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원작의 막이 오르고 (9)
왜 저러나 들어나 보자, 용건이 있다면 따라오겠지. 그런 마음이었다.
‘그가 빨간 눈인 걸 안답시고 입단속하려고 협박하는 것만 아니면 좋겠는데.’
한편으로는 조금 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사람 많은 데 가면 답답하다고 했던 게 아주 핑계도 아니긴 하니까.’
세실리아의 유리 몸, 이대로 괜찮은가.
나는 느릿한 걸음으로 연회장 뒤편, 테라스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남들 보기엔 혼자였지만, 은신한 채 나를 수행하는 그림자 기사들이 따라올 테니 안심이었다.
‘아, 시원해.’
황궁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한 글렌치아 공작가의 타운하우스 2층에서는 황성의 밤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그것이 황궁의 높은 담벼락 안에서는 보기 힘든 거여서, 나는 자유로운 소시민이었던 전생의 감각을 한 조각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바람만 쐬면 세실 몸으로도 술 좀 받을 것 같은데.’
전생의 술맛을 빤히 기억하는데 주량이 한 잔인 답답함, 아시는 분?
그렇게 생각하며 갖고 온 스파클링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루시페우스가 올까?’
정말로 내게 용건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아멜리를 달래러 가라고 떠밀었던 그때도, 실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그건 어떤 내용일까.
역시 제 비밀에 대한 입막음일까?
어쩌면 아카데미에서 도와준 걸 두고 무언가 협박하려는지도….
‘역시 원작 흑막.’
그렇게 생각하니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이야기라도 좀 해보면 그의 목적도 알 수 있겠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내가 생각에 잠겨 난간에 몸을 기댔을 때였다.
차락, 반만 닫아두었던 커튼이 온전히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잘난 체하시더니 전하께서도 별수 없군요.”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 상대의 신원을 확인한 나는 기분이 팍 상하고 말았다.
“아우렌바흐 그 애새끼만 그리 싸고도시더니, 꼴좋습니다. 혼처 구하려고 귀족들 노는 데 끼시는 모양새도 가관이고요.”
기분 좋던 두근거림을 혈압을 올리는 펌프질로 바꿔버린 것은, 술에 취한 윌로우 놈이었다.
루시페우스가 오지 않을까 기대하던 나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이에 대한 황당함과 불쾌함을 감출 수 없었다.
술을 꽤 걸치고 왔는지, 눈가가 벌게진 그의 얼굴은 상당히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이게 무슨 무례지?”
“하아, 아우렌바흐 그 계집애처럼 생긴 애송이가 뭐라고…. 개나 소나.”
윌로우 놈은 미남에 대한 가장 저속한 평가를 곁들이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멜리에게 눈독 들이고 있었는데, 레오폴트가 한시도 떨어지질 않으니 접근할 수가 없어서 불똥이 이리 튀나 보네.’
원작에서는 그 답답한 숨바꼭질 끝에 재회하고도, 레오폴트의 진심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멜리가 생각을 정리하겠답시고 홀로 있다가 그 막말을 듣게 되는 거였는데.
‘차라리 나한테 와서 아멜리에겐 다행이야.’
기분 상한 건 저고 기분 상한 이유도 영 다른 데 있는데, 왜 내게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스칼렛과 한배에서 났다고는 믿기지 않게, 그의 인성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에는 심술보가 두덕두덕 붙어 있었다.
방탕하게 술 마시고 다닌 걸 자랑이라도 하는지 8년 전 아카데미서 마주쳤을 때보다 부피가 퍽 늘어나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그 이후로 처음이네.’
당시 1년간 황실 연회에 참석이 금지되었고, 이후에도 실수로라도 근처에 못 왔으니까.
‘저도 당한 게 있고 창피하기도 하니 자중했겠지.’
한데 오늘은 술도 취한 데다, 아멜리에게 접근이 힘들어 제 억울한 사연을 돌이키다 보니 나한테 화살이 돌아왔나 보다.
‘내가 좀 안일하기도 했지.’
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대놓고 기사 하나라도 데려왔으면 윌로우 놈이 따라붙지도 않았을 텐데. 그림자 기사들이 은신 중이지만, 저놈이 눈치채기란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루시페우스의 경계심을 살까 봐서 그런 거였는데, 이렇게 되네.’
한편으로는 잘됐다 싶은 마음에 나는 부러 밉살스레 굴었다.
“나 때문에 경이 아직도 짝을 못 찾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천하의 무뢰한인 것처럼 온 황성에 광고를 하시고…. 이게 다 당신 때문입니다.”
얼씨구, 그게 잘못한 제 탓이지 왜 내 탓인가.
나는 잘 걸렸구나 싶어서 위악적으로 웃었다.
“왜, 변변한 관직도 없는데 나이만 먹으니 초조한가 보지? 명색이 게이블스의 소후작인데 말이야.”
“여전히 참 말이 기셔.”
윌로우의 낯짝이 험악하게 빛나며 한 걸음 더 내게로 다가섰다. 어느 날 스칼렛을 위협하던 그 표정이었다.
나는 소맷자락 안에 손을 넣어, 팔에 걸고 있던 호출기를 누를 준비를 했다.
그림자 기사들은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상황에 개입할 수 없으니까, 그걸 이용해 일단 한번은 당해줄 요량이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거지.’
이 김에 사교계 영구 제명이라도 시킬 수 있다면 나쁘지 않았다.
‘다치더라도 여기에 레오폴트 전용 치유사가 될 아멜리도 있고.’
내 눈앞에 그의 그림자가 어둑하게 드리웠다.
‘이제 손이 날아오겠지…!’
그리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흐읍!”
갑자기 윌로우 게이블스의 입이 강제로 다물리는 소리가 났다.
눈을 슬며시 떠보니 그 얼굴이 시뻘게지고 있었다.
“켁, 켁켁!”
갑자기 콜록대기 시작한 그는 제 목을 자꾸만 더듬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의 허둥대는 손짓에 목에 느슨하게 걸려 있던 크라바트며, 셔츠 단추가 맥없이 풀어졌다.
둥실.
그가 까치발을 하는 줄 알았더니, 갑작스레 그가 떠올랐다.
고개를 쳐든 모양새가 마치, 누가 들어 올린 듯하달까…?
‘…마법?’
그때였다.
펄럭, 굳게 닫혀 있던 테라스의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듯 열리더니, 어느새 윌로우 놈의 뒤편에 루시페우스가 당도해 있었다.
벌벌대는 윌로우 놈과는 상반되게, 굉장히 말끔한 등장.
‘오기는 왔네…?’
내게 눈빛으로 인사해 보인 그는 아주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윌로우의 바로 뒤에 바싹 다가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들어 허공에 떠 있는 놈의 귓가에 대고 입을 열었다.
‘새삼 느끼지만, 잘 컸네….’
저 큰 덩치의 윌로우가 허공에 떴는데도, 높이가 얼추 맞는 걸 보니 말이다.
“우리가 몇 년 전에 약속을 하나 한 것 같습니다만.”
“누, 누… 누구….”
딱.
“으윽!”
장갑 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작게 울리며, 제 목 근처를 더듬던 윌로우의 손이 허공에서 덜덜 떨었다.
“너, 이…! 그때!”
검지가 반대로 꺾여 손 모양이 기괴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잘 크니 마니, 취소야….
“그땐 제가 좀 서툴렀지요, 제가 보고 배운 게 없어서.”
“이, 이 자시익…!”
딱, 다시금 울리는 마찰음.
윌로우의 중지가 꺾였다.
그 얼굴이 더는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누군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는.”
딱, 이번엔 약지가.
“제 눈길이 닿지 않는 이에게만 하시라고.”
딱, 소지가 꺾였다.
“아, 그땐 이 손이 아니었던가요.”
다시금 마찰음이 울리고, 꺾였던 손가락이 대번에 원래대로 돌아가더니, 반대편 손가락이 모두 반대로 꺾였다.
“그, 끄윽….”
윌로우는 숫제 울 것 같았다.
“마법사한테 당한 것 같았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는데 관절이 마법에 묶여서 못 움직이는 거라고, 한동안 신관들이 매일같이 들러서 신성력을 퍼붓고 갔죠.”
정학을 당할 뻔했던 윌로우가 선수 치듯 휴학계를 낸 일에 대해 물었을 때, 스칼렛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보통 신성력으로 마법 술식을 역추적해 마력을 중화하는데, 루시페우스가 독자적인 술식을 쓴 바람에 그 원리를 알 수가 없어 굉장히 비효율적으로 치유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루시페우스가 한 일인 줄은 알았지만, 그걸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나는 눈앞의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루시페우스는 윌로우 놈을 협박하듯이 연신 뭐라고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를 더 낮춰, 그 말소리는 내게까지 닿지 않았다.
‘왜, 그때 나를 도왔을까?’
마음 한구석의 해묵은 빚이 무게감을 키웠다.
‘그날의 일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는데.’
그때, 루시페우스가 문득 내 쪽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 어디선가 맞닿았을 때.
“험한 꼴은 안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가 손가락을 다시 한번 튕겼다. 공중에 떠 있던 윌로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꺄악!”
“소, 소후작?”
“시종, 시종!”
저 너머 다른 쪽 테라스로부터 비명이 늦봄의 밤공기를 타고 날아들었다.
그 혼란스러운 소음은 저와는 전혀 무관한 일인 것처럼, 루시페우스는 태연하게 제 옷을 털며 재킷의 주름을 펴냈다.
“…맙소사.”
이게 다, 무슨 난리야.
긴장이 풀린 나는 테라스 바깥쪽에 설치된 벤치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그의 몸짓을 멀거니 쳐다볼 뿐이었다.
옷매무새를 다듬은 루시페우스는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군더더기 없는 그의 걸음걸이에서는 기척조차 나지 않을 듯했다.
“익숙한 상황이군요.”
“…경.”
“이번엔 정말 구면이시지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을 것 같던 입가에 아주 미미한 호선이 만들어졌다.
“…그때도, 이렇게 전하께서 앉아 계셨었는데.”
아, 정말 그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거였나.
윌로우를 마법으로 제압한 그, 내게 일부러 빨간 눈을 보여준 그.
호기심 너머로 미뤄두었던 공포가 일시에 마음을 덮쳐왔다.
내가 그의 비밀을 안다는 사실을, 저 강한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꿀꺽, 나는 양손을 맞잡는 척하면서 내 목에 달린 초커를 만졌다.
8년 전 윌로우 게이블스와의 사건이 있었던 그날 이후, 레베카가 더 큰 수정으로 새로이 제작해준 것이었다.
내 방어적인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루시페우스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내게로 다가오는 시간이 천년 같으면서도, 동시에 너무 순식간인 것도 같았다.
화려한 글렌치아의 무도회에 취해서일까, 내가 너무 섣불리 그와 독대를 결정한 것 같다는 후회도….
그렇게 번민할 무렵, 그의 신형이 풀썩 꺼졌다.
루시페우스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한 가지,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어느새 내 눈높이보다 낮아진 그의 창백한 낯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낯에, 무슨 초조함 같은 게 떠올랐다 느껴졌을까.
“…부디.”
그렇게 말한 루시페우스는 제 오른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검은 장갑이 끼인 채였다. 원작에서 묘사되었던 대로, 단 한 순간도 벗겨지는 일이 없는 그의 검은 장갑.
어린 날에 2구역의 시장통에서 마주쳤을 때도, 꿈속에서 봤을 때도 늘 그랬듯이….
나는 무엇엔가 홀린 듯 내 손을 그의 장갑 낀 손 위에 올렸다.
그걸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는, 중얼거리듯이 내뱉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친 채, 반대편 손을 들어 올린 그는 손끝을 물어 장갑을 벗었다.
길고, 하얗고, 마디마디가 근사하게 불거진 손이었다.
그의 다갈색 눈동자에 이채가 스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손끝이 조심스레 내 손등에 다가가려던 순간.
“전하!”
“괜찮으십니까?”
어느새 테라스에는 온몸을 꼼꼼히 감싼 그림자 기사 둘이 나타나 있었다.
‘아, 호출기!’
그에게 겁먹은 내가 나도 모르게 호출기를 누른 모양이었다.
‘내, 내가 뭘 하려던 거야?’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 나는 그대로 벌떡 일어났다.
“응, 슬슬 돌아가자고!”
그가 확인하려던 것이 무엇이든, 위험할 것 같았다.
그의 존재가 그러하듯이.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 앞에 무릎 꿇었던 그대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충격이랄까 혼란 같은 것이 번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일어서면서 그의 손끝이 내게 닿았던 감각이 찌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