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달밤, 발코니에 숨어든 손님 (5)
“어젯밤 성내에 진짜 큰일이 났었어요.”
“큰일?”
다음 날 아침, 메리제인이 내 침실로 출근하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하는 말에 나는….
‘그 일이겠지?’
내 수하들이 성공했음을 알았다.
“간밤에 저잣거리에서 큰불이 났다지 뭐예요? 그, 상단들 건물 있는 거리에 공용 마차 보관소 그 근처에서요.”
아하, 역시.
나는 눈을 가늘게 휘었다.
상단 거리, 공용 마차 보관소 옆.
그러니까, 알비누스 상단 건물.
‘알렉스가 득의양양한 낯으로 보고하러 오겠네.’
나는 흡족한 마음을 숨긴 채 속눈썹을 팔랑팔랑, 세실리아의 눈동자를 깜빡였다.
“어머, 그럼 어떡해. 근처 상단에 큰 피해가 있었겠네? 공용 마차 보관소도 한동안 못 쓰겠고. 말들은 괜찮대?”
“그게,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다행히 마구간 쪽에는 불이 안 번졌대요. 말 한 마리 다치지 않아서, 와중에도 달의 신의 가호가 있었다고들 얘기했어요.”
역시 내 수하들, 동물 사랑이 남달랐다.
“옆에 상단은 창고가 홀랑 다 타 버렸다지만, 뭐, 생명 안 다친 게 어디예요?”
“흐응, 정말 다행이네.”
나는 거울 너머로 내 일정을 챙기기 위해 와 있던 헨리에테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알비누스 상단 창고 전소라. 완벽하네.’
그들이 소각한 것은 마기에 잠식된 베라초. 그 연기가 어떤 독기를 분출할지 모르니 신성력을 활용해 불길을 조절했을 거였다.
덕분에 마구간 말들도 안 다치고.
‘어제 마르탱이 알비누스 상단 사람들을 만나서, 도대체 뭘 유통해야 하는 거냐며 대충 모양새라도 보여달라고 억지를 부리기로 했지. 그렇게 창고 위치를 알아냈을 거고….’
그리고 밤에 다시 가서, 알비누스의 창고에 불을 질렀다.
방화쯤이야 수위급 성기사들에게 어려울 것 하나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알비누스 후작가가 항의할 경우를 대비해 마기에 오염시킨 베라초 견본도 챙겨 놓으라고 했고.’
순조로웠다.
‘루시페우스야 상단 일하고는 큰 연관이 없댔으니 괜찮겠지…?’
그리고 이렇게 그의 안위를 걱정하게도 됐지만… 뭐, 적당히 인정하기로 했다.
‘사람 마음이란 건 다 변하니까, 내 마음도 언젠가는 변할 거야.’
지금이야 눈길이 가겠지만, 그냥 이렇게 지내다가 마음 잠잠해지면 되는 거였다.
어차피 그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니까. 뭘 바랄 것도 없이, 그냥 혼자 좋아하다가….
그냥 그렇게.
전생에서부터 익숙해진 체념을 되새기자니 침울해지려 했다. 나는 억지로 방긋 웃으며 헨리에테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오늘 일정 보고드립니다. 오전에 알렉스 경이 알현 요청하셨고, 오후에는 원로원 방문이십니다.”
“원로원에 가세요? 웬일로요?”
“으응, 그냥 바람도 쐴 겸, 재판 방청이나 다녀오려고.”
내가 눙치며 하는 말에 메리제인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또 무슨 재밌는 꿍꿍이신지는 모르겠지만요, 호위 기사들 속 썩이지 마시고요.”
“메리. 메리는 내 사람이야. 걔네들 사람 아니라.”
“네에, 호위 기사분들도 전하 사람이고요. 일종의 동지애 같은 거예요.”
그리 말하며 메리제인은 과장된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내가 과보호받던 어린 시절부터 온갖 연기를 다 해가며 쏘다닌 것을 너무도 잘 알아,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고작 재판 방청인데 별일 있으려고?”
“전하께서 별일을 만드실까 봐 걱정인 거죠.”
“걱정 마. 위장 모자 쓰고 갈 거야.”
“그게 더 걱정이네요.”
메리제인이 피식 웃으며 내 위장 모자들이 보관된 쪽으로 건너갔다.
황궁의 바깥쪽에 자리한 원로원. 내 공식적인 집무실이 자리한 수선화궁 바로 맞은편이지만, 원로원은 거의 처음 방문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원로원 1층의 북쪽 날개에 자리한 원로원 법정. 귀족 간의 분쟁을 중재하는 이곳에서, 오늘 나는 또 예정된 승리를 하나 거둘 예정이었다.
‘후후, 돈이 아까워서 거는 재판이 아니니까.’
스읍, 후우.
그때쯤 끼어드는 심호흡 소리. 아, 얘는 아까부터 진짜.
아까부터 내 옆에서 열심히 숨을 고르는 신사에게 나는 타박하듯 말했다.
“경. 긴장돼? 남들 앞에서 얘기하는 건 아카데미 학술 대회 때부터 몇 번이고 한 거 아냐?”
“제가 전, 아, 에스메르의 상단주님 앞에서 처음 임무를 수행하는 자리 아닙니까.”
거기까지 말한 막심 블라우베르는 빠릿빠릿한 눈빛으로 머리칼을 매만졌다. 언제나처럼 빗어 넘긴 암녹색 머리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정갈하게 정돈돼 있었지만, 긴장한 탓에 계속 손이 가는 모양이었다.
“자신 없는 건 아니지?”
“그 정도 깜냥으로 제가 지난 7년간 단주님께 구직을 청했겠습니까.”
그리 말하며 막심은 제 앞에 쌓인 서류 뭉치를 팡팡 쳤다.
“그래. 결의가 대단해 보이네.”
“믿어만 주십시오. 쿠로바츠 블랑 경이 아무리 베테랑이라지만 없는 법을 만들어 내지야 못할 테니까요.”
“응, 믿음직해. 좋아.”
나는 그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아멜리에게서 에스메르 상단이 사들인 채권을 갖고서 마르크 백작에게 빚을 갚으라 독촉하는 날이었다.
‘판례를 자알 만들어놔야 아멜리에게도, 제2의 아멜리에게도 좋을 테니까.’
그리고 막심 블라우베르는 에스메르 상단주의 법률 대리인으로 와 있었다.
피고가 귀족이라 원로원 법정에 서게 됐지만, 평민인 코코 에스메르는 직접 발언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막심 블라우베르 경을 섭외했다…라는 설정이었다.
‘아카데미 졸업생이면 누구나 법률 대리인이 될 수 있으니까.’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 7년, 막심 블라우베르는 관료로 등용된 것도 아니고 학자의 탑에 들어간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그 기간을 보냈다.
그에게는 오늘이 일종의 공직 데뷔가 될 터.
‘조만간에 4황녀 직속 보좌관으로 사교계에 소개될 테니, 오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외유를 즐기는 셈이지.’
이윽고 육각 모자를 쓴 세 명의 판사와 서기가 들어왔다. 그들의 입장과 함께 장내에 들어선 모든 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이라 봐야, 마르크 백작의 가족과 몇몇 귀족파 인사들뿐이었지만.
‘귀족파 에이스 변호사를 붙여 놨으니 결과를 확인하러 온 게지.’
그래 봐야 정당성은 우리에게 있으니 질 리가 없지만.
내가 예견된 승리에 속으로 웃으며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
끼익, 저 뒤편의 육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흘끗 쳐다보니 그곳에는….
‘…왔구나.’
내가 기다린 적 없으나 기다린 이, 루시페우스가 여유로운 걸음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내부의 풍경에는 별 관심 없다는 듯,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소리 없이 앉았다.
콩닥콩닥콩닥콩닥,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왜 왔을까? 아, 마르크 백작 재판 결과를 감시하러 온 거겠지? 그렇지, 로즈버리에게서 돈을 뜯어 간 이들이 다 귀족파 부스러기니까. 경매장에 가고 프랑 자작 저택 감시하고, 뭐 그런 맥락일 거야.’
내가 여기에 연관된 줄은 몰랐을 테니까….
아니, 정말 그럴까? 어쨌든 이 재판은 에스메르 상단주 명의로 건 건데.
‘그럼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도 알까? 아직 얼굴 못 봤을 테니 모를까? 레베카의 초커로 알아볼 수 있댔지만 투시는 못 한다니까….’
아아아아, 심장이 두근대는 속도에 맞추어 생각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레베카의 신성력이 담긴 수정 펜던트를 손으로 꾹 쥐었다.
‘나를 알아볼까? 내가 있을 줄 알고 온 걸까?’
무의미한 생각만 머릿속에서 핑핑 돌아갔다. 에스메르 상단주용으로 제작한 망사 달린 변장 모자를 쓴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새빨개진 낯이 이 훤한 재판정에 다 드러났을 테니까.
“본인은 이 자리에서 태양의 명징함과 달의 엄정함을 본받아 거짓 없이 발언할 것을 맹세합니다.”
개정(開廷)을 알리는 간단한 의식이 치러진 뒤. 막심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방청석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블라우베르 소백작의 아들 아냐?
웬 법률 대리인 놀이를 하고 자빠졌어?
블라우베르가 사교계 발길을 끊더니,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구먼?
마르크가 무슨 일로 이리되었는지 모르나?
예상대로인 방청객들의 반응에 나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역시, 마르크 백작이 로즈버리의 돈을 먹은 게 귀족파 꿍꿍이 때문이라고들 광고해 주는군.’
우리가 승소한 뒤에는 어떻게 반응할지, 그것도 볼만하겠는걸?
막심은 방청석의 수군거림에도 아랑곳없이 준비해온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원고가 마르크 백작가에 이행을 요구하고자 하는 채권은 본디 두 가문의 우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로즈버리 선대 남작 입장에서는요.”
감성 자극 좋고.
나는 흐뭇한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막심의 달변을 경청하였다.
“…하여, 신의 성실의 원칙에 따라 피고에게 채무를 이행할 것을 촉구합니다.”
휴우, 작정한 말을 긴장한 기색 없이 청산유수처럼 쏟아낸 막심은 과장스레 한숨을 쉬어 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제법인데, 경?”
“그간 제 이력서를 거절한 게 아까우시지요?”
그는 입을 놀릴수록 긴장을 더는 인물인지, 이제는 숫제 너스레까지 떠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싶은 걸 참고서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지금의 나는 평민 코코 에스메르니까.
뒤이어 귀족파에서 선임한 쿠로바츠 블랑이 발언을 시작했다.
“맞습니다. 이 증서는 두 친우 간의 거래에 대한 기록일 뿐, 채권자가 지난 36년간 채권을 행사하지 않은 데서 볼 수 있듯이 진정한 의미의 채권 증서는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콧수염을 전생의 감자칩 마스코트처럼 기른 쿠로바츠 블랑이 열심히 마르크 백작을 변호했다.
친(親)귀족파 성향의 변호사인 그는 돈만 주면 귀족파의 음습한 범죄도 다 변호해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원로원 법정에서 꽤 높은 승률을 자랑하는 해결사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가 승소할 수밖에 없다니까?
“그렇다면 그 돈은 어디로 갔습니까?”
“로즈버리 선대 남작이 보기에도 빌려줄 만하니까 빌려준 것 아니겠습니까?”
“그 용처를 마르크가 기억하고 있는지를 여쭙는 겁니다. 로즈버리에서 빌린 돈, 금화 이백 개.”
“그러니까, 그 정도의 돈은.”
“쿠로바츠 블랑 경껜 그 돈이 적게 느껴지십니까?”
“당대 마르크 백작가의 위세를 생각하면.”
“그 위세 높은 마르크 백작가가 금화 이백 개가 없어서, 아카데미 졸업하고 10년 동안 연락 한 번 않던 로즈버리 선대 남작을 만나기 위해 황성에서 말을 열흘 달려서 갔습니까?”
옳지, 옳지, 잘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열심히 박수를 치며 막심을 응원했다.
법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우리가 우세했으니까.
“이에 당시 로즈버리령 출입 기록과 로즈버리 당대 가주의 서신 목록을 증거로 제출합니다.”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귀족파의 승소 청부사를 초짜인 막심이 뛰어난 언변으로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막심 블라우베르, 제법인데?’
그간 그를 받아들이지 않은 세월이 아까워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벌써 그가 수족으로서 마음에 들었다.
“자자, 조용. 양측 대리인들은 착석하시오.”
나는 막심에게 흐뭇한 미소를 아끼지 않았다.
“대단해, 대단해. 방청객들 분위기가 벌써 초상집이야.”
마르크 백작가의 불미스러운 사건에 관심을 가진 소수의 귀족으로 이뤄진 방청객들은, 막심이 예상외로 선전하는 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분위기도 이쪽으로 넘어온 것 같아.”
원로원 법정은 귀족이 연루된 분쟁을 조정하는 곳인지라 방청석의 기류가 큰 영향을 끼쳤다.
‘귀족들은 체면을 중요시하는 법이니까. 우리 쪽 방청객 하나 없는데, 이 정도 반응이면 뭐….’
그리 생각하며 입꼬리에 미소를 매단 채 뒤편을 훑어보았다.
마르크 백작의 뒤쪽으로 그의 가족들이, 저 동떨어진 곳에 귀족파 인사들 몇이, 그리고….
‘악, 맞다.’
우연인 듯 스치는 내 시선의 끝에, 문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앉아 있는 루시페우스의 낯이 들어왔다.
눈이 마주쳤다.
마치 그가 오래전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