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216화 (216/226)

< 88, 폭풍전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2) >

곧이어 괴마들이 우르르 등장했다.

무림맹의 심처인 맹주전에 괴인들이 난입했음에도 놀라는 이가 없다. 오히려 그들의 등장을 반기듯 스스로 엉덩이를 움직여 자리를 만들었다.

“너는 말버릇이 어째 점점 안 좋아지냐?”

망아취자는 이훤을 타박하면서도 슬쩍 자리를 내줬다.

“스승님도 공적으로 몰려서 돌아다녀보라고요. 성격이 어떻게 되는지?”

“대형의 말이 옳습니다. 평소였으면 그냥 때렸을 텐데 이제는 공적처럼 눈치도 보고 그래야 하니 대형의 심기가 많이 불편했지요.”

탈마가 히죽 웃으며 자신의 옷자락을 내보였다.

“그래서 이런 것까지 하고 다녔다는 거 아닙니까?”

잠시 근황을 주고받은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문상 혜석자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한데 관주에게는 무언가 묘수가 있나 봅니다?”

이훤은 망아취자가 건넨 술을 마시며 입꼬리를 올렸다.

“폭풍전야라서 불길하다면서요?”

“그렇지요. 천마는 단순한 고수가 아니라 마교의 상징입니다. 그런 천마가 제대로 만들어진다면 마교는 유례가 없을 만큼 강성한 기세로 정파를 집어삼킬 겁니다.”

맹주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한데 우리는 마교의 위치를 몰라요. 그게 나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탁!

이훤은 술잔을 내려놓고 상체를 기울였다.

그리고 무언가 대단한 계획을 발표하듯 시간을 끌었다.

“폭풍전야라면······.”

“그렇다면?”

“폭풍이 오기 전에 다 때려잡으면 되지.”

괴마들은 이훤이 취마했다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하나 맹주를 비롯한 무림맹의 수뇌부들은 뜬금 없는 한 마디에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무슨?”

이훤은 문상의 반문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잘못된 거 있나?”

“아니, 말이 되기는 하는데······.”

무상인 검천제성 갈량은 속이 타는 듯 술을 연거푸 들이키더니 말을 건넸다.

“뜻이야 좋지. 폭풍이 오기 전에 다 때려잡으면 폭풍이 오든 말든 상관없으니까. 한데 문제는 어떻게 때려잡을 것이오? 애초에 놈들이 어디에 숨었는지도 모르잖소. 신강의 천산이란 말 그대로 성 전체를 의미한다고.”

그 말대로였다.

천산의 지류는 신강 전체에 퍼져 있었고, 남으로는 대수림과 북으로는 대막과 맞닿았다. 아닌 말로 신강에 숨으면 신장조차 찾을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찾으면 되지.”

무상 갈량은 눈을 끔뻑이며 이훤을 바라봤다.

그 역시 앞뒤 가리지 않는 언행으로 인해 몇 번이나 빈축을 산 경험이 있다. 다만 성정이 순후하고, 의협심이 넘치기에 따르는 후학이 적지 않았다. 한데 그런 그가 보아도 이훤은 참 가벼웠다.

‘세상 쉽게 사는구만.’

한데 너무 쉽게 사는 것 같으니 오히려 부러울 지경이다.

“방법은 있소?”

이훤은 갈량의 물음에 입꼬리를 올렸다.

“열심히 찾아야지.”

그 때 망아취자가 이훤을 향해 타박했다.

“이 놈아! 앞뒤 자르지 말고 설명을 해라. 맹주, 들어보시오. 본래 나 또한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이 녀석이 호언장담하는 것으로 보아 내 생각이 옳았던 듯하오.”

“그게 뭡니까?”

“제갈삭이 마교에 합류했고, 그 안에 강림혼요술을 익힌 자가 있다면 수하들도 적지 않을 게요. 그러니 최대한으로 기감을 흩뿌린 채로 수색을 하다보면 누군가는 걸리지 않겠소?”

한 마디로 천라지망을 펼친다는 의미였다.

한데 극소수의 사람으로 한 성 전체를 수색한다는 건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닌 말로 재수가 없으면 몇 년에 걸친 수색으로도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가능할 거요.”

뒤늦게 모습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형산파의 축융노도와 노룡군도였다.

망아취자는 그를 보고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신마를 추격할 당시 망아취자는 복수에 눈이 멀었고, 축융노도는 억지로 끌려온 사람답게 열성을 다하지 않았다. 하나 생사의 간극을 몇 번이나 함께 했고, 절명곡의 생존자라는 유대감은 옛 인연을 미화하기에 충분했다.

“화산의 불덩이가 아직 살아 있었군.”

“형산의 뺀질이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축융노도는 묘마와 악마를 알아보았음에도 따로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정체를 밝히기에도 애매했고, 애초에 인연이라고 할 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뒷일은 이 녀석이 맡을 테니 자네는 잠시 나를 보지.”

망아취자가 슬쩍 자리를 피하자, 축융노도가 뒤따랐다.

노룡군도가 나서서 이훤과 축융노도의 행적을 간단하게 전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신마가 있을수도 있음을 알렸다.

“왜?”

문상의 혼잣말이었지만, 좌중의 생각과 일치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답은 누구에게서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왠지 그걸 알려면 천마부터 잡아 족쳐야 할 것 같아.”

이훤의 읊조림이다.

그는 지금 제갈삭의 비동에서 보았던 천총대화를 복기하는 중이다. 천총대화는 한 장의 그림이지만, 복잡한 미로가 새겨진 지도였고, 삼라만상의 이치가 담긴 비급이었으며, 예언에 준할 만큼 기이한 도형이었다. 그렇기에 지식이 더해질수록 천총대화의 의미가 달라졌다. 처음에는 무림맹의 사건을 예견하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제갈삭 역시 신마의 진의를 엿본 것이 아닐까 싶다.

‘그가 고금제일의 지자라는 가정을 한다면······.’

지금껏 상리에 맞지 않던 행위도 모두 이해가 됐다.

그에게는 무림맹도, 제갈세가도, 이훤도, 심지어 천룡전마저 대업을 성사시키기 위한 계기와 과정에 불과했으리라.

“신마는 목적이 있어요.”

이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가야 합니다. 그러니 겸사겸사 마교의 위치도 알아오도록 하지요.”

“가능하겠소?”

제아무리 이훤이라고 해도 수만 명의 교도를 모두 상대하는 건 불가능할 듯했다.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 적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붕괴될 정신이 걱정됐으리라.

“때가 되면 부를 테니 준비나 하고 있어요.”

“그럼 가는 길에 마실 술이라도 준비해놓겠소.”

이훤은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귀에 손을 가져다댄 후 입꼬리를 올렸다.

“탈마가 수레와 술을 알아서 준비했으니 그냥 마시던 술이나 드시오.”

맹주는 그제야 술자리에서 탈마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헛웃음만 연발했다.

“허허.”

*

제갈삭은 청룡령과 백호령을 좌우에 대동한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수십 장 아래의 연못에서는 오색창연한 빛이 쉴 새 없이 번뜩였다. 달빛이 각종의 보석과 부딪쳐 만들어낸 광경이었다.

하나 그는 현란한 빛무리를 뚫고 연못을 살폈다.

“천극담에서 가져온 중수가 모두 사라졌군.”

청룡령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천마의 몸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백호령은 표정을 굳혔다.

“이제 시작이로군요.”

그 또한 연못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팔대마가의 전대 가주인 원로들이 팔괘의 방향에 맞춰 정좌한 상태였다. 그들이 쉴 새 없이 주술을 읊조렸고, 그에 따라 빛무리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주술처럼 들리는 것이야 말로 천마신공의 구결일 터였다. 하나 팔대마가에 전해진 구결은 따로 떼어놓고 보면 아무 뜻도 없었다. 다만 여덟 명이 동시에 외치면 말의 어조와 상황에 따라 뭉쳐서 들리곤 했다.

천마가 되려면 그것을 듣는 것이 첫 단계였다.

“마교는 봉문한 상태이고, 팔대마가는 복종을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교도들 사이에도 천마가 재림하여 만마가 앙복하고, 천하를 피로 물들여 새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제갈삭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산 하나의 내부를 파내 만든 공간의 천장에는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크기의 구멍만 남아 있었다. 그는 구멍을 통해 달과 별의 위치를 보며 천기를 헤아렸다.

“취마의 등장은 피할 수 없으나, 이십팔수의 그림자만이라도 걷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묘수가 있으십니까?”

그는 청룡령을 보며 턱짓을 했다.

“남마교의 교도 중 교 안에 들이지 않은 자가 몇이나 되는가?”

“팔백 명 정도입니다. 제법 칼을 쓰지만, 신마의 심득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혈겁이 일어났을 때에는 쓸모가 없을 겁니다.”

“좋군. 그렇다면 혈겁이 일어나기 전에 써야지. 그들에게 명하여 장강 이남을 떠돌며 혈사를 일으키도록 하라. 최대한 눈에 띄고, 잔인하게, 백주대낮에 일을 처리해라.”

“공포를 불러일으키도록 말이지요?”

“그렇다.”

청룡령은 잠시 자리를 비웠고, 백호령에게도 비슷한 명령이 전해졌다.

“취마가 예상 보다 빠르고, 많이 심득을 퍼트렸다. 강호의 고수가 비온 뒤의 죽순처럼 사방에서 솟아나니 시간이 흐른다면 우리에게 좋을 것이 없다. 그러니 무림맹과 구파오가에게 일거리를 줘라. 그들이 정신없이 바쁘다면 취마의 양 날개가 꺾일 것이다.”

“그리 하겠습니다.”

백호령마저 자취를 감췄다.

제갈삭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폭풍이 딱 한 번이라도 몰아친다면 이 세상이 뒤집힐 것이다. 그러니 딱 한 번만 불태우면 되는 것이야.”

그는 다시 연못을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고금을 통틀어 가장 화려하고, 강렬한 불쏘시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힘을 내자꾸나.”

*

며칠 전 첫 눈이 내렸다.

강호는 더없이 평화로웠다.

무림맹은 굳건히 자리를 지켰고, 무림공적인 괴마들은 자취를 감췄다. 비록 대강남북에서 흉수와 원인을 알 수 없는 혈사들이 연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강호에 발을 들인 이상 그 정도의 혈사는 감내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나 무림맹마저 느긋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명 마교, 아니 제갈삭이 꾸민 짓이겠지요. 이대로 혈사가 연이어 벌어진다면 강호의 분위기가 바뀔 겁니다.”

“취선관주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는가?”

“아직입니다.”

“후우, 그렇군.”

문상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맹주를 위로했다.

“그가 떠나고 고작 해야 달포가 흘렀습니다.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단시간 내에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마교의 총본산을 찾는 건 불가능하지요.”

“하나 혈사가 더 번지기 전에 맹의 전력을 파견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하게 희생되는 이들이 늘어날 걸세.”

맹주의 말에 문상은 고개를 숙였다.

생각 같아서는 수하들을 모두 내보낸 후 혈사를 일으키는 자들을 소탕하고 싶었다. 하나 천지가 요동칠 대혈투가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아닌 말로 무림맹의 전력을 대강남북에 파견한 후 갑작스레 마교가 발호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아마 곤륜파가 잠시 막아내겠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고, 이내 중원까지 놈들의 발아래 짓밟힐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혈사를 일으키는 자들의 흔적을 쫓고 있는 중입니다. 며칠 안에 결과가 나올 테니 그 때까지는 참아 보시지요.”

“하아, 무림맹주랍시고 자리나 지키는 내 신세가 참으로 처량하군.”

그 때 창 밖에서 인기척이 전해졌다.

그리고 탈마가 떠날 때와 똑같이 싱글벙글 웃으며 얼굴을 내밀었다.

“그 자리는 그만 지키시고, 함께 가죠.”

맹주는 탈마의 갑작스런 등장에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말인가?”

“대형께서 소집령을 내렸습니다.”

권한도 의무도 없이 근본 없는 소집령에 화가 날 여유도 없었다.

“찾았는가?”

탈마는 입꼬리를 올렸다.

“대형이 하겠다고 하면 이뤄지는 게 이 세상이라고요. 자! 지금부터 호명하는 사람을 불러주세요. 그 사람들은 저와 함께 천마와 마교를 때려잡으러 갑니다!”

“오오!”

맹주와 문상이 눈을 빛냈다.

하나 잠시 후 눈을 끔뻑이며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탈마는 고작 해야 여섯 명의 이름만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인가?”

“네. 대형이 여섯 명 외에는 필요 없다는데요.”

< 88, 폭풍전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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