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그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난 일 (16)
“그래요. 제게 애원해 보시면 좋겠군요.”
“…기가 막히는 소리를 들으면 웃음밖에 안 나온다더니.”
내가 황당함에 실소를 터뜨리자, 도미닉이 낯을 일그러뜨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 정도면 제가 봐드릴 수도 있다는 말인데, 이해가 안 되십니까?”
“누가 누굴 봐줘?”
“멈춰!”
레오폴트가 재빨리 검을 뽑아 도미닉의 턱 밑에 갖다 댄 순간.
푸슛!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레오폴트가 휘청였다.
“레오!”
아멜리의 새된 비명 너머로 마검사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가 석궁형 마도 기계로 레오폴트를 공격한 거였다.
“괜찮아?”
“네, 네.”
레오폴트의 뺨에 선명한 붉은 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원거리 공격이 문제네….’
나는 재빨리 마검사와 아멜리의 위치를 계산한 뒤 레오폴트에게 말했다.
“저자를 우선 처리해. 소후작이 나를 해치진 않을 거야.”
“전하…!”
굳이 숨기지 않은 말소리에, 도미닉 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렇지?”
“그럼요. 시체는 제가 바라는 걸 못 주잖습니까.”
녀석이 비죽 웃었다. 그걸 본 레오폴트의 눈살이 꺼림칙하다는 듯이 찌푸려졌다.
“얼른 돌아오겠습니다.”
순식간에 신성력으로 다리를 강화해 높이 뛰어오른 레오폴트가 마검사에게로 쇄도했다.
캉!
저편에서 두 개의 무기가 맞부딪는 소리가 났다. 마검사의 마도 기계가 어느새 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작은 머리통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심이 영특하시다고 할지, 가소롭다고 해야 할지.”
시꺼먼 눈동자를 뒤룩거리며 주절대는 녀석은 정말로 인격이 달라진 것만 같았다.
캉! 카캉! 캉! 레오폴트와 마검사의 검이 연신 부딪히는 소리를 뒤로한 채 도미닉이 내 턱을 쥐었다.
“당신이 이 모든 일의 흑막이었다니. 하하….”
“흑막은 이 일을 벌인 너희 부자겠지.”
“이제라도 받아달라 비시는 모습이 마음에 들면 목숨만은 살려 드린다는 게… 이해가 안 되시는지요.”
“받아달라니?”
나는 녀석이 다른 데 주목하지 못하게 하게끔 꼬박꼬박 대꾸를 이어갔다.
“어차피 아비도 곧 뒈지겠다. 알비누스야 이미 망했겠다. 당신 하나라도 제가 같이 데려가면 좋겠더군요.”
“데려가긴 어딜…. 흡!”
어느새 내 양 볼을 우악스레 쥔 녀석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손길에 볼 안쪽의 살이 잇새에 찢겼는지 쇠 맛이 났다.
“전하!”
아멜리가 이쪽으로 달려오려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저지했다.
“다 좋아.”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내게 붙박인 녀석의 눈동자엔 영혼의 빛이라곤 이미 꺼진 것 같았다.
“너 하나라도 그 새끼한테 안 뺏기면 돼.”
“…….”
“그 악마 새끼…. 악!”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녀석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깜짝 놀란 놈의 손이 풀린 사이,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전하!”
마기에 오래 노출돼서일까, 물러섰다기보다 비틀거리다 엎어진 쪽에 가깝게 되었지만….
“이, 미친…!”
도미닉의 흰자위 형형한 눈알이 나를 향했다.
아멜리가 다시금 달려오려 했고, 도미닉 놈이 손을 뻗어 내 머리통을 쥐어 채려던 그 순간.
“보자 보자 하니까…!”
“…테오 오라버니!”
왼손 검지에 낀 반지를 꼭 쥐며 나는 테오도르가 설정한 낯 뜨거운 시동어를 외쳤다. 부연 빛무리와 함께 텔레포트 반지가 작동되는가 싶더니… 도미닉에게 손이 거칠게 그러잡혔다.
…잡혔다고?
나 아직도 여기야?
왜?
내 손을 쥐느라 허리를 숙여 얼굴을 맞대게 된 도미닉 놈이 윗니를 내보이며 으르렁댔다.
“무슨 헛짓이실까…?”
술식이 제대로 발동 안 됐나?
“테오 오라… 악!”
펑! 내가 재빨리 시동어를 다시 외쳤지만, 내 손을 덮은 놈의 손안에서 반지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뼛속의 신경마저 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어떻게 된 거지? 반지가 고장 났나? 너무 오래 안 써서?
“전하!”
손에 튄 거대한 불꽃에, 굉음까지. 아멜리가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종종거리며 레오폴트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레오, 얼른 전하를… 꺄악!”
“밀리!”
순간 아멜리가 날아가 레오폴트의 소대원들을 막고 있는 방어막에 처박혔다. 마검사의 소행이었다.
<한눈을 다 팔고 말이야. 이 대륙 놈들은 하여간 평화에 절어서.>
“이 자식이…!”
카캉! 캉! 레오폴트의 검이 분노에 차 거친 호선을 그렸다.
‘…레오가 나랑 아멜리를 둘 다 지킬 순 없는데, 어떡하지?’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텔레포트 마법은 실패했지만 공격용 마도구 반지가 몇 개 남아 있으니 대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남은 것 중에 쓸 만한 건 전격 마법이랑 화염계, 바람계 정도…. 전격 마법으로 놈을 마비시킨 뒤에 절벽 아래로 날려버리면….’
내가 레오폴트와 마검사의 전투를 곁눈질하며 다양한 경우의 수를 따지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아우렌바흐입니까.”
도미닉 놈이 제 얼굴을 더욱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 얼굴에 초점이 맞지 않을 정도의 간격이 되었다.
“그 눈동자는 어째서 번번이 다른 곳으로만 굴러다니는지.”
“…….”
나는 눈매를 빳빳이 굳힌 채 녀석을 노려보면서 슬그머니 마도구 반지를 작동시키려고 손을 움직이다가…
“…아읏!”
녀석이 내 손을 다시금 억세게 쥐었다. 조금 전의 폭발로 인해 화상을 입었는지, 살갗에 극심한 고통이 깃들었다.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도미닉 놈의 낯이 즐겁다는 듯이 빛났다.
“신성력과 마력이 서로 반발하는 것…. 전하께서 물고 빠시는 그 새끼 덕분에 아주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뭐?”
“남은 마도구, 어디 한번 다 써보시죠. 신성력이야 얼마든지 있는데 족족 다 망가뜨려 드릴 수 있습니다. 비싼 반지인데 아깝지 않으실까 걱정일 뿐이군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걸.”
허세로나마 쏘아붙이며 나는 녀석이 다른 데 주목하지 않도록 계속하여 노려보았다. 그러고서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는 척, 초커를 쥐려고 했을 때.
“켈록… 컥!”
도미닉이 내 목뒤를 쥐어 챘다.
정확히 말하면, 레베카의 초커를.
“귀여운 짓을 하시는군요. 계속 이리 귀여우셨으면 좋았을 텐데.”
“무, 무슨 짓… 꺅!”
그의 우악스러운 손짓에 초커가 뜯겨 나가, 저 멀리 내팽개쳐졌다.
레베카의 신성력이, 그리고….
“여기에 방어 마법을 걸었습니다. 전하께서 마력에 취약하시니 몸에 직접 걸 수는 없어서요….”
녀석이 알고 한 짓은 아니겠지만, 루시페우스가 쳐둔 방어막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
‘지금쯤이면 충분할까?’
그때, 녀석이 내 목을 틀어쥐었다.
“…하, 고작 이리되실 거면서.”
놈은 황홀하다는 듯한 낯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황궁에서 나오셔, 기사들도 다 보내셔, 마도구 같은 것도 이젠 다 무용지물…. 얼마나 초라하십니까.”
와중에도 루시페우스가 건 금제 때문인지 에둘러 말하는 그의 말소리가 길었다.
‘괜찮아. 아직 괜찮아.’
켁, 켁, 그가 조이는 손길이 그리 억세지 않은데도, 나는 눈물방울을 매달며 그를 노려보았다.
녀석이 만족하여 내 낯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날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니 괜찮아.’
나는 반항하듯 팔을 퍼덕거렸다. 놈의 흡족한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는 사이, 소맷자락 안에 숨겨두었던 손거울이 스르륵 떨어져 내 손안에 담겼다.
나는 손끝을 튕겨 지금껏 수십, 수백 번 여닫은 그 뚜껑을 열었다.
“루, 켁, 루시페우스…!”
세실리아의 막사를 나선 루시페우스는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은신 마법까지 두르면서였다.
‘확실히 마법을 쓰기가 너무도 편하군.’
이곳까지 세실리아 일행과 말들을 이동시키고, 수백의 성기사단 전체가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마법진을 가동하고, 지금 이렇게 움직이기까지….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마기에 영향을 받아 태어난 자들은 후천적으로 마력을 타고난다고 해요. 그 증명이 바로 빨간 눈이고요.”
루시페우스는 어느 저녁 프리지어궁의 만찬장에서 울리던 세실리아의 말소리를 떠올렸다.
그가 귀 기울이도록 운명 지어진 목소리가 빚어낸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순간 그는 수십 년간 살아온 세계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크게 안도하였다. 달의 신이 지하의 힘을 언급했을 때 어느 정도 짐작한 바였으니까.
하물며 세실리아가 단언했음에랴.
그 목소리가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저와 같은 존재가 또 있다는 사실로써 제가 위안받기를 바라고, 하등 주목할 것 없는 저의 과거를 상상하며 그 아까운 눈물을 흘리는 이의 말인데 틀릴 리 없었다.
‘얼른 처리하고, 바로 황성으로 모셔야지.’
그리 생각하는 사이, 루시페우스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상공에 떠 있었다.
발아래로 협곡을 메운 부연 대기가 마치 끓는 물의 대류처럼 이리저리 운행하고 있었다.
‘그때는 곧바로 곳곳에서 소용돌이가 쳤는데….’
첫 번째 생. 그가 제 마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술식을 가동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열리기 시작했다.
협곡 바닥에 쩌저적 균열이 갔고, 토사가 그 아래로 쓸려 내려가는 소리가 폭풍처럼 울렸으며, 그 공동(空洞)에서마다 회오리바람이 치솟아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성기사들이 신성력을 쏟아붓는 가운데 마물들이 펄떡펄떡 튀어나와 순식간에 인간계와 마계의 것들이 뒤엉켰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조건이 기준에 미달해서인지 별 진전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세실리아의 기사들이 지시한 바를 묵묵히 해내고 있었으며, 성기사들이 가세하기 위해 협곡을 내려가고 있었다.
‘저 백색의 갑주가 내 편이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제 삶이 그리도 바뀌었다.
달의 신이 준 삶에, 세실리아가 있다는 것만으로.
그 바뀌었음에 쐐기를 박기 위해, 루시페우스는 제 지질한 과거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끊어야 했다.
‘여긴 일단 성기사단에 맡겨두고.’
후작을 찾고, 술식을 중단시킨 뒤, 다 함께 뒤처리한다.
깔끔한 계획이었다.
루시페우스는 다시금 나침반을 꺼냈다. 킬리온의 피를 흘려 넣자, 일부러 누구나 볼 수 있게 해둔 빛줄기가 곳곳으로 선명하게 뻗어 나갔다.
모래바람 때문에 혼탁해진 대기 속으로 스며들어 그 끝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검사들이 확인한 바론 후작이 저 북쪽 끝에 있었지. 별 연락이 없으니 아직 그대로일 테고.’
무언가 변동이 생겼다면 세실리아가 손거울을 통해 알려줬을 테니까.
루시페우스는 빛줄기를 따라 이동했다.
그레고르 알비누스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안전한 곳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양아들이 장담한 것보다 진행이 더뎌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마력을 쏟아부으면 그 즉시 균열이 다 갈라진다더니…!’
그 녀석의 힘이 아니면 안 되는 거였나?
아니면 혹시, 저 천한 것들이 건성으로 하는 건가? 악마의 자식답게 사특한 잔머리를 굴려서?
그레고르가 낭패감과 분노에 볼을 씰룩거릴 때였다.
“…뭐, 뭐야!”
왼쪽 가슴팍에 가느다란 빛줄기가 쏘였다.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나타나는 이는 없었다.
이건 혹시, 정무 회의 때의 그 마도구…?
그때였다.
구태여 기척을 숨기지 않은 남자가 착지한 순간, 그들을 둘러싸고 모래바람이 일었다.
부예졌던 사위가 가라앉으며, 거뭇하던 실루엣이 형체를 갖췄을 때.
그레고르의 낯이 허옇게 떴다.
“너, 너, 너 이 자식…!”
“이런 곳에서 다 뵙습니다, 가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