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창천(蒼天)으로 가는 길. (4) >
혈룡인은 반이나 잘려나간 귀를 매만지며 외쳤다.
하나 악마는 그를 무시한 채 묵음거사를 보며 웃었다.
“꽤 재밌는 재주를 부리는구나. 다행이야. 저 멧돼지보다 네 놈을 상대할 때 십전진뇌공을 시연하기 좋을 듯하구나.”
“너야말로 희한한 재주를 쓰는 구나.”
악마는 가볍게 발을 놀려 삼 보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혈룡인을 도발하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올 수 있겠는가?”
“죽여 버리겠어!”
혈룡인의 양 손을 감싼 핏빛 기운은 마치 바위처럼 부풀어 올랐다.
쿠쿠쿠쿠쿠쿵!
하나 악마는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가솔들에게 십전진뇌공을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기경팔맥은 뿌리이자, 뼈대다. 예전에는 지형에 육신을 덧씌웠다면 이제는 반대다. 육신을 지형에 덧씌운다. 이곳은 기경팔맥 중 음교맥이 시작되는 곳으로 복사뼈 아래의 조해혈에서 시작되어 결분혈과 인영혈을 타고 관골 위쪽의 정명혈로 이어진다.”
그 순간 혈룡의 쌍장이 태산처럼 악마를 짓눌렀다.
“조해혈은 땅의 기운을 끌어올리니 그 자체로 하체가 굳건해진다.
악마는 설명처럼 가볍게 압박을 해소한 후 창을 휘돌렸다. 한순간 혈룡인의 쌍장이 무력화됐고, 악마는 누군가를 가르치듯 말을 이었다.
“교신혈은 음기가 솟구치니 허초를 섞을 때 더욱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또한 상대는 진초와 허초를 구분하기 어려워지니 이것이야 말로 상대의 안력을 저하시키는 역법도일 것이다.”
터터터터터터텅!
혈룡인의 쌍장이 허공을 두드렸다.
하나 모조리 잔영이었고, 진체는 어느새 아래에서 위로 턱을 노리고 있었다.
“씨발!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악마는 수십 개로 분화된 혈룡인의 공세를 마주하는 순간 가볍게 두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의연하게 창을 내세운 채 일갈을 내질렀다.
“인영혈을 타고 정명혈로 이어지니 법도가 중첩되는 셈이다. 상대가 힘을 배분하여 공세를 펼쳐도 고저가 확연하게 드러나니 허초를 과감하게 배제한다!”
“헙!”
혈룡인은 비명을 토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악마가 자신의 권영에 스스로 얼굴을 들이댄 것이다. 하나 그가 내지른 권영은 허초였기에 오히려 거리를 허락한 셈이 되었다.
철컥!
악마가 쥔 창이 두 개로 나뉘어 단창으로 변했다.
하체가 대지에 뿌리내린 상태로 상체가 활처럼 휘어지니 단창의 끝은 어느새 혈룡인의 인중과 명치를 동시에 노렸다.
“정명혈은 양교맥에 이어지니 이제 힘으로 억누를 때다.”
그 순간 악마의 근육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고, 창끝에 맺힌 푸르스름한 기운에서 뇌기가 쏟아져 나왔다.
“천룡전이라고 광오한 이름을 붙였으나, 실제로는 능력이 없어 타인을 미혹하여 종으로 부릴 뿐이다. 스스로 정명하여 욕망을 내려놓는다면 천하에 가장 손쉬운 적이니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그 순간 두 개의 단창이 허공에서 휘돌더니 한순간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 악마의 두 눈에서 벽광(碧光)이 쏟아지는 순간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푹푹푹푹푹푹푹!
혈룡인의 머리가 한 박자 늦게 호박처럼 터졌고, 양 팔이 뜯겼으며, 단전을 중심으로 기다란 선이 그려졌다. 마지막으로 혈룡인의 상반신이 나무토막처럼 앞으로 허물어지는 것이 아닌가.
“······.”
묵음거사는 현란한 손놀림을 멈춘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혈룡인은 강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내공이 마르지 않을 만큼 대단한 고수였다. 스스로 평가하기를 천하오대고수에 손꼽힌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한데 그런 그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났다.
‘내 십이현금은 하나도 통하지 않았어.’
악마가 창을 고쳐 잡더니 다섯 걸음을 이동 했다.
묵음거사가 있는 곳에서 북동 방향이다.
오히려 거리를 벌린 셈이다.
“자! 다음 과정이다.”
악마의 한 마디가 악귀의 저주처럼 온 몸을 파고들었다.
저 말인즉슨 기경팔맥의 나머지를 자신에게 펼치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 때 악마의 눈동자가 묘하게 번들거리더니 음울한 한 마디를 흘려냈다.
“악가 내에서 악가는 무적이다!”
*
기경팔맥(奇經八脈)은 독맥과 임맥, 충맥과 대맥, 그리고 음양교맥, 음양유맥을 이뤄진다. 혈도의 기본인 십이경맥과 기경팔맥은 따로 떼어 설명할 수 없다. 기경팔맥이 호수나 연못이라면 십이경맥은 강이나 시내였다. 즉 십이경맥은 기경팔맥을 거미줄처럼 이어주는 운하와 같았다.
‘아직 부족하다.’
악마는 구궁벽력공을 십전진뇌공으로 개량했지만, 진정한 십전에 이르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십전(十全)이란 그 자체로 완벽함을 뜻하지 않던가.
그는 절벽처럼 솟구친 전각군을 돌아봤다.
‘이제 겨우 기경팔맥을 완성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몸을 움직여 적을 상대해야 했다.
하나 십이경맥의 묘리까지 덧씌울 수 있다면 향후 산동악가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될 터였다. 십전진뇌공을 대성한 자라면 세가의 심처에 앉아서도 모든 움직임을 인지하고, 대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악마는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순간을 위해 첫 걸음을 떼는 날이었다.
“내가 갈까?”
묵음거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섣불리 입을 열 수도 없었다.
흑의인이 혈룡인과 묵음거사를 함께 보낸 이유는 하나였다. 두 사람은 각자도 대단했지만, 함께 했을 때의 위력은 배가 됐다. 불같이 대놓고 달려드는 혈룡인과 바람처럼 은밀하게 접근하는 묵음거사의 합공은 무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한데 묵음거사의 음공은 아예 통하지 않았다.
그는 눈동자를 굴려 전각군을 살폈다.
‘쯧, 좋지 않군.’
소리와 기파에 의지하는 무공답게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나 전각군의 구조는 유불리를 논할 만큼 특이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악마가 설명했던 모든 이적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그 때 악마가 피식 웃더니 걸음을 내딛었다.
“이래서야 내가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묵음거사는 눈을 빛냈다.
상대가 유리한 고지를 포기했으니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고 느낀 게다.
따랑-
하나 탄음을 시전하는 순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는 기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상체만 슬쩍 비틀면서 피해냈기 때문이다. 차라리 막아냈다면 한 가닥 희망이라도 걸었으리라. 그러나 아예 눈으로 보는 것처럼 행동하니 회생의 여지가 전무했다.
“임맥은 가슴의 내장과도 연계를 하니 그 또한 염두에 둬야 한다. 전중혈이 심장과 연계하니 활력이 증가하여 오감은 신의 영역에 이르게 된다!”
악마는 그 말을 증명하듯 묵음거사의 탄음을 모조리 피했고, 빠르게 쇄도하여 창을 내뻗었다.
쉭쉭쉭쉭쉭!
결국 묵음거사나 앉은 자리에서 튕기듯 솟구치며 좌측으로 밀려났다. 하나 이것은 그가 의도해서 일어난 행위가 아니었다.
악마의 한 마디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는 전중혈에 앉아 있던 묵음거사를 밀어내 중완혈 방면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이제 임맥을 따라 움직이며 혈도를 따라 충맥에 이어지니······.”
“빌어먹을!”
결국 묵음거사는 산동악가의 내부를 뛰어다녔다.
그리고 요혈의 위치에 이르렀을 때마다 악마의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마치 각 혈도에 적이 있을 경우에 대한 대응책을 가르치듯 체계적이다.
푹!
“크흑!”
묵음거사의 오른쪽 어깨에서 살점이 한 움큼이나 떨어져나갔다. 피가 쏟아지는 동안에도 움직이지 않으면 살지 못할 터였다. 하나 그는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살기 위해 개처럼 뛰었다.
“죽여 버리겠다!”
강림혼요술에 걸린 자는 명령을 받는 순간 완수할 때까지는 자의로 도주나 자결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치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한 채 악마의 창을 피해야 했다.
촤악!
임맥에 대한 설명이 끝났을 때 오른 팔이 잘려나갔다.
“크학!”
하나 묵음거사는 왼손으로 오른 팔을 감싸는 대신 땅에 떨어진 십이현금을 주웠다.
“보아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이것들이 과연 두려움의 대상이더냐?”
악마는 코웃음을 친 후 묵음거사의 배후를 찔렀다.
묵음거사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밀려났다.
그 자리가 바로 충맥의 요혈들이 배치된 장소였다.
“이곳은 바람이 사시사철 불어와 기척과 소리를 숨기고, 안력을 흐리게 만드는 역법도다. 하나 십진진뇌공을 익힌 자에게는 평범한 장소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 적은 약해지고, 나는 그대로니 질 수가 없는 게다! 충맥의 요혈은 아래와 같이 시작되니······.”
충맥이 끝날 무렵 십이현금이 산산조각 났다.
“아!”
그리고 독맥을 지나 양유맥과 음유맥이 이어질 때마다 묵음거사는 피투성이가 됐다. 그리고 마침내 대맥에 이르러 묵음거사는 무릎을 꿇은 채 검붉은 핏물과 내장 조각을 토해내며 울부짖었다.
“크아! 복수할 것이야! 그분께서 오실 거다!”
악마는 창을 늘어트린 채 묵음거사를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잠시 후 손짓했다.
그러자 텅 빈 공간에 가솔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보였다. 그 숫자가 무려 삼백여 명에 이르렀다.
“빨리 오는 것이 좋을 게다. 조금만 늦어도 이들이 천룡전 자체를 섬멸할 것이야.”
“이렇게 많은 자가······. 언제?”
묵음거사는 넋이 나간 듯 눈을 끔뻑였다.
악마는 악설을 향해 손짓했다.
“많이 배웠느냐?”
“머리로만 기억했습니다.”
“이 자를 어찌 해야겠느냐?”
악설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을 꼽으며 무언가를 헤아렸다.
“이곳은 대맥의 교회혈이 지나갑니다. 음과 양의 기운이 가장 활발하게 부딪치니 어떤 기운이라도 증폭될 것입니다. 하여 법도이자, 역법도입니다. 이미 저 자는 생사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냥 두어도 알아서 절명할 것입니다.”
“크하! 정답이다!”
그 순간 묵음거사가 눈을 뒤집더니 꼬꾸라진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서너 번의 경련 이후 움직임이 완전하게 사라졌다.
악마는 죽은 묵음거사의 시신이 아니라 고개를 돌려 가솔들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정답을 외쳤던 탈마에게 닿았다. 동시에 가르침이 헛되지 않았음에 감사를 표하던 악설의 귓가에 전음이 전해졌다.
[탈마를 잡아라.]
“네?”
악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전까지 함께 하던 동료가 아니던가.
잡으라는 말에 가솔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할지 고민을 했다. 그 사이 악마의 부드러운 손길이 악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하면 악가는 천하제일가가 될 것이다.]
악설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치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수련을 했을 때에나 보일 법한 변화였다.
‘혼인을?’
그녀는 무가의 여식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뜻보다 세가의 안정을 위해 혼처를 찾아야 함을 직시했다. 무엇보다 악마가 벽력창 악재임을 알고 있지 않던가.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이 한 말이니 웃고 넘길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단 한 번도 사내에게 관심을 둔 적이 없기에 막막하기만 했다.
“대단한 걸? 개똥도 약에 쓸 수 있다더니!”
잘못된 표현이었다.
하나 악설은 잘못을 바로잡는 대신 딸꾹질을 했다.
지금껏 제대로 본 적 없는 탈마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예전에는 냄새나고, 고약하고, 경박하게만 보였던 얼굴이 제법 나쁘지 않아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어딘가 괜찮은 구석도 있을 것만 같았다.
“고, 고마워요.”
< 62, 창천(蒼天)으로 가는 길. (4)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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