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원작의 막이 오르고 (2)
“아, 정말…. 데릭입니까?”
누구를 제게 붙이신 거예요? 케인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과장해서 지어냈다.
벌써 열두 해를 함께하는 사이다. 전생 현대인인 내가 신뢰하는 수하를 넉살 좋게 받아준다는 믿음도 쌓일 만한 세월이었다.
내가 살포시 미소 짓는 것을 본 케인은 말을 이었다.
“로즈버리 영주님의 둘째 따님이신데, 로즈버리 사정이 워낙에 궁핍해서요.”
아, 전하께서도 당연히 아시겠지만…. 케인이 우물대며 덧붙였다.
처음 내 호위 소대의 수련생을 선발할 때, 그 선발 요건으로 일정 수준으로 가난한 영지 출신이어야 함을 넣었으니 말이다.
‘물론 나는 로즈버리에 대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지만.’
케인은 내가 원작에서 읽어 알고 있는 아멜리의 사정을 읊었다.
“영지에서 따로 데뷔탕트 무도회를 열 여력이 못 돼서, 상경하신 김에 데뷔하시게 되어 제가 돕게 되었습니다.”
역시 신뢰할 수 있는 내 수하. 한 치의 거짓도 없다.
“근데 경, 만나는 영애 있지 않아?”
“하하, 데릭 이 자식.”
황성의 대표적인 딸 부잣집 가문 중 하나인 말로테 자작가의 셋째.
그녀가 이 전도유망한 기사에게 마음이 있어 초반 악역으로 톡톡히 활약할 예정이었다.
“그, 괜찮다고는 하시더라고요. 아가씨께 도움도 주고 있고요…. 카발리에가 무슨 연인 관계로 하는 거던가요.”
“흐응, 친절한 영애네.”
내 말에 빈정거림이 섞인 것도 모르고 케인이 실실 웃었다.
‘도움 준다는 그게, 아멜리의 드레스가 유행에 한참 뒤떨어진 것을 알고도 모른 척 입고 가게 놔두는 거랑 발에 맞지도 않는 구두를 빌려주는 것인 게 문제지.’
결정적으로 거짓말로 케인을 연회장 밖으로 끌어내 아멜리가 카발리에 없이 연회장에 덩그러니 남아 있게 될 예정이었다.
보통 영애들이 18세쯤 데뷔하는 것에 비하면 나이도 훨씬 많은데, 카발리에 없이 남아 있으니 벌써부터 안타까웠다.
‘아멜리에겐 미안하지만, 덕분에 레오폴트랑 만날 거니까 아무것도 달라지면 안 돼.’
아멜리와 레오폴트의 첫 만남이 될 오월제 연회에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기로 했다.
나는 손끝이 촉촉해져 오는 기대감을 느끼며, 태연한 목소리로 케인에게 물었다.
“연미복은 맞췄어?”
“그냥 정복에 망토 갖추고 가면 되는 거 아닐까요?”
기사라는 직업에 뭐가 씐 걸까…?
“…신성력으로 정화해도 아저씨 냄새 나니까 연미복 따로 맞춰.”
나는 보너스라며 금화 주머니를 던지며 말했다.
내 여주인공의 풍족한 생활을 위한 거였다.
“성인이 되도록 신성력 측정을 안 한 사람이 있었다고?”
“동북부 쪽은 개발이 덜 돼서 근처에 큰 신전이 없잖아요?”
“하긴, 같은 제국이라도 지역 나름이니까….”
“무슨 이야기들이니?”
시녀들이 나를 꾸미며 조잘대는 이야기에, 나는 기어코 끼어들고 말았다.
내 시녀들의 우두머리 격인 메리제인이 대표로 답했다.
“오늘 데뷔하는 한 영애 이야기예요. 로즈…베리? 그런 동북부 산간 영지 출신 영앤데, 그간 세례도 못 받고 지내다가 이번에 황성에 왔다네요.”
역시 아멜리 이야기였다.
나와 레오폴트가 스물둘이 되고, 케인이 옛 아가씨의 데뷔탕트에 카발리에로 참석하게 되고.
마침내 사교계에 아멜리에 대한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바로 오늘, 아멜리가 레오폴트를 만나는 오월제 무도회가 열릴 예정이니까.’
정말로 원작의 시간이 시작된 느낌이 났다.
그 설렘에, 나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들떠 있던 차였다.
물론 나도 그 무도회에 참석해야 하니 어차피 그때 일어나서 단장을 시작해야 했지만.
“오늘 연회에서 데뷔한다고?”
“네, 그 영지가 가난해서 데뷔탕트 무도회를 열 사정이 못 됐나 봐요.”
“저런.”
정말로 아멜리를 오늘 보는구나!
나는 남몰래 바르르 떨었다. 벌써 몇 번째일까.
케인이 제 아가씨의 카발리에를 하기로 했다고 들었을 때부터 나는 내내 이런 상태였다.
‘내가 암조를 굴리게 된 시초를 따져보면, 케인을 통해 아멜리에게 보다 나은 거처를 구해주려던 것에서부터였으니까.’
레오폴트도, 스칼렛도, 루시페우스도 모두 만나봤지만, 아멜리를 만나는 건 정말 처음이었다.
“사교계 데뷔하기 전에 세례받으려고 대신전에 갔는데, 글쎄 신성력이 꽤 높았다지 뭐예요.”
“아아, 무슨 신관급은 된대?”
“아마 그런가 봐요. 그런데 벌써 스물이 넘었댔나…. 나이도 있고 당분간 해야 할 일도 있대서 교단에서 영입은 못 한 것 같고요.”
“재밌네.”
나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몇 시간 뒤면 아멜리를 본다!’
아,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재작년에 치러진 내 성년식 때보다 훨씬 더.
“참, 알비누스 후작가의 둘째 아들 얘기 들으셨어요?”
다시금 귀 쫑긋.
그래, 루시페우스도 올해부터 사교계에 등장했으니, 그에 대한 소문도 돌아야 옳았다.
‘아멜리의 간택을 못 받을 뿐이지, 명색이 서브 남주라고.’
내 귀밑머리를 다듬던 아네트가 내 귀가 쫑긋대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동대륙에서 유학하고 왔다는데, 엄청 멋있대요.”
“분위기가 많이 바뀌긴 했나 보더라고. 나도 소문 들었어.”
“아, 보좌관님은 아카데미 시절에 봤겠구나?”
“그땐 멋있다기보다….”
헨리에테가 난처한 얼굴로 내게 시선을 던졌다.
아카데미의 외톨이였던 루시페우스를 기억하는 한편으로, 그가 암조의 관찰 대상 중 하나여서 쉬이 말을 뱉기가 어려운 거였다.
나는 거울 너머로 헨리에테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대충 둘러대도 괜찮아.
“…내가 졸업할 때까지는 좀, 체격도 왜소하고, 좀 음침해 보이고 그랬어. 교류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래서, 그 영식이 어린 영애들을 다 홀린 거야?”
패티샤가 아네트의 반대편에서 내 머리를 다듬으면서 넌지시 물었다.
“얼마 전에 아란치노 백작가 사냥 대회에 왔었다나 봐요. 훤칠하고 잘생겨서 눈에 확 띄는데, 통 입을 안 열어서 신비롭다고 난리래요.”
“어머, 알비누스 후작은 그다지…. 아, 후작의 이복누이의 아들이랬나?”
“네, 하나도 안 닮았대요. 그렇게 멋있는데 다가가기 어려워서들 난리예요.”
아네트가 신나서 재잘대는 소리에, 나는 슬며시 입꼬리를 늘였다.
‘작년에 꿈속에 봤던 그 모습대로면, 멋있기야 아주 멋있겠지.’
5월의 첫날에 치러지는 오월제 연회를 시작으로 황성 사교계 시즌이 시작되는 거여서, 사교계 전역이 다양한 기대감으로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사교계 정찰은 헨리에테에게 다 맡겨놓은 나 역시, 올해 시즌은 꽤나 기대되었고.
나는 오늘 연회에서 일어날 일들을 떠올렸다.
내가 평생을 기다려온 아멜리와 레오폴트의 첫 만남.
초라한 드레스로나마 해맑게 데뷔탕트를 치르는 아멜리에게 저도 모르게 끌리는 루시페우스.
그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고 고독해 보이는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아멜리.
아멜리와 레오폴트가 함께 있는 걸 보고 질투하게 될 스칼렛…은 이제 없겠구나.
‘그런 척이야 충실히 하겠지만.’
기대할 거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콩닥콩닥, 나는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전하, 혹시 점심 제대로 못 드셨어요?”
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내 손을 맞잡은 엘런이 의아한 눈초리를 던졌다.
“손이 자꾸 떨리시는데. 괜찮으시죠?”
“으응, 괜찮아. 안 어지러워.”
긴장한 마음에 손이 떨렸나?
내 혈당 수치를 걱정하는 엘런의 낯에 나는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손에 힘 꾸욱 주면서.
역시 12년의 세월이 헛된 게 아니어서, 그 의욕 없는 엘런이 주군을 걱정할 때도 되었다.
“경, 오늘 데이트하기로 한 사람 있었던 거 아냐?”
“제가 무슨 데이트요?”
“왜, 연회 때마다 남자 바꿔 가면서 데리고 다니더만.”
“뭐, 같이 가 달라는 이들이야 있기야 했지만…. 임무가 우선 아닐까요?”
“경이 많이 컸어.”
“예?”
내 말이 반어법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란 엘런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도 참.”
내가 저를 놀려먹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그냥 또 농담인 줄로 생각한 듯했다.
3년 전부터 나는 황실 연회에 참석할 때면 내 직속 소대 기사들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테오도르가 출가하기 전까지는 매번 테오도르가, 그 이후로는 란셀이나 브랜든과 같은 호위 기사들이 맡았던 일이었다.
기존의 호위 기사들이 성기사단장이 된 로젤리아를 보필하기 위해 1대대로 돌아가며 일어난 자연스러운 세대교체였다.
“뭐, 나야 경이랑 들어가면 반응이 더 좋아서 좋아.”
“반응이라뇨….”
난 보지 않아도 엘런이 멋쩍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2년 전 그들을 뽑았던 일이 황성을 들썩였던 일인지라, 그들은 나름대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게 남녀 유별한 것이 아니어서, 엘런과 리나처럼 늘씬하고 실력 있는 여기사들이 특히 인기가 좋았다.
‘나야 암조 기사들 한 명이라도 연회장에 더 들이면 좋은 거지만.’
마침 올해부턴 사교계 활동도 열심히 하겠다, 우리 인기인들 덕 좀 봐야지.
후훗, 나는 완벽한 계획에 흐뭇해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멜리와 레오폴트의 첫 만남 배경이 될 오월제 개막 연회에서는 데뷔탕트 무도회도 함께 치러졌다.
귀족 영애들이 앞으로 사교계에서 활동하겠다며 황실에 정식으로 저를 소개하는 자리.
아멜리 역시 오늘의 데뷔탕트였다.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귀족들과 연을 쌓을 필요가 있었고, 그러려면 사교계 데뷔는 필수였으니까.
나이도 많고 좋은 드레스도 못 구해서 눈총을 받을지라도….
‘마음 같아서는 케인을 통해서 호화롭게 꾸며서 참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지만….’
내가 본 적도 없는 아멜리를 ‘공제눈’의 여주인공으로 편애하는 건 당연지사지만, 레오폴트와의 첫 만남을 망칠 수는 없었다.
오늘 소소한 수난을 당할 아멜리에게 마음속으로 위로와 사과를 보내며, 나는 연회장 앞에 당도했다.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 그레이스의 가족이 입장하고 난 복도의 끝.
문 안쪽으로 보이는 휘황찬란한 조명에 나는 가슴이 지금까지보다 더 빨리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시작이다.
“전하, 진짜 괜찮으신 거죠?”
“응, 현기증 나는 것도 아니고 부정맥도 아냐….”
황궁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엘런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지막으로 세실리아 4황녀 전하 드십니다!”
잠시 뒤, 시종이 내 입장을 고하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엘런의 손을 맞잡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는 익숙한 뭇 귀족들의 선망 담긴 눈빛이 쏟아졌다.
관객의 자세, 관객의 자세…. 나는 오래 외운 주문과도 같은 말소리를 되뇌었다.
“4황녀 전하 만세!”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엘런 경 멋있어요!”
사람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나는 십수 년째 거듭된 이 극성에 조건반사적인 수줍음을 느끼며 붉은 카펫 깔린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경, 어쩐지 팬이 더 는 것 같아?”
“…….”
나에 대한 환호성 속에 간간이 엘런의 이름을 부르짖는 소녀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뭐라도 주절대야 이 떨리는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아서 말이지….’
이미 수십 번을 겪은 일이었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특별히 더 떨리는 것 같았다.
나는 내게 열렬한 시선을 보내는 귀족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는 척하며 아멜리를 찾으려고 애썼다.
‘계단 내려가기 전에 찾아야 하는데…!’
데뷔탕트 영애들은 한곳에 모여 있으려나? 보통 레오폴트가 어디에 서 있더라?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두리번거릴 때.
연회장 동편 입구 근처에, 보기 드문 색깔이 시선에 걸렸다.
‘아, 분홍색!’
여주인공다운 색의 머리칼이었다.
‘정말… 진짜 아멜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