그런 당신의 몸속에 이미 악재의 심득이 새겨져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하나 종초홍을 놀리는 대신 탄성을 흘렸다.
“무공에 대한 욕망까지 누를 수 있게 만들어주다니. 사문이라는 건 정말 대단하네요.”
“부러우면 입문할래?”
“취선관 이인자가 접니다. 대형한테 허락부터 받으세요.”
종초홍은 양 손을 들어 농담임을 밝혔다.
“해본 소리야. 그나저나 형님은 강호에 폭탄을 던지셨어. 만매만전에 이어 화산연맹까지. 고금을 통틀어 유례가 없을 만큼 파격적이지.”
종초홍의 우려 섞인 말에 탈마는 히죽 웃었다.
“무공을 널리 알리고, 떨어져 있던 이들을 모으고. 이렇게만 보면 좋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만매만전은 보는 이의 수양에 따라 깨달음이 전해지니까. 하나 세상에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걸 듣지 않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이쪽 사람들은 유독 그렇고.”
“그러니 위군자라는 소리를 듣지요.”
“변명하기도 뭐한 말이로구나.”
탈마는 더 이상 종초홍을 도발하지 않았다.
정파인이라고 해서 모두 위선자는 아닐 터였다.
하나 사마외도 역시 모두 구제불능의 악인은 아니지 않던가.
“일전에 제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이 그러더군요. 만매만전을 깨우친 후에야 세상에는 수많은 강호가 있음을 알게 됐다고요.”
“호오. 멋진 말이로구나.”
“각유강호라고 하더군요. 만매만전 5장 7절에 나오는 말입니다. 공부 좀 하세요.”
“잘난 척은.”
그때 이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8절이다.”
“7절인데요.”
탈마의 확신 가득한 대꾸에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소리야? 내가 만든 비급인데!”
하나 만매만전을 펼쳐서 확인해본 바 탈마가 맞았다.
[형님이 만들었다고 알리려면 좀 읽으세요.]
[어차피 다 알아.]
[남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자기가 만들어놓고 설명도 못하면 치매인 줄 알아요.]
이훤은 결국 만매만전을 받아서 챙겼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하루만 더 가면 의창이네. 둘이는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냐?”
“탈마가 제가 묻더군요. 어째서 천문사숙조의 심득을 익히지 않았냐고요. 그래서 제가······.”
종초홍은 말끝을 흐렸다.
이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맙소사!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애초에 널 찾아 온 목적이 있었어!”
탈마 또한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아! 그러게요.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지?”
본래 두 사람이 갑작스럽게 강호에 출도한 이유는 종초홍에게 천문진인의 죽음을 묻기 위함이었다. 한데 중경에 도착하자마자 종초홍의 행방불명을 마주하다보니 까맣게 잊었던 게다.
“천문진인께서는 정말 귀천하셨나?”
종초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시신을 확인했나?”
이훤의 연이은 질문에 종초홍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무림맹의 정보를 관장하는 비선각의 부각주지만, 사문의 일까지 모두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흐음, 저도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한데 그걸 왜 궁금해 하시는 겁니까?”
세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훤은 절명곡의 생존자들에 대한 후일담을 전했다.
악재가 반노환동하면서 악마로 이름을 바꿨다는 이야기를 빼면 모조리 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만큼 천문진인에 대한 의문점이 가득했다.
“천문진인은 은거 했잖아. 그렇다면 무당의 문도들도 쉬이 접할 수 없었을 거야. 한데 그가 죽은 걸 어찌 알았고, 무엇보다 무암자는 천문진인의 비급을 어떻게 얻었지? 모든 게 너무 절묘하잖아. 딸은 죽을 병에 걸렸고, 개미굴에 해약이 있다는 걸 누가 말해준 건데?”
종초홍은 침음을 흘렸다.
표정으로 보아 무언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만 사문의 일인지라 쉬이 발설하기 어려웠나 보다.
이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리고 무당과 무림맹이 개미굴을 덮친 것도 너무 절묘했지. 마치 무암자가 떠나자마자 쫓아온 것처럼 말이야.”
종초홍은 배를 움켜쥐었다.
“아! 배가······.”
농담은 통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좌우를 살핀 후 입을 열었다.
“비사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건 알려지면 안 됩니다. 형님이 벽력창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한 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뭘 숨겼다는 건데?”
이훤의 반문에 종초홍은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지요. 하나 오대세가에 처음으로 가입한 산동악가였습니다. 비선각의 주요 관심 대상이었지요. 벽력창이 신마의 심득을 얻었다는 건 몰랐지만, 그의 성정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순순히 죽었을 리 없다는 것이 비선각의 판단입니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
종초홍의 예상처럼 악재는 이훤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살고자 했다. 결국 죽음을 비껴갈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산동악가를 살리기 위해 새로이 정립한 구궁벽력공을 전하고 있지 않던가.
“좋아. 비밀은 지킬게.”
종초홍은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후우. 저는 무암사숙에게 딸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백소라고 하지요. 피부가 눈같이 희고, 특히 손은 핏줄이 고스란히 드러날 만큼 곱습니다. 하여 무암사숙은 백소라고 이름 붙였지요.”
이훤은 눈을 끔뻑였다.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은 묘사가 아닌가.
‘아니겠지. 아닐 거야. 강호의 여협 중에 손이 하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어?’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탈마가 끼어들었다.
“무당은 혼인이 금지인가요?”
“응, 도적에 오른 이상 혼인을 할 수 없어.”
“그래서 종 형이 도적에 오르지 않았군.”
“야! 그건 아니야. 크흠! 어쨌든 속가제자 중에 가장 발이 넓은 사람이 저였습니다. 하여 무암사숙께서 제게 신병을 맡기셨지요. 한데 일곱 살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달리 고운 피부를 어여뻐 했지만, 그게 절맥의 전조였지요.”
“하아.”
절맥은 뜻대로 기경팔맥 중 한 곳이 끊어져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흔히 알려진 구음절맥은 아홉 곳의 절맥이 끊어짐을 의미하니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백소라는 여아는 오음 절맥인지라 무공만 익히지 않는다면 생활에 지장은 없었으리라.
“한데 그 아이가 무공을 익혔지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다는군요. 무암사숙은 그 아이를 혼냈고, 어느 날 무당산 어딘가로 가출을 했습니다.”
“설마 그 아이를 거둔 게 천문진인이야?”
종초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마 천문진인께서 귀천하신 후 백소에게 비급이 전해졌을 것이고, 무암자는 파문을 각오하고 비급과 치료제를 바꾸려고 한 듯합니다. 그리고 무암자가 몰래 비급을 가지고 떠났을 때 백소가 제게 연통을 했지요. 아버지를 말려달라고요.”
이제야 전후사정을 알 것 같았다.
이훤은 배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말했다.
“흐음! 이런 배는 얼마나 할까?”
“수백 냥은 하지 않을까요?”
“사자. 두 배 준다고 해. 싫다고 하면 달라는 대로 줘.”
탈마는 이훤의 뜬금없는 말에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으로 갈 거죠?”
종초홍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고요? 무당을 왜 가? 화산에 간다면서요.”
이훤은 종초홍의 반발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러니 배를 사서 무창까지 쉬지 않고 가야겠어. 그리고 무당산에서 백소라는 아이를 만난다!”
“형님, 무당산이 무슨 옆집도 아니고, 갑자기 그게 말이나 됩니까?”
탈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종 형, 어차피 연맹의 발족식까지는 한 달이나 남았어요. 무당산에 들렀다가 소림까지 한 바퀴 돌고 가도 충분한 시간이라고요.”
종초홍은 표정을 구겼다.
“아니! 이 미친 사람들아. 무당산에 오르면 무당파가 가만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마음대로 오고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고요.”
하나 이훤과 탈마는 당당했다.
종초홍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혀를 찼다.
절대지경을 앞둔 고수와 장차 천하제일대도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자들이다.
‘쳇, 오고갈 수도 있겠군.’
*
무창에 도착한 후에는 일사천리로 나아갔다.
이훤은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마다한 채 무당산에 올랐다. 회귀 전에도 몇 번 지나친 무당산이었지만, 회귀 후 마주한 산세는 천양지차였다. 그야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다행히 종초홍이 길안내를 책임졌다.
이훤이 초도각을 통해 화산을 오갔듯 종초홍 역시 샛길을 훤히 꾀고 있었다. 해검지와 연혼동을 지나 무당파가 위치한 자소봉의 뒤쪽으로 향했다.
“여깁니다.”
종초홍은 동굴의 입구에 적힌 풍천동(風天洞)이라는 세 글자를 보며 회한 가득한 눈빛을 내비쳤다.
“남암의 천장단애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대황애와 천연동이지요. 반면 풍천동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본파의 조사들이 선연을 이어갔다는······. 형님!”
이훤은 종초홍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채 동굴로 들어섰다.
“나는 화산의 지명도 잘 모른다.”
종초홍은 입술을 삐죽였다.
‘진짜 본파의 문도들과 마주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그는 황급히 이훤을 뒤따랐다.
한데 이훤은 동굴 너머의 분지에 들어서자마자 우뚝 선 것이 아닌가.
“형님, 이제야 풍천동의 아름다운 풍광을······.”
종초홍은 이번에도 말끝을 흐려야 했다.
마지막에 왔을 때만 해도 풍천동은 바람 소리만 가득할 뿐 고아한 정경으로 인해 평온함이 가득하지 않았던가.
한데 지금은 피 냄새가 낭자했다.
그는 이훤의 곁에 서고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당파의 문도들이 백의를 입은 여인을 둘러싼 채 연신 절초를 펼치고 있지 않은가. 한데 여인은 절묘한 경공을 펼치면서도 공격을 자제했다. 그로 인해 백의는 점점 피로 물들었다.
“천문사숙이 네 년의 암수에 돌아가셨다!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요녀를 살려두지 마라!”
< 58, 천룡(天龍).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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