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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62화 (162/220)

162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9)

‘…끼리끼리, 가관이네.’

헨리에테는 윌로우 게이블스와 헤이븐 프렘린 쪽을 흘끗대며 속으로 빈정대었다. 일할 때 끼는 안경은 사교계의 레이디 헨리에테로 차려입으면서 벗고 온 채였다.

‘그리고, 보자아….’

헨리에테의 보라색 눈동자가 고요하게 움직여 홀 안을 훑었다.

‘저기 있군. 예전 같았으면 윌로우 게이블스 쪽에 붙어 있었을 텐데.’

헨리에테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제 시야에 걸려든 남자를 살폈다.

윌로우 게이블스와 정반대편에 자리한 도미닉 알비누스였다.

‘저자가 전하께 구애한다는 걸 알고서 윌로우 게이블스가 겁박했다더니. 확실히 사이가 전 같지는 않아 보이네.’

오늘의 두 타깃을 확인한 헨리에테가 제 앞의 신사들에게 생긋 웃었다.

그들은 모두 귀족파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가문의 인사들이었다. 귀족파의 주류가 어떤 음모가 꾸미는지는 모르는 자들이지만, 귀족파 전반의 여론을 청취할 때 긴요했다.

‘그리고 루시페우스 경이 관리하던 이들이지.’

헨리에테는 어느새 암조의 주의 대상에서 다른 의미에서의 주의 대상이 된 남자를 떠올렸다.

“그나저나, 영애한테 그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소.”

“뭔데요?”

“좀 재밌는 소문이 도는데.”

사교 클럽을 운영하며 무리의 구심점을 맡고 있는 레이븐 백작이 목소리를 낮췄다.

“4황녀 전하께서, 그, 알비누스 후작의 둘째랑 뭐, 그렇고 그런 사이시라는….”

그녀를 둘러싼 신사들이 모두 귀 기울이는 기색이 선명했다.

헨리에테가 세실리아를 소재로 너스레 떨 때 왁자하게 웃으면서 관심은 또 만만이었다.

‘애초에 내가 전하의 시녀라서 들러붙은 작자들이니까.’

헨리에테는 속으로 조소하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낯을 지었다.

“알비누스의… 둘째라면?”

“그, 루시페우스 경이라고. 레이디들은 잘 모르나? 키가 이렇게 커서는 안경 끼고 머리 묶고 다니는 영식 말이오.”

레이븐 백작이 제 머리보다 조금 높은 곳을 손짓하며 말했다.

“저기 저, 겔프 영식한테 물어봐도 아는 게 없다고 잡아떼지 않소.”

“아아, 그… 알비누스의 검은 신사라던가, 그분요?”

헨리에테가 연보랏빛 속눈썹을 팔락거리며 의뭉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사교 클럽에서 두 분 사이를 놓고 내기들을 한다더니, 아직도 그러는 모양이네.’

빈정거리는 속내와 달리, 헨리에테는 천연덕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살랑거리는 부채에 신사들의 시선이 붙박였다.

“오오, 그 부채는.”

“저희 전하께 들어온 선물을 하사받은 거죠. 딱 봐도 동대륙산인데, 이런 건 잘 모르시잖아요?”

“원체 검소하시니까.”

“프리지어궁 궁인들 사이에 소문이 짜하다더군.”

신사들의 낯에 온화한 기색이 감돌았다.

또, 또, 또 시작이다.

주군께서는 게이블스와의 분쟁에서 어리숙한 이미지를 보이신 이후로, 그 왜곡된 인상 그대로 귀족들에게 얕보이기를 즐기셨다.

기실 그게 유용하기야 했다.

귀족파 작자들이 4황녀의 보좌관인 저 또한 방심한 채 대하곤 했으니까.

문제는 그 방심이, 고귀하되 검소한 4황녀를 제 집안의 안주인으로 들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까지 흘러가는 것이었다.

‘덕분에 이자들이 내게 잘 보이려고 친근하게 구는 거지만, 번번이 역겨운 건 어쩔 수 없네.’

아수라마수라에서 혼기를 넘겼다고들 하는 스물다섯인 헨리에테가 보기에, 신사들의 주제 모름은 도가 지나쳤다.

남자란 자고로 어리고, 잘생기고, 커야 하는데 말이다.

‘돈이야 전하께서 많으시니까, 그거 축낼 머저리만 아니면 되고. 게다가 전하 곁에는….’

마침 신사들이 떠올리고 있는 남자와 제가 떠올리는 남자가 같아, 헨리에테는 고소하다는 표정을 부채로 가렸다.

애초에 이 부채가 세실리아의 오라비이자 제국 최고의 거부인 글렌치아 공작의 부군인 테오도르의 선물이었다. 그는 제 유일한 동생을 위해 이런 진귀품을 다달이 보내오곤 했다.

세실리아가 아무리 검소하대도 그들의 수준으로는 그녀의 안목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

‘이게 동대륙의 밀림에서만 자생하는 희귀종의 깃털로 만들었단 것도 모를 작자들이.’

헨리에테는 속마음과는 달리 고혹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안 그래도 그 소문에 대해 듣기야 했어요. 어쩌다 보니 두 분께서 이따금 동선이 맞으셨던 모양인데, 신기하죠?”

“어쩌다 보니?”

“저희 전하께서 교류하는 영애가 그리 많지 않으시잖아요? 한데 아무래도 알비누스 쪽에서는….”

헨리에테가 슬며시 허리를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레이븐 백작이 덩달아 허리를 숙여 그녀의 부채 근처에 귀를 갖다 대었다.

그들을 둘러싼 신사들 모두가 숨죽였다.

“게이블스의 차기 가주로 레이디 스칼렛을 지지하는 것 같던데.”

“허어?”

레이븐 백작의 탄사에 맞추어 신사들이 모두 얼빠진 낯을 하였다.

“저희 전하께서 레이디 스칼렛과 교분이 깊으시잖아요? 그 영식이 레이디 스칼렛에게 힘을 실어 주려다 보니 그렇게 자주 마주쳤나 보네요.”

“아아, 그게 그리된 거였어? 어쩐지….”

신사들이 서로를 눈짓하며 헨리에테의 이야기에 저들이 관찰한 바를 끼워 맞추려 애썼다.

그래서 4황녀 전하와 무슨 사이냐고 물었을 때 얼버무린 거구먼.

어쩐지, 어찌나 인정을 안 하던지.

그게 다 사실이 아니어서 그런 거였어.

헨리에테가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진 게 벌써 7년이었다. 그녀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이는 아수라마수라 사교계에 없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두 가문의 후계자들이 근래 반목하잖아요?”

헨리에테가 은근한 눈짓으로 윌로우 쪽과 도미닉 쪽을 번갈아 가리켰다.

그들이 반목하는 건 사실 도미닉이 세실리아에게 접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지만…. 그의 구애가 세실리아의 비밀을 갖고서 협박하는 방식으로 이뤄진 만큼, 그 상황을 정확히 아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헨리에테를 둘러싼 신사들은 그녀의 의도대로 휘둘려 주었다. 신사들의 시선이 윌로우 게이블스를 스쳤다가, 도미닉 알비누스에게로 가서 오래간 머물렀다.

게이블스의 망나니보다야 알비누스의 음침한 녀석이 더 만만한 법이었으니까.

시선을 느낀 도미닉 알비누스의 낯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들이 저를 무시한다고 착각하겠지.’

그러는 사이, 신사들의 뇌리에서 루시페우스와 세실리아의 염문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헨리에테는 속으로 씨익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나저나…. 제가 격무에 시달리는 사이, 다들 재미 좀 보셨다면서요?”

“재미?”

“요즘 수정 거래가 호황이라던데….”

헨리에테의 은근한 말소리에 신사들이 모두 흠칫 놀랐다.

여성으로서 가주가 된 글렌치아 공작의 경우가 특수할 뿐, 아수라마수라 사교계에서 투자니 상업이니 하는 것들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것이다.

“어, 허허, 이것도 4황녀 전하께서 들으신 이야기일까?”

“아이, 참. 저희 막내 전하야 그런 데 무슨 관심이 있으시겠어요? 그저 애민(愛民)에만 관심 있으시지.”

그리 말함으로써 헨리에테는 마치 세실리아가 위정자로서의 명분만 알고 세상 물정은 잘 모르는 것처럼 묘사하였다.

“저도 슬슬 퇴직하고 혼인할 때가 됐으니까요.”

“라마르 백작께서, 아무래도 지참금은 직접 마련하라시나 보지?”

“아버지야 저나 제 동생들 대하심에 다름이 없으시지요.”

세실리아가 혼외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겠다고 저를 발탁한 건데, 아직도 제가 라마르 백작의 친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리 구는 치들이 있었다. 그에 대한 염증을 담아 헨리에테가 희귀종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더욱 고혹적으로 팔락였다.

“제가 퇴직하면 이런 건 다 그만둬야 하니까요. 그 전에 밑천을 좀 당길까 싶어서.”

헨리에테가 아직 혼인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사치벽 때문으로 포장돼 있었던 것이다.

“오오, 그게 말이지. 조만간에 수정 값이 정점을 찍을 거라는 정보가 있어서 말이야.”

“우리 신사들끼리만 아는 건데, 레이디 헨리에테는 손이 크니 우리가 특별히 끼워줌세.”

“어머. 영광이어라.”

신사들의 허세 가득한 호언장담에 헨리에테가 생긋 웃었다. 저들이 귀족파 주류의 사탕발림에 홀랑 넘어가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르고 종잣돈을 대준 걸 헨리에테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한데 그게, 우리가 직접 하는 게 아니라….”

레이븐 백작이 사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한껏 낮췄을 때였다.

“아니, 어디서 우리의 정보가 새나 했더니, 레이븐 백작이셨습니까?”

“아이쿠, 투자 정보에 그리 밝으신 게, 영식의 귀가 이리도 밝아서였군요?”

찔끔 놀란 레이븐 백작이 갑작스레 나타난 상대에게 과장하여 너스레를 떨었다.

조금 전까지 윌로우 게이블스와 낄낄대던 헤이븐 프렘린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헨리에테. 소문을 듣자 하니 4황녀 전하께서는 여전하신 것 같고.”

“소문요?”

“우리 4황녀 전하께서 어찌나 검소하신지.”

아, 여기도 또 검소 타령인가. 속으로 진절머리 내며 헨리에테가 생긋 웃었다.

“옛날 옛적에 우리 가문 기사단의 종자 하나를 재활용하신 거야 이미 유명한 이야기고.”

“어차피 그렇게 다혈질인 여기사는 다루기 힘들 거였잖아요. 그만 놀리셔요.”

헨리에테는 어금니를 깍 깨문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대꾸했다. 어린 시절 프렘린 기사단에서 갖은 차별에 시달리다 탈출한 리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황실과 게이블스의 알력 다툼 때문에 게이블스와 혼담을 못 맺으니, 꿩 대신 닭이라고 알비누스와 혼담이 오간다지요?”

헤이븐 프렘린의 말소리에 주변을 둘러싼 신사들의 눈동자가 헨리에테에게로 향했다.

“그 가문의 형이고 동생이고 다 4황녀 전하께 홀려서 우리 소후작과의 의리를 다 저버리고 말이야.”

헤이븐이 빈정거리며 제 뒤로 손을 휘둘렀다. 윌로우 게이블스의 어깨를 툭툭 치는 것이었다.

“아, 아이고 소후작.”

“거기 있었소?”

와병한 사이 그 존재감이 약해졌는지, 그제야 그를 인식한 신사들이 허둥지둥하였다.

“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으면 그럴 수 있지.”

윌로우 게이블스가 위협적으로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저는 하나도 재미있지 않다는 시위였다.

그의 흉흉한 분위기에 신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도 제가 부마 후보에서 제명된 것에 앙금이 남았나…?’

헨리에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상 펴게, 자네. 아무리 알비누스가 돈놀이로 세를 일군 가문이라지만, 우리 귀족파 신사들 사이의 신의조차 모르겠어?”

맞소, 맞아. 어쨌든 게이블스의 후광에 짓눌린 신사들은 헤이븐 프렘린의 말에 태엽 인형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여댔다.

“어, 어쩐지, 요즘 알비누스가 조용하더라니.”

“조용해야만 하는 거였구먼. 이, 이렇게 소후작의 심기를 거슬러서야….”

그리 말하는 신사들의 눈동자가 또르르 저 구석에 있는 도미닉을 향했다. 그들 모두가 최근 윌로우 게이블스와의 개인 면담을 피할 수 없었던 차였다.

헨리에테도 신사들을 따라 도미닉 알비누스를 살폈다. 그는 이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목덜미까지 시뻘게져 있었다.

“게다가 제가 듣기로는….”

헨리에테가 그 사치스러운 부채를 접어 제 입술을 톡톡 치며 느릿하게 내뱉었다.

“그 동생분이 여러분과 진행하던 일을 그만둔 게 모두 소후작이 부마 자리를 노리게 되면서라던데….”

도미닉을 흘끗대던 신사들의 시선이 흉흉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루시페우스 경과 어울리던 신사들은 동업하던 게 중단돼서 입지가 불안해졌는데, 그 원망의 화살을 모두 알비누스 소후작에게로 돌려놓았습니다.”

“잘했어.”

헨리에테의 보고에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나 대신 여론을 청취하기 위해 사교계 활동을 시작한 헨리에테는 어느새 스스로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그리고, 짐작하신 대로 윌로우 게이블스에게 부화뇌동하는 자들 모두 알비누스 소후작과 반목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래?”

“수정 쪽 일이야말로 알비누스가 주도하는 사업인데 프렘린 영식이 있으니 소후작이 제 근처에도 오지 못하더군요. 파티 내내 제게 말을 걸고 싶은 눈치인 게, 아무래도 조만간 입질이 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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