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에필로그 (6)
“전하께서도 꼭 종소리 들으시고 행복하셔야 해요. 제가 뭐든 다 선물해 드릴게요.”
그랬다.
레오폴트는 요 얼마간 일전의 약속을 지키는 건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뭘 주고 가는 중이었다.
“예전부터 내가 만나는 사람 생기면 선물 세례하겠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지금도 시도 때도 없이 오페라 티켓에 찻잎에 향유에, 말도 마.”
나는 내 집무실에 쌓이고 있는 레오폴트발 선물들을 떠올리며 작게 어깨를 떨었다.
“왜 그런 이유로 그가 당신께 선물을 하죠…?”
“내가 전부터 제게 좀 잘해 줬어야지?”
“아하?”
내 말 너머의 의미를 가늠하려는 듯 루시페우스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그, 연애 잘하라고 레이디 아멜리 취향에 맞는 찻잎이나 향수 같은 걸 선물해주고 그랬거든….”
그러니까 네가 아멜리를 좋아하는 줄 알고, 둘을 떼놓으려고 애쓰던 그때 말이야….
한없는 민망함에 내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돼, 됐고, 일단 열어봐.”
어찌 된 곡절인지 다 알겠다는 듯, 루시페우스가 픽 웃으며 상자를 받은 손 그대로 잠금쇠를 퉁겨 열었다.
그 안에는 에메랄드로 장식된 은제 커프스단추와 넥타이핀 세트가 들어 있었다.
그걸 보는 루시페우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인정하긴 싫지만, 근래 받은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군요.”
“그래?”
“전하께 드릴 선물을 제게 보낸 자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제 것으로 에메랄드를 보낸 건 정말로 소공작이 처음입니다.”
그리 말하며 루시페우스는 그 보석의 표면을 천천히 쓸었다. 거기에 붙박인 그의 눈동자가 복잡한 기운을 담은 채 가라앉았다.
레오폴트와 전혀 다른 관계였던 지난 생의 기억을 돌이키는 거겠지….
“그으, 걔가 그렇게 센스가 좋은 게 아니라, 레이디 아멜리가 다 챙긴 거래, 사실은.”
“…역시 제가 따라다닐 만한 분이셨군요.”
“어허? 친척 누님께 별소릴 다?”
내가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자, 루시페우스가 소리 없이 웃으며 내 낯에 눈을 흘겼다.
에리나 경의 혈통이 공표되자, 루시페우스가 힐베르크 후작 부녀와 친척 관계라는 사실 또한 자연스레 밝혀졌다.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던 힐베르크의 부녀가 합친 것도 최근의 일인데, 갑자기 근래 황실의 최고 공신이 친척으로 등장하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존속이 걱정되던 가문의 위세가 갑자기 대단해졌다.
“집을 못 쓰게 되어 오갈 데 없게 된 저를 받아주신 친척 누님이시니, 따를 만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게, 프리지어궁에도 방 많다니까….”
내가 그의 팔꿈치를 갉작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 저택은 조만간 대공사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멸문한 역적 가문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주인의 취향에 맞춘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은 이 저택이 그의 두 생에 걸친 악몽의 배경인지라 내가 강권한 거였다.
소식을 들은 힐베르크 후작은 기꺼이 오촌 조카에게 손님방을 내주었다.
당연히 거기에 루시페우스의 의사는 반영돼 있지 않았고, 사람 좋은 힐베르크 부녀의 일방적인 호의였지만.
“아무리 외당숙댁이라지만 불편할 거 아냐, 응?”
“더부살이야 제겐 익숙한 일이니 괜찮습니다.”
속눈썹 팔랑팔랑 눈을 깜빡이며 한 말에 돌아온 대꾸가 가슴 저몄다. 내가 금세 풀죽은 표정을 짓자, 루시페우스는 난처하다는 듯 엷게 미소 지었다.
“무엇보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이젠 몰래 다녀가는 것도 조심해야 당신께 누가 안 되니까요.”
“누라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해?”
“그리고….”
발끈하는 나를 코끝으로 내려다보던 남자는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리 무방비하게 하시는 말씀이 제게 어떤 번민을 안겨주는지 아시고 일부러 그러시는 건지….”
거기까지 말한 남자의 짧은 입맞춤이 촉, 귓가에 내려앉았다.
번민이라면, 음, 그러니까….
‘…라면 먹고 가라는 소리로 들렸다는 거지…?’
나는 순식간에 콧잔등까지 달아올라, 삐걱거리는 동작으로 저택 안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 얼른 저택 구경이나 시켜줘. 빨리 보고 빨리 가야겠다, 응.”
“아, 잠시만요.”
루시페우스는 웃음기 밴 목소리로 내 어깨를 안아 멈춰 세웠다.
“뤼미에르 공방. 왔나?”
“아, 예! 아까, 친구와 함께 마스터 있었다.”
루시페우스의 물음에 하디가 선물 상자 더미 제일 위에 놓여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루시페우스가 율리안과 함께 있을 때 와서 알리지 못했다고 해명하면서.
“뤼미에르? 경이 뭘 샀어?”
예상치 못한 이름에 나는 도망치려던 것도 잊었다.
뤼미에르 공방은 황성 최고의 액세서리 공방이었다. 지극히 화려한 디자인과 세밀한 세공으로 이름 높은 만큼, 루시페우스의 평소 차림새와는 어울리지 않는데….
그는 말없이 뤼미에르 공방의 시그니처인 벨벳에 진주로 장식된 상자를 꺼내 들었다. 도금된 잠금쇠를 열자, 그 안에서 반짝이는 목걸이가 등장했다.
거기에 세공된 건, 모조리 루비.
“이리 질 좋은 루비가 많이도 들어오니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급히 맡겼습니다만, 시간이 필요한 공정을 제가 도우니 늦지 않게 도착했군요.”
가늘게 제련한 은을 레이스처럼 떠서 목 아래 두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목걸이에는 각양각색 크기의 루비들이 좌우 대칭으로 장식돼 있었다.
그 루비들은 누가 봐도, 요 며칠간 그에게 선물로 들어온 액세서리들에서 떼어낸 거였다.
“아니, 경한테 들어온 선물이잖아…?”
“제게야 뭐, 쓸모 있겠습니까.”
“쓸모 있지, 왜?”
“제게요?”
“경이 예쁘게 꾸미는 데…?”
웃음을 삼킨 루시페우스는 내 등 뒤로 가, 우선 내 외투를 받아 들었다. 어느덧 초겨울에 다다른 날씨에 내가 목 끝까지 모피로 채운 코트를 입고 왔기 때문이었다.
“제가 쓸데없이 뾰족뾰족한 장신구라도 하고 다녔다가, 당신의 살갗을 조금이라도 다치게 할까 무섭거든요.”
“그럴 리가 있겠어? 그리고 다쳐도 경이 치료해주면.”
“조금이라도 다치지 않으시는 게 중요하지요.”
그리 말하며 루시페우스는 목걸이를 내 목에 둘렀다. 그사이 목걸이를 따뜻하게 했는지, 빗장뼈 위로 닿는 금속은 조금도 차갑지 않았다.
탈칵, 연결 고리가 맞물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목걸이의 무게가 온전히 내려앉았다.
“거울 없어? 괜찮아?”
내가 빙그르르 돌아 그를 바라보자, 내 목 아래를 바라보는 그의 낯이 더없는 만족감으로 빛났다. 깊은 감격을 띤 그의 붉은 눈동자가 한동안 내 가슴팍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왜? 어떤데?”
“따뜻한 곳에 가서 거울로 직접 보시죠.”
루시페우스는 내 어깨에 외투를 다시 걸쳐주며 목 쪽을 바투 여몄다. 그리고 이마에 짧게 내려앉는 입맞춤.
뭐, 목걸이든 나든 다 예쁘니까 그런 거겠지.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어깨를 안긴 채 현관의 홀을 가로질렀다.
“와아, 정말… 감회가 새롭네.”
루시페우스의 안내를 받아 내가 들어선 곳은 안채의 침실 구역으로부터 반 층 위, 안채 전담 사용인들의 숙소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자리한 작은 방이었다.
“왜 굳이 이런 데를 오시겠다고….”
루시페우스는 영 마뜩잖다는 듯한 표정으로 마법을 써서 방 안의 먼지를 제거하고 탁한 공기를 몰아냈다.
“이 저택의 유일한 장점이 화려한 인테리어인데, 하필이면 이런 델….”
“마음의 고향 같은 데라서?”
나는 민망한 듯 해쭉 웃어 보이고는 앞장서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페우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등 뒤로 문을 닫았다.
탁, 낡은 문이 닫히는 나직한 소리와 함께 방 안에는 우리 두 사람과 어스름한 달빛만이 남게 되었다.
양부와 의형에게 핍박받고 외로움과 서러움에 홀로 흐느끼던 아이를 보듬어주던 그 달빛이.
그러니까 이 방은 내가 꿈속에서 빨간 눈의 아이를 볼 때면 다다르던 바로 그 골방이었다.
방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오른쪽에 보이는 허름한 침대, 별다른 세간을 보관한 적 없을 것 같은 싸구려 옷장과 옷걸이, 이 방이 창고로 쓰였음을 증명하는 듯한 몇 개의 나무 상자들….
창가에 기대어 앉자, 마탑에서 거부당해 돌아온 루시페우스 소년이 펑펑 울던 때처럼 머리 위로 달빛이 내리쬐었다.
콧잔등이 시큰시큰해질 것 같아, 나는 부러 밝게 목소리를 울렸다.
“마지막으로 왔을 때, 웬 남자애 하나가 여기 누워서 울고 있었는데.”
“…그런 창피한 얘기는 좀.”
루시페우스가 목구멍 너머로 앓는 소리를 삼키며, 구석의 나무상자 하나를 이쪽으로 가져왔다.
“식사야 나가서 하면 되는데 뭘 번거롭게 가져오셨습니까.”
내가 준비해온 바구니를 열자, 온열 마법 덕에 처음 샀을 때의 따뜻함을 유지하고 있는 ‘폴리나네’의 밀빵과 ‘공주와 쏙독새’의 미트볼 수프가 나왔다.
내가 케인을 영입하자마자 첫 임무로 사 오라고 시켰던, ‘아멜리 인증 맛집’ 음식들이었다.
“으응, 뭐…. 그 아이가 맨날 딱딱한 빵만 먹던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려서 말이지.”
나는 루시페우스가 빵 바구니와 스튜 냄비를 상자에 올리는 걸 지켜보며 멋쩍게 웃었다.
내 어조에서 많은 걸 파악했는지, 상을 다 차린 그는 짧게 웃으며 내 곁에 앉았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다른 방에서 마법으로 가져온 듯한 담요와 방석이 들려 있었다.
“그 아이는 이제 어른이라 따뜻한 빵 같은 것보다야….”
나를 담요로 똘똘 싸매고, 방석을 깔고 앉게 하고…. 모든 정리가 다 끝났을 때, 내 양옆에 팔을 짚은 그의 얼굴이 코앞에 와 있었다.
“다른 게 더 좋다는데요.”
다른 거 뭐? 그런 대꾸가 떠올랐지만 나는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인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도 내 입술에 맞닿았으니까.
오랜만의 입맞춤은 짧고도 정중했다. 입술의 요철을 맞추듯 짧게 머금었다가, 천천히 맞비볐다가…. 서로의 감촉에 우선 익숙해지려는 듯 느릿하고도 조심스러운 접촉이었다.
그러고는 장난스레 내 아랫입술을 물어 당긴 그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어린애 말고, 저를 보셔야죠.”
언제나처럼 심장 아래를 울리는 듯 나직한 목소리에 배꼽이 간질거렸다.
“으응, 보고 있잖아.”
“당신 곁에 있는 건 저잖습니까.”
루시페우스가 타박하듯 제 코끝으로 내 코끝을 문질렀다.
“근데 경, 얼마 전부터 말이 좀….”
“좀?”
“당신, 이라고…?”
“아.”
복수하듯 굳이 그의 호칭 선택을 지적하자, 아니나 다를까 루시페우스는 퍽 당황한 낯이 되었다.
쑥스러움을 내색하듯 그의 손끝이 덮어 쥐었던 내 손등을 갉작였다.
“그게…. 다른 이들도 다 부르는 거 말고, 좀 특별한 걸로 부르고 싶었던 건데요.”
나는 딱히 대꾸하지 않은 채 빤히 그의 낯만 쳐다보았다.
침묵이 길어질 무렵. 루시페우스는 낭패감 어린 낯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례해 보인다면, 그만둘까요…?”
“응. 그럴래?”
웃음기를 지운 나의 즉답에 그의 낯이 어둑해진 순간, 나는 재빨리 배죽 웃었다.
“장난이야. 야, 너 해도 돼, 경이라면.”
“…네?”
내가 저를 놀린 걸 깨달은 그는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핀잔주듯 내 입술을 물었다.
시작은 타박이었으나, 얽혀버린 순간 그건 이미 깊은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