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서브 남주를 저지하겠습니다 (5)
“황실의 총애가 그리도 깊으신 것일지, 혹시 다른 이유가 있으실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황한 낯이 드러나지 않도록 숨소리를 눌러 내렸다.
‘마력이 많으면 신성력도 감지하기 쉽나…?’
내가 타고난 신성력과 마력이 없는 것이 황실의 기밀인 만큼, 그림자 기사들은 늘 은신한 채 나를 수행하는데.
‘실제로 레오폴트도 알아차린 적 없고.’
그런데, 그걸 다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손이 절로 레베카의 초커에 가려는 것을 꾹 참았다.
‘역시 세계관 최강자…. 동요한 티를 내면 안 돼.’
내가 떨리는 입매를 꾹 눌러 참을 때 루시페우스의 시선이 다시금 내 낯을 향해 있었다.
“그런데 전하께선 제 약점을 알고 계시니, 거슬려도 도리가 없지요. 제 특질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제가 화형대에 오를지도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그의 건조한 눈동자가, 그의 말에 어떤 진심도 담겨 있지 않음을 말해주었다.
화형이 폐지된 지도 오래일 뿐만 아니라 그가 제압된다니, 말조차 안 될 소리.
그가 멋대로 만들어낸 술식은 거대한 신성력을 비효율적으로 퍼부어야만 간신히 파훼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윌로우 놈을 고치겠다고 신관들이 몇 주째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나는 겹겹의 결계를 뚫고 소량의 마나로도 내게 메시지를 보냈던 그의 손거울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이건 역시, 협박…?’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러니 제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는, 전하의 안위를 제가 적극적으로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그 목소리는 마치 맹세인 듯 울렸다.
안경 너머로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 그런 태평한 상상은 언감생심임을 알려주었지만.
‘레오폴트의 편인 내가 제 약점을 쥐고 있으니까, 역시 입단속이 우선인 건가….’
그런 생각을 감추며 나는 가만히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그의 손이 드레스 자락 위에 놓인 내 손끝을 슬며시 집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 손길은 그의 걸음걸이처럼 무척이나 조용하고도 대담했다.
내 손가락의 첫 마디들을 살며시 집은 그의 손은 지난번처럼 찌릿하리만치 뜨거웠다.
십수 년 전 저잣거리에서처럼.
의도는 알 수 없으나 내 손을 잡고야 만 그의 얼굴에는, 미묘한 기색이 어리는 것도 같았다.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일종의 안도감… 같은…?
급기야 제 손 위에 내 손가락을 받쳐 든 그는 퍽 진지한 눈길로 내 손을 살폈다.
마치 경전을 탐독하듯 신중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어찌나 꼼꼼하고 또 경건한지, 나는 얼굴마저 달아오를 듯했다.
그가 아멜리에게 반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내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경탄하고 있다 착각했을 정도여서….
이윽고 그의 엄지가 내 손가락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그것이 또 진득하여, 그와 맞닿은 곳마다 열꽃이 필 것만 같았다.
나는 불쾌한 척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정신이 없었다.
그 신중한 손길에, 내 손끝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이라 되는 것 같았기에.
‘사, 사람 손 처음 잡아 보나.’
그가 그대로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의 얼굴에 퍼지는 감정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이를 무례하다 뿌리치지 못하는 이유 또한, 알 수 없었다.
다그닥 다그닥.
황성에 다다른 마차는 루시페우스가 내리자마자 미련 없이 떠나 버렸다.
황녀의 호위들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그를 일별한 후, 말의 고삐를 당겨 마차를 따랐다.
줄곧 마차를 따르던 기척들도 다가왔다가 이내 사라졌다.
천천히, 밤거리의 어둠 속으로 잠기는 마차의 그림자를 루시페우스는 얼마 동안이고 지켜보았다.
그 안에 담겨 있을 작은 빛을 생각하면서.
루시페우스는 그녀의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다.
저 무해하고 연약하고 흥미로우신 분께서 어떤 즐거운 생각을 하신다면, 계속 그리 즐거우시면 될 일이었다.
그에게는 작지만 결코 쉽지 않은 소망이 있었으니까.
‘올해 안에, 어차피….’
루시페우스는 제 목표를 되새기며 장갑에 다시 손을 껴 넣었다.
아무려면 좋을 일이었다.
“그래, 소득은 좀 있었느냐.”
밤의 어둠에 잠긴 알비누스 후작의 집무실. 자선 파티에서 돌아온 그길로 루시페우스는 제 양아버지를 찾았다.
연회에 참석했던 연미복 차림인 루시페우스와 달리, 후작은 잠옷 로브에 그 노쇠하고 마른 몸을 대충 꿴 채였다.
그를 박대하는 것이 자명한 차림새.
루시페우스는 빛이 들지 않는 문가에 선 그대로 목소리를 울려 대꾸했다.
“예, 다음 주중에 레이븐 백작의 사교 클럽에서 회동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도미닉이 배편을 구했다고 연락이 왔다. 늦어도 태양절에는 올 테니 그때까지 잘 정리해 놓으면 좋겠지.”
“그리될 것입니다.”
“그, 랜들의 사생아 뒤처리는 어떻게 되었느냐?”
“그쪽에서 돈을 받은 놈들은 무슨 증언을 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수고했다.”
후작은 손에 쥐고 있던 잎궐련을 깊이 빨아들이고는 천천히 내뿜었다.
집무실의 일부만 간신히 비추고 있던 램프 불빛이 혼탁하게 가라앉았다.
끼익, 후작은 반쯤 돌아앉아 어둠에 반쯤 잠긴 루시페우스를 곁눈으로 보았다.
“그, 게이블스 후작에겐 내 면이 안 서게 됐어. 상황이 잘 따라 그 콧대를 눌러주게는 되었지만….”
“송구합니다.”
“너야 곧 떠날 사람이지만, 알비누스는 유구하지 않겠느냐. 도미닉, 네 형이 어차피 부마가 될 테니, 지금보다 위세 높은 가문을 이끄는 편이 네게도 보람이겠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리 답하는 루시페우스의 어조는 평온했지만, 그의 턱이 미세하게 불거졌다.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그의 낯이 어떤 기색을 띠는지, 후작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는 후작의 손은 떨림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본디 제 양아들을 두려워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후작은 손을 가볍게 저어 루시페우스를 물렸다.
제 방에 다다른 루시페우스는 크라바트를, 묶었던 머리를, 장갑을, 그리고 안경을 차례로 털어내었다.
붉은 눈동자에 피로가 선연했다.
“후….”
상상 속에서 루시페우스는 몇 번이고 후작의 목을 졸랐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지만.
후작저의 손님방 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한 침실. 후작저 뒤편의 숲을 바로 끼고 있는 북향의 방.
햇볕이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서 루시페우스는 그 방이 제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빛이 들지 않는 곳, 언제라도 주인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곳.
가끔 속이 들끓을 때면 숨을 쉬러 나가 볼 수 있는 발코니가 있는 정도면 족했다.
달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그곳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숲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숨을 고르면,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루시페우스는 어둠 속으로 잠겨 들던 마차 속의 작은 빛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의 그날 이후,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어렵잖게 많은 것을 참아낼 수 있었다.
이제야 다시 찾아냈지만, 지금이 아니었다면 용기 내지 못했을 거였다.
‘…미움받는 건 익숙한 일이고.’
제 작은 빛의 하얗게 질린 낯을 떠올리며, 그는 작게 웃었다.
그의 손가락이 허공을 그었다.
조금 전. 그의 모든 기억을 통틀어 최초로, 누군가의 온기에 닿을 수 있었던 그 손가락이었다.
그의 손끝에 생겨난 빛무리가 이윽고 우아한 필체의 글씨를 그려내었다.
「당신께 빚을 달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하군요.」
그 빛무리는 마치 인쇄한 것처럼, 대문자와 소문자의 비율이 균일한 하나의 문장이 되었다.
마치 예술품을 감정하듯, 그것을 한참 동안 살피던 루시페우스는 콕 찍듯이 손으로 빛무리를 쳤다.
이내 그 자리에는 단 한 번도 무엇이 존재한 적 없었던 듯 숲의 어둠만이 남았다.
달빛처럼 파르란 제 손을, 루시페우스는 다시금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까는 정말, 나도 모르게.’
감정의 동요를 제어할 수 있게 된 건 정말로 오랜 일인데.
저도 모르는 새 깨지고 만 유리잔의 파편과 거기서 흘러내린 포도주의 감각이 손에 진득했다.
잘 다스려 두었던 기운들이 요즘 들어 곧잘, 정제되지 못한 채 뒤엉키던 그때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천천히 제 손을 허공에서 말아 쥐었다.
슬며시 다가가 쥐었던 작은 손가락들의 오밀조밀한 감각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작고, 보드라운 감촉….’
잡을 수 있었다. 가닿을 수 있었다.
가슴속에 낯선 감정이 피어오르려는 것 같아, 루시페우스는 깊게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그 감정은 지금껏 그를 들끓게 했던 그 어떤 것과도 다른 종류여서, 어떤 쪽으로 분류해야 할지….
그는 알 수 없었고, 또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루시페우스는 기실 제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별것도 아닌 손거울을 보낸 것도, 사실은 충동이었다.
그 반응이 궁금했던 충동.
루시페우스는 많은 순간에 그녀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가장 외로운 밤에 찾아와 보듬어주던 그 여리고 따스한 빛을.
그때 떠오르는 상은 보닛을 쓴 갈색 머리칼의 소녀일 때도 있었고, 그 화려한 연회에서 그 누구보다 빛나던 요정인 때도 있었고, 신의 은총을 받은 은사를 가린 채 오도카니 앉아 있던 모습일 때도 있었다.
결국 후작저로 돌아가 꼴 좋다는 비아냥을 들었을 때, 마탑에서 쫓겨나듯 거절되어 무거운 발걸음을 후작저로 돌렸을 때, 아카데미에서 불쾌한 얼굴들에게 경멸받을 때.
그리고 동대륙의 너른 초원과 깊은 동굴과 아득한 숲에서… 결국 어떤 답도 찾지 못했던 동시에 모든 걸 알아버린, 그 모든 순간에….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는 많은 것을 참을 수 있었다.
‘내 약점을 내 손으로 쥐여준 유일한 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도, 스스로는 연약하고 무해하기 그지없는 그녀니까.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이제 후작만이 아니게 된 거지.’
그는 제 운명을 정했지만, 그런 소소한 변수 하나 심어두는 것이 어쩌면 재밌을 것 같아서.
그래, 말하자면 그 모든 건 변덕이었다.
“제국의 아름다운 작은 별을 뵙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말입니다.”
“경, 고생 많았어.”
내 집무실에 정말 오랜만에 들어온, 붉은빛이 감도는 금발을 짧게 자른 기사를 맞이하며 나는 한껏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거의 반년 만에 보는 리나였다.
“전하께서는 오랜만에 뵈니 한층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경의 입에 발린 말도 한층 더하네.”
“얼른 전하 뵙고 눈 호강하고 싶어서 황성 도착하자마자 바로 온 것 아닙니까.”
“저런, 여독 좀 풀고 오지. 경 눈빛이 아주 상했어. 주군을 보는 눈빛이 아냐.”
“저를 그 오지까지 파견 보내셨으면 이 정도는 받아 주셔야죠, 전하.”
“여전하네, 정말.”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 보이며, 헨리에테에게 손짓해 차와 요깃거리를 준비하게끔 했다.
“일단 앉아. 할 얘기 많지, 우리?”
조금 전까지 너스레 떨던 이는 어디에 갔는지, 임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리나는 총기 어린 눈빛을 띠었다.
처음 만났을 때 왈가닥 말괄량이가 따로 없었던 리나는 훤칠한 키에 탄탄한 체격, 맵시 좋게 자른 짧은 머리칼이 잘 어울리는 기사로 자라났다.
덕분에 사교계에서 로젤리아의 뒤를 이어 뭇 영애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인기 여성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내 호위 기사들 중에서도 특히 인기가 좋았다.
‘요즘 리나가 안 보인다고 영애들이 아련한 눈빛을 뿜곤 하던데…. 황실 지지율 상승을 위해 다음 연회 때는 꼭 리나를 호위로 대동해야지.’
그리 다짐할 때, 헨리에테가 나를 위한 따뜻한 차와 리나를 위한 과일 냉차를 내왔다.
일전에 리나가 속한 2소대장인 엘런이 대신 올렸던 보고서가 함께였다.
얼마 전까지 리나가 추적하던 빨간 눈의 마을에 대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