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악녀를 포섭하는 중입니다 (4)
“후계라? 게이블스는 절대로….”
“네, 게이블스는 절대로 여식을 후계자로 두지 않죠. 현 후작 대에도 그랬고요.”
“그렇지.”
지금의 게이블스 후작과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툰 여성.
그레이스도 나와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을 거였다.
“하지만 언니, 그 후계자가 저지른 일을 보세요. 게이블스 후작가가 지금 황실에 불경한 마음을 품건 품지 않건, 그 영식보다는 영애가 가주가 되는 편이 훨씬 안전할 거예요.”
“…황실에서 각 가문의 후계자 문제까지 섣불리 건들기에는 위험 부담이 큰데.”
“그래서 제가 나서겠다는 거잖아요.”
나는 그레이스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아직 성년도 안 되어 황실에서 무슨 역할을 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막내 황녀.
얼마나 순진해 보이는 울림인가.
게다가 지난해 윌로우의 처벌을 두고서는 영재라는 위명과 달리 어리숙하고 유약한 이미지도 선보인 차였다.
“그런데, 싸움이 붙을 수 있을까?”
“작년부터 게이블스를 주시 중이에요. 학식, 인망, 평판, 외모, 그 무엇도 게이블스 영식은 그의 누이를 이기지 못해요.”
“…게이블스 영애가 재인(才人)이란 건 나도 들어서 알고 있지. 하지만.”
“네, 그 영애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모르니까요. 그래서 우선 천천히 친해져 보려고 해요. 급한 일은 아니니까요.”
“드디어 프리지어궁에서 다과회가 열리는 거니?”
현 황제의 적통 중 유일한 10대인데도 사교계 활동을 하지 않던 내가 스칼렛과 친해지겠다니 하는 말이었다.
게이블스의 영애, 스칼렛은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인데도 벌써 영향력이 컸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스칼렛을 잡으려면 사교계로 가야지.
“우선 보좌관을 들이려고요. 저 대신 사교계 활동을 할.”
“네가 직접 하지 않고?”
“저를 노출해봐야 괜히 이미지나 소비될걸요. 사람들이 저를 최대한 모르게 하고 싶어요.”
윌로우의 집적거림이 사라진 지금, 내가 사교계 활동을 꺼리던 이유가 사라졌지만….
‘생각해 보면 원작의 배경이 될 미래의 사교계가 궁금한 거지, 사교 활동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안 가더라고.’
잘 모르는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는 거, 딱히 재밌지도 않을 것 같고…. 제2의 윌로우 같은 애들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 지난번에 게이블스 후작에게 만들어둔 이미지를 고정해두면 퍽 유용할 것 같았다.
“그리고 직접 사람들하고 얽히면 제 편견이 끼어드니, 제 기사들이 전해주는 정보로만 파악하는 게 더 객관적일 것 같아서요.”
내가 생각해도 말을 잘 꾸며낸 것 같아, 나는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그레이스는 연신 흥미로워하는 미소를 얼굴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 언니가 내게 보내는 전폭적인 지지임을 나는 알았다.
“기대하세요. 그간 생각해둔 것들이 많답니다.”
“전하, 이번에 보냈던 다과회 초대장에 대한 답신들이 도착했습니다.”
“응, 정리해서 줘.”
연보랏빛 머리칼의 여인이 편지가 수북하게 쌓인 은쟁반을 받쳐 들고서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레이스에게 게이블스의 후계 싸움을 일으키겠다고 선언한 것이 작년, 그해 아카데미 졸업생 중 내 보좌관으로 영입해온 헨리에테였다.
“엘런 경과 페터 경이 보고한 자료들은 언제까지 정리해 드리면 될까요?”
“급할 거 없으니까, 다음 주 회의 전에 볼 수 있게만 해줘.”
나 대신 사교계 활동을 하는 것은 사실 그녀의 업무 중 가장 중요도가 낮은 일이었다.
황궁 안에서 직속 소대의 업무와 관련된 행정적인 일을 돕는 것이 그녀의 주 업무였으니까.
1기의 막내인 리나와 데릭까지 임관하여 어느새 직속 소대는 꽉 채운 10인 체제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수집되는 귀족 사회의 정보도 훨씬 다양해졌고, 그로 인해 처리하고 관리해야 할 서류 더미도 많아졌다.
그런 연유로 나는 궁 안팎에서 나를 도울 인재로 작년 아카데미 졸업생인 헨리에테를 영입했다.
입이 무겁고 영리하며, 파벌 싸움에 휩쓸리지 않을 사람을 찾던 차에, 그녀가 딱이었던 것이다.
‘외모와 화술도 빼어나서 사교계 활동을 시키기에도 좋고.’
나는 안경이 잘 어울리는 이지적인 인상의 내 미인 보좌관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경, 못 보던 브로치네?”
“네에, 지난 오소렌타 후작 부인의 살롱에 갔더니 부인께서 주셨어요.”
“그 머리핀도.”
“이건 칼텐 백작가의 둘째 영식이 선물해 주더라고요….”
그래, 이렇게 사교계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호감도 사고.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헨리에테 라마르. 동남부에서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라마르 백작가의 영애.
그녀의 이름도, 그 가문도 원작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데서 나는 이미 그녀를 신뢰했다.
‘레오폴트와 척도 안 지고, 아멜리를 괴롭히지도 않으니까 언급 안 된 거겠지.’
아카데미 성적도 우수했고, 시종장의 친척이기까지 해서 신원도 보증됐으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라마르 백작 부인이 처녀 시절 밖에서 낳아 온 딸이라는 거였다.
“다음으로 좋은 건 전하의 측근을 모두 그런 내력을 지닌 이들로 꾸리시는 거죠.”
루시페우스와 같은 아이들이 흑화할 수밖에 없는 환경, 혼외자를 차별하는 풍조를 바꾸고 싶다는 말에 내 스승이 해주었던 조언.
이런 게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씩 해봐야지.’
내가 못 하면, 아무도 못 하는 거니까.
“전하, 여기 명단 준비되었습니다.”
숙련된 손길로 모든 편지 봉투를 개봉한 헨리에테는, 순식간에 분류 작업을 마친 뒤 명단을 작성해 내게 올렸다.
“타깃은?”
“온답니다. 첫 다과회시니 전하께서 직접 준비하시겠어요?”
“뭘 그렇게까지. 경이 먼저 시안을 만들어줘.”
“타깃의 취향을 토대로 준비하고, 좌석 배치도 고심해 보겠습니다.”
“좋아. 믿을게.”
지금껏 황실 연회에나 얼굴 비추고 사라지던 막내 황녀가 여는 첫 다과회.
내가 아무런 사교 모임도 열지 않으니, 황궁에 초대받을 일이 없어 아쉬워하던 내 또래의 영애들은 모두 신나서 초대에 응했다.
스칼렛 게이블스마저도.
그녀가 바로 우리의 타깃이니, 그녀가 나와 말을 섞기 좋도록 자리를 짜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번 다과회의 목표는 후작저 내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취향을 저격해, 나의 정보 장악력을 과시하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녀를 포섭하는 것.
나는 흡족한 마음에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게이블스 영애가 정말 그런 데 관심이 있을까요?”
“글쎄, 아무도 그녀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많은 증거가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잖아?”
준수한 아카데미 성적. 사교계에 데뷔하자마자 쏟아지는 관심. 온 사교계의 시선을 사로잡는 미모. 거쳐 갔던 모든 가정교사의 찬사. 사용인들의 두터운 신뢰.
그리고 무능하고 소문 안 좋은 오라비와 후계자 자리는 아들에게만 주는 가문.
“스칼렛, 후작가의 후계자가 될 나를 황녀 전하 앞에서 망신 주면 어찌하느냐.”
그런 망발을 하고서 싸늘하게 굳던 윌로우 게이블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전의를 다졌다.
초여름의 햇살이 초록빛의 잎사귀들을 투명하게 비추는 6월의 오후.
프리지어궁의 후원에 꾸린 다과회 자리에는 거의 스물에 달하는 인원이 참석했다.
사교계 시즌 동안 황성에 머무르는 내 또래 영애들이 모두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주목해 주세요. 오늘 다과회의 주인공이신 세실리아 4황녀 전하십니다.”
나는 헨리에테의 소개를 받으며 한가운데 자리했다.
지난해부터 황성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진 헨리에테가 일종의 사회자 역할을 맡았다.
내 또래 영애들 사이에도 헨리에테가 퍽 인기인지, 그녀를 바라보는 손님들의 눈에 선망이 어려 있었다.
역시 잘 뽑았어, 정말.
나는 흡족한 미소를 굳이 떨치지 않은 채 다과회의 손님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내가 여는 첫 다과회에 참석해줘서 모두 고마워요.”
“드디어 프리지어궁에 와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 어머니께서 처녀 시절에 다녀오셨던 것을 얼마나 자랑하셨는지요.”
“그간 레이디 헨리에테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앞으로도 부디 자주 초대해 주셔서 후원의 다른 계절을 느끼게 해주세요.”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10대의 소녀들이 아직 원숙하지 못한 예법으로 재잘대는 것이 6월의 초록만큼 싱그러웠다.
사교계에 데뷔했든 하지 않았든, 또래끼리 모였을 때 은근하게 풀어지는 그 명랑한 분위기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전하, 여기부터 소개할게요. 넬리 백작가의 레이디 제니스….”
헨리에테가 이 자리에 참석한 소녀들을 하나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서류로는 다 들어본 이름인데,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네. 그리고….’
손님들의 면면을 살피며, 나는 바로 맞은편에 앉은 스칼렛을 흘끗 쳐다보았다.
최고 상석인 내 맞은편이니, 두 번째로 좋은 자리였다.
우리의 의도에 따라 헨리에테가 배치한 자리로, 귀족파의 실세 가문을 예우해 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게이블스 후작가의 레이디 스칼렛.”
“초대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흔쾌히 와줘서 고마워요.”
스칼렛의 얼굴에 번지는 그림 같은 미소. 조금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한 계산으로 지어진 것이리라.
나는 그녀의 낯을 홀린 듯이 바라보며, 7년 전 신년 하례식 때 처음 마주쳤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도 우아했는데, 이젠 관록과 여유까지. 역시, 미래의 사교계 일인자….’
나는 사실, 그녀가 후원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인사하는 것도 혼자 무슨 발레리나 같고 말이야.’
주홍빛 머리칼을 곧게 펴 가운데 가르마를 타서 내리고, 호박빛 눈동자를 살포시 내리깔고 있는 스칼렛의 자태. 그 시선의 각도마저 계산된 것 같다면 착각일까?
‘고전 흑백 영화에서나 볼 법한 미인상 같아.’
거기에 웃음을 머금는 일이 거의 없는 도톰한 입술은 입꼬리가 살포시 말려 있어 무표정조차 아름다웠다.
고혹적이면서도 어딘가 어려운 분위기….
그것이 사교계의 수많은 영식의 연심을 끌어내고, 또래의 영애들의 선망을 자아내는 것이리라.
‘나도 세실 얼굴 잘 쓰지만, 얘도 얘다….’
옷차림 또한 사교계의 유행을 이끄는 이답게 전위적이고 세련되었다.
다들 코르셋과 파니에로 허리 넣고 치마 부풀린 드레스로 치장한 가운데, 혼자서 큰 키를 활용해 슬림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좌중의 이목을 대번에 끌었다.
거기에 색 배합을 치밀히 계산하여 장착한 액세서리까지.
‘저 목걸이는 남대륙식인 것 같은데. 귀걸이는 제국식이고.’
게다가 팔찌는 아무리 봐도 고대 유물이고 부채는 또 동대륙 소수 부족 양식….
아주, 걸어 다니는 입간판이었다.
게이블스 후작가가 이리도 부유하다고 광고하는 입간판.
‘실제로 스칼렛의 추종자 중에는 분명 게이블스의 부를 선망하는 이들도 있을 테지.’
대대로 일궈온 비옥한 영지에, 귀족파의 실세로 자리 잡은 막강한 권력까지.
테오도르가 장가간 글렌치아 공작가가 사업으로 거부가 된 것과 비교하면, 정말 명문 귀족가답게 기품 하나 잃지 않은 고전적인 부유함이었다.
‘특히 앤더슨령 포도밭에 자부심 넘쳤을 텐데, 그 포도를 황실에 헐값에 넘기고 있으니 얼마나 자존심 상하겠어.’
그래서 스칼렛이 오늘 더욱 꾸미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황실의 철퇴를 맞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싶어서.
‘본인의 선택일 수도 있고, 후작가의 입장이 그런 걸 수도 있고.’
내가 ‘게이블스 후작 영애’로서의 스칼렛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레이디 스칼렛, 오늘 여느 때보다 화려하시네요.”
“낮에도 이렇게 아름답게 꾸미신 건 처음 봐요.”
“저희야 눈 호강을 하니 좋지만 말이에요.”
스칼렛의 추종자로 짐작되는 그녀 주변의 영애들이 하나같이 듣기 좋은 소리를 했다.
‘음, 쟤네가 스칼렛의 오른팔, 왼팔이지.’
스칼렛이 원한 적은 없지만.
“처음으로 내궁 영역에 들어오게 된지라, 황녀 전하께 누가 되지 않을까 하여 최선을 다해 보았답니다.”
그리 말하며 흘끗 나를 바라보는 스칼렛의 눈초리에는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최대한 수수한 드레스를 입었다.
건강이 우선인 세실의 몸에는 빡빡하게 꾸며야 하는 옷이란 황실 연회 때나 입는 거였으니까.
편하면서도 화려한 드레스야 많았지만, 오늘 입은 건 개중에도 가장 소박했다.
‘자아, 나는 스칼렛이랑 주도권 경쟁할 생각 없어. 이렇게 무해하다고!’
유행 선도, 사교계 권력 이런 건 정말 관심 밖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오늘의 타깃, 스칼렛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