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19화 (119/220)

119화. 석연치 않은 설렘 (1)

똑똑똑.

으응, 뭐지….

“전하, 들어가도 될까요?”

이 새벽에, 나를 다 깨우고….

얼마 만에 이렇게 푹 잔 걸까, 나는 자꾸만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으려는 의식을 추어올리려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부들부들한 여름 침구에 살랑이는 얇은 커튼, 그 너머로 비치는 햇빛, 밖에서부터 풍겨오는 정원수의 습하고도 상쾌한 향기.

아, 그러니까 내 방 안인데.

‘내 방이라고?’

언제 온 거지?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어제 나는, 루시페우스가 깨어나지 않아서 종일 온실에 있다가….’

세르니타의 컨트리 하우스에서 그 일이 있었던 것이 벌써 이틀 전.

아멜리를 납치하려는 작전에 끼어들었더니, 도미닉이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던지.

그 말인즉, 그 작전은 루시페우스의 단독 소행이 아니라 알비누스의 입김이 닿은 거란 소리였다. 심지어 거기서 도미닉이 마법을 쓴 데다가, 마검사들이 등장하기까지….

아니, 그런 건 하나도 중요치 않았다.

루시페우스가 이상한 증세를 보이더니, 갑자기 기절하고 말아서.

“그는 위, 위험인물이니까. 알비누스의 흉계를 캐보려면 말이야.”

그의 불안정 때문에 지반이 뒤흔들렸던 양, 그가 쓰러지자마자 모든 것이 멀쩡해졌을 때.

나는 그렇게 어설픈 핑계를 대며 그를 데리고서 황궁으로 복귀했다.

이유는 그를 보살펴야겠다는 마음, 단 하나뿐이었는데.

요 며칠간 그와 나를 지켜본 암조 기사들은 이제는 놀리지도 않고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그를 프리지어궁의 내 방에 들일 순 없어서 평소 궁인들이 드나들지 않는 온실에 둔 거였고.

그가 꼬박 하루가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아서, 어제는 온실에서 그를 지켜보다가 깜박 잠든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지?’

황망하게 이리저리 구르던 시선이 가닿은 곳은, 침대 아래 놓인 신발 한 켤레 위였다.

내가 온실에 갈 때면 신곤 하는 뒤축 없는 로퍼.

그게 놓인 양이, 언젠가 그가 찾아다 주었던 슬리퍼가 그러했듯 매우 정갈했다.

아, 그러니까.

‘깨어났구나!’

다행이다. 얼른 가봐야….

‘핫.’

긴장이 풀려서일까. 갑작스레 그저께의 잔상이 밀려들었다.

평소의 무표정이 깨지고 만 그의 얼굴. 열기를 품고 있던 눈동자, 천천히 떨구어지던 그의 코끝이며 입술.

그러니까 하마터면 키, 키, 키….

‘꺄악!’

나는 그대로 이불보에 얼굴을 처박았다. 누가 내 새빨개진 얼굴을 볼까 봐서.

‘그래, 그건 분명. 그 분위기는.’

세실리아로서야 다 잊고 살았지만, 그걸 내가 어찌 모른단 말인가.

‘그러니까, 그도 나를… 조, 좋아….’

정말? 언제부터? 아니, 어째서?

아니, 그보다… 그래도 되는 건가?

물론 내가 헷갈렸던 것만큼 그가 아리송하게 군 순간들이 수많았지만….

‘분명 아멜리더러 연모하는 레이디라고 해놓고.’

그가 깨어나지 못했을 때는 그저 걱정뿐이었는데, 이제는 묻어두었던 고민들이 우후죽순 고개를 내밀었다.

‘일단 만나보긴 해야 하는데. 도미닉이 나타난 일부터 해서, 물어볼 게 많으니까….’

그렇게, 내가 한달음에 그를 보러 가고픈 마음에 다른 이유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을 때였다.

“전하, 들어갈게요!”

아이, 참. 어쩔 줄 몰라 하는 시녀들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맞다, 날 찾는 소리에 깬 거였지?’

고개를 치켜드니, 헨리에테가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시죠? 오전에 소대장 회의를 잡아 놓으시고선요.”

“아, 그랬지….”

“전하께서 늦잠도 다 주무시고. 요 며칠간 고단하시긴 하셨나 봐요.”

도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헨리에테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안경을 추켜올렸다.

아멜리를 임시 시녀로 섭외하기 위해서 헨리에테마저 데려가지 않았던 탓에, 그녀는 아직 사냥 대회에서의 일을 정확히 몰랐다.

“그분하고 마음 확인하셨단 얘기는 들었지만요.”

“무, 무슨 소리야?”

정확히 모르는 것 마, 맞네…! 나는 창피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몇 신데? 내가 늦잠을 잤다고?”

“곧 정오예요.”

“아, 그러게…?”

창밖을 보니, 날이 이미 꽤 밝아져 있었다.

이렇게까지 늦잠을 자다니? 정말 그간 피로했던 게 몰려왔나….

내가 낯에서 얼떨떨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사이, 헨리에테가 재빨리 다른 시녀들을 불러 내 옷단장을 시작했다.

‘일단 회의부터 마쳐야 온실에 가볼 수 있겠네….’

그레이스가 내 열여섯 살 생일 때 선물해준 집무실에 들어서니 암조의 세 소대장이 모여 있었다.

“미안, 미안. 점심 먹으면서 하자. 주방에 얘기해놨어.”

늦잠을 자는 바람에 그들을 한 시간도 더 기다리게 하여 미안해진 나는 수선을 떨었다.

“그분…께서 깨어나셨나 봅니다?”

“며칠 제대로 못 주무시더니.”

“안색이 좋아지셨어요.”

소대장들의 말소리에는 전처럼 놀리는 기색이 없었지만 나는 놀림당한 것 같아 낯을 붉혔다.

“무, 무슨 소리야?”

“어젯밤까지 내내 온실에 계셨다면서요.”

…그러기야 했지만.

그저께는 세르니타 후작령에서 밤새 마차를 달려 도착한 뒤 그의 잠자리를 살피느라. 그리고 어제는 깨어나지 않는 그가 걱정돼서.

끄응, 나는 대꾸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애꿎은 밀빵만 뜯었다.

“아무튼, 다들 사냥 대회 동안 수고들 많았어. 연말에 다들 포상 휴가 줄 테니까, 좀만 더 힘내줘.”

“별말씀을요.”

“네에.”

“감사합니다!”

다행히 나의 말 돌리기가 잘 먹혔는지, 세 소대장이 제 성격들에 따라 대꾸하였다.

어찌 되었건 사냥 대회도 무사히 마쳤고. 루시페우스도 깨어나고. 모든 게 순조롭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결국 별일 없었지만, 유시가 위험에 처했었고. 루시페우스 단독 소행인 줄 알았던 아멜리 납치 건에 알비누스의 입김이 닿은 것도 알았고….’

원작에서 보지 못한,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

그걸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다.

“세르니타 후작은 어떻게 됐어?

“역시 마수 때문이라고 하니 납득하더군요.”

“배상하라는 기미도 없지?”

“그럼요. 본인이 애초에 떳떳하지 못하니 뭐라고 항의하겠어요?”

세르니타의 별채는 그날 아주 난장판이 되었다. 도미닉 때문에 바닥이 다 갈라졌고, 응접실 위로 세 층을 루시페우스가 통째로 날려 버렸으니까.

거기에는 아주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다. 세르니타 후작이 관여한 핑곗거리가.

‘검은 숲에 남아 있던 마수들이 갑작스레 미쳐 날뛰는 걸 제압하다가 그렇게 됐다…라니, 그가 별수 있겠어?’

날뛸 만한 마수가 있는 걸 너무도 잘 아는 세르니타 후작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책임자인 제 실책을 덮어준 셈이니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었다.

“헤르미아나 전하께서도 대처를 아주 잘해 주셨어요.”

다음 날 내 조카들과 따로 복귀한 알렉스가 덧붙였다.

“아주 의연하게 세르니타 후작을 상대하시던데요? 황태자 전하께서 보셨으면 정말 든든하셨을 거예요.”

“…그래. 헤니에게 빚을 졌네.”

그리 읊조리는 입 안이 썼다.

언젠가 그레이스의 후계자가 될 헤르미아나에게 특별한 일은 아니나, 내 뒤치다꺼리를 맡기고 온 셈이라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귀족파를 어찌 다루는지 보라고 그레이스가 함께 보낸 거긴 하지만, 바로 실전에 나서게 할 줄이야.’

그건 내가 유스티안을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죄책감과도 연결된 것이었다.

‘나 때문에, 내 조카들이….’

나는 입 안을 지그시 깨물며 화제를 돌렸다.

“알비누스 쪽은. 이번 일이 실패한 데 대해 별다른 반응 없고?”

“예, 아직은요.”

케인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그들의 진짜 목적이야, 우선 루시페우스에게 물어볼 수 있으니 급할 건 없었다.

“그, 둘째분을 찾는 기색도 없습니다.”

루시페우스가 제 의형인 도미닉과 대치하고서 사라진 것이 이틀 전의 일.

‘어쨌든 최소 외박 최대 가출이니 찾을 법도 한데.’

루시페우스처럼 강한 자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건지, 아무런 제스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랑 있는 걸 보였으니 물고 늘어질 수도 있겠지만…. 도미닉이 내게 상해를 입혔으니 일단 납작 엎드려 있는 거겠지.’

현장에서 즉결 처분할 일이었지만, 자칫하면 암조가 단순한 호위대가 아님이 탄로 날 위험이 컸다.

렌틸 자작이 막 등장한 이때, 그녀와 연이 있는 내가 의심을 사면 몇 년 동안 해온 무해한 연기가 다 소용없어진다.

게다가 알비누스가 귀족파의 모든 음모에 촘촘히도 얽혀 있는 것 또한 문제였다.

‘일단 이번 건이 어찌 된 건지부터 살펴보고, 나중에 뒤엎을 때 한 번에 옭아매야지.’

기사들은 내가 알비누스의 크고 작은 악행을 저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다음 순서는 엘런이었다.

“렌틸 자작님께는 그간 밤손님이 매일 왔다고 합니다.”

“내 친우의 아버님께선 참 피가 차갑기도 하셔라.”

게이블스 후작은 결국 위험 요소인 제 누이를 제거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뻔뻔한 낯짝을 떠올리며 어깨를 작게 떨었다.

“게이블스 말고 다른 가문에서도 사람을 보냈다는 게, 확실히 자작님께서 귀족파 판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리라 걱정하는 자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자작의 호위는?”

“사냥 대회 마치고 황성 복귀한 뒤로, 2소대 전부 그쪽에 붙어 3교대로 근무 중입니다.”

“리나가 담당이지?”

“네.”

아멜리가 빚을 독촉하기 위해 돌아다니던 성내 탐험도 이제 다 끝났겠다, 리나를 렌틸 자작의 경호로 붙여둔 차였다.

“내 스승이시니, 자알 지켜 드려야지.”

귀족파의 세력 판도에도, 게이블스의 후계 다툼에도 렌틸 자작은 꽤 중요한 존재니까.

그다음으로 알렉스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보고를 시작했다.

“우선, 그분…께서 부재중이셔서인지 일전의 방화 건을 놓고 알비누스 상단에서 더 연락 온 것은 없다고 하고요.”

방화 건을 마법으로 감식했다던 루시페우스가 지금 이쪽에 있는 걸 두고 너스레 떠는 거였다.

나는 그에게 눈을 밉살스레 흘겼다.

“그거 말고.”

“네에, 대신전 비밀 서고의 세례 기록도 입수됐습니다.”

루시페우스의 어머니가 성기사인 데 착안해, 그가 신성력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확인코자 알렉스에게 지시한 것이 벌써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성기사단 원정 중에 아이가 태어난 전례가 없다 보니, 대신전에서도 자료를 찾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게다가 그 원정이 꽤 비극적으로 끝났고.”

세례를 받은 사람만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고 귀족으로 행세할 수 있으니, 당연히 루시페우스가 세례받은 기록이 대신전에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대신전에 남은 기록이라곤 그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뿐. 세례를 언제 받았는지, 대부나 대모가 누구인지, 세례를 받으며 측정한 신성력이 얼마인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전의 비밀 서고까지 열람하느라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사 결과, 성기사단에서 약식으로 세례받은 것이 맞더군요.”

“그렇다면 신성력 보유량에 대해서는….”

“기록돼 있기는 합니다. 다만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다. 일반인보다야 많지만, 성기사가 어머니라기엔 딱히 특별하지 않달까요.”

“거기에 잘못 적혔을 리는 없고?”

내가 난데없이 묻자 알렉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약식 세례라도, 증인 셋의 서명이 필요한걸요.”

“그 증인은?”

“당시 에리나 알비누스 경 휘하의 기사들로, 당시 모두 전사했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대강 대꾸하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 톡, 쳤다.

‘루시페우스가 그런 증세를 보인 건, 분명 그에게 신성력이 과하게 많아서…라고 했는데.’

나는 세르니타의 장원에서 돌아온 깊은 새벽, 나를 위해 한달음에 달려와 준 내 언니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세실, 무슨 일이니?”

프리지어궁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레베카에게 온실로 와달라 청했다.

아무리 레베카가 대신전에 매일 출근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게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으니 분명한 민폐였다.

하지만 그날은 그런 걸 판단할 이성이 날아가 있었다.

“세르니타에서 무슨 일이 있었…. 헉.”

내 온실에 들어선 레베카는, 아열대 활엽수 너머의 나를 발견하자마자 크게 놀랐다.

군데군데 찢어진 치맛자락. 넘어지면서 찍히는 바람에 너덜너덜해진 손바닥과 무릎, 정강이. 거기서 나온 피와 분진이 잔뜩 묻은 손이며 얼굴에 옷가지까지.

그리고 기절해 있는 루시페우스.

레베카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암조 기사들이 간이침대를 수배하러 간 사이, 바닥에 뉘어둔 그의 머리를 내 무릎에 괸 채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는 양에 다친 다리가 아렸지만 그쯤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언니, 일단. 일단…. 이 사람을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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