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취선관주는 어떤 놈인가? >
60, 취선관주는 어떤 놈인가?
화산연맹은 발족식에 앞서 배분을 일원화했다.
어차피 계보가 명확했기에 조사부터 숫자를 헤아리면 어려울 것이 없다. 하여 연맹주인 관윤종의 서평을 일대제자로 했고, 만류종의 각상동주를 원로로 대우했다. 다행히 광녕종의 서화종과 진박종의 태극관주는 배분이 같았다. 하여 나이가 어린 서평은 서화종과 태극관주를 사형이라 칭했고, 두 사람은 연맹주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그 아래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본래 화산파라 불리웠던 광녕종을 제외하면 각 종파의 제자들은 소수였다. 가장 숫자가 많은 태극관만 해도 서른 명을 넘지 못했다.
하여 유리검 유건평은 여전히 이대제자였다.
“연맹의 이대제자이자, 보군당을 맡게 된 유건평입니다. 하여 제가 여러 귀빈께 발족식의 식순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보군당(普群堂)은 새롭게 편제된 연맹의 바깥 살림을 도맡아하는 곳이다. 하여 유건평은 연회 도중 잠깐의 시간을 빌려 귀빈들에게 발족식의 순서를 알리게 되었다.
“중추절 하루 전에 축전제를 개최하여 귀빈들과 멀리 찾아오신 동도들을 위해 큰 연회를 열 계획입니다. 만화연이라 이름 지었으니 부족하다 여기지 마시고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십시오. 그리고 중추절 당일 향후 연맹이 자리 잡게 될 선인봉 정상의 봉선대에서 연맹 발족의 의의를 하늘에 고하여, 만천하에 연맹 탄생을 알리고자 합니다. 중추절 다음 날에는 작은 대회와 여러 행사를 기획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째는······.”
유건평은 잠시 긴장한 듯했으나, 이훤을 확인하고는 점차 목소리의 평정심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한 때 제자로 삼으려 했던 절대고수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던 듯싶다.
이훤은 유건평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주변을 살폈다.
단상과 가까운 탁자일수록 귀빈석이다.
하여 북해빙궁의 새로운 궁주인 북리혜는 무림맹과 구파오가의 사절단 사이에 앉아 있었다.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에 비해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앞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탈마는 이훤의 뒤에 앉아 있다가 귀엣말을 건넸다.
“궁주를 봐요.”
“보고 있어. 아무래도 새외 세력의 수장이니 구파오가와 웃으며 어울리는 건 쉽지 않을 거야.”
“그것 때문이 아닐 텐데. 형님이 이름을 잊어버려서 화가 난 것 같은데요?”
이훤은 코웃음을 쳤다.
“훗, 나랑 손을 잡았냐? 입맞춤을 했냐? 각자 원하던 거 얻었고, 웃으면서 안녕했으면 된 거지. 거대방파의 수장을 스무 살에 차지한 여자야. 그런 일로 일희일비하면서 이처럼 중요한 자리를 놓칠 리 없어.”
“그거 알아요?”
“또 뭐?”
“형님은 불리하면 혀가 길어져요.”
탈마의 한 마디에 이훤은 잠시 멈칫했다.
“검후께서는 어디 가셨냐?”
“그리고 말도 잘 돌리고요. 어쨌든 그 흉악한 검후께서는 하산하셔서 술을 드시고 계실 겁니다. 형님이 낙안봉으로 모시고 갈 때까지는 발족식에 관여하고 싶지 않으시데요.”
이훤은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회음현에서 한껏 풍류를 즐기다가 검후에게 잡혀서 고생할 이름 모를 후기지수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뭐였지?”
탈마는 이훤의 갑작스런 물음에 나직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해가 아니라 혜요. 슬기로울 혜(慧). 북리혜.”
역시 부처와 제자가 그러했듯 염화시중의 경지에 이른 동생이 아니던가. 이훤은 뿌듯한 마음으로 탈마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야, 내 동생. 문맹 탈출도 하고, 멋있네.”
“후훗! 홍천기공 이후에 글공부 좀 했지요. 확실히 하기를 잘했어요. 지금까지 상자에 적힌 글귀를 읽지 못해서 손해를 본 게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이훤은 탈마의 자랑을 귓등으로 흘리며 상석을 바라봤다.
이제 연맹주 서평은 제법 대표의 자격을 내비쳤다.
만매만전으로 인해 두어 단계 성장했다고 하더니 화산파가 위기에 처했을 때와는 다른 사람처럼 여겨졌다. 진중함을 토대로, 올곧음을 굳혔으니 세월이 흐르면 자애와 배려가 더해져 훌륭한 맹주가 될 것이다.
태극관주는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쉴 새 없이 힐끔거리는 것으로 보아 몇날며칠 동안 만매만전을 토론하고, 쉴 새 없이 비무를 하고 싶어서 엉덩이가 근질거리는 듯했다.
반면 각상도주는 자는 것처럼 눈을 반개하고 있었다.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면 죽었다고 생각할 만큼 세월의 흐름을 정통으로 맞이했다. 하나 그로 인해 이곳에 모인 누구보다 구도자의 느낌을 물씬 풍겼다.
‘저러다 귀천하시겠네.’
그래도 몇 번 보았다고 화산파의 장문인이었던 서화종이 가장 편했다.
이훤은 빙긋 웃으며 덕담을 건넸다.
“회음현의 성세가 아주 대단하더군요.”
“그 또한 취선관주의 덕이 아니겠습니까.”
서화종은 이훤을 보며 따스한 시선을 내비쳤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로구나.’
두 사람의 관계는 복잡했다.
처음에 탈마의 얼버무림을 듣고 매화검주인 노군동주의 제자인 줄 알았다. 하여 배분을 무너트리고서라도 이훤을 받아들이려 했다.
한데 몇 번의 사건을 거쳐 망아취자의 생존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훤이 망아취자를 스승님이라 부르는 것도 듣게 됐다.
그 때는 조금 어려웠다.
화산파의 쇠락이 가속화된 상태에서 이십 대의 청년을 사제로 받아들이면 문파의 배분은 유명무실해질 터였다. 또한 화산파를 살리기 위해 애썼던 이대제자들의 상실감도 걱정됐다.
한데 취선관은 화산파와 독립된 관계였다.
단지 주도를 배웠기에 사제관계란다.
이렇게 되니 마음이 편해졌다.
거기에 더하여 때마침 연맹이 결정됐다.
하여 서화종은 이훤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오십 년 동안 지금 거리에 사문의 존장이 계심을 알지 못했고, 보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마저 벗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야 관주께서 적극적으로 나서도 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한 화산은 약했지만, 하나가 된 화산은 강했지요. 거기에 더하여 관주와 사숙께서 도움을 주시니 저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화산을 찾지 않더이까?”
이훤 또한 서화종이 고마웠다.
화산파에 대한 애증이야 이제는 퇴색된 지 오래였다.
하나 오랜 세월 유지한 문파의 이름을 버리고, 연맹으로 하나가 된다는 선택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결국 그 또한 화산을 경외하고, 애정 했기에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고금을 통틀어 유례가 없던 일입니다. 장문인의 결의가 아니었다면 그분과 제가 아무리 애써도 제자리걸음이었겠지요.”
망아취자의 생존은 수뇌부만 알고 있는 비밀이다.
향후 무림맹에서 무림대회를 열 때 망아취자가 참석하여 신마의 심득을 직접 거론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무림맹주라고 해도 가벼이 여기지 못하리라.
그렇기에 이훤은 연맹의 발족식에 큰 책임감을 느꼈다.
서화종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덕담은 아무리 좋아도 덕담에 불과했다.
길어져봤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인봉의 전각은 보셨습니까?”
이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봉이 회음현과 가까우니 외원으로 삼고, 선인봉을 내원으로 삼는다고 하더군요. 확실히 새로 지은 전각군이라 그런지 멋있었습니다.”
“연화원과 선인원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연맹의 맹도들이 큰 고생을 했지요.”
한데 서화종의 표정이 묘했다.
밝은 가운데 흐릿하게 그늘이 보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별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선인봉의 전각군을 새롭게 조성하다보니 큰 돈을 소모했습니다. 각지에서 보내온 기부금과 축하금, 그리고 각 도관에서 정리할 수 있는 물품까지 팔아서 자금을 마련했지요. 하여 무사히 공사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관주께서 주신 거금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한창 공사를 하고 있었을 겁니다.”
서화종은 너털웃음과 함께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하나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돈이 없다고?’
문파의 위세는 전통과 무공에서 시작된다.
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고 상대를 판별하기 마련이다. 만매만전으로 인해 화산연맹이 성세를 이뤘거늘 맹도라는 자들이 누더기를 걸치고, 누렇게 뜬 얼굴로 돌아다니면 누가 경외하겠는가.
아닌 말로 소림의 제자들을 보라.
그들은 스스로 굶지 않는 한 언제나 뽀얀 얼굴과 선한 미소를 자랑했다. 벽곡단을 만들어도 가장 좋은 조합을 찾아 저렴한 가격에 큰 효과를 보지 않던가.
‘뭐 이런 거지같은 상황이······.’
무엇보다 이훤을 짜증나게 만든 건 이미 회음현의 성세를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회음현이 화산의 것은 아니지만, 성세는 화산으로 인해 비롯되지 않았던가.
이훤은 서화종을 보며 한 숨을 흘렸다.
화산연맹의 수뇌부 중에서는 가장 안정적이고, 속세의 경험이 많다. 하나 강호의 노회한 자들을 상대로는 여전히 어수룩했다.
[잠깐 하오문 좀 다녀와라.]
[지금요?]
[당장! 회음현에서 가장 돈을 많이 쓸어가는 새끼가 누군지 알아 와.]
[필요하면 훔쳐오면 되지.]
[매번 네가 훔칠래?]
탈마는 돈의 사용처가 화산연맹임을 알고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형님, 또 큰 그림 그리시네. 요즘 그림 그리시는데 재미 붙였어요? 예전에는 그냥 다 뒤집어엎던 양반이 왜 이렇게 변하셨을까?]
이훤은 한숨을 흘렸다.
[발족식은 무사히 끝내야지.]
[크큭! 저만 믿으세요.]
본래 색마가 있었다면 질문하는 순간 답이 나왔으리라. 하나 탈마의 분야는 원래 정보가 아니었기에 수고스러움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산동악가는 아직도 정리가 안 된 건가?’
이훤은 집요할 정도로 자신을 바라보던 색마의 눈빛을 떠올리는 순간 진저리를 쳤다.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지금이 낫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훤은 탈마가 돌아온 후 연회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 본분을 다하고 연회장에서 나선 사람과 마주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유리검 유건평은 침음을 흘렸다.
어쩌면 회귀 후 이훤의 진가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아니던가. 비록 그가 품을 수 없었기에 관망했지만, 이처럼 성장할 줄은 생각지 못했으리라.
유건평은 격세지감을 피부로 느끼며 손을 모았다.
“연맹의 이대제자인 유건평이 취선관주께 인사드립니다.”
이훤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는 연맹 사람이 아니니 편하게 말하세요.”
“연맹의 연판장에 서명을 하지는 않았으나, 화산에 베푸신 은공이 워낙 크기에······.”
유건평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는 잠시 한 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럼 지금 이 순간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이훤의 말에 유건평은 장탄식을 흘렸다.
“아깝다! 그리고 다행이다!”
반대의 이야기였지만, 진의를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유건평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고맙다. 모든 것이 다 고마워.”
“칭찬받으려고 한 일은 아닌데요.”
“그래서 더 고마운 거지. 나는 너를 처음 알아본 사람임을 자랑할 수 있기에 만족한다. 그러니 나를 연맹의 이대제자로 대해다오.”
“그리 하겠습니다.”
그는 진심을 담아 손을 모았다.
그리고 물었다.
“취선관주께서 저를 기다리신 것으로 보아 용건이 있으신 듯하군요.”
이훤은 더 이상 유건평의 결정을 바꾸려하지 않았다.
“축전제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축전제(祝前祭)는 말 그대로 화산연맹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발족식 전날 개최하는 연회였다.
“귀빈들은 예전의 핵심 건물이었던 진무궁에서 연회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후기지수들은 진무궁 옆 옥화지에 따로 모일 예정입니다.”
“제 자리는 어딥니까?”
“당연히······.”
유건평은 말끝을 흐렸다.
“후기지수들과 어울리고자 하시는군요.”
“네. 그뿐 아니라 자리 배치도 도움을 주셨으면 해요.”
이훤의 부탁을 유건평은 기꺼이 수락했다.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유건평은 멀어지는 이훤을 보며 빙긋 웃었다.
‘무공과 명성이 아무리 드높아도 친구란 언제나 소중한 존재이지. 관주도 언제까지 강호의 노고수들과 어울릴 수는 없지 않은가. 또래와의 편한 자리도 필요할 게야.’
반면 이훤은 탈마와 전음을 주고받았다.
[형님, 됐어요?]
[계획대로다.]
[재밌겠네요. 진행할게요.]
이훤은 탈마의 기척이 사라지자, 음흉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어린놈의 새끼들에게 화산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줘야겠다.’
< 60, 취선관주는 어떤 놈인가?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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