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악역들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5)
“왜요, 아가씨?”
“…나 여기가 좀 익숙해.”
“벌써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여길 보셨다고요?”
메리제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오늘 처음 궁 밖으로 나온 내가, 여기가 익숙할 리가 있나….
‘장터 구색이 친근하대도 그건 파는 음식 이야기지, 이 풍경은 정말 처음인걸.’
전생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 소년 이야기에서는 움직이는 사진도 나오던데, 여기는 마법이 있어도 그림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마저도 귀족들의 전유물이어서 서민들의 생활상은 보여주지 않으니까.’
그랬기에 이 저잣거리 풍경은 오늘 처음 보는 것인데.
어디선가 꼭 이런 날씨, 이런 거리, 딱 이 정도로 북적대는 사람들의 군집을 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이런 게 데자뷔인가?’
나는 영 확실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리제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내게 마시멜로 구이를 건넸다.
“이거 같이 찍어 먹어야 한대요.”
달걀 크기의 딱딱한 과일 껍질로 된 용기에 담긴 초코 소스였다.
‘고증 참.’
나는 속으로 웃으며, 메리제인이 이끄는 대로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다니면서 드시면 어디 묻을 수 있으니까, 여기서 다 드신 뒤에 움직이도록 해요.”
“그래.”
우리는 시장통에서 꺾어 들어가는 골목 중 사람이 없는 곳으로 골라 들어갔을 때였다.
나는 거기서, 아까와 같은 기시감을 다시금 느꼈다.
“어디 불편하세요?”
내가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자, 세실리아의 첫 외출에 긴장해 있던 메리제인이 놀라서 물었다.
“그런 건 아닌데….”
서민 지구의 골목 같은 게 전생에서와 비슷한 느낌이 나서일까? 아까부터 왜 이러지.
그런 혼란을 곱씹으며 마시멜로에 초콜릿 소스를 찍어 우물거릴 때였다.
이 풍경에서 이어지는 장면들이 갑자기 뇌리를 스쳤다.
“메리.”
“네, 전하.”
“저기 누가 쓰러져 있는 것 같아.”
“네?”
나는 우리가 있는 골목 안쪽에서 꺾어 들어가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된 것처럼 골목의 풍경이 비틀비틀 이어졌는데, 그 장면들의 끝에 갑자기 시야가 풀썩 내려앉은 것이었다. 마치 카메라를 든 사람이 엎어진 것처럼….
“저 골목에요?”
메리제인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리의 위치에선 내가 말하는 곳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머뭇대는 메리제인을 놔두고, 나는 홀린 듯 그쪽으로 걸어갔다.
“아니, 전하, 어디 가시는 거예요?”
화들짝 놀란 메리제인은 조금 떨어져서 따라오던 란셀과 브랜든을 재촉하듯 손짓했다.
나는 그저, 이 기묘한 감각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골목의 입구에 다가섰을 때.
골목 안에는 한쪽 벽에 처박힌 듯 엎어져 있는 거적때기가 있었다.
그 부피로 보아 내 또래 정도일까.
‘아까 머릿속에 스친 장면대로야…!’
뒤따라온 메리제인이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맙소사,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이래…. 전하, 험한 것 보지 마세요.”
정말 내 말대로인 것에 깜짝 놀랐으면서도, 메리제인은 내 머리를 안아 내가 그쪽을 보지 못하게 했다.
“기사님들 시켜서 경비대에 신고 넣고, 우리는 이만 가요.”
“잠깐만.”
나는 메리제인을 슬며시 밀며 고개를 들었다.
피하거나 기사들에게 처분을 맡기는 게 옳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시체도 아니고, 내 또래 같고….’
무엇보다 몸을 제대로 웅크리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떠는 것이, 그 애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파하는 것 같은데….”
오지랖인 것은 알았지만, 곤경에 처해 있는 내 또래를 보고 못 본 척할 만큼 나는 모진 황녀님이 못 되는걸.
일종의 정의감도 동했다.
‘걱정할 것 없어. 란셀과 브랜든에, 은신한 채 따라오는 테이와 제이크도 있고. 나를 저보다 더 아끼는 메리제인도 있는걸.’
나는 살금살금 그쪽으로 향했다. 내가 머릿속으로 내린 계산을 알 리가 없는 메리제인만 안타까운 소리를 냈다.
“전하….”
“조심하십시오.”
이런 것까지는 로젤리아의 지시 사항에 없었던 듯, 란셀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게로 바싹 붙었다.
구릿빛 피부에 밀빛 머리칼을 목덜미까지 기른 란셀은, 아기방 문지기나 하던 초임 시절부터 지난 10년간 성심껏 나의 무료한 일상을 잘 지켜주었다.
사실 그것은 내 호위 기사 모두 마찬가지였고.
‘내 호위를 맡은 덕분에 그때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가지 않아도 됐으니 행운이라 여겼다는 것도 같아.’
또 한편으로는 그가 얼굴에 어떠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인물임을 이제는 알았다.
‘아기방 문지기 시절에는 맨날 굳은 낯이라 걱정했었는데, 애초에 큰 불만이 없었는지도….’
나는 란셀이 오늘의 성내 활동에서 조금의 보람을 찾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꺼이 그의 보호를 받아들였다.
란셀까지 내 돌발 행동을 돕자 메리제인이 안절부절못했다.
“아이, 참.”
그녀의 걱정스러운 말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나는 그 거적때기의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그건, 정말로 내 또래의 아이였다.
“하아, 하아….”
그리고 그 아이는, 꽤나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밭게 내뱉는 숨소리가 듣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끄으…. 허억, 헉.”
“아이고, 아가씨. 지지예요.”
지지 아닌데.
내가 거적때기로 본 것은 가까이서 보니, 사실 꽤 고급스러운 면으로 만들어진 로브였다.
귀족까지는 아니어도 부유한 평민이어야 입을 수 있는 재질이었다.
다만 어디에 부딪혔는지 바닥을 한껏 굴렀는지 흙먼지가 뿌옇게 묻어 있었고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을 뿐.
“저기, 얘. 괜찮니? 응?”
나는 아무래도 걱정하는 마음이 들어서 그 아이의 어깨를 슬며시 흔들었다.
검은 장갑을 끼고 있는 아이의 손이 움찔거렸다.
“얘, 괜찮아?”
순간적으로 그 로브 너머로 홧홧한 열기가 느껴졌다. 어디 아픈가?
‘열이 심한가? 이렇게 느껴질 정도면….’
그것이 어찌나 뜨거운지 조금 찌릿한 듯도 했다.
이 계절에 정전기도 아니고…?
“얘, 괜찮아? 정신 차려 봐.”
“으흐, 하아….”
내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손을 떼지 못하고 조금 더 흔들자, 숨을 토해내며 부들대던 아이의 호흡이 차츰 진정되기 시작했다.
내 손이 적응한 건지, 그 몸의 열기도 미지근한 정도로만 느껴지게 되었다.
“…하아.”
깊은숨을 내뱉은 아이는, 그것으로 비로소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얘, 괜찮아?”
“아가씨, 잠시만요.”
보다 못한 메리제인이 그 아이의 어깨를 잡아 그 낯을 확인하려 했다.
돌아누운 아이는 순간적으로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으….”
잇새로 신음을 내뱉는 아이의 하관을 보며, 나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그 입매와 비쩍 마른 턱선 같은 것이….
‘꿈속의 그 아이?’
틀림없었다. 최근에는 자주 보지 못했대도, 헷갈릴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 조금 작은 체구도 그렇고….’
나는 토끼 눈을 뜬 채로, 메리제인이 그 아이를 돌보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신이 좀 드니?”
메리제인이 재차 그 아이를 흔들 때였다.
아이가 슬그머니 눈가를 덮었던 손가락 사이를 벌렸다.
손가락 틈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초점을 맞추는 눈동자. 그것은 분명히….
“헉.”
메리제인이 숨을 밭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골목에 낮게 울려 퍼졌다.
손에 가려져서 제대로 보았지만 그건 분명.
‘빨간 눈….’
그러니까, 그 아이는 이 세계에서 악마의 상징이라고 일컬어지는 빨간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정말로, 내가 꿈속에서 이따금 만났던 아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진짜 이 세계의 인물이었어!’
나는 반가움 반 놀람 반의 마음으로 아이를 지켜보았다.
‘그나저나 어쩌다 여기서 이 꼴인 거지? 그 가주라는 자가 못 나가게 하는 거 아니었나…?’
내가 아이의 상황을 파악하려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절그럭.
그제야 아이의 빨간 눈을 확인했는지, 란셀이 제 검을 확인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렇구나. 이 정도로, 빨간 눈에 대한 미신과 거부감이 이 사회에 팽배해 있구나.
‘모두가 일종의 미신임을 알겠지만….’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격랑은 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생애에 한 번은 겪는 일이었고, 그래서 이 세계의 트라우마와도 같은 거였으니까.
‘같이 훈련하고 자란 동료들이 격랑 속에서 죽어간 란셀이라면 더더욱….’
란셀도 제 반사적인 움직임에 스스로가 참담할 거였다. 더구나 상대는 아파서 쓰러져 있던 어린아이 아닌가.
‘…그래서 사람들한테 맞기라도 한 건가.’
렌틸 자작이 읽게 했던 책의 활자 사이사이에 혐오가 배어나던 것을 생각하면, 또한 란셀의 순간적인 반응을 보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린치를 가하는 무지렁이들이 있을 법도 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상황을 납득했다. 그리고… 내가 납득했다는 것이 한편으로 참담했다.
어쨌든 난 누구도 무엇으로도 차별받으면 안 된다는 현대 사회를 살다 왔으니까.
메리제인으로서도 그게 미신이라는 걸 알아도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빨간 눈을 볼 일은 없었으니까.
그런 반응들 때문이었을까.
아이의 눈동자가 체념의 빛으로 물들더니, 검은 장갑을 낀 손에 온전히 가려졌다.
나는 얼굴을 가리고 쌔액, 쌕, 숨을 고르고 있는 아이를 쳐다봤다.
‘밝은 데서 보니 더….’
젖살이 빠지지 않았어야 할 턱선은 물론이요, 소매 밑으로 드러난 팔뚝 같은 게 꽤나 앙상해 보였다.
나는 몇 해를 지켜본 아이를 떠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도울 수도 없어 아이를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 괜찮습니다.”
아이는 입술을 오물거려 간신히 말소리를 만들어냈다. 마치 중얼거리듯이.
그리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일어나 앉고서는, 얼굴을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실눈으로 한참을 더듬대던 아이의 검은 장갑을 낀 손끝에, 안경이 하나 쥐였다.
‘검은 장갑? 안경…?’
나는 얼마 전 신년 하례식 때 내가 찾던 소년을 떠올렸다.
검은 머리칼, 안경, 제가 그리 집착하던 여인과 춤출 때도 벗지 않던 검은색 장갑.
게다가 같은 집에 살고 있던 갈색 머리의 소년까지.
빨간 눈을 빼면, 그의 모든 것은 ‘공제눈’의 한 인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내가 신년 하례식에 보지 못해 아쉬워했던, 이 세계의 서브 남주이자 흑막이었다.
“너, 혹시….”
“아가씨!”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팔을 잡았다. 메리제인의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천천히 내 쪽을 돌아본 아이의 붉은색 눈동자가 당혹과 분노, 두려움 같은 것을 담아 요요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