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52화 (152/226)

< 61, 급할수록 빨리 해라. (2) >

장치결은 취기로 인해 붉어진 얼굴을 긁적이며 낙안봉에 올랐다. 비록 취선관에서 총관 생활을 하고 있지만, 본업은 종남파의 장로였다. 하여 진무궁에서 주최한 연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마치 꿈만 같구나.’

중견방파의 주인이나 구파오가의 중진들이 예를 갖춰서 대해주던 모습이 뇌리를 스칠수록 진득한 미소가 지어졌다. 생각 같아서는 멋들어진 시라도 한 수 읊고 싶었지만, 자칫 망아취자의 잠을 깨웠다가는 무슨 사달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다.

그 산간 서늘한 가을 바람이 스쳐갔다.

그래, 이곳이 현실이다.

장치결은 고개를 내저어 조금 전의 일을 기억에서 지운 후 옷깃을 여몄다. 기러기가 쉬어간다는 표현처럼 낙안봉의 바람은 너무나 매서웠다.

“어이쿠! 이러다 자칫 잘못하면 고뿔에 걸리겠군.”

하나 취선관에 들어서자마자 멈칫 해야 했다.

망아취자는 손님과 있었고, 이훤은 북해빙궁주와 손을 잡고 있었다. 얼마 전에 정식으로 허락을 구한 복우전과 소연명도 눈에 들어왔다. 한데 그를 멈칫 하게 만든 건 구석진 곳에서 안주를 껴안고 있는 탈마였다.

‘뭐하는 거지?’

탈마는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안주를 껴안은 채 장치결을 보며 히죽 웃었다. 하나 탈마의 언행에 일희일비해서 좋았던 기억이 없지 않던가.

하여 장치결은 곧장 이훤에게 다가갔다.

“관주 먼저 와계셨구려.”

이훤은 장치결을 반겼다.

오랜만에 마주한 망아취자는 기분이 좋아 보였고, 취선관은 어제 떠난 것처럼 깨끗했다. 이 모든 것을 도맡아해준 사람이 바로 장치결이다. 그렇기에 예전의 장난기를 버리고 기꺼이 손을 모았다.

“진무궁에서는 따로 인사를 못했네요. 잘 지냈습니까?”

장치결은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생활이 고되고, 간혹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다. 하나 간간히 망아취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노군과 비무를 할 수 있는 꿈 같은 생활이 아니던가. 이제는 더 큰 성과를 이루기 전에는 종남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취선관의 모든 것이 만족스럽습니다. 궁주도 계셨군요.”

북리혜는 손을 모으는 대신 살짝 고갯짓을 하며 예를 표했다. 일문의 종주와 장로라면 상하 관계가 구분될 수밖에 없다. 하나 그녀는 북해빙궁의 궁주가 아니라 이훤의 여자로서 감사를 표했다.

노회한 장치결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허허, 관주께 좋은 일이 있으신 듯하니 제가 어울리는 술을 가져오지요.”

“역시 총관입니다!”

이훤은 엄지를 추켜세웠고, 잠시 후 장치결이 가져온 술을 마신 후에는 양 손의 엄지를 들어 칭찬했다.

“이건 무슨 술입니까?”

회귀 전과 후의 기억을 헤집어도 이런 술은 맛 본 적이 없었다. 총관은 머쓱한 표정과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동시에 내비쳤다.

“봉온주와 백화상주에 갓 내린 청엽차를 섞어봤습니다.”

한 마디로 혼합주라는 이야기다.

“호오! 세 종의 백주와 한 종의 황주를 섞었기에 이런 빛깔이 났군요. 거기에 깔끔한 느낌의 청엽차라면! 그럴싸 합니다. 상당히 맛이 좋아요.”

이훤의 극찬에 총관은 헛기침을 했다.

“요즘 어르신의 입맛이 떨어지신 것 같아서 혼합주를 연습하던 중입니다. 한데 제가 한 가지 말하지 않은 재료가 있는데······.”

“솔잎.”

장치결은 진심이 담긴 탄성을 내뱉었다.

“역시! 무공도 무공이지만, 술에 관해서는 관주가 천하제일입니다! 이건 어르신께서도 맞추지 못하셨거든요.”

그 때 망아취자의 시큰둥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자네가 너무 득의양양해서 일부러 모른 척 해준 게야.”

그리고는 검후에게 딴청을 피운다고 혼쭐이 나셨다.

이훤은 부부처럼 애틋한 두 노인을 힐끔 본 후 어깨를 으쓱였다. 장치결 또한 망아취자의 투정이 익숙한 듯 기꺼이 술 잔을 비웠다.

“하아! 요즘은 무공에 대한 생각도 많지만, 술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길은 머지않은 곳에 있습니다.”

장치결은 대답 대신 품에서 만매만전을 꺼냈다.

“이미 걷고 있지요.”

“좋네요.”

북리혜는 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는 동안 시중을 들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광경에 장치결마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부담스러워했을 정도였다.

“궁주!”

“괜찮아요. 말씀 나누세요.”

장치결은 회의장에서만 해도 냉기가 풀풀 날리던 북리혜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며 탄성을 내뱉었다.

‘허허, 이쯤 되니 나도 부럽기는 하군.’

술자리는 금세 마무리됐다.

밤도 늦었거니와 북리혜가 자고 가도 될 만큼 취선관은 넓지 않았다.

“궁주의 성취가 나이에 비해 놀랍구려.”

“모두······.”

망아취자의 덕담에 북리혜는 잠시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조근 조근한 어조로 말했다.

“스승님의 덕분입니다.”

일문의 주인이 스스로 고개를 숙인 것도 모자라 스승이라 칭했으니 외부에서 알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하나 지켜보던 검후는 피식 웃을 뿐이다.

“클클, 여우같은 계집이니 나처럼 끙끙 앓지만은 않겠구나.”

망아취자가 북리혜의 의도와 검후의 속내를 모를 리 없다.

“저 녀석은 무공을 가르치지는 않았으나, 내 손으로 거둔 마지막 제자다. 너와 교분이 얕지 않으니 나 또한 너를 북해빙궁의 궁주가 아니라 가족으로 대하겠노라.”

북리혜는 망아취자의 따스한 한 마디에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처소로 안내해주고 오겠습니다.”

“그래라. 먼저 잘 터이니 알아서 하여라.”

탈마가 눈치 없이 이훤과 북리혜를 따라 일어났다.

그러다 검후가 던진 술잔에 머리를 얻어맞고 주저앉아야 했다. 그 사이 탈마의 품에서 탈출한 안주가 누구보다 빠르게 노군동으로 달려갔다.

“도와줄까?”

이훤이 장공잔도에 박힌 쇠막대를 보며 말했다.

농이 섞인 한 마디에 북리혜는 콧방귀를 뀌더니 표홀한 신법을 펼쳤다. 광풍 속에서도 가볍게 내려선 그녀가 징검다리를 걷듯 자연스럽게 잔도를 지나갔다.

그녀는 이훤이 뒤따라 잔도를 건너자, 미간을 좁혔다.

“정말 처소까지 데려다 주려고?”

이훤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손님이 있네.”

북리혜는 미간을 좁혔다.

토라진 것이 아니라 그녀의 기감에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장신의 사내가 풀숲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 창무검제.”

천하에 수많은 별호가 있다지만, 오직 다섯 명만 사용하는 별호가 있다.

검제(劍帝).

그 중 남궁세가의 삼인자로 창무검제라 불리는 남궁채린이 무심한 표정으로 이훤을 응시했다.

“궁주에게 볼 일은 없소.”

남궁채린의 근엄한 한 마디에 이훤이 앞을 막아섰다.

“화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마음대로인데?”

이훤의 말에 북리혜는 감동을 받은 듯보였다.

반면 남궁채린은 순순히 북리혜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애초에 이훤에게 볼 일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남궁무향인가?”

선제공격에 남궁채린은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아이는 순수한 마음에 자네를 찾아갔을 뿐이야. 굳이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그 아이의 순수함을 이용하여 자네의 행적을 쫓은 내게 있겠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훤은 회귀 전부터 남궁세가가 싫었다.

그들의 거대함과 그들의 자부심과 그들의 비밀스러움을 경계했다. 한데 회귀 전 남궁무향은 백예예로 살면서 뭇 사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복우전을 택했고, 의문의 흉수에게 간살을 당했다. 그 후 복우전이 남궁세가를 월담했으니 흉수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행히 그녀를 대하는 건 진심인 건가?’

별다른 목적 없이 순수하게 제자로 삼고, 죽은 동생의 호적에 올렸기를 기원했다.

그래야 그녀가 행복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검제나 되시는 분이 야심한 밤에 찾아온 이유는...”

이훤은 남궁채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한 번 붙어보자는 뜻이겠죠?”

촤라라락-

팔황과 무극이 중수처럼 녹아내리며 손등을 감쌌고, 이내 뼈가 있는 것처럼 길게 늘어졌다.

“신기하군.”

이훤은 쌍검을 쥔 것처럼 팔황과 무극을 휘휘 돌린 후 히죽 웃었다.

“원래 신병이기는 주인공과 함께 하는 법이지.”

“경극을 좋아하는가?”

남궁채린은 질문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검을 뽑았다.

발검 자체가 물 흐르듯 이어지니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라면 언제 검을 뽑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내 삶 자체가 경극이야.”

회귀까지 한 마당에 어떤 경극이 마음에 차랴.

그러니 이훤은 경극을 선보인다는 마음가짐으로 멋들어지게 뛰어올랐다.

파팟!

첫 수부터 암천군림보를 극성으로 펼쳤다.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구 성에 이르렀지만, 잔영은 여전히 여덟 개에 불과했다.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숫자였다. 다만 예전보다 잔상이 진했고, 이제는 아예 시간차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동시다발적으로 번쩍이기 시작했다.

스릉-

남궁채린은 검극으로 하단을 가리킨 후 뒷발을 살짝 뺐다가 하나로 모으며 중극을 찔렀다.

‘기수식?’

사문의 형제들끼리 수련을 할 때나 사용하는 기수식이 분명했다. 아니나다를까 남궁채린은 폐부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린 일갈을 내질렀다.

“창천진무검! 칠 초 팔 식의 구궁패룡이다.”

뭐하자는 건지 한순간 호기심이 피어오를 만큼 충격적인 광경이 아닌가.

명문은 무공을 가르칠 때 초와 식의 이름을 구분하여 가르쳤다. 초식명 자체가 투로를 함축한 경우가 태반이었기에 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했다. 하나 일정 경지에 이르면 초식명과 투로를 일치시킬 수 있기에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부끄러움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절초를 상대방에게 일러주는 꼴이 아닌가. 그렇다고 초식명과 다른 무공을 펼치자니 비겁하다는 비난은 둘째 치고서라도 본인이 헷갈려서 실수를 연발할 터였다.

‘중검, 방위, 극쾌.’

한순간 구궁패룡으로 연상되는 무리가 뇌리를 스쳐갔다.

그리고 남궁채린의 검은 구궁의 방위를 모조리 선점한 채 용이 아가리를 벌린 것처럼 흉포하게 쇄도했다.

혈륜이 덧씌워진 팔황과 무극이 교차하듯 전방을 쓸었다.

그 순간 남궁채린의 검은 한순간 청광을 번뜩이더니 얇은 강기를 흩뿌렸다. 초식이 마무리되지 않았음에도 상대의 무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적재적소에 기를 조율하는 모양새는 망아취자에 뒤지지 않았다.

터터터터터터터터텅!

한순간 여덟 개의 잔영이 찢겼다.

하나 이훤의 팔황은 남궁채린의 강기를 뚫고 검을 튕겨냈다. 그리고 반대쪽의 무극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며 턱을 노렸다.

“배면창소!”

이번엔 보법이다.

남궁채린은 한 발을 축으로 핑그르르 돌면서 무극의 예기를 회피했다. 그는 이후에도 검법과 보법을 펼칠 때마다 초식명을 외쳤다. 십여 합을 넘기는 순간 남궁채린이 수세에 몰렸고, 끝내 더 이상 초식명을 입에 담지 못했다. 삼십여 합을 넘기자, 남궁채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건방지게 초식명을 읊조려?’

제아무리 기를 조율하고, 명문의 내공을 품었다고 해도 천공혈륜겁과는 애초에 궤가 달랐다. 육신을 극한까지 단련한 후 심신의 조화를 이루면 대자연과 몰아일체의 경지에 이른다고 했다. 즉 자연지기를 받아들이기 위해 인체를 단련하는 게다. 하나 강호의 무공 중 대다수는 자연지기를 가공하여 단전으로 받아들였다.

그 범주에서 벗어난 유일한 곳이 소림이었다.

무당과 화산, 속가제일문이라는 남궁세가 또한 가공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촤라라라락!

한순간 팔황과 무극이 투갑으로 변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존재 이유를 잃었다. 주먹을 내뻗는 순간 이 장의 거리를 격하고 권강(拳罡)이 탄강처럼 튀어나갔다.

쩡-

남궁채린의 검이 두 동강 났고, 이내 헛기침을 하며 탁기를 몰아냈다.

“크헉!”

이훤은 남궁채린이 부러진 검을 놓는 순간 자세를 풀었다. 남궁채린은 발족식을 축하하기 위해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이다. 그렇기에 더 이상의 싸움은 향후 분란의 소지를 만들 가능성이 농후했다.

“과연 취선관주의 능력은 대단하구려.”

“당신도 다 보여준 건 아니잖아.”

“검이 부러졌소.”

“딱 봐도 예비용인데?”

남궁채린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나 또한 만매만전으로 큰 공을 이뤘소. 한데 관주에게는 닿지 못하는구려. 내가 졌소이다.”

강호에서 다섯 명만 있다는 검제 중 한 명이 패배를 인정했다.

하나 이훤은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지. 나는 제룡검존의 심득을 구경조차 못했는 걸.”

하나 절명곡의 생존자인 제룡검존 남궁천운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그는 악재만큼 가문을 아꼈고, 능력 또한 월등했다.

그 결과 신마의 심득이 제대로 전해졌을 터였다.

남궁채린이 품에서 서찰을 하나 꺼냈다.

“그럼 구경하러 오시겠소?”

서찰의 겉면에는 남궁세가주의 직인이 찍혔다.

“왠지 독이 든 과일 같이 먹음직스러운 걸?”

이훤의 물음에도 남궁채린은 느긋했다.

“본가의 가주께서는 관주가 무림대회의 전에 방문하시기를 원하오. 만약 관주가 오지 않는다면 본가는 무림대회의에 불참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마의 심득에 관한 어떠한 논쟁에도 개입하지 않을 것이외다.”

“별로 내키지 않는데. 어차피 남궁세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호 전체가 들썩일 거야.”

남궁채린은 남궁세가의 초대를 거절할 줄 몰랐는지 표정을 굳혔다.

“결코 손해보는 방문은 아닐 거외다.”

이훤은 결국 서찰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서찰을 흔들며 말했다.

“조건이 있어.”

남궁채린의 눈동자는 조건을 듣는 순간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요동을 쳤다.

< 61, 급할수록 빨리 해라. (2) > 끝

ⓒ 김태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