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묘하게 돌아가는 러브라인 (1)
오늘도 위장용 상단 건물에서 문장 없는 마차로 갈아타고서, 진짜 목적지로 향했다.
1구역과 2구역의 경계 으슥한 곳에 자리한 정보 길드 이르겐트.
겉으로는 화려한 골동품점인 척하고 있는 이곳은 정보를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정보와 정보를 맞바꾸는 특이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들에게서 얻을 것이 있는데 암조가 수집한 정보는 이들의 흥미를 못 끌 터라, 내가 직접 나서야만 했다.
‘정 안 되면 나만 아는 원작 정보라도 풀어야 하니까.’
오늘 내가 노리는 것은 아멜리가 친부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아이템.
그 가문이 이윽고 황실파와 귀족파 간의 정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라, 한시라도 빨리 황실파로 회유해야만 했다.
나는 길드에 풀어도 되는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구분하며 리나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에스메르 상단에서 왔습니다.”
일전에 케인이 썼던 것과 같은 변장 모자를 쓰고 평복을 한 리나가 접수원에게 자그마한 패를 내밀었다. 길드와 예약이 되어 있다는 표식이었다.
“그럼 그쪽께서….”
“네, 저희 단주님이십니다.”
“확인되었습니다. 아래 마법진 위에 서주세요.”
우리가 접수원의 안내에 따라 마법진 위에 올라서자, 접수원이 리나로부터 받은 예약패를 벽면에 꽂아 넣었다.
마법진에서 빛이 나더니 순식간에 사위가 뒤집혔다. 그렇게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어느 너른 응접실이었다.
‘윽, 울렁거려….’
신성력이 없는 세실의 몸으로는 그 급격한 마나의 흐름을 버텨낼 수가 없어서인지, 특수 제작 마차로는 겪은 적 없던 멀미가 격하게 몰려왔다.
원작에서 레오폴트가 납치된 아멜리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다가 여기에도 와서, 이동 마법진이 있는 줄이야 알았는데….
“…우욱.”
그게 나한테 쥐약일 줄은 몰랐지….
내가 버티지 못하고 휘청이자, 깜짝 놀란 리나가 다가왔다.
“전, 아니, 단주, 괜찮으십니까?”
“으응, 이동 마법은 처음이라서, 놀라서 그만.”
나는 자연스럽게 내 목에 달린 초커에 손을 갖다 대어, 신성력을 조금 융통했다.
‘하아, 이제 좀 낫네….’
이렇게 적은 신성력으로도 회복될 수 있는 건데. 신성력 제로인 세실리아 신세가 고달팠다.
후아, 내가 숨을 깊이 내쉬며 식은땀을 닦아낼 때였다.
“…잠시만요.”
갑작스레 리나가 나를 제 등 뒤로 숨기며 응접실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거기서 보이는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왜 그래?”
“누가 지켜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여기가 마나 흐름이 복잡해서 잘못 느낀 거 아냐?”
“그랬나 봅니다. 아, 정말 이동 마법진 찝찝하지 말입니다.”
리나가 제 짧은 머리칼을 헤집으며 뇌까렸다.
이동 마법진은 일상에서 겪을 일이 없는 것인데, 암조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종종 겪게 되는 모양이었다.
‘이런 길드에서 보안을 이유로,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 많이들 설치해 놨다고 했지.’
지금도 역시, 같은 건물 안에서 이동한 걸 텐데 말이다.
우리가 응접실 가운데 있는 소파에 앉아 긴장을 풀 때쯤이었다.
벌컥, 안쪽 문이 열리더니 로브를 코끝까지 뒤집어쓴 사람이 나타났다. 한눈에도 길드의 간부인 듯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메르제령의 에스메르 상단에서 오셨다고?”
“반갑소. 에스메르 상단의 단주 코코 에스메르요.”
나는 전생에서 부유함의 상징과도 같았던 브랜드의 창업주들 이름을 섞어 만든 가명을 댔다.
메르제령은 내가 성년이 되면서 하사받은 황실의 영지였다.
공식적으로 메르제 후작이 된 나는 영지가 생긴 것보다 거기에 유령 상단을 만들고 가짜 호적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 더 좋았다.
암조의 활동에 활용할 수 있으니까.
내가 지금 코코 에스메르라는 이름의 평민 부호로 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황실이 곧 법이니까. 역시 환생 잘했어.’
나는 변장 보닛이 흔한 인상으로 만들어준 얼굴로 전문가다운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이동 마법진을 쓸 정도로 마법 친화적인 공간인지라 내가 마법 보닛을 쓴 것도 알아차렸겠지만, 이 정도의 위장은 이해할 거였다.
‘자기도 저리 깊게 후드를 뒤집어썼고 말이야. 어차피 내 본모습만 모르면 상관없어.’
간부 사내가 우리 맞은편에 앉자, 하인이 원하는 음료를 묻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그래서, 어떤 대가를 치르시려나.”
“물건은 준비돼 있소?”
“우리 이르겐트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은 없지.”
“당장 값을 치를 거라 말이오.”
“단주께서 치르신다면 바로 대령합지.”
…말 한마디면 될 것을, 깐깐하네.
“게이블스 소후작의 용태…?”
“별로.”
이미 알고 있다는 소리다.
어차피 내가 스칼렛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일이니, 딱히 고급 정보까진 아니지.
“태양제 사냥 대회에서 풀릴 마수의 목록.”
“흥미롭지 않군.”
“게이블스 후작의 누이의 거취.”
“이르겐트를 뭐로 보는 거야?”
오, 렌틸 자작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는 거야?
아마 게이블스 후작조차 모르는 일일 텐데, 역시 대륙 최고의 정보상다웠다.
고심하던 나는 정말 원작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정보를 입에 올렸다.
“알비누스 후작가가 황성 상단들에 접촉하는 이유?”
“말장난하러 오신 거 아니지?”
“…힐베르크 후작가의 후계자?”
“개중 그나마 낫군.”
그제야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원작의 주요 비밀 정도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거냐….’
생각보다 큰 정보를 풀게 된 것에 조금 쓰린 마음이 드는 것을, 때맞춰 나온 아이스티의 달달함이 위로해 주었다.
“힐베르크 후작이 예전에 교단에 귀의하기 전 만나던 여인과의 사이에 자식을 보았소.”
“호오, 대단한데, 사제의 길을 걸으시려는 분이.”
“본인도 모르고 자식도 모르는 일이오. 그런데 조만간 그 자식이 후작을 찾을 일이 있을 거요.”
“아, 혹시 그래서.”
후드 아래로 드러난 사내의 입술이 삐딱한 호선을 그렸다.
그는 신중한 척하려는 듯 투박한 손가락으로 제 턱을 쓸더니 느릿하게 대꾸했다.
“우리가 준비한 물건이 있어야 완성되는 퍼즐 아닌가? 조금 모자라.”
…눈치 좋기는.
‘원작에선 이거 없어도 서로 알게 될 거였다고.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나는 낭패한 기색을 띠지 않으려 애쓰며 리나에게 손짓했다. 리나가 품 안에서 벨벳 주머니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걸로 보충하지.”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주머니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은으로 된 회중시계였다.
“이건…?”
“4황녀 전하께서 메르제령의 주인이 되셨을 때 메르제령 사교계에 교부하신 것이오.”
그렇다. 내가 나 자신에게 선물한 것을 두고 생색내는 거였다.
‘내가 메르제령을 얻고서 메르제령 가신들과 인근 귀족들에게 돌린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지금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미혼 여성을 꼽으라면, 내 입으로 말하기 낯간지럽지만 바로 4황녀 세실리아.
때문에 내 하사품 또한 굉장히 값어치가 뛰어났다.
“오오…. 황실의 하사품이면 당연히 성은(聖銀)으로 되어 있겠지?”
“당연한 말씀을.”
사내가 감격스러운 손짓으로 시계를 살폈다.
황실의 상징이 은발인 만큼, 이 세계에서는 은을 아주 귀하게 여겼다.
은이 변색되거나 변형되지 않도록 대신관 이상의 사제들이 축성한 성은은 금보다도 더 귀하게 여겼고.
거기에 마탑의 기술까지 더해진, 절대 시간이 틀어지지 않는 회중시계이니 충분한 값어치를 할 거였다.
“값이 좀 남는데. 더 필요하신 것 없으신가?”
내가 내민 정보와 4황녀의 하사품의 총 가치가 내가 의뢰한 물품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으, 정보 아까워.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이럴 경우를 대비해 생각해둔 답을 입에 올렸다.
“이번 달 경매 입장권.”
“좋지, 좋아.”
대번에 기꺼운 기색이 된 사내가 탁자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일종의 호출기였는지, 아까의 하인이 나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여기, 의뢰하신 물건.”
리나가 나를 대신해 탁자 위에 놓인 상자를 열었다. 엄지손톱만 한 루비 하나가 한가운데 박혀 있고 그 줄을 따라서는 작은 크기의 수정들로 장식된 금속 팔찌였다.
“평민들 중에 인연 팔찌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르겐트도 아는 것을.”
내 대꾸가 맘에 든 듯 사내가 피식 웃었다.
인연 팔찌는 친자 감별 마도구였다.
이전에는 아랫도리 가벼운 귀족들이 혼외자를 잔뜩 만들어놓고 책임지지 않아서 인연 팔찌로 친자임을 증명해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적자와 사생아를 불문하고 귀족의 피가 섞이면 누구나 세례를 받고 신전 명부에 올라야 한다는 법이 있어서, 가주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혼외자가 없으니 인연 팔찌가 필요 없게 되었다고.
그리고 나는 이것을 힐베르크 후작의 사생아에게 선물할 예정이었다.
‘아멜리는 원작에서 작은 사건을 처리하다가, 친부의 신성력이랑 공명하고서야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되니까….’
그게 또 한참은 걸릴 일이어서, 그걸 앞당기기 위해 이 팔찌를 구한 거였다.
‘이 덕에 아멜리가 따로 있는지도 모르는 친부를 빨리 만날 수 있겠지.’
그러면 아우렌바흐 공작가와 사교계의 시선도 고와질 거고, 힐베르크 후작가도 중앙 정치에 빨리 뛰어들 거고.
내가 설계한 미래를 떠올리자, 벌써 꽤나 흐뭇해졌다.
“잠시, 경매 입장권을 가져오도록 하지.”
내 표정에서 거래가 성사된 것을 확신한 사내가 들어왔던 문으로 빠져나갔다.
“시계까지 내주신 건 너무 출혈이 큰 것 아닙니까?”
문이 닫히자마자 리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이번 경매에 참가하려고 하긴 했어.”
이르겐트는 지금처럼 정보의 대가로 모은 특별한 물건들을 비밀 경매에 부쳐서 수익을 창출했다.
정보 대신 입수되는 것에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만들어진 천연 마력석이나 역사 속으로 사라진 가문의 잊힌 가보, 마탑에서 맞춤 제작된 마도구처럼 특수한 내력의 귀중품들이 있었다.
나처럼 정보와 정보를 맞교환할 만한 사람이 많지 않으니 이르겐트에는 특별한 상품이 많이 들어왔고, 그걸 경매장에서 팔아 현금화하는 것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미혼 여성의 하사품도 그렇게 경매에 나오겠지.’
나는 그렇게 낯부끄러운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비밀 경매장의 입장권이 될 예약패는 리나가 지니고 있던 것보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모양새였다.
길드 예약패가 구리로 되어 있었던 반면 경매 예약패는 청동으로 되어서 가운데에 오닉스가 박혀 있었다.
“그럼, 경매장에서 뵙지.”
사내는 마스터키 같은 패를 하나 벽면에 꽂아 이동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아, 또 마법진….’
으, 벌써 울렁거리는 것 같아….
나는 예견된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리나와 마법진 위에 섰다.
아까처럼 순식간에 시야가 뒤바뀌어, 우리는 다시금 1층의 공간에 돌아와 있었다.
아까 맨 처음 예약패를 확인했던 로비의 뒤쪽에 자리한 응접실…인 모양이었다.
‘으으, 진짜 어지럽네….’
짧은 시간 안에 두 번이나 이동 마법진을 겪어서인지, 아까보다 멀미가 훨씬 심했다.
시야가 마구 요동치는 느낌….
나는 애써 정신을 붙들며, 리나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초커에 손을 갖다 댔다.
얼른 신성력을 발동시켜야….
어, 천장이 내려오네…?
손이 떨려 헛손질하고 말았는지, 나는 신성력을 발동시키지 못한 채 휘청이고 말았다.
“전, 아니 단주님!”
내가 이러리라곤 짐작도 못 한 리나가 응접실에서 빠져나가려다가, 황급히 내 쪽으로 뛰어오려던 그때.
툭.
단단한 가슴팍이 내 등과 뒤통수를 받치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