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6) >
수많은 무인이 살아가는 강호.
그 중에 기인이사를 따지는 건 불가능했다.
저마다 자신이 가장 잘 났다고, 가장 뛰어나다고 여기는 이들의 세상인 게다. 그러니 무기가 겹치고, 무공이 겹치고, 별호가 겹치는 예사였다.
어쩔 수 없었다.
세상은 넓고, 무인은 많았으니까.
검제만 보아도 다섯 명이나 되지 않던가.
물론 밝혀진 것만 이 정도였고, 강호 어딘가에 서는 새로이 검제라 불리는 자가 또 존재할지 모를 일이다. 하나 조변석개하는 강호에서도 영원불멸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있다.
검후(劍后)가 그 중 하나였다.
보타암의 최고수가 여중제일인이 아닐 수는 있다.
보타암의 최고수가 주산군도의 주인이 아닐 수도 있다.
하나 보타암의 최고수는 무공의 수준을 떠나서 언제나 검후라 불렸다. 한 마디로 검후라는 별호에는 수백 년 동안 양민과 정파를 위해 헌신한 보타암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검후시라고요?”
경계를 서던 남궁속은 목책과 막사가 날아갔고, 수하들이 부상을 당한 상황에서도 예의를 갖춰야 했다. 아닌 말로 검후가 수하들을 죽였다면 세상 사람들이 누구를 욕하겠는가. 아마 수하들이 검후에게 씻을 수 없을 죄를 지었다고 여길 터였다.
검후란 그런 존재다.
“거짓말 같으냐?”
그녀는 지난 삼십 년 동안 은거했고, 갑작스레 화산연맹의 발족식에 나타났다. 그 후 장강의 물줄기를 따라 이훤과 동행했으나, 돌아갔다고 알려진 상태였다.
그러니 남궁속은 어쩔 수 없이 되물어야 했다.
“어찌 의심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검후는 피식 웃더니 지팡이를 슬쩍 들었다.
“네 녀석 뒤에 웅크리고 있는 마흔두 명까지 날려버리면 믿어줄 테냐?”
남궁속은 침음을 흘렸다.
“아닙니다.”
그는 수하들을 살펴보다가 인상을 썼다.
수하 중 대다수가 쓰러진 채 신음만 흘렸다. 그 중 운신할 수 있는 자를 골라 외원으로 보냈다.
“최대한 빨리 알려라.”
남궁속은 수하가 출발을 하자 한시름 놓은 듯 한 숨을 내쉬었다. 하나 이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어, 어디 가십니까?”
검후는 콧방귀를 뀌며 한 마디를 흘렸다.
“그럼 내가 여기서 계속 기다려야 하느냐?”
남궁속은 말을 잇지 못했다.
본래 누가 됐든 기다려야 했고, 세가의 허락이 있은 후에야 통과하는 것이 의례였다. 하나 세상 일이 그렇게 순리대로 흘러갈 리가 없지 않은가.
무림맹주나 소림의 방장, 또는 검후가 그러했다.
남궁속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결론을 내렸다.
수하를 보낸 이상 자신의 할 일을 마무리 짓기로 말이다.
“금방 검후를 모시러 올 겁니다.”
“막겠느냐?”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동시에 검을 뽑았다.
“검후께 무례를 저지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다만 내게도 사정이 있을 뿐이니 강호의 법도대로 해결해야겠지.”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남궁속은 검을 고쳐잡았다. 짧은 순간임에도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검후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머릿속도 복잡했다. 하나 그런 고민이 무색할 만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통! 통! 통!
검후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지팡이를 규칙적으로 내리쳤다. 그 소리가 세 번 이어졌을 때 남궁속은 누군가 발바닥을 찌른 것처럼 찌릿함을 느꼈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반신이 마비된 것처럼 무기력했다.
“이각 정도면 풀릴 게다.”
남궁석은 멀어지는 검후의 굽은 등을 보며 한 없이 외쳤다. 하나 안 된다는 말은 퍼져나가지 않았고, 두 번째 초소가 있는 방향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이래서야 검후가 남궁세가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모양새가 아닌가.
‘삼십 년 만에 출도 했으면서 왜?’
하나 대지를 울리는 굉음이 계속됐다.
검후는 여덟 번째 목책을 마주하고 침음을 흘렸다.
노구가 지치거나, 자괴감이 들었다기보다 눈앞의 존재들이 원인이었다.
“검후는 남궁세가가 참으로 우스우신가 보오.”
다섯 명의 노인이 적당히 거리를 벌린 채 검후를 바라봤다. 일견하기에도 초절정의 극에 달한 고수들이다. 평소였다면 이런 곳에 나타날 리 만무한 자들이 줄지어 등장한 셈이다.
‘허허, 남궁세가의 저력은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저런 자들을 문지기로 세울 정도이니······.’
그녀는 삼십 년 전 만났던 남궁세가의 가주를 떠올렸다. 정파의 수장이라고 하기에는 욕망과 욕심을 가감 없이 드러내더라. 오히려 검후를 회유하여 주산군도의 방파들과 함께 동부를 이끌어가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런 자에게 삼십 년의 시간이 생겼으니 당시의 욕심은 대부분 이루고도 남았으리라.
“멈추라고 했소!”
검후는 다섯 명의 노인을 앞에 두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 날 마주했던 남궁세가주를 떠올리다보니 정작 노인들의 경고는 귓등으로 흘린 상태였다.
“너희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 녀석의 눈에 띈 너희들이 안쓰러울 뿐이다.”
“그게 무슨 개소리······.”
다섯 명의 노인은 남궁세가주가 비밀리에 엄선한 광운십칠비 중 오기(五奇)라 했다. 하나 검후에게는 배분이 두 단계는 족히 차이가 날 어린 녀석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다가오니 오기 또한 자세를 취했다. 하나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오기가 아니라 남궁세가의 전각군을 향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시선을 끌어줬으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을 터······.’
이훤과 내기를 한 대가로 나선 길이지만, 녀석이 의미 없는 짓을 벌일 리 없으리라. 그렇기에 무언가 제대로 이뤄내지 않으면 혼쭐을 내주겠다는 결의가 담긴 지팡이가 대지를 찍었다.
쾅!
*
만해각(萬解閣)은 남궁세가의 머리를 뜻했다.
수많은 지자가 모여 있었다.
그 중에는 대과에 급제한 후 초빙된 자도 있었고, 정파의 머리라 자부하는 제갈세가 출신도 속했다. 그렇게 모인 자가 무려 백여 명이다.
만해각은 만결당과 만사당으로 나뉜다.
만사당(萬査堂)에서 조사한 정보를 토대로 만결당(萬決堂)이 결정을 내렸다. 그렇기에 사안에 따라 두세 명이 모일 때도 있었고, 수십 명이 운집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가장 많은 지자가 회합을 지녔던 건 화산연맹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 모였던 자들이 마흔여섯 명이다.
한데 오늘은 일견하기에도 칠십 명에 가까운 지자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검후의 행색을 한 다른 자일 경우는?”
“인근에서 행적이 조사된 고수 중 인피면구나 축골공에 능한 자들의 위치가 파악됐소. 검후가 확실하오.”
“한데 검후가 왜?”
상석에 앉은 누군가가 짜증 섞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수십 명의 지자들이 침묵을 지켰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으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수십 명의 지자들이 머리를 맞댔어도 검후의 언행은 이상하기만 했다. 만에 하나 검후가 난장을 부리는 이유가 밝혀진다면 대응 수위를 정할 수 있었다.
“크흠! 이것이 선결되지 않는다면 공허한 회합이 계속될 뿐이외다.”
수백 명의 무인을 투입해도 되고, 내원의 핵심 고수를 보내서 조용히 처리하는 방식도 있다. 만약 남궁세가를 진심으로 적대하는 것이라면 기관진식과 폭약은 물론이고, 독의 활용까지 허락할 용의가 충분했다.
“노망이 들었나?”
“······.”
차라리 노망이 들었다면 없애버린 후 핑계를 대면 될 터였다. 하지만 검후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판단 하에 일을 저질렀다가 그녀가 도망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누가 뭐라도 해도 검후는 양민에게 신이었고, 정파 무인들에게는 우상이 아니던가.
“사십칠 초소가 돌파당했습니다!”
황산에서 창천성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열겹의 초소가 존재했다. 그러니 검후가 이미 네 번째 방어망을 통과했다는 의미였다.
지자들이 말을 잇기도 전 인편이 다시 도착했다.
“오십칠 초소와 육십칠 초소가······.”
만해각의 각주인 제갈서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갈세가의 방계 출신으로 꽉 막힌 세가의 위계를 피해 의탁한 자였다. 한때 제갈세가의 소가주보다 현명하다는 평을 받았기에 남궁세가의 만해각을 차지할 수 있었다. 남궁 씨가 아님에도 세가 서열이 한 자리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케했다.
그런 그가 대노하여 외쳤다.
“뇌를 꺼내서 내가 직접 뒤적거리기 전에 당장 방안을 구축하라!”
“속도가 더욱 빨라졌습니다. 검후가 만약 창천성을 월담한다면 전각군과 조경으로 인해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지금 당장 가용 병력을 모조리 동원해서 막아야 합니다!”
“이미 내원주께서 독단으로 오기를 보냈습니다. 그들이 시간을 끌어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이훤과 관계가 있는 건 아니겠지요?”
누군가의 말에 좌중이 고요해졌다.
이미 이훤과 검후가 장강의 물줄기까지 동행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던가. 두 사람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면 성동격서의 우를 범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건 아닐 게요.”
“하나 늙은이의 마음이란 아침과 저녁이 다른 법입니다. 제가 알기에 무한에서 검후를 만나 화산까지 안내한 것도 이훤이었습니다. 그리고 발족식 당시 검후에 이어 이훤이 무위를 뽐냈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두 명이 연이어 펼친 신위를 하나로 뭉쳐 소문이 났을 정도입니다.”
하나 상석에 앉은 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닐 게요. 그녀가 무림맹주이거나, 천하제일인이었다면 그럴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지. 하나 그녀는 검후요. 보타암의 수백 년 역사가 누적되어 만들어진 존재란 말이오.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꺼려야 할 건 패배나 손해가 아니라 별호가 더럽혀지는 것이외다. 이유 없이 이훤과 도모하여 남궁세가를 침범한다면 수백 년 역사를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을 터. 그게 가능하겠는가?”
의문을 제기했던 학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친해질 수는 있다.
조손지간처럼 목숨을 맡길 수도 있다.
하나 이훤이 악행을 저지를 때 검후가 돕는다는 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혀도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전력을 다해 막는 것이 옳습니다.”
만해각주는 지자들을 둘러본 후 말을 이었다.
“눈이 맑고, 감이 좋은 자들을 뽑아 별채 인근에 뿌려둬라. 이훤의 일거수일투족을 반의 반각 단위로 보고 받겠다. 그리고 내원주께 일러 움직일 수 있는 무인들을 모조리 끌고 내원과 외원의 경계에 집결토록 하라.”
십여 명의 학사가 부리나케 만해각을 떠났다.
잠시 후 만해각주인 제갈서도가 직속 학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내원의 경계로 간다.”
“각주, 본래 군사는 쉬이 자리를 이탈하는 법이 아닙니다.”
“멍청한 소리! 지난 수십 년 간 누구도 남궁세가의 초소를 허락 없지 지나지 않았다. 하나 창천평 인근에 강호방파들의 세작이 깔린 게 수십 년이다. 그들이 무얼 보고, 무얼 보고할 듯싶으냐?”
“본가의 대처가 근시일 내에 퍼지겠군요.”
만해각주는 장삼만 대충 걸친 후 뛰쳐나갔다.
“그렇다! 오늘 모든 수를 동원해서 검후를 막는다. 그리고 검후를 천하에 때려죽일 만든다. 그래야만 오늘 우리가 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는 만해각을 벗어난 후 잠시 미소지었다.
자신의 명령이 제대로 전해진 듯 내원은 소란스러웠다.
아마 제검백가는 전쟁에 준하는 소집령이 내렸으리라.
그는 기분 좋게 달리던 중 잠시 인상을 썼다.
월동문이 활짝 열린 별원은 분명 세가의 직계 중 한 명인 삼소주의 처소였다. 한데 무공이 뛰어나지 않은 그가 눈치 챌 만큼 향긋한 술 내음과 기름진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삼소주는 선택받은 첫째와 뛰어난 둘째에 밀려 음주가무에 심취한 것으로 유명했다. 당연히 만해각주는 오래 전 삼소주를 버리고, 소가주에게 줄을 댄 상태였다.
‘하긴 세가에 비상이 걸린 것도 귀뜸받지 못했나 보구나. 역시 권력에서 밀려난 자의 말로는······.’
만해각주는 삼소주를 비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한 시가 급하다! 사소한 것도 놓치지 마라!”
*
“네 덕에 저 놈이 사소한 걸 놓치고 갔네.”
이훤이 술잔을 빙빙 돌리며 웃었다.
하나 월동문을 등지고 있는 청년은 눈만 부릅뜰 뿐 말하지 못했다. 마혈과 아혈을 잡혔으니 말하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할 터였다.
이훤은 삼소주가 즐겨마시던 술을 털어 넣은 후 혀를 찼다.
“남궁세가의 셋째가 고작 이런 술을 마시는 거야? 아! 사소한 삶이라서 이것도 감지덕지인가?”
삼소주는 아마 ‘감히!’나 또는 ‘두고 보자.’ 등의 들리지 않는 저주를 퍼붓고 있으리라.
이훤은 술병을 들고 휘적거리며 처소를 나섰다.
걸음마다 경계를 서야 하는 이들이 가득했을 공간이 텅 비어 있지 않은가.
이훤은 검후를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후훗! 우리 할머니, 이름값 한 번 대단하시네.”
< 64, 강호 유일의 세가(世家). (6) > 끝
ⓒ 김태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