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묘하게 돌아가는 러브라인 (10)
“저 17번은 또 누구고? 혹시 알아?”
“글쎄.”
루시페우스가 짧게 웃었다. 그것이 웃음이라기엔 너무나도 짤막해서 율리안은 알아챌 수 없었지만.
아느냐면, 알았다.
남들 눈에는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를 틀어 묶고 작은 칵테일 모자 아래로 망사를 쓴 세련된 평민 여성이겠지만…. 그에게 그런 눈속임은 무용했으니까.
오늘은 또 어떤 재미난 콘셉트로 행차하셨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역시 종잡을 수 없는 분이셔서.’
그런 그의 가슴 한구석에 인 것은, 분명한 간질거림.
그 마음을 무엇으로 분류해야 하는지 그는 여전히 알 생각조차 없었지만.
율리안은 루시페우스의 시선을 따라 17번 참가자가 자리한 박스 쪽을 바라보았다.
경매가 시작되면서 실내가 조금 밝아진 덕분에 반 층 높은 곳에 자리한 그 인물들이 보이기야 했다.
망사 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쓴 여인과 그의 수하로 보이는 남성. 하지만….
‘정말로 초면인데. 귀족 같지도 않고.’
율리안이 고개를 작게 갸웃하며 다시금 말을 붙였다.
“뭘 알고 입찰하는 건가? 우리 쪽 사람은 아닌 것 같지?”
“아니지.”
그리 단정 짓는 어투에 일말의 불쾌감조차 없었다.
알비누스 후작의 사냥개처럼 그가 시키는 일을 기계적으로 처리해 나가는 그가, 임무가 틀어졌는데도 아무런 거리낌을 보이지 않았다.
눈빛이 가라앉지도, 미간이 좁혀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금 즐거운가…?
늘 속을 알 수 없지만, 오늘은 더더욱 알 수 없다고 율리안은 생각했다.
‘저 17번 쪽에서 눈을 못 떼는 걸 보면 무슨 생각이 있기는 한 모양인데….’
과묵한 만큼 표정도 없는 그가 미소 비슷한 걸 띠었으리라 상상도 못 하여, 율리안은 그저 그에게도 생각이 있겠거니 넘겨짚을 따름이었다.
“열여덟 번째 경매품! 제국력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천사의 성상입니다.”
그때, 오늘의 경매에서 그들이 유일하게 직접 움직이기로 한 목표물이 경매에 올랐다.
늘 그렇듯 율리안이 대신 나서기 위해 경매 번호판을 쥐려 할 때였다.
허공에 루시페우스의 장갑 낀 손이 올라와 있었다. 마치 그를 제지하듯이.
“자네가 직접 하게?”
루시페우스는 대답하는 대신 번호판을 집어 들었다.
그런 그의 손길에 야트막한 설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루시페우스 본인도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자꾸만 제 임무를 방해하시는 작은 빛께서, 이것마저도 방해하시면 어떨지 싶은 마음에서였다.
번호판을 들고 금화 100개를 입력한 루시페우스는 자연스레 17번 참가자가 자리한 쪽을 쳐다보았다.
마침 그녀의 수하로 보이는 자가 쌍안경으로 이편을 살피고 있었다.
신상을 숨기기 위함인지 변장 마법이 걸린 모자를 쓰고 있는 그 남자…. 그래. 그러니까 남자였다.
쌍안경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루시페우스는 저도 모르게 불쾌함을 선연히 드러내고 말았다.
그것이 일종의 위협이 되었을까. 쌍안경 너머의 사내는 잔뜩 놀란 듯했다.
그의 의도대로였다.
사내가 숨을 들이켜며 당황한 낯을 지은 것에 루시페우스는 다소간 만족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가 싶던 남자는… 그녀의 얼굴에 붙어서는 다정하게도 이마를 닦아내 주며 안색을 살폈다.
그러니까, 다정하게도….
그에 화답하듯 이어지는 그녀의 해사한 미소까지.
제게는 늘 야멸차신 작은 빛께서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으시는 종류의 표정이었다.
그것이 불쾌하다는 인식을 하기도 전에, 그는 화풀이하듯 그녀가 내건 입찰액의 두 배를 불러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율리안 겔프가 작게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과하게 구는 이가 아닌데.’
그 입찰액에 놀란 것은 루시페우스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 입이 왜 타는지도 모르는 채 스파클링 와인으로 입을 축였다.
정작 그녀는 놀란 기색도 없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퍽 성실하게 입찰을 이어갔다.
그녀에게 필요한 거여서인지, 저를 방해하고 싶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까 그 사내가 나를 확인했으니, 나와 경쟁 중인 건 아실 테지.’
필요하시다면, 가지시면 될 것이다.
제 것을 굳이 앗아 가고 싶으시다면, 그리하셔도 나쁘지 않을 거였다.
저를 의식하시고 저에게서 무언가를 얻으시기 위해 저를 떠올리신다면 즐거우리라.
‘즐거움이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루시페우스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삶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엇도 바라지 않는 삶이었다. 이번 생에 그의 바람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그 ‘바람’이라는 게 생겼음이 낯설고, 한편으로 두렵게 느껴졌다.
그녀가 입찰하는 것에 따라 기계적으로 입찰액을 올리면서도, 그는 제 마음속에 이는 낯선 울렁임을 잊으려 애썼다.
제 낯을 가리려는 듯, 장갑 낀 손으로 코의 가장 우뚝한 부분을 짚었을 때.
“네, 17번에서 다시 금화 1500개 입찰하셨습니다! 더 없으신가요?”
이윽고 그녀가 반드시 낙찰받겠다는 의사를 피력하듯 퍽 높은 금액을 불렀다.
지금껏 그녀의 입찰액에 곧바로 조금 더 보탠 금액을 불렀던 루시페우스는 얼마간 머뭇거렸다.
오늘 그의 임무는 바로 저 성상을 낙찰받아 가져가는 일이었다.
돈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금화 1500개의 열 배도 지불할 수 있었다.
‘내가 여기서 추가로 입찰한다면 결론은 둘 중의 하나겠지. 내가 낙찰받거나, 더 높은 금액을 부르시거나.’
그녀가 원하는 것을 제가 얻어 버린다면, 당연히 아쉬워하실 거였다.
제게 분한 감정을 가지신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즐거울 것 같았다.
분해하시는 동안에는 저에 대해 생각하실 테니까.
‘내놓으라고 찾아오신다면 순순히 내어드릴 수도 있는데.’
알비누스들과 달리 제게 바라는 것 없는 그녀에게는, 무엇이든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었다.
‘아, 그 레이디를 연모하는 척을 하길 바라시는 건가.’
그 엉뚱하심이 또 즐겁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루시페우스는 쉽게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제가 가졌을 때, 그녀가 제게 찾아올 확률은 100퍼센트가 아니었다.
반대로, 그녀가 성상을 가진다면… 그것을 빌미로 그녀를 찾아갈 기회가 생기는 것이었다.
간단한 일이었다.
너무 간단하여, 이내 다른 변명으로 덮어버릴 수 있을 만큼.
‘그래. 당해드리는 게 좋겠군. 불가항력에 의해 후작에게 곤란을 안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그 ‘불가항력’이라는 것이 제가 그녀의 즐거움을 감히 앗을 수 없다는 마음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루시페우스에게 그것은 일종의 변덕과도 같았다.
후작만이 알고 있던 제 빨간 눈을 두고서, 그녀에게 거래 운운하고 만 그 변덕의 연장선상.
‘그때도 계셨더라면, 그 생이 조금이나마 살 만했으려나.’
그렇게 부질없는 생각을 할 때. 제 동태를 살피려는 듯 제 작은 빛이 이편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제 수하가 쓰던 쌍안경으로 이편을 빼꼼히 살피는 모습.
그가 할 수 있는 건, 제 즐거운 마음을 내색하여 희미한 미소 한 자락 보여드리는 것뿐이었다.
저를 보고 놀라시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었다.
저를 눈에 담으셨으니까.
오늘 경매의 수확이 좋았다.
나는 자못 흡족해져서, 경매 끝나갈 무렵에 시킨 청사과 에이드를 홀짝였다.
‘루시페우스가 성상을 일부러 포기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쌍안경으로 그를 살피자, 마치 내가 저를 보고 있는 걸 알고 있는 듯이 미소 지어 보이던 그의 얼굴….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그때, 복도를 살피던 알렉스가 말했다.
“사람들 다 빠져나가고 가시는 게 편하시겠죠?”
“응, 수령할 상품도 많으니까.”
“귀족파 놈들이 수정 내놓으라고 지키고 있으면 어쩌죠?”
“…그건 내 호위 담당인 경이 생각해야지?”
“그렇군요….”
말꼬리를 흐리면서도, 알렉스는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는 암조 기사들 중에서도 퍽 호전적인 성미를 갖고 있었는데, 행정 업무에 재능을 보인 탓에 3소대를 맡아 늘 몸이 근질거린다고 하던 차였다.
경매장의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며, 내가 느긋하게 알렉스와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테라스의 난간에 인영이 하나 나타났다.
캉!
반사적으로 알렉스가 검을 휘두르며 커다란 파열음이 났다.
신성력을 덧씌운 검격을 막은 건 나무로 된 지팡이였고, 그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경.”
“오늘은 에스메르 상단주이신 모양이로군요.”
알렉스의 검을 막은 채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낯이 서늘하게 빛났다.
“알렉스. 물러나.”
“하지만…!”
“괜찮아.”
순식간에 마력으로 지팡이를 강화하여 알렉스의 검격을 막아냈을 거였다. 루시페우스의 실력에 비하면 정말 사소한 일이겠지만, 그만큼 알렉스의 자존심이 꽤 상했을 게 빤했다.
알렉스의 신성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루시페우스가 너무 강한 것뿐인데.
‘경매장 내부에는 마법 무효화 결계도 쳐져 있을 텐데,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거지.’
승산이 없는 상황. 알렉스는 마지못해 검을 거뒀다.
“제가 에스메르 양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단주님!”
알렉스가 뭐라 말하건, 루시페우스는 내 낯만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어스름한 경매장의 조명을 등지고 있어 내게 그림자를 드리운 그의 낯이 어둑했다.
“제가 호위 기사를 잠시라도 떼어놓지 못하는 상황이어서요.”
내 대꾸에, 루시페우스는 뭔가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러고 보면 글렌치아 연회의 테라스에서도, 6월 자선 파티 때도 어쩌다 보니 단둘이 있기야 했는데….
‘모르는 사람 있다고 쑥스러워하는 성격이기라도 한 거야, 뭐야…?’
나는 그의 기색에 개의치 않고 한참 동안 그를 쳐다보았다.
짧은 대치가 이어졌을 때, 루시페우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을 해칠 수 있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었던가요.”
이어지는 적막. 알렉스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니 제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는, 전하의 안위를 제가 적극적으로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뇌리를 스치는, 알제니아의 장원에서 돌아오는 마차에서 그가 했던 말.
‘아, 그래서 내가 지금도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는 건가.’
하지만 지금까지 일부러 그를 위해 기사들을 물린 적은 없었는데.
“무기를 버리면 경계를 푸실까요.”
그리 말하며 그가 뎅그렁, 지팡이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고요한 와중에 지팡이 구르는 소리가 났다.
‘저건 눈속임이면서….’
그리 생각하며 눈을 흘기는데, 루시페우스의 낯이 왠지 긴장한 듯했다.
내가 거절할까 봐 걱정하는 듯한…?
‘손잡아 보겠다고 할 때마다 저런 표정이었던 것 같기도 한데….’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는 얼마간 고심하다가 알렉스에게 나지막이 일렀다.
“손님 껄끄러워하시니 잠깐 물러서 있어.”
“하지만 저, 단주님….”
“그는 내가 누군지 알아.”
“그래도요…!”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서 손을 내저었다.
알렉스가 걱정하는 바를 모르는 것 아니었지만, 그가 나를 해치진… 않을 거니까.
‘아마도….’
내 나름의 고압적인 태도에, 알렉스는 자못 걱정된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문가에 가서 섰다.
알렉스가 적당히 떨어진 것을 확인한 루시페우스의 낯이 조금 풀어진 듯한 순간.
그는 그대로 몸을 낮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정중한 몸짓에 나도 나지만, 알렉스 또한 작게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루시페우스가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일전에 말씀드린 거래에 대해 생각을 좀 해 보았습니다, 에스메르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