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79화 (179/226)

< 70, 소마(笑魔). (2) >

감각사도는 하나의 감정만 지녔다.

그렇기에 흑의인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웃어야 했다.

한데 놈은 웃지 않았다.

그리고 올려다보는 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광이 번뜩이는 순간 내력이 저절로 유형화되어 반응했다. 몸뚱이가 먼저 위기를 인지하고 방어를 하고자 하는 상황이었다.

이훤은 그래서 확신했다.

눈앞의 흑의인이 회귀 이후 찾던 존재임을 말이다.

흑의인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동시에 놈의 소매가 펄럭였고, 십여 개의 바늘이 번뜩였다. 가볍게 손짓만으로 튕겨낸 후 놈을 바라보니 여전히 같은 자리다.

“너 잘하는 걸 하려고 한 것 아닌가?”

암기를 던지고 도망치려고 한 게 아니냐는 물음이다.

하나 한 걸음도 뗄 수 없었으리라.

이미 야산의 정상에는 혈륜이 거미줄처럼 흩뿌려진 상태였다. 허락 없이 움직였다가는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몸뚱이 중 어딘가가 잘려나가리라.

‘그걸 아는 것 자체가 놀랍네.’

역시 진짜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게다가 흑의인은 점차 당황스러움을 지운 채 미소를 되찾기 시작했다. 자포자기인지 아직 한 수가 남았는지는 더 지켜봐야 알 터였다.

“사람의 피가 자기를 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좋은 정보 고맙다.”

“하여 자철을 띈 암기 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지근거리에 이르는 순간 저절로 모공을 파고들어간 후 쉼 없이 피와 함께 혈맥을 휘젓고 다닌답니다. 방금 제가 던진 자전천봉침이 그쪽 방면에서는 최고라고 하더군요. 한데 검제, 아니 관주, 흐음!”

흑의인은 이훤을 앞에 두고 여유를 부렸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강호에서 당신의 가치를 처음 알아본 사람으로서 호칭에 대하여 신중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주세요. 저 또한 고대하던 순간이지만, 아직 준비가 미흡하거든요.”

이훤이 허공에서 서서히 내려왔다.

마치 허공에 계단이 존재하는 것처럼 내려오는 모습에 흑의인은 탄성을 흘렸다.

“아! 별 것 아니야.”

이훤은 오랜 지기(知己)를 마주한 것처럼 빙긋 웃으며 정상에 내려섰다.

“하던 이야기 계속 해.”

흑의인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취마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봤을 때 당신을 상징하는 최적의 별호가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무례하다고 여기지 마세요. 비록 기간은 짧지만, 매일 같이 당신을 생각했기에 우리는 이미 가까운 사이가 아닙니까?”

“그렇게 해.”

마치 누가 더 여유로운지를 겨루듯 느긋한 상황이 이어졌다.

“오늘은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았어요. 당신들을 밖으로 유인한 후 힘으로 끝내려 했지요. 하나 만용이었네요. 신마의 심득이 이렇게 강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니야. 네 아비인 광무제는 정말 강했어. 만약 나 혼자였다면 그와 싸우면서 너를 찾지 못했을 거야.”

흑의인은 사도의 제약을 벗어던진 듯 아예 대놓고 한 숨을 내쉬었다.

“후! 사실 얼마 전 제 직속들을 보내 전마를 죽이고, 악마를 데리고 오려 했어요. 하나 소식이 끊겼지요. 해서 그 때부터 의심은 했습니다. 설마 벽력창 악재가 반노환동을 하여 악마가 되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요?”

“이해해. 보통은 어려졌다고 해서 곧장 어리게 살려고 하지는 않지. 노망이 들지 않았다면 누가 그러겠어?”

“하하하,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저 여자가 궁금해?”

“네. 남궁세가만은 도저히 뚫고 들어갈 틈이 없었거든요. 그렇기에 저 여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청하라고 부르던데 과연 누구일까요?”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천룡이 누구지?”

“그걸 대답해드릴 수는 없지요.”

한가롭게 대화를 하는 듯했지만, 야산 정상은 칼바람이 쉴 새 없이 휘돌았다. 그리고 바람의 결마다 혈륜이 스며들어 사지(死地)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 했습니다. 저는 하고자 하는 걸 모두 했으나, 이 지경에 이르렀군요. 자! 저를 죽이세요. 제 상은 이미 깨진지 오래이나, 회광반조의 상태에 이른다면 혹시 압니까? 이훤이 원하는 단서라도 내뱉고 죽을 지요.”

이훤은 물끄러미 흑의인을 응시했다.

“흥이 식었다.”

“네?”

“내가 너를 잡고 싶었던 건 갚아야 할 빚이 있기 때문이었어.”

흑의인 또한 모르는 사실은 아니었다.

이훤의 언행은 종잡을 수가 없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감각사도 중에서도 자신에 대한 원한이 깊었고, 그걸 위해서라면 다소 무리한 행동까지 감수하지 않았던가.

해서 그걸 이용해서 모략을 꾸미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원한의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이훤, 당신은 마치 예전부터 저를 아는 것 같더군요. 참으로 기이한 상황입니다. 제가 사자림주의 아들이었다는 건 아실 테죠. 저는 천룡으로 인해 새로 태어나기 전까지 사자림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한데 당신의 원한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이훤은 표정을 굳혔다.

“이십 년 후.”

“네?”

“이십 년 후 나는 너로 인해 사지에 빠지고, 결국 죽어야 했다. 심지어 너와 나는 의형제였고, 취마인 내가 직접 소마라고 이름까지 붙여줬지. 그런데 너는! 내가 정말 마시고 싶던 술에 독을 풀었어. 인간이라면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할 악행을 저지른 게다!”

흑의인은 개미굴의 인왕전에서 자신을 소마라고 불렀던 이훤을 떠올리고 있으리라.

이훤은 노기를 드러내며 말을 덧붙였다.

“한데 네가 나를 죽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이유를 알지 못했지. 하나 이제는 알겠다. 신마의 심득을 얻기 위함이었지. 수 년 동안 그걸 위해 내 곁에서 모략을 꾸민 거야.”

흑의인의 표정이 묘하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의문이 풀렸고, 새로운 정보까지 얻었다.

한데 앞뒤가 맞지 않으니 심경이 복잡할 터였다.

“만취하여 머리에 문제가 생길 리는 없고, 주화입마도 아닐 테니······. 설마?”

이훤은 입이 귀에 닿을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래. 나는 이십 년 후에서 돌아왔다. 죽은 후 눈을 뜨는 순간 화산이었지. 자! 이제 내가 너를 그토록 원했던 이유를 알겠느냐?”

흑의인은 자신이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으니 어안이 벙벙했다. 청하의 존재를 알면서도 제룡검존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그였다. 환생과 빙의조차 떠올리지 못한 자에게 회귀란 허무맹랑함 그 자체이리라.

이훤은 물끄러미 흑의인을 응시했다.

비웃을 일이 아니다.

천하제일의 지자나 덕이 높은 고승이라고 해도 쉬이 떠올릴 수 없는 이적(異蹟)이 아니던가.

“하, 하하, 하하하! 그렇군요. 그렇게 되면 앞뒤가 맞는군요. 어째서 가장 먼저 도모해도 될 만큼 허술했던 화산이 한순간에 강해졌고,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갔는지 알았습니다. 당신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군요!”

흑의인은 광소를 터트리다가 불현 듯 웃음을 그쳤다.

“한데 이 중요한 이야기를 알려주시는 이유가 뭘까요?”

이훤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이 식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죽였던 소마를 잡아 원한을 풀고자 했다. 한데 소마의 얼굴을 한 네 놈 또한 앞잡이에 불과하구나.”

“······.”

흑의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 이훤은 진정 그 말을 남긴 채 돌아섰다.

동시에 야산의 정상을 휘감고 있던 혈륜 또한 씻은 듯이 사라졌다.

“꺼져라. 가서 천룡에게 전해라. 목 씻고, 기다리라고 해. 내가 반드시 찾아서 원한을 갚겠다고 말이야.”

저벅저벅-

이훤은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흑의인은 이훤이 멀어지는 걸 지켜봤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첫 발을 뗐다. 서서히 뒷걸음질 쳤고, 단전에서 솟구친 내력이 전신을 휘도는 순간 용천혈을 통해 발출됐다. 그렇게 발끝이 돌았고, 상체까지 돌리며 경공을 펼치는 순간 입꼬리를 올렸다.

“엇.”

하나 주변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분명히 경공을 펼쳤음에도 마치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 순간 발목부터 인두로 지진 듯한 고통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크아아악!”

흑의인은 자신의 발이 일 장이나 떨어진 곳에 놓인 것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고개를 숙이는 순간 깔끔하게 잘려나간 채로 피를 쏟아내는 발목이 보였다. 그 때 귓가에 끈적거리는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좋았어?”

이훤이다.

산 아래로 사라졌던 이훤이 어느새 등 뒤에 나타났다.

흑의인이 넋을 놓은 사이 이훤이 어깨를 감싸며 한 번 더 속삭였다.

“크큭! 죽음을 각오했는데 살려주니까 한 순간 좋았지. 그렇지?”

흑의인은 폐부 깊숙한 곳에서 솟구치는 기묘한 감각에 몸을 비틀었다. 진저리를 치며 이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거짓이었던 건가?”

“소마야. 대충 십팔 년 후 쯤에 네가 나한테 이렇게 말 할 거야. 대형. 지금 뺏는 것보다 살았다고 안심할 때 빼앗으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어요. 그러니 지금은 술이나 한 잔 하시면서 곧 죽을지도 모른 채 웃는 놈들을 구경이나 하시죠. 라고 말이야.”

그 때 흑의인의 코 아래로 술 냄새가 스쳐갔다.

“술을 가지러 간 거였나?”

이훤은 술병을 기울이며 탄성을 흘렸다.

“하아, 맞아. 이 기분이야. 십팔 년 후에도 지금처럼 기분이 좋았어. 네 조언대로 안심하다가 죽는 놈들의 표정이 꼭 지금 네 얼굴 같았거든.”

“이런 미친!”

그 때 등 뒤에 있던 이훤이 흩어지듯 전면에서 뭉쳐들었다. 그는 흑의인의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싼 채 뚫어져라 응시했다.

“천룡아! 보고 있냐? 보고 있지? 수십 년 동안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면서 만들어낸 게 겨우 이거였냐? 조금만 기다려라. 이 새끼 다음은 너야!!”

그 순간 흑의인의 눈동자에 막이 덧씌워지듯 번들거렸다.

무당산 아래서 천룡이 죽어가던 사도에게 빙의할 때도 이와 같았다. 흑의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에 황망함을 금치 못했다.

“자, 잠깐! 천룡이시어. 아직 제가 할 일이······.”

이훤은 천룡이 나타나려는 순간 양 손으로 혈륜을 밀어 넣었다.

콰직!

흑의인의 머리가 호박처럼 터졌다.

하나 혈륜으로 휘감긴 공간 내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양손은 깨끗했다.

“크큭! 한 마디도 못 했으니 울화 좀 치밀게다.”

그가 돌아서자, 허공에서 술 한 병이 날아왔다.

탈마였다.

“원수라면서요. 그걸로 되겠어요?”

이훤은 대답 대신 술 한 병을 쉬지 않고 비웠다.

그리고 그 후에야 후련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 새끼가 이십 년 동안 자라면 진짜 원수겠지. 하지만 지금은 천룡의 하수인일 뿐이야. 결국 천룡을 잡지 않으면 이 갈증은 풀리지 않아.”

이훤은 탈마가 다시 건넨 술을 받아들었다.

이번에는 한 모금만 마신 후 턱짓을 했다.

“한데 너는 별로 놀라지 않네.”

탈마는 히죽 웃었다.

“반노환동에 빙의인지 환생인지까지 튀어나왔잖소. 게다가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희한한 건 나지. 내가 생각해도 태어날 때부터 기척을 감추는 것에 능했고, 눈으로 보기만 해도 신공절학을 익히는 건 말이 되지 않아요. 모든 건 신마라는 걸로 이해할 뿐이지. 그런 면에서 보면 가장 잘난 형님이 회귀 정도는 했어야 하지 않나 싶소.”

“미친 놈.”

이훤의 말에 탈마는 낄낄 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더불어 형님이 더 좋아졌어. 이십 년 후에도 우리가 친했다면 이번의 이십 년 후에는 더 친해지지 않겠어요?”

“지랄 마라. 천룡을 잡을 때까지 부려먹기만 하다가 버려버릴 거다.”

탈마는 술이 든 가죽 주머니를 흔들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술 사러 다니는 것도 귀찮아하는 사람이 나 같은 동생을 어디 가서 구하시려고?”

이훤은 입맛을 다셨다.

“우리는 정말 죽어서도 인연을 이어가자.”

“그나저나 회귀했다는 건 엄청 중요한 비밀 아닌가요? 이렇게 천룡에게 전해도 되는 겁니까?”

“이미 얻을 건 죄다 얻었다. 강호의 상황은 내가 살던 때와 완전하게 변했어. 그리고 사람의 성격이 하루아침에 변할 리 없으니 이제 와서 천룡이 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지.”

그 순간 탈마가 탄성을 내뱉었다.

“엇! 그럼? 형님이 경험했던 사람과 지금의 사람이 다른 행동을 하면······.”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럼 그 새끼는 아는 거야. 그리고 그 새끼가 천룡의 하수인이다.”

< 70, 소마(笑魔).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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