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나의 두 생에 걸쳐 일어나는 일 (4)
“전, 하…?”
“응.”
세실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가 루시페우스의 심장을 천천히 물들였다.
세실리아의 숨과 함께 멎었던 심장과 허파가 그제야 제 기능을 되찾는 것 같았다.
“저는….”
오랜 세월 말을 잊었던 사람처럼 루시페우스의 말소리는 어눌하게만 울렸다.
“저는, 저, 는… 전하께서 저, 정말… 저를 떠나신 줄로만 알고….”
“내가 경을 왜 떠나?”
“그, 그러….”
니까요…. 루시페우스는 목구멍에 치받는 뜨거운 것을 간신히 삼켰다. 그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세실리아의 손이 루시페우스의 얼굴에 닿았다. 끊임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말라붙어, 남자의 뺨은 온기를 다 빼앗겨 있었다.
“내가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나?”
“오래….”
그 말에, 루시페우스는 시간을 가늠하려 애썼다.
하지만….
“잘…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그런 건 알 수 없었다.
계산할 것조차 되지 않았다.
세실리아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순간부터 모든 의미가 스러지고 말았기에.
세실리아가 없게 된 이상 그의 세계는 암전을 맞았기에.
제 육신이야 존재한다지만 그 세계는 없는 세계였으며, 그러므로 제가 작은 빛과 온기를 박탈당한 지 몇 시간, 몇 분이 지났음을 가늠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래되건, 찰나이건, 세실리아가 없음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울보 신사님이네.”
손끝으로 그의 눈시울을 훑어내는 세실리아의 말소리가 장난스러웠다.
이 목소리를 다시는 못 듣는다고 체념한 시간은 또 얼마나 길었던가.
루시페우스는 하릴없이 세실리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니, 어느새 돌아온 그녀의 온기를 확인하려는 듯 그 몸을 제 품에 새겼다.
흐흑…. 남자의 건조한 흐느낌에 두 사람이 한가지로 떨었다.
그를 다독이듯, 세실리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머리 묶인 곳 아래를 간질였다. 연인의 어깨 너머로 세실리아의 눈동자에 하늘이 쏟아져 들어왔다.
회백색이었던 하늘이 노랗고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어느새 늦은 오후를 향해 치닫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깐밖에 안 지났을 거라더니? 물리가 안 통한다더니 인간 세계의 물리는 다 모르고 사나?’
제 입으로 펑펑 울고 있다고 했으면, 서둘러 줬어야 하는 거 아냐? 특별한 아이라며?
그동안 얼마나 괴로워했겠어….
달의 신이 제가 비난하던 ‘공제눈’ 작가였다는 사실을 알아서일까, 말을 섞다 와서일까. 마음속으로 달의 신을 친근하게도 타박하며, 세실리아는 남자의 관자놀이에 입맞춤을 새겼다.
“괜찮아. 다 끝났어. 별일 없었어. 그냥 잠깐, 잠깐 그랬던 거잖아.”
“…저는 정말, 정말 끝인 줄 알았는걸요….”
그제야 조금 진정했는지, 반쯤 쉰 목소리가 세실리아의 어깨를 간지럽혔다.
절망을 갓 통과한 연인의 말소리가 애처로워, 세실리아의 눈시울이 한껏 붉어졌다.
“미안…. 경이 막사 안에만 있으라고 했는데.”
“…아닙니다.”
필요하셔서 그리하셨겠지요, 그런 말이 차마 나오지 못하고 울컥하는 뜨거운 것에 녹아내렸다.
“내가 돌발 행동 안 하겠다고 약속해놓고.”
“아니에요, 아니, 아닙니다….”
모든 빛이 절멸한 세계에서 몇 번이고 곱씹은 자책이 다시금 부서져 나왔다.
“제가, 제가 잘했어야 하는 건데요.”
자책의 말들이 몰고 온 건 조금 전까지 그를 적셨던 한없는 고통이었다.
“제가… 제가 전하를 완벽하게 지켰어야 했는데요.”
후작에게 복수한다거나,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음모를 제 손으로 멈춘다거나… 그런 것보다 세실리아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는데.
제 복수심 같은 건 세실리아를 잃는 슬픔과 고통에 비하면 너무 사소한데.
세실리아에 대한 마음을 연심이라 인정하기 전에도, 그는 늘 세실리아를 지키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전하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요.”
한껏 울었음에도 다 표현할 길 없었던 슬픔, 세실리아가 죽지 않았다는 안도감, 의연하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 되찾았다는 벅찬 희열 같은 게 범벅이 되어 그의 목구멍을 치받았다.
애써 모든 걸 끅끅대며 참자 어깨가 자꾸만 들썩였다.
세실리아가 그의 귀 뒤를, 또 목뒤를 살살 쓸었다.
‘…품이 뜨겁네.’
그리 생각하고 보니, 주변은 살풍경 그 자체였다.
제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것과 퍽 다른 풍경이었다. 땅이 잔뜩 갈라지고 무너지고….
세실리아는 그 몰래 입술 안쪽을 가늘게 깨물었다.
‘세르니타에서도 루시페우스가 기절하기 전에 대지에 큰 파동이 일었었지.’
제 연인은 단순히 깊은 슬픔에 빠졌던 것만이 아니었다.
또… 저로 인해 불안정해지고 말았다.
세르니타에서는 제가 다쳐서 그랬는데, 하물며 잠시 죽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으니.
세실리아는 자꾸만 메어오는 목으로 간신히 말소리를 쥐어짰다.
“경이 나 때문에 이렇게 불안정해지는 게 미안해서, 그래서 꼭 안전하게 있으려고 했는데….”
말소리에 점차 물기가 배어났다.
다시 깨어난 순간, 저들의 운명에 대한 확신으로 벅찼던 마음은 연인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으로 축축해진 지 오래였다.
“경이 이렇게 나한테 휘둘리는 거, 너무 무서운데….”
그제야 루시페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상아처럼 희고 단단한 남자의 낯은 한껏 흐트러져 평소보다 훨씬 창백했다. 그 눈가만이 유독 발간 게, 얼굴의 핏기가 그쪽에 몰린 것만 같았다.
“…저를 구속하셨잖습니까.”
“내…가?”
“제 목숨이, 심장이 전하께 속박된걸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더없는 진심이 울렸다.
세실리아가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죽은 목숨이었고, 세실리아를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심장은 협곡 저 아래서 터져버리고 말았으니까.
세실리아가 엷게 웃으며 그의 입술을 쓸었다. 높아졌던 체열 때문일까, 파리한 남자의 입술은 한껏 건조해져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은….”
“그 속박됨을 제가 원합니다.”
루시페우스의 손이 세실리아의 손을 쥐었다. 그 손이 향한 곳은 제 왼쪽 가슴 위였다.
세실리아의 손끝에 느릿한 맥동이 스몄다.
“전하께서 이 세계에 오신 것만으로 제 영혼의 고삐를 쥐신 셈이니까요….”
달의 신이 저를 위한답시고 한 일을 자백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평생 내색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한번 무너져버린 그의 마음은 그 경계를 정확히 재단할 수가 없었다.
연인이 자책하지 않길 원하는 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의 말소리가 두서없는 데서 세실리아는 그 모든 걸 파악한 참이었다. 그래서 그녀 또한 달의 신이며 제 환생의 연유 같은 건 일단 묻어두고, 연인과의 재회를 만끽하기로 했다.
세실리아는 그에게 손을 뻗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생을 잃었던 몸의 움직임치곤 격한 것이어서 루시페우스는 깜짝 놀랐으나, 이윽고 어쩔 도리가 없어졌다.
세실리아의 팔이 그의 목을 안았으니까.
저를 가까이하는 그 맥없는 몸짓에, 심장이 맞닿는 포옹에 루시페우스의 목구멍이 가랑거렸다.
“내가 경의… 모든 게 될게. 가족이고, 친구고, 연인이고. 다 내가 될게.”
이미 그러하신걸요…. 루시페우스는 간신히 마음속으로 답했다.
“우리는 함께 행복해질 거야.”
세실리아의 등 너머로 두른 그의 팔에 힘이 꼭 들어갔다.
“그러려고, 우리가 만났으니까.”
나와 루시페우스가 순간 이동 마법으로 나타나자 주둔지의 모든 이가 소스라치듯이 놀랐다.
“전하!”
“저, 전하…! 살아 계셨…. 흑.”
<오, 오셨어…!>
레오폴트와 아멜리, 하디를 비롯한 마검사들에.
“전하, 진짜…!”
“이게 뭡니까….”
“안 믿었어요, 안 믿었다고요!”
이런저런 작전상의 사유로 내 곁을 비워야만 했던 암조 기사들.
그리고….
“세실! 나, 나는 정말이지….”
어떻게 알고 왔는지, 레베카까지.
달의 신이 내게 양껏 줬다는 인연들을 보자 벅차올랐던 마음도 잠시, 고통과 슬픔에 잠겼었음이 선연한 그들의 낯에 내 가슴도 한껏 저며 들었다.
모두를 제치고 레베카가 내게 다가왔다.
“주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아우렌바흐 소공작에게서 네 이야기를 듣고서 얼마나 놀랐던지…!”
“죄송해요. 죄송해요, 언니.”
레베카는 잔뜩 젖은 낯으로 내 얼굴을 쓸었다가 어깨를 만졌다가 하며 동동거렸다.
날 안고 싶은 것을, 루시페우스가 나를 안아 든 그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어쩌지 못하는 거였다.
“경, 나 좀 내려줘.”
“하지만, 힘드실 텐데요….”
그는 한번 죽었던 거나 마찬가지인 내 몸에 기력이 없을 거라 걱정하는 듯했다.
내 안위에 번번이 동요하고 마는 그가 사랑스러워 쿡쿡 웃고 싶은 걸 참으며,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빨리. 나 언니랑 안고 싶어.”
루시페우스가 내키지 않는다는 낯을 숨기지 않은 채 조심스레 나를 내려주었다.
달의 신의 의하면 영혼이 잠깐 분리되었던 내 몸은, 그저 한두 시간 기절했던 정도인지라 힘들 게 없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루시페우스가 신성력을 꼼꼼히도 쏟아붓고 마기를 다 순환시켜 몰아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루시페우스는 내가 정말 죽은 줄 알았으니까.’
나는 건강함을 증명하듯 팔을 크게 벌려 레베카를 껴안았다.
“언니이.”
“아이고, 진짜, 내가 너를….”
“먼 길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그게 죄송하니, 너는?”
레오폴트로부터 소식을 듣자마자 이동 포털을 탔는지, 레베카는 신전 안에서만 입는 생활복 차림 그대로였다.
나는 내 언니의 품에 얼굴을 비비며, 달의 신에게서 모든 걸 들은 이후로 다짐한 말을 툭 뱉었다.
“그리고 고마워요.”
“고맙기는 무슨….”
“언니가 저를 평생 지켜 주셨잖아요.”
어려서부터 늘 내 건강을 돌보고, 제가 없는 곳에서 내가 아플까 봐 제 신성력을 늘 지니고 다니게 하고…. 그리도 큰 사랑을 준 언닌데, 그 마음을 못 믿어서 인색하게만 군 막냇동생은 정말이지 죄가 많았다.
초커를 받은 날, 제대로 사랑하겠다고 했던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쓸모 있는 세실이 돼야, 걱정 안 시키고 야무진 막둥이가 돼야 가족의 사랑이 유지될 거다…. 신성력이 없음을 알고서 스스로 다그친 그 방어적인 마음이 늘 앞섰으니까.
내 가족의 사랑이 내가 세실리아로 태어나고 20년이 넘도록 한결같은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루시페우스와 함께 서로의 마음을 믿자고 한 때부터 관성적인 멈칫거림을 그만두기로, 모두를 마음껏 믿어보기로 마음먹었는데.
하물며 달의 신이 확인까지 해줬으니….
“언니가 제 언니인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제가 이제야 알았지 뭐예요.”
“응?”
내 말에 멈칫한 레베카가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군청색 눈동자가 진중하게 빛났다.
“…그렇구나.”
내 뺨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는 레베카의 낯에는 어느새 푸근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나도, 내게 사랑스러운 막둥이가 있다는 사실에 두 신께 늘 감사드린단다.”
주변의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레베카는 분명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했다.
남들은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본 걸 수도 있고, 루시페우스에게서 그의 이전 생에는 내가 없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수도 있고….
레베카는 다시 나를 꼭 안고는 한참 내 등을 쓸었다.
“그래. 신께서 축복하신 일이야. 네 존재 자체가 축복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