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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220화 (220/220)

220화. 에필로그 (10)

“황실을 대표해서 아마리우스의 오랜 벗, 아우렌바흐의 경사를 축하하네.”

나의 짤막한 손짓에, 호위로 따라온 리나와 데릭이 황실에서 보내는 선물들을 사용인들에게 전달했다.

“소공작, 오늘 정말 근사한걸? 그대를 추종하던 눈먼 영애들이 이 모습을 못 봐서 슬퍼할 텐데.”

진줏빛 예복 차림의 레오폴트는 정말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대충 흩뜨리고 다니던 앞머리도 깔끔하게 빗어 넘겼고, 그의 몸에 맞춘 예복은 잘 단련한 체격을 근사하게도 보여주었다.

“저는 밀리만의 남자이니, 여론은 신경 안 씁니다.”

에헴, 그리 말하며 레오폴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정말, 의젓해졌나 싶다가도 참 여전하달까….

내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입으로만 미소 지은 채 차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볼 무렵.

“레오, 네가 전하를 아멜리 양에게 모셔다드리렴.”

그리 말하는 아우렌바흐 공작 부인의 낯에는 다정만이 넘쳐흘렀다.

‘원래는 아멜리를 끝까지 마뜩잖아했는데 말이야.’

레오폴트의 눈치 없는 행동을 내가 최대한 차단했고, 한편으로는 아멜리가 힐베르크 후작의 친딸임이 일찍이 밝혀진 탓에 두 사람을 반대할 짬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않으며 루시페우스와 함께 레오폴트를 따라갔다.

“두 분은 어찌 되시나요?”

성기사단의 엘리트다운 의젓한 발걸음으로 앞서가던 레오폴트가 불쑥 물었다.

“응? 뭘?”

“결혼 계획요.”

그걸 지금 여기서 묻는다고? 이렇게 대놓고? 우리 둘이 같이 있는데?

‘의젓은 개뿔, 여전하네, 여전해.’

나는 눈에 힘을 빡 주고 레오폴트를 눈빛으로 타박했다. 한데 레오폴트는 그마저도 재밌다는 듯 느물대는 것이었다.

“뭐, 저희에 비하면 만남이 늦으셨으니 아직이실 수도 있죠.”

“아니, 저기, 아우렌바흐 소공작. 때와 장소 좀 가려서….”

“제가 조만간 에리난트 백작을 따로 만나 한 수 조언해 줘야겠군요.”

그리 말하며 루시페우스에게 고개를 까딱이는 것이 아닌가.

레오폴트는 정말이지, 이 순간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한껏 으스대었다.

이게 다 내 업보였다. 레오폴트에게 조언이랍시고 별말을 다 주워섬겼던 것….

루시페우스가 여전히 레오폴트를 껄끄러워하는 것을 아는 나는, 슬그머니 그의 안색을 살폈다.

“경, 그러니까 그게….”

한데, 루시페우스는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내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 그 입가에는 미미한 호선이 깃든 듯도 했다.

‘…이제 레오가 좀 편한가?’

크리스티앙 차넬에서 맞춘 살굿빛 드레스를 입은 아멜리는 신부 대기실로 꾸민 응접실에서 손님을 맞고 있었다.

“같이 안 들어가? 웨딩드레스도 아닌데, 보면 좀 어때.”

“저희의 앞날에 조금이라도 잘못될 여지를 남겨두고 싶지 않아서요.”

그렇게 말한 레오폴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응접실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못 말려, 정말.

“어머, 전하! 오셨어요?”

“응, 축하해, 영애. 행복해야 해.”

“축하드립니다, 누님.”

“역시 루시페우스가 모시고 왔구나?”

누님…?

이름…?

나는 나도 모르게 세모눈을 뜨고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멜리가 루시페우스에게 육촌 누나니까 틀린 말은 아닌데….

친척 동생을 이름으로 부르는 게 이상한 건 아닌데….

‘이 감정은 뭐지?’

순식간에 든 위화감에 내가 눈동자만 도륵도륵 굴릴 때였다.

“레이디, 축하드립니다. 여기, 전하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어머, 고마워요. 리나 경, 데릭 경.”

“다들 와줘서 고맙다.”

“왜 소대장님이 혼주처럼 굴어…?”

내 기사들이 인사를 주고받으며 떠들기 시작하자,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응접실 안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아멜리에게 친오빠, 친할아버지 같은 케인과 니콜슨 부자가 자리한 응접탁자 쪽에는….

‘짙푸른 머리칼…!’

중년 남성과 내 또래의 여성, 그리고 유스티안보다 어려 보이는 소년이라면…!

“아, 전하. 소개해 드릴게요.”

내 시선을 확인한 케인이 재빨리 다가왔다. 은사를 진 자의 등장에 토끼 눈을 뜨고 있던 푸른 머리 삼인방은 삐걱대는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이쪽은 아멜리 아가씨를 키워주신 아버지인 로즈버리 남작님, 소남작인 엘레나 아가씨와 블레이크 도련님입니다. 남작님, 이쪽은 4황녀 세실리아 전하시고요.”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로즈버리 남작은 제 아들의 머리통을 꾹 누르며 내게 머리를 숙였다. 꽃뱀에게 물렸던 엘레나 또한 당황한 와중에도 예법상 흠잡을 데 없는 인사를 선보였다.

“전하께서 저희 밀리를 잘 돌봐 주셨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영지 사정이 좋지 못해, 아이 혼자 황성에 보내놓고 정말 걱정스러웠는데….”

“별말을 다. 내가 벗이라곤 레오폴트 경만 알고 자랐는데, 공이 레이디 아멜리를 잘 키워준 덕에 내가 참된 우정을 알게 되었어.”

나는 내 여주인공을 가슴으로 키워준 아버지에게 그가 그저 황송해할 인사치레를 해주었다.

“게다가 글렌치아 상단과의 다리를 놓아 주셨다고도….”

“무슨? 레이디 아멜리가 좋은 평판을 따낸 덕에 얻은 건데, 아버지에게 쑥스러웠나 봐.”

“저, 전하께서도 참….”

오늘의 주인공에게 내가 연신 금칠해주자, 아멜리의 뺨에 발갛게 홍조가 들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건강하셨는지요.”

곁에서 지켜보던 루시페우스가 로즈버리 남작에게 악수를 청했다.

“예, 오랜만입니다. 백작 위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리 말하던 남작의 눈동자가 슬며시 아멜리를 향했다. 두 사람의 혈연에 관해 언급하려는 것이 명백했다.

루시페우스가 난처한 낯을 지었다.

“제가 양부를 잘못 만나 친척 누님께 큰 심려를 끼쳐 드렸더군요.”

“지금이라도 공께 든든한 친척 어르신이 생겼으니 다행 아닙니까. 나중에 동북부에 오실 일 있으시면 저희 로즈버리도 친척이다 생각하고 찾아 주시고요.”

대대로 호구… 아니 호인인 가문답게, 로즈버리 남작은 정말로 사람이 좋아 보였다.

그런 성품으로 아내가 결혼 전에 낳아온 딸도 성심껏 사랑했으니 아멜리가 자신이 친딸이 아니리라곤 상상도 못 했으리라.

그런 사랑을, 세실리아 또한 받았고.

이 모든 삶을 선물해준 남자를, 나는 애정 가득한 낯으로 올려다보았다.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약혼연은 밤이 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우렌바흐 공작이 힐베르크 후작을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어 한 데다, 로즈버리의 식구들 또한 재치 있는 말주변으로 아우렌바흐들의 호감을 산 덕에 분위기가 내내 좋았다.

황성 최고 콰르텟의 연주 속에 약혼자 커플을 필두로 사람들이 저마다 춤을 추며 격의 없게 어울리기까지 했다.

루시페우스의 지난 생에는 아멜리에게 찻물이며 돈주머니를 투척했던 사람들마저 싱글벙글한 분위기.

‘이 화목한 풍경에 내가 분명히 일조한 거지.’

나는 뿌듯함에 벅차오르는 마음을 끌어안고서, 루시페우스와 만찬장 뒤편의 테라스를 찾았다.

“아, 시원하다.”

스파클링 와인을 무려 한 잔이나 마셔 달아오른 뺨에 늦겨울의 냉기가 싱그럽게도 달려들었다.

“전생 주당 어디 안 가십니다.”

루시페우스는 짓궂은 미소를 매단 채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치고는 목 끝까지 여며주었다. 그가 선물해준 루비 장식 목걸이가 걸린 앞섶이 거기에 꼭꼭 감춰지고 말았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뒤에서 나를 꼬옥 감싸 안기까지.

우리의 시선이 한가지로 정원의 근사한 야경에 닿았다.

좌우 대칭 완벽하게 조성된 정원 곳곳에 가로등이 은은한 불빛을 어룽대는 낭만적인 풍경….

그때, 루시페우스가 내게 걸쳐둔 제 재킷을 뒤적였다. 이윽고 그의 손에 딸려 나온 것은 작은 상자였다.

이 크기는, 분명….

내 생각에 화답하듯 그 안에선 오색찬란한 반사광을 자랑하는 반지가 나타났다.

“원래 이렇게 드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만….”

나를 뒤에서 감싸 안은 남자의 목소리가 나직한 떨림을 담아 울렸다.

“오늘 완성되었다고 연락이 왔길래 바로 찾았는데, 하필 약혼식을 보고 나니 드리지 않고는 못 배기겠군요.”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다이아몬드를 다섯 발로 물린 반지는 그 둘레와 링 부분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빙 둘려 있었다. 그리고 이쪽에서 볼 수 있는 옆면에는 화룡점정 삼아 장식된 루비까지….

그 빛이 너무도 찬란해서, 눈이 부시다 못해서,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누가 프러포즈를 얼굴도 안 보고 해….”

내 목소리에는 금세 물기가 배어났다. 루시페우스는 낮게 웃으며 나를 달래듯 한번 꼭 안더니, 나를 번쩍 안아 올려 난간에 앉혔다.

“이런 걸 언제 다 준비했어….”

“제집에 사용인을 많이 고용해야겠다고 결심한 날 바로 뤼미에르에 의뢰했지요. 한데 당신께서 선수를 치셔서….”

상자 안을 보이며 나를 올려다보는 루시페우스의 낯에는 어딘가 소년의 것처럼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거기에 깃든 건 일종의 설렘이었다.

이내 그의 눈동자가 나붓이 내리깔리더니, 그가 내 손을 천천히 쥐어 올렸다. 어느새 반지를 빼낸 빈 상자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당장은 제가 집도 절도 없지만.”

“경이 집이 왜 없어….”

내 손에서 장갑을 벗겨낸 그가 내 약지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제 저택이 프리지어궁처럼 근사하게 거듭나고, 프리지어궁에서 쓰시던 것만큼 좋은 것으로만 저택을 채우게 되면….”

내 손끝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에 안심했는지, 그가 천천히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반지가 손가락 가장 깊숙이 안착하자, 그는 감격에 찬 듯 얼마간 거기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이윽고, 그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을 때.

“당신께서 평생 그 저택의 주인이 되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힝,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팔을 뻗어 그에게 무언으로 포옹을 명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순순히도 내 말을 따랐고, 나는 그의 단단한 어깨에 기대어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서 훌쩍였다.

“아무것도 없어도 나는 다 좋아.”

그리고 또 한참 훌쩍이다가… 나는 이때를 위해 생각해둔 단어를 어색하게 입에 물었다.

“나의, 루스.”

루시페우스의 품이 우뚝 멎었다.

조심스레 몸을 떼어낸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낯을 하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루스. 나만이 부를 그대의 이름.”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뺨을 어루만지자, 그의 낯에 감격이 번졌다.

그가 몇 달간 대놓고 조르지 못하던 그의 애칭이었다.

살면서 애칭이란 걸 가져본 적 없는 남자에게 나만이 선사할 자격을 가진 바로 그 애칭….

그는 벅참을 가누지 못하여, 재빨리 내 양 볼을 감싸 쥐며 입을 맞췄다. 그 격정을 내색하듯 크게 베어 물었던 입술을 간신히 떼어내며….

“그럼, 당신은 나의….”

“세실?”

“…그것밖에 없을까요?”

기쁨에 일렁이던 그의 낯이 살며시 굳었다.

“달리 뭐가 있어야 하는데?”

“그건 저 말고도 다들 부르는 이름 아닙니까. 황실 분들이라거나….”

“레오라거나, 레오라거나?”

내가 놓치지 않고 놀리자, 그의 미간이 억울하다는 듯 좁아졌다. 나는 쿡쿡 웃으며 다시금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쩌나, 그게 아니면 별수 없는데.”

루시페우스는 불만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내가 무게중심을 잃을세라 바싹 다가섰다. 어느새 그의 얼굴이 내 얼굴 바로 아래 자리해 있었다.

“이런 건 어떨까요.”

“어떤 거?”

“당신이 전생에 쓰시던 이름… 말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순간 표정을 잃었다.

그런 건, 나도 잊고 있었는데….

“그거면 저만 아는 이름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의 낯은 다시금 소년처럼 빛나고 있었다. 수줍음과 즐거움이 경쾌하게 어우러진 표정….

“안 될까요?”

그가 내 양옆 난간을 짚었다. 더없이 가까이서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진한 열망으로 빛났다.

내가 그의 애칭을 오래 생각해왔듯, 그 또한 오래 고민한 바일 테니까.

한편으로 거기에 깃든 건 확신이었다.

내가 그에게 모든 걸 독점할 권리를 줄 거라는 확신, 끝내 허락하고 말 거라는 확신….

제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도 그러하다고 믿으려 애쓰는 나의 연인….

나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매만지다가 끝내 미소 지었다.

“안 될 리가 있겠어?”

내가 이 생을 받은 것은 다 네 덕분인데.

그 엉터리 결말을 뒤로하고, 네 이야기를 우리 마음대로 써나갈 건데.

나는 엷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숨을 옮기듯, 그의 입가로 다가가….

“내 이름은 말이지….”

날숨과도 같은 마지막 말은 그의 입 안으로 스러졌다.

<흑막을 구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요>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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