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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8화 (18/220)

18화. 조력자를 구하는 중입니다 (1)

「정신을 차려 보면 늘 그의 눈동자가 진득하게 따라붙고 있었다.

아멜리는 오늘도 저를 지켜보는 그 남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오늘도 연회장 가장 구석진 곳에 기대서서 와인 잔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는 그 신사,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안경 너머로 사람들을 살피는 그 무심한 눈동자의 미남을 두고, 사교계의 영애들은 금욕적인 매력이 있다며 흘끗대곤 했다.

누구와도 닿기 싫다는 듯 손목 위까지 꼼꼼히 감싼 검은색 장갑에, 마지막 단추까지 채워 입은 정장.

그가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음에도 영애들은 그를 선망했다. 이지적이라거나 고독하다거나 하는 수식어를 붙여 가면서.

모두의 시선을 무시한 채 연회를 관망하고 있는 그 남자를, 아멜리는 감히 저와 같다고 생각했다.

저처럼 외롭고, 저처럼 스며들지 못하는 존재라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따라붙었을 것이다. 이 촌극이 질렸다는 듯 가뿐히 자리를 떠나는 그를, 마치 홀린 것처럼.

바스락.

저도 모르게 내버린 인기척. 그때, 아멜리는 제 몸을 휘감는 한기를 느꼈다.

“레이디께서는 늘 무모하시군요.”

목을 울리는 데 어떤 열의도 내비치지 않는 듯한 낮은 울림이었다. 마치 무저갱에서 울리는 듯한….

그 순간, 아멜리는 제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 녹색 눈의 공자님을 떠올렸다.

그가 빛이라면, 눈앞의 이는 어둠이리라.

“저, 저는….”

“이번에도 저를 동정하시는 겁니까.”

순간적으로 아멜리의 목이 야트막하게 졸려왔다.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반사적으로 신성력을 운용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 그런 것이.”

“자꾸 제게 참견하시는군요.”

갑작스레 저를 냉정하게 대하는 그의 태도처럼, 서늘하고 숨 막히는 분위기가 대기를 감쌌다.

아니, 이 역시 분위기가 아니라 실제로….

“윽….”

“자꾸만 거슬리게 구시고. 자꾸만 제 선을 넘어오시니 저는….”

그리 말하는 그의 얼굴에 조금, 고통스러운 빛이 흐르는 듯도 했다.

아멜리의 푸른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일렁였을 때.

“그쯤 하지.”

관목의 잎사귀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가 나며, 반대편에서 인영이 나타났다.

그 다정한 녹색 눈의 공자님.

켁, 켁, 갑작스레 숨통이 트이자 아멜리는 막혔던 숨을 몰아쉬며 안도했다.

“소공작께서 어찌.”

“…….”

그 공자, 레오폴트는 대답 대신 루시페우스의 검은 장갑에 시선을 보냈다.

귀족파의 가장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알비누스 후작가. 그 일들을 직접 행했을, 저 손.

그리고 방금 그녀에게 분명 어떤 위해를 가했을….

으득. 레오폴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무고한 영애께 무슨 결례를.”

“레이디께서 무고하십니까.”

루시페우스의 안경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아멜리는 그의 눈동자가 붉게 빛난다고 생각했다.

“황실파의 수장이 되실 소공작과 한배를 타신 사이 아닙니까.”

물음표가 빠져 있는 그의 말은, 한편으로 무언가를 확인해주길 바라는 듯도 했다.

아멜리의 자그마한 손이 저도 모르는 사이 허공을 날았다.

짝.

“밀리…?”

“저에 대해 알지도 못하시면서 그리 말하지 마세요.”

루시페우스는 고개가 돌아간 채 한참을 있었다. 그의 낯에 떠오른 것은 명백한 씁쓸함이었다.」

원작의 서브 남주이자 흑막인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누구도 곁에 두지 않는 인물.

그런 그는, 친절을 베푼답시고 그가 그어둔 선을 넘어버린 아멜리에게 끌리게 된다.

그녀의 씩씩함에 감화되면서도, 그걸 망치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집착하고 폭력적으로 군다.

‘제대로 된 사랑만 받았어도 그렇게 안 컸을 텐데.’

그 양가적이고도 파괴적인 감정은, 그의 가여운 개인사에서 비롯된 것이 자명했다.

그는 흑화하기 딱 좋은 설정들을 다 가진 인물이었으니까.

조실부모하고, 입양된 외삼촌 가족에게 학대당하고, 가출은 매번 실패.

마력을 타고난 덕에 마탑으로 도피하나 했더니 거부당하고. 귀족들이 다니는 아카데미에 진학하지만 사생아의 사생아라며 왕따 당하고.

결국 독학으로 마법을 터득한 그는 귀족파가 음지에서 꾸미는 일을 수행하는 해결사가 되었다.

‘알비누스 후작의 수족인 척 굴었지만, 언젠가 죽이고 싶지 않았을까?’

황폐해진 그의 내면에 솜사탕 같은 분홍색 머리칼을 살랑이는 아멜리의 친절은 단비와도 같았을 거였다.

인간적인 온정을 애정으로 착각하여 집착하면 안 될 일이었지만….

‘너무 불쌍하잖아.’

여러 번 ‘공제눈’을 재주행하는 동안, 언젠가 한 번쯤은 루시페우스의 입장에 공감하며 읽었던 적도 있었다. 당시 내 삶이 힘들고 마음이 외로운 때여서 그랬으리라.

‘그런데 그게, 그 아이였다니.’

그러고 보면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아비도 모른 채 태어나, 돌도 되기 전에 눈앞에서 생모가 죽었으니까.

‘그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야 못하겠지만….’

그리고 입양돼 온 곳에서의 학대.

물리적인 폭력은 없어도 방치, 무관심, 폭언과 같은 정서적인 학대는… 내가 잠깐씩 봐도 참담한 수준이었다.

‘정말로, 사랑다운 사랑을 못 받아서 그 루시페우스가 되는 건가 봐.’

첫 잠행을 마주치고 돌아오는 마차 안.

나는 갑작스레 마주친 그 꿈속의 아이, 루시페우스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사례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내가 제 팔을 덥석 잡았을 때, 그 아이는 수많은 감정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건 대체로 당혹감이었으리라. 와중에 말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다.

어떤 감정이 실려 있다고 여길 수 없을 정도로.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안경을 끼고 인파 속으로 사라진 소년의 뒷모습.

‘조금 체념한 얼굴…이었지.’

아홉 살, 전생 기준으로 따져도 기껏해야 열한 살일 텐데 벌써 감정을 꾹꾹 눌러둘 줄 알게 된 아이.

창가에 옹송그리고 누워, 새어 들어오는 달빛만 바라보던 그 창백한 낯이 떠올랐다.

어찌 그걸 알아보지 못했을까.

‘…눈 색깔이 원작에서 묘사된 거랑 달라서.’

상상도 못 했다. 열 번은 읽은 ‘공제눈’ 속 서브 남주의 눈 색깔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갈색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빨간 눈에 대한 이야기는 원작에 지나가면서라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스칼렛 이미지도 꽤 달랐고 말이야. 원작의 내용이… 절대적인 건 아닌 거지.’

외출 제한이 해금되어 내 세계가 넓어지면서, 나는 내 기억과 다른 세계의 모습을 마주치곤 했다.

황성의 크기나 평민들의 생활상 같은 건 책으로도 익힐 수야 있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에 대한 진짜 정보는… 직접 겪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었다.

‘문제는 황성에만 갇혀 있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인데.’

다시금 아쉬워지는 오늘의 계획.

오늘 케인을 찾으면, 그를 회유해 내 수족이 되게 할 예정이었다. 성내의 정보를 수집하고 아멜리의 조력자가 될 평민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겸사겸사 월급도 후하게 줘서 2구역 집을 구해주면 딱이었는데.’

나는 문득, 마치 놀이동산에서 집에 가기 아쉬워하는 아이처럼 운을 띄웠다.

“다음엔 또 언제 나올 수 있을까아?”

눈동자 울먹울먹. 마차 안이어서 위장 보닛을 벗었기에 세실리아 얼굴이 잘 먹힐 거였다!

메리제인에게 무언가 내가 바란 것을 못 이뤄줬다는 부채감을 자극하길 바라며.

“글쎄요. 황태자 전하께서도 한 달에 한 번쯤이나 나오실까 말까였다던데….”

나는 말 줄임표에 담긴 말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알아 분한 마음이 들었다.

‘신성력도 마력도 없는 나는 언감생심이라는 거지…!’

혹여 다음번이 있대도 로젤리아의 명을 우선시하는 호위 기사들이 나를 3구역에 데려갈 리도 없고. 그렇다고 로젤리아와 함께 나올 수도 없고….

‘아, 누가 나 대신 케인 어디 있는지 찾아줬으면.’

케인을 구슬려서 내 심부름꾼으로 삼으려 한 건데, 심부름꾼이 없어서 케인을 찾을 방법이 없다.

나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걷는 것만 같은 느낌이 되었다.

‘내가 안일했지. 이렇게까지 계획이 꼬일 줄은 몰랐어….’

드디어 잠행을 나간다는 마음에 들떠서, 내 신분과 황실을 너무 얕봤다.

그때, 메리제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늘 드신 것 중에 생각나시는 것이 있으시면, 이 메리나 기사님들에게 심부름을 시키세요.”

맞은편 자리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란셀과 브랜든도 고개를 끄덕였다.

“심부름…?”

“네, 저희는 성내에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니까요.”

곰곰이 생각에 빠진 내 낯이, 서운함 가득한 것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심부름. 심부름이라.

‘그래, 케인 찾는 걸 굳이 몰래 할 필요가 있나?’

신분과 황실이 거추장스럽다면, 신분과 황실을 이용하면 된다.

나는 속으로 씨익 웃었다.

“그래, 세실. 오늘 바깥나들이는 어땠느냐?”

고심 끝에 허락한 내 첫 잠행을 기념할 겸 내 무사함을 직접 확인할 겸, 아버지는 바로 그날 저녁 나와 만찬을 함께하셨다.

따라 나가지 못해 불안해했던 로젤리아도 동석했다.

오늘의 메인 디시는 바깥에서 기력을 소진했을 나를 위한, 사골 육수에 제철 채소와 소갈비를 넣고 뭉근히 끓인 보양식 스튜.

스튜라 쓰고 탕이라 읽어도 될 법한 그 맛에 스푼질을 멈추지 못하던 나는 아버지의 물음에 고개를 반짝 들었다.

기다리던 말이었다.

나는 우선, 세실리아의 얼굴로 해맑게 웃어 보였다.

“책으로만 읽던 황성의 활기찬 모습을 제 눈으로 살필 수 있어서 너무 값진 경험이었어요.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아버지.”

“그래, 그래. 무사히 다녀오고 아픈 데도 없다니 다행이구나.”

아버지께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 건강이 모든 원흉이었다.

‘오늘만 해도 내가 다녀오자마자 난리도 아니었지….’

황궁의가 달려와 건강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간 것은 물론이요. 내 약재 전용 온실에서 공수된 약초들을 담뿍 넣어 만든 약차에 레베카의 신성력 세례까지.

나는 작게 어깨를 떨었다.

“특히 무엇이 재밌었느냐?”

“메리가 저잣거리의 다양한 군것질거리를 맛보게 해줘서 좋았어요.”

“그래, 네 형제들도 성내에 한 번 다녀오면 황궁 식사가 맛없다고 싫어하곤 했었지.”

“역시 세실은 의젓해서, 오늘 식사도 맛있게 잘 먹는구나.”

“저잣거리 음식은 가끔 먹어야 좋을 맛이던걸요? 어디, 황궁 주방 요리만 할까요.”

“우리 세실은 사려 깊기도 하지, 황궁 요리장 마음도 챙길 줄 아는구나.”

내가 무사히 다녀온 것만으로 안심한 로젤리아는 어떻게든 나를 기특히 여기려는 기색이었다.

“별 탈 없었지? 기사들 말 잘 들었고?”

“그럼요. 저잣거리가 북적대긴 했는데 황성 치안이 좋아서인지 별문제 없었고요. 다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말을 좀 안 듣긴 했지만, 그건 메리제인의 말이었으니까….

그런 사정은 감춰두고서, 나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지금쯤 말을 꺼내면 어색하지 않겠지?

“다만, 평민 아이들이 또래 친구들끼리 모여서 노는 걸 보니 조금 부럽더라고요.”

그런 것 본 적 없지만…. 나는 이 자리에 증인이 돼줄 메리제인이 없음을 감사히 생각하며 조금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또래 친구… 말이냐?”

“네에.”

“아우렌바흐의 손주가 네 말벗이지 않느냐.”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아버지의 대답에, 나는 우물쭈물하며 준비된 거짓말을 내뱉었다.

“아우렌바흐 소공자는 자주 볼 수가 없고, 이제는…. 다른 친구도 있으면 좋겠는걸요.”

레오, 미안! 이게 다 너를 위해서란다!

나는 레오폴트와 단둘뿐인 친구인 설정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케인을 찾을 방법은 아버지를 통하는 것밖에 없는걸.

내가 뭔가 원하는 게 있어 보이는 기색에, 아버지의 푸른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그래서?”

“저어, 제 또래의 호위를 갖고 싶어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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