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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26화 (26/220)

26화. 흑막의 어린 시절을 주시하는 중입니다 (2)

나는 몇 달 전 마지막으로 꿈에서 본 루시페우스를 떠올렸다.

마탑에 들어갈 줄 알고 꿈에 부풀어 떠나갔다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거부되어 알비누스로 돌아오고야 만 루시페우스.

하염없이 울고, 제 처지를 비관하던 그 아이의 마른 어깨….

도망치고, 후작가의 기사들에게 잡히고, 도망치고, 갈 곳이 없어 제 발로 돌아오고, 도망치고, 다쳐서 실려 오고….

절망 끝에 미약한 희망을 엿봤으나, 결국 마탑에서마저 거부된 그 처량한 어깨.

‘루시페우스도 내년이면 아카데미에 들어가겠지.’

황성에서 귀족 행세를 하려면 누구나 아카데미에 가야 하니까.

열세 살에 입학하는 아카데미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학비가 비싸 같은 귀족이어도 모두가 입학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족가 자제들이 고급 교양과 함께 친분을 다지는 곳이어서, 황성 귀족들은 자녀를 모두 아카데미에 보냈다.

이는 그 가문이 가진 부를 과시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알비누스 후작 역시 체면은 열심히 차리는 이였으니 그런 관례를 어길 리 없었다.

‘그러니까 루시페우스를 눈엣가시로 여기면서도 매번 다시 잡아 오곤 했던 거지.’

이복누이의 아들을 홀대한 티가 나면 가문의 위신이 상하니까.

하지만 그게 어려서부터 인맥 쌓게끔 데리고 다닐 정도는 아니었는지, 루시페우스는 지금껏 황실 연회 한번 나오지 못했다.

‘내년이면 아카데미 들어가는데 올해도 얼굴 한번 안 비추고. 수확제 하나 남았는데, 그때도 안 오려나…?’

내년 아카데미에 입학함으로써 처음으로 귀족 사회에서 활동하게 될 루시페우스.

당연히도… 그 아카데미 생활은 평탄하지 않을 예정이다.

아카데미에서마저 또래들에게 사생아의 사생아라며 멸시당하는 것이, 그가 흑화하여 본격적으로 마법을 독학하는 결정적인 계기였으니까.

‘루시페우스의 역할도 나름 중요하니, 적당히 원작대로는 굴러가게 둬야 하는데. 조금 덜 외로우면 좋겠지만….’

나는 꿈속의 아이가 루시페우스라는 사실을 안 이후로, 그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한데 내가 실질적으로 손쓸 방도가 없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황권이 강하다지만 외부에 노출된 적 없는 후작가의 자제를 무작정 파양시킬 수도 없고.

마탑의 결정을 번복하게 할 수도 없고….

‘내 손발이 돼줄 직속 소대는 아직 준비 중이고, 활동을 시작하더라도 아카데미 생활에 관여할 수도 없고….’

그런 무력감을 느낄 때마다, 나는 차라리 원작의 억지력을 믿으며 그 견고한 세계관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건 구원일 것이다.’

그 구원이, 다른 누군가의 불행은 아닐 테니까.

그가 저지를 악행을 대폭 걷어내면 그가 죽고 마는 엔딩도 바뀔 테고, 그러면 그도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아이, 저, 저….”

내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케인은 연신 혀를 끌끌 차며 리나와 레오폴트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리나는 날랜 몸짓으로 레오폴트를 갖고 노는 중이었다.

“케인.”

“예, 전하. 밀빵은 폴리나네 휴업이 끝나는 대로….”

케인은 숙련된 빵 조달자로서 잽싸게 답했다. 으음, 너무 오래 시켰나.

‘아멜리 인증 맛집’인 폴리나네의 밀빵과 공주와 쏙독새의 미트볼을 사오는 것은 어느새 한 달에 두 번 정기적인 임무가 되어 있었다.

건강 위주인 세실리아의 식단에 내리는 한 줄기 조미료 맛이었기에, 나는 그 짭조름한 음식들에 푹 빠져 있었다.

아, 생각하다 보니 혀끝에 그 감칠맛이 맴도네.

‘케인이 정식 기사가 되면, 케인 시키지 말고 정기적으로 배달받을 수 있는 길을 뚫어야겠다.’

나는 내 계획에 흡족하여 속으로 후후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 수확제 때 기사 작위 받잖아. 느낌이 어때?”

“아…. 뭐, 아직 확정도 아닌데요.”

“란셀 경이 너 정도면 심사는 무조건 통과라고 했어.”

“스승님께서 그냥 좋게 말씀해 주시는 거죠.”

케인이 멋쩍게 목뒤를 긁으며 허허 웃었다. 어느새 란셀만큼 키가 커진 그에게서는 어느덧 청년의 기미가 비쳤다.

나는 그의 다부진 몸을 보며, 신뢰감 가득 담은 목소리를 냈다.

“당연히 그리돼야지. 맡길 일이 많은걸.”

“예?”

나는 케인을 올려다보며 후후 웃었다. 슬슬 준비에 박차를 가할 때가 됐다.

매해 11월 초에 열리는 수확제는 한 해의 마지막 축제 주간이었다.

개막식이 열리는 그 첫날, 황궁도 나름대로 바빴다.

사냥 대회나 최고의 농작물 경연 대회 같은 행사들은 황성 내 광장이나 황성 북쪽의 숲에서 열리지만, 개막식과 폐회식만은 황궁에서 열리기 때문이었다.

이게 끝나면 신년 하례식 때까지 두 달간 황궁 연회가 없으니, 황성에 머무르는 귀족들은 빠짐없이 참석했다.

개막식을 준비하는 프리지어궁은 오늘도 떠들썩했다.

특히 내 드레스 룸이….

“아우, 패티, 갑갑해!”

“초겨울이라 날씨가 추워서 어쩔 수 없어요.”

“지금까지 잘만 다녔는데, 왜!”

“오늘은 기사 서임식부터 참관하신다면서요.”

그리 말하며 패티샤는 드레스 위에 코트를 입은 내게 모직 케이프까지 덧입히려 했다.

치마 밑으로는 타이즈 세 겹에 바지까지 입은 차였다.

“야외 행사잖아요. 잠깐 나가실 땐 몰라도 오래 서 계시면 추워요.”

옆에서 모피 목도리를 들고 대기 중이던 메리제인도 맞장구쳤다.

하아, 안 추운데….

내가 느끼기에 아수라마수라의 기후는 퍽 온난했다.

레베카가 신성력을 써주지 않아도 여름에는 여름 느낌 날 정도로만 더웠고, 겨울 역시 눈은 왔지만 강추위란 남의 일이었다.

‘황성이 본대륙 중에서도 온난한 곳에 자리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여름에는 쪄 죽을 듯이 덥고 겨울에는 손발 떨어져 나갈 듯이 추운 지옥의 연교차 속에 전생을 보낸 내겐 퍽 쾌적했다.

‘뭐, 세실리아의 몸이 워낙에 허약하니 걱정하는 거야 이해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크게 앓은 것이 세례식 직후의 꽃샘추위 때문이라 이 난리인 거겠지.

나는 체념한 낯으로 모피 목도리에 털장갑, 그리고 마도구로 된 손난로를 받아 들었다.

개막식이 열리기 전, 해가 기울어 가는 오후. 수선화궁 앞의 연무장에서 기사 서임식이 열렸다.

3년 전 내 수하들이 높은 경쟁률을 뚫기 위해 땀 흘린 곳.

‘이곳에서 맏이인 케인과 엘런이 정식 기사가 된다니…!’

나는 감회가 새로운 마음을 곱씹으며 연무장 안으로 들어갔다.

황실 행사에 걸맞게 위엄 있게 꾸며진 단상이 설치되어 우리 가족을 맞았다.

“자, 세실. 이쪽이다.”

내가 기사 서임식에 처음으로 참석한단 사실에 감격한 아버지가 단상 위에서 맞이했다.

나는 어기적어기적, 네 겹 옷가지 때문에 불편한 다리를 티 나지 않게 놀려 단상으로 올라갔다.

‘개막 연회 가기 전에 꼭 다 벗고 가야지.’

부모님과 황태자 그레이스 옆에 마련된 자리에 앉으니, 수십 명의 예비 기사들이 열과 오를 맞추어 도열해 있었다.

제국 전역에서 성년이 된 기사 수련생 중 제국군에 합격한 이들이 이 자리에서 황실에 충성을 맹세하고 기사로 서임받는 자리였다.

‘춥긴 춥네.’

나는 털장갑 안에 넣어둔 온열 마도구를 꼭 쥐며 연무장을 살폈다.

오른쪽 줄 앞쪽에 케인과 엘런이 나란히 서 있었다.

지난 한 달간 기사 선발 심사를 위해 애쓴 결과 우수한 성적으로 심사를 통과했다고 한다.

‘당연하지. 란셀이 직속 소대 가르치면서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적성을 찾았는데.’

나는 오늘 내 호위로서 내 옆에 서 있는 란셀을 슬며시 올려다보았다.

‘첫 제자들이 기사가 되는 날이니 뿌듯하고 감격스럽지 않을까?’

늘 그렇듯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지만.

케인과 엘런은 어엿하게 성기사단 정복을 입고 있었다. 빳빳하여 주름 하나 없는 게, 갓 맞춘 티가 났다.

케인은 잔뜩 긴장한 것이 역력한 반면, 엘런은 오늘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다만 높게 묶은 포니테일이 평소보다 꼼꼼하게 매듭지어진 것만이 다른 듯했다.

그녀는 케인보다 한 살이 많아 작년에 성년이 되었는데도 혼자 튀기 싫다는 이유로 올해에야 기사로 서임되는 참이었다.

그래도 시키는 건 다 잘하니 잘된 일이지만….

“란셀. 감상이 어때?”

란셀은 여전히 구릿빛 얼굴을 무뚝뚝하게 굳혀둔 채였다.

“…이런 게 주마등인가 싶습니다.”

목소리가 슬며시 떨렸을까.

그의 낯에는 작은 변화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만은 이미 눈시울이 붉어져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주마등은 죽기 전이고, 주책 선생님아….’

그런 마음을 속으로 삼키며 나는 입을 열었다.

“경도 그동안 고생 많았어. 리나랑 데릭 임관될 때까지만 고생해줘.”

직속 소대 1기 중 막내인 리나와 데릭은 올해 열여섯 살로, 3년 뒤에 성년이 된다.

그때가 되면 로젤리아가 붙여준 기사들을 모두 1대대로 돌려보낼 계획이었다.

당장 오늘 케인과 엘런, 두 사람이 정식 기사가 될 테니, 내가 어릴 때부터 나를 호위한 8인의 기사 중 둘을 1대대로 복귀시킬 거였다.

내년과 내후년, 수련생들이 하나둘 정식 기사가 되는 것에 맞추어 기존의 기사들을 돌려보낼 거였고.

“6소대 녀석들이 전하를 지킬 수 있어서 다들 영광이라 생각하는 것 아시죠?”

웬일로 란셀이 이리도 길게 말한담? 나는 자못 놀란 마음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그 구릿빛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벌써 란셀과도 12년을 함께했는걸. 나는 그가 퍽 인자한 미소를 의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네 호위 기사들은 기꺼이 너를 존경하고 주군으로 섬기기로 다짐했단다.”

나는 몇 년 전 로젤리아가 말해주었던 그들의 심경을 헤아리며 방긋 웃었다.

“당연하지. 이건 사춘기인 내가 경들하고 세대 차이 나는 거 싫어서 쫓아내는 거야.”

란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 비슷한 게 떠올랐다.

이렇게 내 평온한 유년기를 조금씩 떠나보내고, 내가 기대하는 미래를 차근차근 준비하는 거다.

완벽한 원작의 무대를 위해.

“세실, 잘 지냈느냐?”

“오라버니!”

“오늘 네가 키운 수련생들 중에 처음으로 기사가 된 이들이 나왔다지? 정말 축하한다.”

“감사해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잘 지내셨죠? 오랜만이야, 소공작.”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못 본 사이 전하께서도 한층 어른스러워지셨네요.”

기사 서임식이 끝난 뒤 이동한 대연회장. 짧은 개막식 행사가 끝나고 무도회 준비를 위해 연회장이 부산스러워졌을 때였다.

내 오빠 테오도르가 제 부인인 글렌치아의 소공작과 함께 황실 가족들에게 인사하러 왔다.

지난해 테오도르는 중립파 대귀족인 글렌치아 공작가의 후계자와 혼인했다.

레베카가 교단에 귀의했어도 아직 황궁에서 출퇴근하는 걸 생각하면 그가 우리 형제 중 처음으로 출가한 셈이었다.

“그래, 세실. 지난여름은 무탈하게 잘 보냈고?”

“그럼요, 그럼요.”

테오도르는 족히 넉 달 만에 보는 나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제 가정을 꾸렸으니 원가족인 황실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게 맞고, 더구나 그는 글렌치아 공작가의 일원이 된 셈인데….

“그래, 오랜만에 보니 우리 세실이….”

“하하. 부쩍 안 자랐어요, 오라버니.”

세실리아의 키가 아주 천천히 자라나고 있는 것을 내 모르지 않는데.

어쨌거나 테오도르의 청금색 눈동자는 아련하게 나를 살폈다.

그는 이렇게도, 나와 떨어져 안타깝기 그지없음을 번번이 온 얼굴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당신도 참. 전하께서는 당신 딸이 아니라 누이라고요.”

“그래도 말이오, 여보. 매일 보던 아이를 자주 못 보니.”

테오도르는 앓는 소리를 냈다.

만일 내 남편이 이러면 기분 나쁠 것 같은데…? 나는 데로록 눈동자를 굴려 글렌치아 소공작을 살폈다.

중개 무역과 광산업으로 성장한 제국 대표 거부의 후계자답게, 나의 새언니 글렌치아 소공작은 참 배포가 큰 모양이었다.

“황성 올라올 때마다 짬짬이 뵈러 오면 되죠. 전하께서도 부군 맞으셔서 출가하시기 전에요.”

“…모진 소리를 하오, 당신은. 세실을 감히 어떤 놈팡이가 데려가다니, 상상만으로도….”

테오도르가 슬픈 낯을 지었다. 진실로, 글렌치아 소공작의 배포가 커서 다행이었다.

‘걱정 마요, 오라버니.’

나는 내 직속 소대를 열심히 굴려서 황궁에 오래오래 붙어 있으려는 내 마스터플랜을 떠올렸다.

‘아버지와 그레이스에게 쓸모 있는 세실이 되면, 혼약에 얽매일 필요 없게 될 테니까.’

사랑처럼 얄팍한 감정에 의지하면 안 된다는 걸, 나는 전생을 통해 톡톡히 배웠다. 직속 소대 잘 굴려서 요직 꿰차고 안락한 황궁에 평생 눌어붙어야지.

그런 뿌듯한 마음으로 연회장을 둘러보던 내 시선에 마침 한 소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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