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묘하게 돌아가는 러브라인 (8)
톡, 톡, 톡, 한동안 내 손끝이 탁자를 울리는 소리만이 집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아멜리 친부가 복권(復權)하는 문제도 그렇고…. 원작에서 보던 것보다 아멜리가 귀족파와 악연이 깊네.’
원작에서 귀족파의 문제는 대체로 황실이나 레오폴트 쪽에 얽혀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오늘의 논의를 일단락 짓기로 했다.
“일단 앞으로도 로즈버리 영애 쪽을 잘 지켜보고. 그 영애가 앞으로도 그 비슷비슷한 가문들에 다닐 것 같으니까.”
“넵.”
“그리고 귀족파와 로즈버리령의 관계에 대해서는….”
“네, 황태자 전하 보좌관들과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기록하던 헨리에테가 안경을 빛냈다.
그간 나 대신 사교계 활동을 하며, 보좌관들끼리의 인맥을 잘 다져놓은 그녀였다.
“좋아. 선대 남작 시절에 로즈버리령에 특이한 사항이 있었는지, 귀족 재산 신고 내역도 한번 확인해주고.”
“네, 전하.”
며칠 뒤, 황성 시내로 나가는 마차 안.
“맨날 글자만 보다 보니 책상물림 된 것 같았는데, 오랜만에 호위 나오니 상쾌하고 좋네요.”
“그새 감 떨어졌으면 안 돼. 저번에 리나랑 가봤을 때 보니까 꽤 무서운 동네던데.”
“경매장 내부 설계도까지 완벽하게 파악해 뒀으니 걱정 마시죠.”
그리 말하며 생긋 웃는 3소대장 알렉스의 눈동자가 선득하게 빛났다.
요 얼마간 돌아갈 수 없는 바다와 빨간 눈에 대한 논문만 눈이 빠져라 들여다본 알렉스는 오랜만의 호위 일에 들뜬 눈치였다.
오늘의 행선지는 이르겐트의 비밀 경매장.
이르겐트에서 받은 경매장 입장권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귀족파의 손에 넘어갈 것들을 빼돌리는 게 오늘의 목표였다.
“다른 참석자 명단은 입수 못 했지?”
“전하께서도 코코 에스메르로 참가하시면서요.”
신분을 속이고 참가하는 경우가 많아, 정보를 입수하는 게 의미가 없다는 말이었다.
“귀족파에서도 퍽 많이 참가할 텐데….”
나의 중얼거림에 알렉스의 눈매가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졌다.
“알비누스 둘째 언급 금지.”
“헙.”
“진짜로?”
이것들이 단체로 망상에 빠져서는.
나는 작게 이를 갈며 오늘 알렉스를 호위로 붙인 김에 나누려고 했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그건 그렇고…. 막심 경이 꽤 마음에 들었나 봐?”
“제가요?”
“보고서 올린 거 보니까 꽤 좋게 평가하는 것 같던데. 아냐?”
“하하, 티가 났나요.”
그럼, 내가 속으로는 네 이모뻘인데. 나는 생긋 웃었다.
“학자의 탑에서 탁월하게 처신해 주셔서, 저희 본 목적을 자알 숨기고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알렉스가 학자의 탑에 파견 다녀온 이후로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막심 경이 좀 학자들 좋아할 법하게 말을 하더라. 말 하나하나에도 미사여구가 흐르고.”
“네에, 빨간 눈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전하께서 나서신다고 막심 경께서 피력해 주시니, 학자의 탑에서도 꽤 기쁘게 생각하더군요.”
“렌틸 자작 덕분에 기본적으로 나를 좋아하기도 하니까. 막심 경 같은 서출 인재를 중용하는 것도 학자의 탑이 좋게 볼 법하고.”
그저 전생의 상식대로 행동했을 뿐인데, 이곳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호감을 쌓고 있었다.
원작의 내용을 아는 것뿐 아니라 전생을 기억한다는 건, 확실히 세실리아의 외모만큼이나 큰 무기였던 것이다.
“일단 제 사견으로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마기와 빨간 눈이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단언하다니, 퍽 확신하나 보네.”
그리 대꾸하며 나는 내가 잘 알고 있는 빨간 눈의 사내를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꿈에서 엿보았던 그의 어린 시절이….
‘일리 있는 말이야. 실제로 루시페우스도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근처에서 태어났으니까.’
기사들의 주둔지는 빨간 눈의 마을보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훨씬 더 가까웠다.
‘에리나 경이 수위급의 성기사였대도 태내에서 영향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봐.’
그 갓난아기 시절부터 루시페우스의 눈은 붉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게… 마력하고 연관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개인 보유 마력 말씀이신가요?”
“응,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꽤 강한 마력을 타고났대.”
그 생각을 떠올린 결정적인 이유는 루시페우스였지만, 거기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대지를 정화해야 하니까 마력을 버리고 신성력만 계발했다는 것 같아.”
“하긴, 신성력과 마력이 충돌하면 폭주하니까요.”
마법사들이 마탑에 모여 사는 까닭에는, 마력을 계발하기 위해 신성력을 억제했으므로 외부 출입을 자제한다는 것도 있었다.
“개중에 신성력 적은 사람들은 먹고살기가 어려우니 도태되고, 신성력 많은 일족만 남아서 그 마을을 이룬 걸 테고요.”
“그렇지. 신성력은 유전되는 거니까.”
그래서 아멜리도 제 친부와 신성력이 감응하는 바람에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황실도 대대로 뛰어난 신성력을 타고나고.
‘내가 엄청난 예외지. 녹금안과 은사만 아니었으면 의심했을 정도로….’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신성력이 유전이고, 에리나 경은 수위급의 성기사였으니…. 그러면 루시페우스 또한 신성력을… 크게 타고났겠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단 생각에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알렉스. 알비누스의 차남 말이야.”
알렉스의 눈매가 건수 잡았다는 듯 아주 어슴푸레한 호선을 그렸다.
‘암조 기강, 이대로 괜찮은가.’
나는 그의 묘한 기색을 무시하고서 낯을 굳히며 말했다.
“그 어머니가 지난번 격랑 때 전사한 성기사였잖아?”
“네, 에리나 알비누스 경 말씀이시죠.”
“그가 세례받은 내역을 한번 알아봐야 할 것 같아.”
내 기색이 퍽 진지하여, 알렉스도 장난스러운 기색을 지우고 고심하는 낯이 되었다.
“…그렇군요. 어머니가 성기사인데 본인은 마법사라니. 퍽 해괴한 조합이긴 합니다.”
“응. 아카데미에 다녔으니까 세례를 받긴 했을 거야. 그때 신성력을 측정했을 테고.”
“그러면 전하께서는 그의 신성력이….”
“어머니가 성기사였으니 평범한 수준은 아닐 확률이 높겠지.”
나처럼 예외일 수도 있지만….
“마탑에서 부담스러워할 정도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면 신성력이 평범한 수준 아니겠어요? 안 그러면 사람 구실 못할 텐데요.”
“그럴 확률이 높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야.”
그의 신성력이 진짜로 많고, 신성력이 마력과 충돌하여 폭주하지 않도록 어떤 조치를 해놓은 상태라면….
“그게 그를 공략할 실마리가 될 수 있어.”
그리 말하는데, 어째선지 ‘공략’이라는 말이 버석하게 씹혔다.
한 달에 한 번, 큰 달의 그믐마다 열리는 이르겐트의 비밀 경매.
길드원들이 구한 보물이나 정보에 대한 값으로 받은 귀중한 현물들이 나오는 곳이었다.
‘말이 비밀이지, 흔히들 ‘비밀 경매’라고 하면 떠올릴 법한 노예 거래가 없어서 단속할 구실이 없는 곳이지.’
범죄로 엮어서 압류한다면 번거롭게 경매에 참가하지 않아도 될 텐데.
‘지금 구하려는 것도 자연스레 입수할 수 있고.’
나는 퍽 독재자 같은 상상을 하며 급사의 안내를 받아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경매품 도록은 탁자에 있습니다. 음료나 주전부리가 더 필요하시면 난간 끝에 있는 마석 스위치를 누르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나는 급사에게 팁을 주며 생긋 웃었다. 작은 칵테일 모자 아래로 망사가 짙게 깔려 있어서 내 입꼬리만 보였을 거였다.
루시페우스처럼 위장 마법을 간파할 수 있는 자가 또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어,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디자인으로 새로이 제작한 위장 모자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난간 너머로 무대가 보이는 박스석이었다.
“고급 오페라하우스처럼 꾸며놨네요. 밖은 그냥 슬럼가 뒷골목인데.”
“그러게. 신기하네.”
원작에서는 이르겐트의 경매장이 대략적으로만 묘사되어서 내게도 퍽 낯설었다.
‘레오폴트가 여기를 급습하긴 했지만 순식간이었었으니까.’
몇 달 뒤 레오폴트는 아멜리 친부의 가문인 힐베르크 후작가의 보물을 찾으러 이 경매장에 들이닥칠 예정이었다.
힐베르크 후작을 황실파로 회유하기 위해서인 한편으로, 힐베르크 후작가의 입지를 굳건히 하여 아멜리를 돕기 위함이었다.
수많은 고구마를 거치며 흑화한 그가 권력을 남용할 줄도 알게 되어서, 영장 하나 없이 진행한 급습이었는데….
문제는 그에게는 정보가 하나도 없어, 아무 소득이 없게 된다는 거였다.
‘그 정보가 나한테는 있지. 레오폴트가 찾는 것은 태양절 직전 경매에서 이미 팔렸다는 정보.’
그러니까, 오늘 말이다.
그 힐베르크 후작가의 보물이 오늘의 목표였다.
현 힐베르크 후작은 선대 후작의 적통 자식이기는 했지만, 원로원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선대 후작 부부가 마차 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인장 반지가 소실된 탓이었다.
‘힐베르크 후작에게 후사가 없어서 그간 인장 반지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안 했지만…. 이제는 자식 생길 거니까.’
인장 반지가 없는 탓에 힐베르크 후작은 아멜리를 제 딸로 입적할 수도, 후작령의 재산에 대해 권리를 행사할 수도 없었다.
‘오늘 경매에 나올 ‘그것’으로 신전에서 보관 중인 귀족 신분을 증명하는 반지를 찾고, 그걸로 인장 반지를 새로 제작하면 되는 거지.’
원작에서는 그 매개물이 오늘 이 자리에서 귀족파에 넘어가는 탓에, 힐베르크의 영지가 꼼짝없이 귀족파에 넘어갈 처지에 몰린다.
그 위기에서 루시페우스는 아멜리에게 거래를 청한다.
「“조건은 단 하나. 소공작과 결별하시고 제 눈이 닿을 수 있는 곳에 계시는 겁니다.”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위력으로 변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마음까지는,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지요.”
“…….”
“그렇지 않으면 레이디의 친부인 힐베르크 후작께서는 평민으로 전락하신다는 것. 레이디의 선택 단 하나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도 진득이 집착할 예정인데, 왜 아멜리를 안 좋아한다고들 그러지? 요즘 느끼는 답답함이 목구멍에 물씬거렸다.
“여기, 미리 입수한 경매품 목록입니다. 수정이 포함된 것은 표시해 두었습니다.”
알렉스가 서류 뭉치를 내게 건넸다.
“고생했어. 수표 넉넉히 챙겼지?”
“그럼요. 귀족파에서도 단단히 작정하고 왔겠지요?”
“이 자료를 귀족파도 얻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 1순위는 우리가 매입, 2순위는 누가 낙찰해 가는지 추적.”
“오늘 3소대 전원이 그림자로 왔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오늘의 표면적인 목적은 귀족파가 수정을 마구잡이로 사들이는 걸 훼방 놓기 위해서였다.
경매장을 통해 거래되는 수정은 이미 최상급으로 판명 난 것들이라 귀족파의 주목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 김에 우연인 듯 힐베르크의 보물도 사들이는 거지.’
나는 알렉스가 준 서류와 대조하는 척하며 그 힐베르크의 보물이 도록에 나와 있는지 뒤져 보았다.
‘성상(聖像)이라고만 언급돼 있었는데. 보자, 보자….’
경매품의 세밀화와 그에 대한 설명이 적힌 책자를 한참 뒤적이던 그때.
‘대리석으로 만든 대천사의 성상, 이거다!’
역시, 열 번은 넘게 원작을 읽은 보람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귀족파에서 이걸 낙찰받는다는 거지.’
나는 조명이 어둑하여 다른 좌석 쪽이 보이지 않는 경매장 내부를 슬며시 훑어보았다.
‘누가 왔을까? 그걸 가장 야무지게 써먹을 그일까, 역시…?’
내가 생각에 잠겨 웰컴 드링크로 나온 레몬수를 홀짝일 때였다.
“오늘 932회 특별 경매에 참석해 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팡파르와 함께, 반가면을 쓰고 턱시도를 입은 여성이 무대에 나와 개회를 알렸다.
경매는 알렉스가 입수한 문서에 적힌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3카그람 무게의 수정 수석, 고대의 마녀가 썼다는 수정구, 고대 왕국 시절의 유물, 남대륙 양식으로 세공된 수정 팔찌 등등….
수정이 들어간 경매품이 나올 때마다 우리 쪽도, 장내도 바빠졌다.
낙찰 경쟁자가 여럿인 걸로 보아, 여러 귀족파 가문에서 사람을 보낸 모양이었다.
‘귀족파가 아니면 지금 이 시점에 수정에 목을 맬 일이 없지. 수정 값이 폭등하는 건 사냥 대회 이후의 일이니까.’
우리의 전황은 4승 3패. 경매에 참가한 귀족파 가문이 족히 다섯은 돼 보이니, 꽤 선방한 셈이었다.
수정은 이걸로 다 됐고, 그럼 이제….
“열여덟 번째 경매품! 제국력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천사의 성상입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오, 드디어.
알렉스와 공유할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여, 나는 번호판을 꼭 쥐었다.
‘자, 그럼 자연스럽게….’
내가 미리 만들어둔 대사를 입에 머금을 무렵이었다.
“네, 81번에서 금화 100개 부르셨습니다.”
81번, 지금껏 수정을 갖고 경쟁한 적 없는 번호였다.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