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맞잡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16)
나는 손끝으로 루시페우스의 머리가 묶인 쪽을 쓸어내렸다. 오랜 여정의 피로를 내색하듯, 갓 갈아입은 듯한 셔츠며 바지와 달리 그의 머리칼만은 느슨히 묶여 있었다.
“멀리 다녀왔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갔었습니다.”
그가 언급한 무서운 울림에 나는 움찔 놀랐다.
“마기에 잠식시키고 있는 수정들을 확인하고 왔거든요.”
“그게 여전히 거기에 있다는 건, 혹시 아직도 그 계획이….”
내 목소리가 바싹 언 걸 느꼈는지, 내 다리를 끌어안고 있는 그의 손끝이 달래듯 내 복사뼈를 토닥였다.
“그 위치를 아는 건 저와 후작뿐입니다. 더구나 수정의 상태가 불안정해서 저조차도 섣불리 건드릴 수 없고요.”
“위험한 건 아니고? 계속 거기에 둬야 해?”
“온전히 마기에 잠식되면 안정화되거든요. 다음 달 중순이면 끝날 겁니다.”
그의 말소리에는 더없는 확신이 배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이전 생에서 치밀한 계산 끝에 성공했던 일일 테니까.
“그때 가서 모두 수거하고 폐기할 테니, 걱정하실 일은 없습니다.”
“후작이 그게 어딘지 안다며.”
“괜찮습니다. 우선, 그 누구도 저처럼 빠르게 이동할 수가 없고요. 게다가 렌틸 자작님께서 슬슬 의회에서 공세를 이어가시면 후작이 황성을 비울 새나 있겠습니까.”
“…하긴, 게이블스를 공격하는 거라고 해도 결국 알비누스가 연루된 일들이니까.”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머리칼을 계속 무의식중에 쓰다듬었다. 그게 간지러웠는지, 그제야 루시페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내 무릎 위로 팔짱을 끼고서 거기에 턱을 괴었다. 드디어 마주 보게 되었다.
“그리고 마검사들이 이동 마법에 조예가 깊은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세르니타에서는 다 함께 사라졌잖아.”
“근거리야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돌아올 수 없는 바다는 여기서 말로 꼬박 열흘을 달려도 모자라니까요.”
“그렇다면….”
여전히 내 낯에 걱정이 묻어 있어서일까. 루시페우스는 그치고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건드리는 자가 없게끔 제가 경비 결계도 쳐두고 왔고. 무엇보다 제가 지닌 정도의 마력이 아니라면야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루시페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양팔로 나를 가두듯 내가 걸터앉은 울타리를 짚었다. 순식간에 눈높이가 맞았다.
“그쪽에 대해 전하께서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네, 정말요.”
그는 그대로 허리를 숙여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언제나처럼 제 무게를 싣지는 않았지만, 그에게서는 꽤나 안도한 기색이 풍겼다.
“제가 잘하고 있으니까, 상은 알아서 받겠습니다.”
“이게 상이야?”
그답잖게 능글대는 말투에 나는 쿡쿡 웃었다.
“전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절대로 몰랐을 경험이니까요.”
그러니까, 살면서 누구에게도 이렇게 기댄 적이 없다는 말….
그가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내뱉는 말들은 속절없이 내 마음 깊숙한 곳을 아릿하게 만들곤 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줘야지.’
그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다.
미안했던 만큼, 뭐든지 다.
‘계속 나한테 원하는 게 있으면 좋겠다. 정말로 뭐든, 다 해줄 수 있을 텐데.’
정말로, 이 단단한 믿음이 계속되기만 한다면….
‘되도록 오래 변하지 않으면 좋겠다.’
나는 느슨하게 묶인 머리칼 아래를 지분대다가 그의 관자놀이에 작게 입 맞췄다.
주방의 시종들은 우리와 마주치지 않은 채 티 테이블에 식사를 차려두고 나갔다. 더 이상 드나들 일 없도록, 전채인 새우 카르파초부터 후식인 사과 버터구이까지 한 상 차림이었다.
오늘도 루시페우스는 모든 음식을 처음 먹는 사람처럼 신중하게 꼭꼭 씹었고, 나는 그런 그가 어떤 걸 좋아하거나 꺼리는지 알고자 그의 낯을 살폈다.
식사하는 내내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며칠 동안 있었던 일들이 화젯거리로 올랐다. 이따금 손거울을 통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대도,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건 또 달랐으니까.
“참, 그리고 아까 소후작이 마도 기계랍시고 뭘 줬는데 말이야.”
“…또 선물입니까.”
피자를 내 접시에 덜어주기 위해 칼질하던 루시페우스의 손이 우뚝 멎었다. 그의 목소리가 꽤나 무섭게 울렸다.
“아까 도로 가져갔어. 놓고 갔어도 태웠을 거고.”
“…….”
루시페우스는 적이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나는 그가 기분을 풀길 바라며 손사랫짓하며 말을 이었다.
“아니, 중요한 건…. 거기에 신성력을 마력으로 전환하는 기능이 있대.”
“신성력을… 마력으로요?”
“응. 아까 보여준 것도 그가 신성력을 쓰니까 작동하더라고.”
루시페우스의 낯이 대번에 진지해졌다.
“어쩐지, 그자가 보유한 마력이 평범한데도 그 수준의 마법을 쓴 게 이상했는데….”
실마리를 찾은 게 기꺼운지, 그는 다소 경쾌한 손놀림으로 피자를 접시에 덜어 내게 건넸다.
“한번 그 기계를 살펴봐야겠군요.”
“그가 가져갔다니까?”
“아까 제가 마법을 건 대로 잠들어 있을 겁니다. 그의 방쯤은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고요.”
“…아하.”
내가 또, 이 남자가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란 걸 잊고 있었네.
나는 느릿하게 눈썹을 들썩이며 한결 개운해진 듯한 그의 낯을 바라보았다.
루시페우스는 이번에도 굉장히 진지한 낯으로 조갯살과 잘게 칼집 낸 오징어 등의 해산물이 올라간 피자를 꼭꼭 씹기 시작했다.
“…이제 안심이야?”
“입단속 해둔 것까지는 그렇지만, 분명 후작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을 겁니다.”
하긴, 도미닉이 오늘 황궁에 다녀갔으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면 수상할 터였다.
루시페우스가 건 금제 때문에 도미닉이 표정으로라도 무슨 티를 내진 못할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까 금제를 건 걸 어기면 어떻게 돼?”
“일단 그 금제가 풀릴 일은 없고요. 정말 만에 하나의 경우, 혹여 시도한다면….”
거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말을 멈춘 뒤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아닙니다.”
“에엥, 나 비위 좋아.”
잔인한 건가? 식사 중이라 그러나?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를 채근하기 위해 내가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그냥 제가, 전하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이해해 주세요, 그리 말하며 그는 난처한 듯 웃었다.
‘진짜 뭔가 끔찍한 건가 보네…?’
아까 도미닉을 바라보던 흉흉한 시선으로는 내 근처도 보지 않으려던 남자의 낯이 겹쳐, 나는 대책 없이 쑥스러워졌다.
짤막한 고요 속에서 심장을 다독이고 있을 때. 보온용 돌판에 놓인 사과 버터구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쑥스러움만큼 장난기가 돌아, 나는 능청스러운 목소리를 울렸다.
“색깔도 참 곱지? 레이디 아멜리가 선물해준 로즈버리산 로자펠.”
“…예에.”
루시페우스의 음울한 눈빛이 사과 구이를 스쳤다.
“레이디 아멜리는 마음씨도 곱지.”
“…….”
내가 1절에서 그치지 않자 루시페우스가 침음했다.
“질투하시는 거라면 좋겠습니다만…. 이건 저를 놀리시는 거지요?”
“왜, 내가 심했나…?”
나는 찔끔 놀라서 조심스레 물었다. 아직 이만큼 편한 사이는 아니었나?
“…아뇨, 뭐랄까….”
루시페우스는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이었다.
“수치스러워서요….”
“나야, 애초에 다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루시페우스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그 레이디에게 끌린 건… 단지 신성력의 끌림 때문이었거든요.”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낯은 마치 자포자기한 사람 같았다.
“신성력의… 끌림?”
“확실한 건 아니지만요…. 제 외조모께서 돌아가신 성녀님과 자매 관계셨다는 게 가장 유력합니다.”
“…맙소사.”
‘공제눈’ 비하인드, 아직도 남았던 거였어? 그것도 이렇게 대형 떡밥으로?
나는 깜짝 놀라 눈동자를 떨었다.
“저야 혈육이 어머니 말고는 없었으니, 신성력의 끌림이 호감과 뭐가 다른지 알 리가 없었잖습니까….”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입가에 걸린 건 틀림없는 쓴웃음이었다.
이야기가 그의 어린 시절로 흐르고 말아, 나는 그를 놀린 것부터 미안해지고 말았다.
내가 제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을까.
“또 그러십니다. 괜찮다니까요.”
작게 웃은 루시페우스는 돌판을 제 쪽으로 당겨 사과구이를 잘라 내게 내밀었다.
내가 순순히 그가 내민 것을 받아먹자, 그제야 안심한 듯 엷게 미소 짓는 것이었다.
“3황녀 전하께서도 제게 힐베르크 후작님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셨으니, 일리는 있을 겁니다.”
“레베카 언니가? 둘이 언제 그런 얘기를 다 했대?”
내가 쓰러졌을 때의 일인가?
루시페우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사실, 제가 킬리온 신관에 대해 수소문한 것이… 레베카 전하께 여쭌 것이었습니다.”
“대신전에서 알아봤다더니, 그게 레베카 언니였어?”
완전히 금시초문이었다. 레베카는 여전히 프리지어궁을 오가며 생활하니, 나와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마주쳤는데.
속 깊은 내 언니, 그레이스나 테오도르와 다르게 나를 놀리지 않아 주었구나….
“…말이 나와서 말인데, 후작의 혈통 문제 말이야. 레베카 언니에게 도움을 받으면 어떨까 싶어. 킬리온이 증언해주면 제일 좋겠지만….”
황족이자 신관인 레베카가 후작의 신성력이 킬리온의 것과 닮았고 루시페우스의 것과 다르다고 선언하면 쉬운 일일 거였다.
“…언니가 나서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3황녀 전하라면 기꺼이 나서실 겁니다. 전하의 요청인데요.”
“…뭐지, 이런 확신?”
예기치 못한 루시페우스의 단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표정 변화가 재미있는지 루시페우스가 낮게 웃으며 대꾸했다.
“저를 잘 대해주시는 것만 봐도 3황녀 전하께서 전하를 깊이 아끼시는 걸 알 수 있으니까요. 저는 우애라는 감정은 전혀 모르니,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
나는 또, 루시페우스가 꺼내는 아무렇지 않은 말에 마음이 저릿해지고 말았다.
정말, 다 해줘야지. 혈육이든 뭐든….
‘혈육? 미쳤어!’
식사를 마친 뒤, 루시페우스는 순간 이동 마법으로 후작저에서 마도 기계 오르골을 가져왔다.
지난번처럼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식탁보를 깔고서 그가 앉자, 나는 재빨리 그의 품에 들어가 겹쳐 앉았다.
“…전하?”
“이것도 몰랐던 경험이지?”
“…네에. 정말이지.”
머리 위에서 그가 낮게 웃으며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 너른 가슴팍에 내 등이 폭 안기자 썩 든든했다.
“저의 레이디 작은 별은, 절대로 예측할 수 없는 분이시군요….”
이어지는 낮은 한숨에는 감격과 격정이 뒤엉켜 있었다. 귓가가 간지러워 나는 쿡쿡 웃었다.
루시페우스는 그대로 팔을 뻗어 내 눈앞에서 오르골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아까처럼 뚜껑이 열리더니 회전목마가 움직이며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반짝이고 뱅글거리는 것을 내가 멍하니 눈에 담고 있을 때.
“…마검사들, 아무래도 제가 만나 봐야겠습니다.”
내 정수리에 턱을 걸치고 있던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원리를 알겠어?”
“간단하네요. 그만큼 위험합니다. 그자가 쓰던 것과 같은 마도 기계를 다른 이들에게 유포라도 한다면….”
“그 공격용 마도구 말이지?”
나는 잠시간 고민에 빠졌다.
막심이 마검사들을 회유하느라 몇 주째 고생 중이었지만, 이렇다 할 진척이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정신계 마법을 걸어 봐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로.
‘시월 정무 회의에는 모든 패를 다 내놓아야 하는데 말이야….’
나는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소후작이 마검사들을 그리 많이 데려와 놓고 활용하지 않는 게, 단순한 고용 관계는 아니란 생각도 들긴 했어.”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루시페우스는 그간 마검사들의 숙소를 감시해왔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특정한 임무를 위해 왔다기엔 그들이 너무 태평하게 구는 인상이라고 했다.
수선화궁에서 뻗대고 있는 마검사들이 그러하듯이.
“그래, 만나봐. 기사들한테 말해둘게. 대신.”
나는 고개를 틀어 그를 올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 같은 마법사로서 통하는 게 있을까 봐서 경에게 부탁하는 거니까.”
“…전하의 명이시라면야.”
어떻게든 내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남자의 낯은 일종의 기쁨으로 빛났다.
그의 단단한 손이 내 볼을 감싸더니 이마에 짧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 핑계로 수선화궁에 계실 때도 제가 찾아뵐 수 있겠군요.”
그다음은 눈 밑에.
“이젠 못 본 척하시는 일.”
그리고 코끝에.
“더는 없으시겠죠.”
“…믿어 보라니까.”
쑥스러운 마음에, 내 말소리가 타박처럼 울렸다. 거기에 작게 미소 지은 그의 고개가 더 아래로 떨구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