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13)
정말, 사랑스러우시지.
귀여우시기도… 하시지.
루시페우스는 제가 감히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작게 자책하면서도 짧게 웃었다.
‘…얼른 돌아가서 뵙고 싶군.’
뵙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걱정 없이 마음껏 뵈러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또 어찌나 뿌듯한지.
마기를 내뿜는 거대한 대지의 균열을 발아래 두고서, 루시페우스는 자꾸만 풀어지려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쪽 지평선에서 저쪽 지평선까지, 크게 열 걸음의 간격을 두고서 대지가 깊디깊게 패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깊숙한 곳에는, 언젠가 그를 집어삼킨 적 있는 영원히 식지 않는 용암이 흘렀다.
아니, 그 직전에 달의 신에게 소환됐었지.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닫힌 상태라 그 열기가 와닿지 않았지만, 저 너머에 그 용암이 흐른다는 사실만으로 루시페우스는 수십 년 전의 절망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그 절망이 있어서 지금도 있는 거니까.’
그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제 작은 빛을 떠올리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곳에 오는 건 벌써 열 번이 훌쩍 넘은 일이었다.
이전 생과 이번 생에 어머니의 시신이 잠든 곳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이전 생에 제 마력을 쏟아부어 기어코 이 균열을 확장하기 위해서.
두 번의 생에 동일하게, 베라초와 수정을 마기에 오염시키기 위해 여러 번.
루시페우스는 균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위로 다가갔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나 싶은 순간, 그 바위가 성큼 멀어졌다.
‘…또 이러는군.’
마력이 본디 마계의 성질이어서일까. 아니면 제 마력이 달의 신이 말하던 ‘지하의 힘’에 기인해서일까.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근처에 오기만 하면 그의 마력이 평소보다 더 날뛰는 것이었다.
그만큼 마법을 쓰기에 용이했지만, 한편으로는 자꾸만 정신이 아뜩해지곤 했다.
평온한 생각, 평온한 생각….
루시페우스는 햇살 아래 빛나는 제 작은 빛의 은사를 떠올렸다.
바람이 불 때면 살랑대는 그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제가 그 머리칼을 감격에 찬 손길로 그러쥐면 노곤하게 감기는 눈꺼풀의 호선을, 그 가장자리를 따라 빼곡하게 난 은빛 속눈썹을, 그 올올이 스며들던 햇살을 떠올렸다.
제 손가락 사이마다 당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욱여넣고서는, 제가 당혹감에 굳어버리면 배시시 웃는 그 낯을 떠올렸다.
‘…다른 의미로 불안정해지는군.’
심장이 떨린다는 것 또한, 제 작은 빛과 함께여서 처음이었다.
그는 나직한 숨소리와 함께 세실리아가 아니면 알아볼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움직였다.
바위가 있던 자리의 흙이 대번에 걷히자, 지표로부터 한 뼘쯤 들어간 곳에 주먹만 한 크기의 수정이 수십 개 들어차 있었다. 마기에 오염됐음을 증명하듯 오색찬란한 반사광 대신 꺼멓고 불그죽죽한 기운이 그 안에서 일렁였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군.’
그 순조로움이 더 이상 그의 바람이 아니라는 것만이 이제까지와 다를 뿐이었다.
루시페우스는 손을 뻗어 그 수정에 미약한 마법을 걸어 보았다.
파직.
‘…역시.’
그의 마력이 닿은 순간, 수정의 내부에 미세한 균열이 갔다.
‘불안정한 상태여서 마력을 조금만 주입해도 망가지려는 걸 테지.’
수정을 모조리 파괴하는 거야 일도 아니었으나, 그랬다간 수정에 깃든 마기가 그의 마력과 감응하여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악영향을 미칠 거였다.
그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강제로 개방했을 때처럼.
달의 인력도 그때와 같지 않고, 수정 또한 그때만큼 마기에 잠식되지는 않아 효과는 적을 거였지만… 어쨌든 위험한 일이었다.
이래서야 마법을 써서 옮길 수는 없었다.
무릎을 대고 앉아 손끝으로 조심스레 톡, 건드리자 순간 수정 내부의 마기가 세찬 소용돌이를 이뤘다.
‘…물리력 또한 쓸 수 없고. 온전히 숙성될 때까지는 내버려 둘 수밖에 없겠어.’
어차피 이곳의 위치는 후작과 저만이 알고 있었다. 후작이 단신으로는 이곳에 오기 힘드니 여기에 접근할 수 있는 건 저밖에 없다.
물론 후작이 도미닉에게도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해 놓았겠지만….
‘그자의 마력으로는 여기까지 이동하지 못할 테고.’
그가 쓰는 마도 기계는 공격 마법에 국한된 것 같았으니까.
그가 거느린 마검사들 또한 순간 이동 마법에는 미숙한지 운신할 때 마법을 쓰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루시페우스는 손을 내저어 수정 위에 다시 흙을 덮고 그곳을 눌러두었던 바위를 원위치에 돌려놨다.
뒤이어 그의 손끝이 커다란 호선을 그렸다.
수정이 묻힌 곳 위로 희미한 반구가 나타났다가, 이내 육안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혹여 이곳에 접근하는 이가 있을 경우를 대비한 경비 결계였다.
‘내 마력이 여기서 온 만큼 황성에서보다 더 잘 기능해주지 않으려나.’
그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마법을 쓴 적이 많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어머니의 시신이 매장된 곳을 찾기 위해 나침반을 쓴 건 제 마력과 무관한 일이었고, 몇 번 순간 이동이나 비행 마법을 썼을 뿐이었다.
지난 생의 마지막에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여는 데 마력을 다 소진하고 말아 후작에게 아무런 저항도 못 하지 않았던가.
그건 물론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것이 더 컸지만….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야.’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깊디깊은 균열을 둘러싸고서 수정을 마기에 잠식시키고 있는 곳이 열몇 군데는 되었다. 수정을 묻어둔 그대로 거대한 술식을 완성할 수 있도록 배치해둔 터였다.
갈 길이 바빴다.
루시페우스의 신형이 홀연히 사라졌다.
끼이익.
루시페우스가 있던 곳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의 바위 너머에서, 장난감 수레가 기이한 울음을 냈다.
그가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듯 수레 한가운데 박힌 오닉스가 이채를 띠었다.
“그 신관님, 우선… 아로카트령 출신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로카트령이라면.”
“빨간 눈의 마을이 행정구역상 아로카트령에 속해 있죠.”
알렉스의 목소리가 더없이 진중하게 울렸다.
“그렇다면 정말로, 빨간 눈의 마을 출신일 확률이 크겠네.”
“네. 아무래도 빨간 눈이 다른 곳에 있기란 어렵기도 하고….”
나는 알렉스의 말에 그냥 눈썹만 들어 보였다.
‘다른 곳에 있기 어렵긴? 바로 내 옆에 있는데.’
내 옆…에. 무방비하게 든 생각에 나는 낯이 화끈거리고 말았다.
며칠 전, 함께 수도원을 방문했던 알렉스는 수도원과 대신전에 며칠씩 머무르며 킬리온에 관해 조사하고 복귀한 참이었다.
그간 딜런과 폴이 함구령을 잘 지킨 덕에, 알렉스는 여전히 루시페우스가 빨간 눈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정확한 주소는 따로 없고?”
“대신전에서 그 신관께서 입교 지원하셨 때의 자료를 찾아봤는데, 거기 적으신 건… 아로카트령 본성의 여인숙 주소였어요.”
“…정말 빨간 눈의 마을 출신이 맞겠네.”
“그렇죠. 아니라면 굳이 임시 주소를 쓸 이유가 없으니까요.”
나는 코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이건 그 지원서를 베껴 적은 건데요….”
알렉스가 제 수첩을 내밀었다. 문서 작업에 강박적인 기질을 띠는 알렉스는 이따금 보안을 기한답시고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서 보고하곤 했다.
교단의 비밀 서고를 열람하는 거야 그레이스의 증표로 가능했지만, 신관 한 사람의 개인정보를 빼돌리는 건 비밀에 부쳐야 했으니 몰래 적어 온 듯했다.
나는 알렉스를 만날 때면 준비해두는 돋보기로 내용을 살폈다.
“보시다시피, 교단에 지원하신 동기 자체가 성녀님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게. 희망 직분에 ‘성녀님의 시종’이라….”
“혹시나 해서 다른 지원서도 살펴봤는데, 그 정도로 구체적으로 적힌 건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성가대, 성서학 연구직 이런 정도지, 같은 시종직이라도 구체적으로 누구를 모시겠다는 건….”
“그래서 성녀의 시종으로 일했었대?”
“안타깝게도, 그 신관께서 귀의한 해에 성녀께서 환속하셨습니다.”
“저런.”
“그리고, 그 가족 관계를 보시면….”
나는 돋보기를 움직여 인적 사항이 적힌 앞부분을 살폈다.
“아버지가 기사였군?”
“예. 준남작이라 신분이 세습되지 않아 그 신관께서 평민이신 거고요.”
“안드레이 경이라…. 소속은?”
“성기사단에 복무했다가, 의무 복무 기간이 지난 후 스털링 백작가에 들어갔습니다.”
“스털링 백작가라면….”
귀족파이긴 한데…. 내가 머릿속으로 귀족 도감을 헤아리고 있을 때. 알렉스가 전에 없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작고한 알비누스 후작 부인이 스털링 백작가 출신이죠.”
“…그렇게 된 거군.”
그러니까, 높은 확률로 알비누스 후작은 킬리온과 이복형제일 거였다. 안드레이라는 이름의 기사를 아버지로 둔.
“신관의 부모는?”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래.”
내가 방금 보고받은 내용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는 내내, 알렉스는 조용히 내 입에서 떨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교단에서는 빨간 눈의 마을에 대해 알고 있을 확률이 클 듯하네.”
“엇, 그럴까요?”
“그 신관이 교단에서는 성녀와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잖아. 그런데 그날 성녀를 꽤나 친근하게 언급했단 말이지.”
그 자리에 없었던 알렉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그래서 내가 서서, 성녀님께 그 상자를 드, 드린 건데….”
그 상자가 무언지 몰라도, 선물을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라는 거였다.
무엇보다 성녀와 힐베르크의 선대 후작이 죽은 마차 사고는 부부가 별장으로 휴가를 떠나던 중의 일이었다.
휴가 계획을 알리고, 휴갓길에 그 선물을 지니고 갈 정도라면….
“그 신관이 교단에 들어오기 전에 성녀와 안면이 있었고. 지원서에 적은 주소가 아로카트령의 가짜 주소인 걸 보면 귀의하기 전까지 계속 빨간 눈의 마을에 살았었다는 소리고.”
“성녀께서는 어려서 신성력을 발현하신 이후로 대신전에서 자라셨으니까요.”
알렉스의 첨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속한 곳에서 벗어날 일 없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빨간 눈의 마을의 존재 자체가 리나가 발견한 것이 처음이었고, 학자의 탑에선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어요.”
“응. 그 마을의 존재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은 건 정말로 확실해.”
그러지 않았다면 황실 직계인 내가 모를 리가 없었을 테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알렉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마, 3황녀 전하께서는…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겠지.”
아무리 교단이 황실과 밀접해도 교단만의 비밀은 따로 관리되는 법이었다.
레베카가 황실 직계라지만 제가 스스로 선택한 소임은 교단에 있었다. 교단의 비밀이라면 굳이 황실과 공유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킬리온에 관해 레베카에게 물어보려고는 했는데. 물을 게 많겠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헨리에테가 집무실에 들어섰다.
마침 외부에서 입고된 서신이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전하. 기다리시던 연락이 왔습니다.”
헨리에테는 그중 한 통을 페이퍼 나이프와 함께 은쟁반에 담아 내게 내밀었다.
은은한 꽃분홍색으로 장미가 스텐실되어 있는 봉투였다.
핑크에, 장미라….
“참, 일관적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그 발신인의 끔찍한 취향에 조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