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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32화 (32/220)

32화. 악녀를 포섭하는 중입니다 (1)

‘윌로우 게이블스, 이 자식을 어떻게 하지?’

아카데미에서 돌아오는 마차 안,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귀족파의 실세인 게이블스 후작가의 첫째.

그는 원작 초반 아멜리 주변의 승냥이 중 하나였으며, 후반에는 분량이 실종되고 말아 서브 남주 후보도 못 되는 하찮은 악역 찌끄레기였다.

무려 귀족파 실세의 후계자인데도.

나는 ‘공제눈’에서 그가 등장했던 장면들을 돌이켰다.

「“너 같은 촌뜨기 영애가 거절하기에는 게이블스의 이름값이 너무 무겁지 않나?”

“아우렌바흐 애송이보다는 내가 즐겁게 해줄 수 있을 텐데.”

“사내는 경험이 우선이라고.”」

으으,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소름 돋는 찌질함이다.

나는 상상만으로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르는 그와 연관된 장면은….

「“영애의 오라비께 몸 좀 사리시라 전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언제나 해맑게, 누구에게나 사근사근하게 굴던 레오폴트가 처음으로 싸늘하게 내뱉은 대사였다.

레오폴트는 기실 누구에게나 상냥했다. 아카데미에서도 인기가 많았고, 사교계에 데뷔하고 난 뒤엔 당연하게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온 귀족에게 사랑받았다.

누구나 공평하게 대하는 다정한 공자님.

그런 레오폴트가 단 한 영애만을 특별히 대했으니 사교계 전체가 시가처럼 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적대 가문인 스칼렛에게도, 레오폴트는 상냥했다.

그녀가 저를 연모한다 떠벌리고 다니는 걸 알았음에도.

하지만 그 오라비인 윌로우가 아멜리를 해코지한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때부터 레오폴트는 게이블스에게 그 어떤 예의조차 차리지 않게 되었다.

이때부터 스칼렛의 ‘악녀’ 설정이 극으로 치달았으리라.

‘윌로우와 스칼렛이라….’

나는 나를 볼 때면 싸늘하게 굳던 스칼렛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가 내게 적대적으로 군 것에 대해, 윌로우가 나에게 집적거릴 것을 알아서 경계한 거라 추측하고 있었다.

‘그걸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스칼렛과는 그 이후로도 개인적으로 교류할 일은 없었다.

윌로우 놈이나 루시페우스의 의형인 도미닉 같은 망상꾸러기들과 얽힐까 봐 사교 활동을 하지 않았으니까.

개중에 윌로우 놈이 가장 문제였다.

그 덕분에 내가 스칼렛 근처에도 안 가게 되었으니까. 스칼렛과 인사라도 나눌라치면 놈이 옆에서 음험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 평생 도움 안 되네….’

그 불쾌감이, 오늘 극에 달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까의 일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마법으로 놈을 제압한 루시페우스가 떠올랐다.

‘정말 나를 만나고 싶었던 걸까?’

무슨 의도가 있는 것처럼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던 그의 빨간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눈동자는 왜 나한테 보여준 걸까?’

그런 궁금증 중, 제대로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똑똑.

“전하, 부르셨습니까?”

“응, 어서 와.”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길로 나는 엘런을 불러들였다.

그녀가 게이블스 후작가를 담당하고 있었으니까.

엘런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 가운데 얕은 피로감을 비치고 있었다.

“요즘 동향은 어때?”

“이번 원로원 회의 때문에 귀족파끼리 자주 회동하는 모양새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알비누스 후작과의 만남이 잦아졌고요.”

“으음, 역시.”

본격적으로 무슨 협잡질을 벌이진 않아도, 수상한 낌새는 꾸준히 보이고 있었다.

그 정도야 귀족파들끼리의 친목 다짐이라고 볼 수 있는 모양새이긴 했다. 하지만 수년 뒤에 귀족파들이 대놓고 황제파와 대립하게 될 미래를 알고 있는 내게는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게이블스 내부의 일들을 추가로 조사해 줬으면 해.”

“내부요?”

“응. 가문 내의 후계 구도라거나.”

“게이블스 후작은 공공연히 아들을 후계자로 소개하고 다니기는 합니다만.”

“응, 그렇기는 한데, 아카데미를 이번에 유급했더라고.”

“…그쪽으로 소문이 좋지 않기는 합니다.”

“돌머리라고?”

“에에 뭐, 학문에 큰 의욕이 없으시다고나 할까요.”

엘런은 평민으로서 귀족에 대한 예우를 꾸며내어 대답했다.

“게이블스 영애는 아직 데뷔탕트는 치르지 않았지만 또래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큰 것 같거든.”

황궁 연회 때마다 영애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걸 보면 분명히 그랬다. 미래의 사교계의 보스답게.

“아카데미에서의 평판은 어떤지, 가문 내에서의 입지가 어떤지…. 그런 것들이 궁금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후계자 구도 자체에는 잡음이 없을 겁니다. 게이블스 후작가에서 대대로 여성이 가주가 된 적은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렌틸 자작이 지적한 대로, 일부 귀족가에는 여전히 아들에게 후계를 물려주기를 고집하는 관습이 남아 있었으니까.

최근 백 년간 풍조가 많이 바뀌었대도 게이블스는 무조건 아들에게만 가문을 물려줬다고 한다.

‘뭐, 후계 구도를 가늠하는 것보다 스칼렛의 의중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지만.’

스칼렛이 나를 싫어한 게 아니라 그저 제 오라비가 비행을 벌일까 걱정돼서 표정을 굳혔던 거라면…. 아멜리를 싫어하게 되는 이유도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아, 그리고 엘런.”

나는 엘런을 불러들이기 직전에 생각하고 있던 이에 대해 떠올렸다.

“빨간 눈들에 대한 속설도 함께 조사해줘. 이건 무기한.”

루시페우스가 빨간 눈을 지녔다는 설정은 원작에 나오지 않은 거라 크게 신경 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가 제 빨간 눈을 일부러 내게 보인 걸 보니…. 거기에 어떤 의도가 있을 것 같단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빨간… 눈요?”

“응, 부탁해.”

엘런이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방긋 웃어 보였다.

한 후작가의 영식이 빨간 눈이라고 말할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예에.”

역시나, 엘런의 낯에 조금 귀찮다는 기색이 감돌았다.

“조금만 더 고생해줘. 이번 수확제 때 인원 확충될 거니까.”

내가 집도 줬는데 말이지.

경례하고 나가 보이는 엘런의 뒷모습을 보며, 드디어 무언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케인과 엘런이 꽤 열심인 것도 흐뭇하고 말이지.

‘엘런의 조사에 성과가 좀 있으면 좋겠네.’

스칼렛과 루시페우스, 두 사람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그들을 막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 김에 윌로우 놈도 어떻게든 처리해 버려야지.’

그런데 상황은 내 생각과 영 다르게 흘러갔다.

“전하, 머, 멍…!”

엘런을 돌려보낸 뒤 씻으려고 옷을 벗었을 때. 어깨에 남은 손자국을 본 시녀들이 대경실색한 것이었다.

메리제인과 패티샤가 호들갑을 떠는 것을 들으며 나는 방 한편에 걸려 있는 거울을 흘낏 보았다.

어찌나 꽉 쥐었었던지 붉은색으로 남았던 손자국이 거뭇해지고 있었다.

‘망할 놈이 신성력까지 썼으니.’

에휴,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싸우셨어요? 란셀 경은…!”

“호위 기사분들은 도대체!”

“아카데미에 군사 출입 금지더라고.”

“아니, 그러면 아우렌바흐 소공자께서도!”

“그래! 아우렌바흐 소공자께서는 도대체!”

레오폴트가 놀러 올 때마다 저들 눈 호강하게 나와서 좀 놀라고 하던 여인들은 어디 갔는지.

메리제인과 패티샤는 입을 모아 레오폴트 소년의 기사도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걸 어째….”

보기만 해도 아프다는 듯, 메리제인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패티샤는 잠시 기다려 보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섰다. 치유해줄 누군가를 찾으러 간 거겠지.

메리제인과 패티샤는 내가 신성력이 없는 것이 밝혀지고 나서 황궁에 들어왔다. 때문에 내 체질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해도, 내가 남들처럼 스스로 회복하지 못한다는 것은 막연히 눈치채고 있었다.

‘얘들이 들어왔을 때 황실이 세실리아에게 좀 유난이었어야지.’

지금은 내가 건강히 자라고 있어서 괜찮지만, 그땐 걸음마를 하다가 자빠진다거나 기침만 해도 황궁의들이 10분 대기조처럼 달려와야 했더랬다.

그런 데다 내 어깨의 멍 자국은 단순한 찰과상이 아니고, 나는 아카데미에 다녀왔다가 이 꼴이 되었으며, 자세히 입을 열지 않는 내게서 어떤 분위기를 읽은 터에….

“세실, 다쳤다고?”

패티샤가 불러온 것은 내 건강을 책임지는 셋째 언니 레베카였다.

메리제인이 내 가운을 젖혀 어깨를 보이자마자, 레베카가 숨을 크게 들이쉬는 소리가 내 방 안을 울렸다.

“이게 뭐야, 누가 이랬니?”

“…일이 좀 있었어요.”

“그래, 아카데미에 군사가 못 들어갔다고 했지. 우선 좀 보자.”

내 어깨를 살핀 레베카는, 멍든 부위에 한 손씩 올려놓더니 눈을 감고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맞댄 부위에 빛무리가 어리더니, 따뜻한 느낌이 났다.

1분쯤 그러고 있었을까.

빛무리가 사라진 그 자리에는 더 이상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일이 가끔 있어야, 언니께서 대신전과 황궁을 오가시는 보람이 있지 않으시겠어요?”

“세실, 그게 농담이니?”

너스레를 떨어 보았지만, 굳어진 레베카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레베카는 얼마 전 하급 신관이 되었다. 하지만 내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여전히 황궁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감사해서요, 언니이….”

나는 순도 백 퍼센트의 고마움을 담아, 그 어느 날처럼 레베카의 허리를 껴안았다.

‘오랜만에 어리광 피울 테니, 이대로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다….’

자세한 걸 말하면 내가 직접 상황을 처리하지 못할 게 뻔했으니까.

“…이제 무슨 일인지 이야기하렴. 도대체 어떤 놈이 벌인 일인지.”

아, 실패네.

상황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갔다.

“세실, 괜찮니? 감히 제국의 황녀에게 위해를…!”

“으앙, 이모님!”

“이모님, 아야해써?”

그레이스와 내 조카인 헤르미아나와 유스티안에.

“아가, 세실! 무슨 일이니?”

“괜찮니? 해코지를 당했다고?”

부모님까지…. 황실 식구들이 내 방에 들이닥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레베카가 곧바로 부모님과 그레이스에게 달려간 것이었다.

‘그나마 로젤리아랑 테오도르가 결혼해서 출가했으니 반으로 줄어 다행인가….’

레베카가 신성력을 퍼부은 덕에 멍은 흔적도 없었지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아픈지 어머니의 눈가에 반짝임이 일기도 했다.

당신의 아내가 눈물짓는 걸 본 아버지는 분통을 터뜨렸다.

“아우렌바흐 소공자는 뭘 하고 있었던 게냐!”

다음 날, 레오폴트는 새벽 댓바람부터 입궁 명령을 받아 황궁으로 날아와야만 했다.

“별일 없으셨죠?”

“으응, 뭐….”

“아니, 멀쩡한 자물쇠를 누가 망가뜨려 놨더라고요. 마멧돼지가 사육장에 있는 녀석들 중엔 가장 난폭해서, 웬만한 신성력 조절력이나 웬만한 검술 실력으로는 제어할 수가 없는 거라….”

레오폴트로 말할 것 같으면 내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 레오폴트는 알현실 앞에 설 때까지 제가 무슨 연유로 지금의 상황에 처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레오.”

“전하!”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 나는 레오폴트가 입궁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본궁으로 달려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저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소년에게 귀띔이라도 해주기 위해서.

“아침부터 뵈니 반갑네요, 전하.”

영문도 모르고 나를 봤다고 해맑게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

그때, 알현실의 문이 열리면서 먼저 아버지를 알현 중이던 재상 로젠하르트 백작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음이 레오 차례겠네…!’

다급해진 나는 레오폴트의 팔을 잡아당겨 재빨리 속닥거렸다.

“미안해, 레오. 어제 네가 마멧돼지 처리하러 갔을 때 사실 일이 좀 있었어. 게이블스 후작 영식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어느새 로젠하르트 백작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전하, 이제 괜찮으신가요?”

“뭐, 뭐가?”

내 첫 조카 헤르미아나가 빼닮은 로젠하르트 백작의 처진 눈초리가 전에 없이 올라가 있었다.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에델에게서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게이블스에 철퇴를 내리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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