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생의 저주이자 유일한 구원
2017.05.10.
희명병원 정문으로 들어선 차는 본관과 응급실을 지나쳐 맨 안쪽에 있는 별관으로 향했다.
연구실과 실험실 등이 자리한 그곳은 늘 환자로 북적이는 본관과는 달리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차가 멈추자마자 섭호가 급히 내렸다. 간이침대를 밀고 별관 앞까지 나와 있던 지미가 곧바로 뒷좌석 문을 열고 견을 살폈다.
“얘 왜 이래?”
“정확한 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에 CCTV와 블랙박스를 확인해 봐야……. 화이트 박사님, 우리 도련님 괜찮은 거죠? 예?”
섭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반면 지미는 침착하게 상태를 확인하고는 침대로 옮기라는 손짓을 했다.
“시간은 얼마나 됐지?”
“제가 연락받았을 때가 5분이었습니다.”
“연락은 누구한테 받았는데?”
양쪽에서 침대를 밀고 복도를 빠르게 지난 둘은 맨 안쪽 <월경연구소>라는 명패가 달려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떤 여자분이었습니다. 백 회장님께서 가벼운 고혈압 증상을 보이셔서 임원회의가 취소됐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전화를 했더니 그분이 받아서 알려주셨습니다. 우연히 목격한 모양입니다.”
“그래. 다른 건 지협이가 다 알아서 잘 해결했겠지. 역시 임원회의고 뭐고 널 보내는 게 아니었어. 아버지 병원 오셨다는 말 듣고 잠깐 올라가 본 사이에 빠져나갈 줄은…….”
지미가 식염수와 거즈 한 뭉텅이를 건넸다.
조심스레 재킷과 셔츠를 벗긴 섭호는 흠뻑 적신 거즈로 견의 얼굴이며 목덜미에 묻은 피를 정성껏 닦아냈다. 얼마나 피를 쏟았는지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사이 혈액팩을 가져와 링거대에 매단 지미는 견의 손등 혈관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다. 뒤이어 이런저런 약들과 기계들도 연결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후, 섭호는 한숨을 삼키며 침대 난간을 짚었다. 마디가 새하얘지도록 움켜쥔 손에 불길한 색의 핏자국이 점점이 남아 있었다.
‘설마하니 참말로…… 아녀. 말도 안 되지. 안 되구말구.’
섭호의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씨 집안의 비서가 된 섭호에게는, 견을 보필하는 것 외에 해야 할 일이 더 있었다.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말에 따르면 월경에 관해 적혀 있는 책이 모두 세 권이라 했는데, 가문에 남아 있는 건 <울투라날개중형> 한 권뿐이었다. 증상에 대해서는 상세히 적혀 있었으나 원인이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서 틈틈이 나머지 책을 찾아 헤맸다. 대놓고 찾을 수도 없고, 사람을 따로 쓸 수도 없었기에 시간과 노력이 꽤나 들었다.
동시에 사람도 찾아야 했다. 견이 열두 살에 초경을 하던 순간에 함께 있었던 소녀. 아무것도 모르고 견의 호르몬시터가 되어버린 후에 사라져 버린 여자애.
애초에 그 파티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초대장을 가진 이들뿐이었기에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넉넉잡고 열 살에서 열다섯 살 남짓의 소녀 중 견보다 조금 크고 코에 점이 있는 아이를 찾으면 되는 거라고.
그런데, 없었다.
범위는 점점 넓어졌다. 파티 참석자를 넘어 그날 리조트에 묵었던 손님들까지 확인했다. 직원의 자녀들, 묵지 않고 리조트 시설만 이용한 사람들까지 닥치는 대로 찾았다.
며칠이면 되리라 여겼던 일은 몇 달이 되고, 몇 년이 되었다. 처음에 점이 없어 리스트에서 뺐던 여자들도 추후에 점을 뺐을지도 모른다며 다시 만나보기까지 했다.
최대한의 가능성을 두고 뒤졌으나 견은 한 달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아이가 되었다. 코피를 목격한 수많은 여자들 중 호르몬시터가 없다는 증거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괴상한 삶의 패턴에도 얼추 적응한 견은 차라리 안 찾겠다고 했다. 50대쯤 되면 그 기묘한 현상도 사라진다 했으니, 일에 몰두하다 보면 금방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지 않겠느냐고.
그러다 작년 이맘때쯤, 찾아냈다.
섭호가 살던 곳보다 더 험한 시골, 자그마한 향토 연구관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그 책을.
<예지미인(藝誌迷人)>이라는 제목처럼 기이한 자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기담집이었다. 책 상태도 내용도 조악해 별 가치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대강 훑어보고 넘기려 했는데,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
―……스물아홉이 되던 해 갑작스레 몸이 쇠하더니, 결국 석 달 만에 온몸의 피를 모두 쏟아내고 요절하였다.
그 구절을 읽고 난 후, 견이 가장 먼저 한 말은 할아버지가 아신다면 쓰러지실지도 모르니 일단 둘만 알자는 거였다. 만약 정말로 자기가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때 저를 대신해 말해달라고.
그러나 냉정함은 딱 거기까지였다.
믿을 수도,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시한부 선고와 맞닥뜨린 견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부정하다가 분노했고, 울다가 기도했고, 포기했다가 다시 부정했다.
섭호는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고 다독이며 묵묵히 곁을 지켰다.
전에 그렇게 해주지 못한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과 차라리 그 책을 찾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담아.
“어이, 위스퍼.”
상념에 잠겨 있던 섭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부르셨습니까, 백지미 고모님?”
“너, 쥐도 새도 모르게 바늘 자국 하나 남기고 죽고 싶니?”
이름만 부르면 지적인 아름다움이 넘치는데, 성까지 붙였다 하면 백치미 돋는 본명을 극도로 싫어하는 지미가 정색을 했다. 섭호는 떨리는 동공을 허공으로 돌렸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화이트 박사님.”
“됐고, 아까 연락받았을 때가 5분이라 하지 않았어?”
“네, 확실합니다.”
“지금 55분인데?”
“예?”
그제야 섭호도 한 대 맞은 얼굴을 했다.
“그때 바로 쓰러진 거라도 해도 이미 50분이 지난 거야. 근데 얘 왜 그대로지?”
“그러게요. 원래 30분이면 변하는…….”
지미가 견을 이리저리 살폈다.
“죽은 건 아닌데. 전혀 죽을 것 같지도 않고. 호르몬수치는 검사해 봐야 알겠지만…… 잠깐.”
곰곰이 내려다보던 지미의 눈이 커졌다.
“얘, 여기 있던 거 어디 갔어?”
지미가 환자복도 입히지 못하고 그냥 벗겨둔 견의 상체를 가리켰다. 반쯤 덮여 있던 시트를 배까지 끌어 내리자, 섭호의 눈도 커졌다.
“어, 얼라리여? 얼룩배기 같던 게 워디 갔디야?”
당황한 섭호의 입에서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그 또한 지미의 귀에는 충격적이었으나, 지금은 견의 왼쪽 가슴에 번져 있던 얼룩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게 더 놀라웠다.
한참 동안 견을 내려다보다가 지미가 중얼거렸다.
“얘, 오늘 피 터졌을 때 어떤 여자랑 같이 있었다고 했지?”
순간, 무시무시한 침묵이 월경연구소 안을 뒤덮었다.
[<울투라날개중형>에 적힌 바에 따르면, 신체 변화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10대 초반에 첫 월경, 즉 초경(初驚)을 할 때 가장 먼저 접촉한 사람을 45∼50세경 폐경(閉驚)할 때까지 옆에 둔다. 이후 출혈이 발생했을 때 같은 사람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작아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첫 각인된 자만 유효하며, 그자가 죽더라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다.
희명병원 내 월경연구소 소장인 화이트 박사는 각인자와 환자가 모종의 호르몬적 유대(紐帶)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고, 그자를 ‘호르몬시터(Hormone-Sitter)’라 명명하였다.]
***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20세기 최고의 정신의학자이자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는 죽음을 앞둔 이의 심리학적 반응을 5단계로 설명했다.
첫 번째는 부정.
“이거…… 이건 아닌 것 같아. 이 책 자체가 너무 신빙성이 없잖아. 시기도 저자도 분명치 않고, 아이가 된다는 말은 없으니 어쩌면 다른 병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좀……. 그래! 나머지 한 권! 그거까지 찾아보고 나서!”
두 번째는 분노.
“책 가져와. 다 태워 버리게! 차라리 눈에 안 보이는 게 낫겠어. 혹시 알아? 태워서 재라도 씹어 먹으면 이 미친 병이 나을지? 대체 왜 찾은 거야. 그 책을! 찾아야 할 건 그 여자인데! 내 인생 망쳐 놓고 튀어버린 그 여자! 왜 하필 그때 거기에…… 아니지, 애초부터 왜 나였던 거지? 왜 하필 나냐고!”
세 번째는 타협.
“기도 같은 거 효과 있을까? 이제껏 안 믿다가 급하니까 찾는다고 더 괘씸해하면 어쩌지?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 정말 진심인데. 다시는 한 달에 한 번씩 뭐가 어쩌고 불평 안 할 테니까, 몇 배는 더 열심히 살 테니까 그저 살게만 해달라고 하면…….”
네 번째는 우울.
“…….”
다섯 번째는 수용.
“석 달이면…… 아마도 다음 월경이 마지막이 될 것 같은데. 그전에 해야 할 것,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 도와줄 거지, 섭호야?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그리고 그다음은, 앞선 다섯 단계가 제멋대로 뒤섞여 끝없이 반복되는 단계.
겉으로는 차분해 보여도 속은 휘몰아치는,
밖으로는 난리를 쳐도 안은 이미 절망의 끝까지 가라앉은,
어제는 살 것 같다가도 오늘은 죽을 것 같은,
그렇게 삶과 죽음 중 어느 쪽도 온전히 누리지 못한 날들 속을 헤매던 견의 무의식이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갔다.
***
열두 살이 되던 해였다.
얼마 전부터 어른들이 이상했다. 왜 이러나 싶을 만큼 저에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200년 간격으로 돌아오는 ‘월경’이 예고된 해라는 걸 몰랐기에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아버지의 비서였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살뜰히 돌봐 주신 위 비서 아저씨가 24시간 곁을 지켰다.
되도록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고, ‘혹시 다치지도 않았는데 피가 난다면 절대 놀라지 말고 바로 저를 부르시라’는 말을 세뇌하듯 했다. 피가 날 때 절대 누구와도 닿아선 안 된다는 것 또한 수없이 강조했다.
차라리 이유를 말해줬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어른들 딴에는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까 싶어서, 혹시나 일어나지 않는다면 굳이 어린애 겁먹게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하에 감췄다지만, 결국은 그것 때문에 일이 꼬이고 말았으니까.
그해 내 생일파티가 희명리조트 오션에서 열렸다. 그동안 해왔던 생일파티 중 가장 규모가 큰, 어른들은 물론이고 자제들까지 함께 부른 자리였다.
말이 생일파티지 후계자들 간의 조금 이른 친목모임이라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다.
친목을 넘어서 미리 며느릿감을 골라두기 위해 우리 집안 어른들이 마련한 자리라는 건 꿈에도 몰랐다.
혹시나 지협이 형과 나 둘 중 한 명이 정말로 가문의 저주를 물려받는다면, 그래서 평생 곁에 있어줄 호르몬시터가 필요해진다면, 그 여자를 일찌감치 곁에 붙여둘 계획이었다는 걸.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기의 간택 파티는 처참히 실패로 돌아갔다.
설마 했던 월경이라는 게 정말로 터진 거였다.
200년 만에, 증조할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에게 일어났다던 일이, 나한테.
그맘때쯤 유난히 예민해서 얘가 드디어 사춘기가 왔나, 하는 말을 듣던 나는 아무도 모르게 방으로 돌아가 책을 읽고 있었다. 파티보다 백 배는 재미있는 의학 소설이었는데, 낯선 단어가 눈을 찔렀다.
AIDS.
에이즈가 환자의 피로 인해 전염될 수 있다는 구절을 읽자마자 모든 게 단박에 이어졌다. 피가 닿는다고 무조건 옮는 게 아니라는 것까지 살피기엔 충격이 너무 컸다.
벌떡 일어섰다. 당장 생각나는 사람은 고모뿐이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의사.
책도 팽개치고 방을 뛰쳐나왔다. 엘리베이터는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정신없이 뛰어 올라가 연회홀이 있는 층의 문을 벌컥 열었을 때,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필 바로 앞에 서 있던 누군가와 부딪힌 거였다.
“아, 아야…….”
주저앉은 채로 간신히 고개를 드는데, 갑자기 코 밑이 뜨듯해지더니 새빨간 핏방울이 투둑 떨어졌다. 놀라 코 밑을 문질러 보자 진득한 피가 묻어났다.
태어나 처음 나보는 코피였다.
“괘…… 괜찮아?”
앞에는 처음 보는 여자애가 앉아 있었다. 코피를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는데,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어떡하지? 미안해…….”
비척비척 먼저 일어선 여자애가 손을 내밀었다. 코피 때문에 혼란에 빠진 나는 닿으면 안 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애가 내 손을 잡은 순간.
심장에서 쿵, 소리가 났다. 안에서부터 울려 귓속을 선명히 때렸다. 강한 정전기 같은 게 스친 것 같기도 했다.
“미안, 정말 미안…… 내가 지금…….”
날 일으켜 준 여자애는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만큼이나 정신이 없어 보였다.
마침 호텔 직원이 다가오는 게 보였고, 얼른 손짓했다.
“우리 고모, 고모 좀 불러주세요. 희명병원 의사예요. 백지미 선생님…… 아! 안 돼요! 만지지 마세요!”
고모가 급히 뛰어왔다. 직원은 코피를 지혈시켜 주려고 했는데 손도 못 대게 하더라면서 눈치를 살폈다. 고모는 황급히 나를 데리고 다시 비상계단으로 들어갔다.
“안 돼, 고모! 나 만지면 안 돼! 이거 놔!”
“견이 너, 대체 어디 있었어? 코피는 왜, 언제부터 났어? 무슨 일 있었…….”
등 뒤로 문을 닫고 돌아서서 날 보자마자 굳던 고모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정작 나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놀이기구를 탔을 때처럼 잠깐 어찔했을 뿐이라 바로 깨닫지 못했다.
“갑자기 코피가 났어. 그리고 닿았어, 고모.”
차게 식은 손에 힘을 주고, 생각나는 대로 막 말했다.
“조금 전에 문 앞에서 부딪혔어. 어떤 모르는 여자애였는데, 나보다 조금 컸는데, 많이 크진 않고…….”
얼굴을, 옷을, 뭐라도 기억해 보려 애썼다. 울고 있었다는 것과 미안하다고 했던 것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간신히 쥐어짜 낸 끝에 한 가지를 더 끄집어냈다.
“맞다, 코에 점이 있었어! 코끝에, 조금 옆으로, 이렇게.”
머리가 아팠다. 어지러웠다. 결국 울음이 터졌다.
“나 나쁜 병에 걸린 거지? 그래서 어른들이 그렇게 조심하라고 한 거지? 내 피 묻으면 다른 사람이 죽는 거지? 그런 거…… 지……?”
눈물을 닦으려다가, 그제야 옷이 헐렁해진 걸 알았다. 뭔가 크게 이상해졌다는 것도.
그러나 더 살피기도 전에 고모가 몸을 낮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아니야, 그런 거.”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고모는 우리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월경을 믿지 않았었다고 했다.
“세상에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은 없어. 내가 고쳐 줄게, 견아. 고모가 다 해결해 줄게.”
그때처럼 어지러운 부유감에 휩싸인 채, 견은 생각했다.
당신은 알까?
인생의 절반 이상을 당신만 애타게 찾다가 허무하게 죽은 누군가가 있었다는 거.
17년 동안, 난 매일 당신이 궁금했어.
누굴까, 어디 있을까. 혹시 지구의 끝에 있어 영영 만날 수 없는 건 아닐까, 어쩌면 지금쯤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는 건 아닐까,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은 지금, 살아 있어?
그런 거라면 솔직히 나, 많이 억울해.
불쑥 튀어나와서 나한테 뛰어들고, 그렇게 내 인생을 망치고, 멋대로 사라져 버린 건……!
***
“……당신이잖아…….”
잠꼬대 같은 말을 토해낸 견은 눈을 떴다.
눈앞이 희게 일렁거렸다. 실제로 공간이 움직이는 건지 현기증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천천히 몸을 움직여 보았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혹은 고열이 들끓을 때처럼 둥실거리긴 했지만 다행히 뜻대로 움직였다.
견은 제 눈앞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어…….”
마디와 힘줄이 적당히 도드라진 어른 남자의 손이다. 손등에 링거가 꽂혀 있다.
‘시체에 링거를 꽂아두진 않을 텐데. 아니면 죽을 때 모습 그대로 귀신이 됐다거나…….’
몸을 일으켰던 견은 앓는 소리를 내며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핑핑 도는 눈앞이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다시 일어나 앉았다.
눈에 익은 제 방이다. 햇빛이 드는 걸 보니 밤은 아닌 것 같다.
멍한 정신을 깨우려 애쓰는데 문이 열렸다. 방으로 들어오던 섭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 도련님! 정신 드셨슈? 지 보여유?”
섭호가 황급히 다가들었다. 그러나 어깨도 손도 잡지 못하고 멈칫했다. 자칫 어디가 잘못될까, 혹은 제 손이 몸을 쑤욱 통과해 버리기라도 할까 겁먹은 듯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인 견이 손등에 꽂힌 링거바늘을 반창고째 투드득 뜯어버렸다.
“도련님!”
“아, 아파…….”
바늘이 뽑혀 나온 곳에서 피가 흘렀다. 섭호가 침대 맡에 있던 수건을 잡아채 얼른 손등을 덮고 꾹 눌렀다.
“시방 뭔 짓거리래유!”
“나 아파. 아프다고.”
“그럼 아프지 안 아프겄슈? 피 보는 건 진저리가 나는구만은!”
“꿈 아닌 거지? 죽은 거 아니지?”
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나 귀신 아닌 거지? 사실은 어디 중환자실이나 영안실에 누워 있는 거 아니지……?”
아까부터 입을 비죽비죽하던 섭호도 왈칵 터졌다.
“참말로 그렇게 되는 줄 알았구먼유! 워째 산 사람이 일주일이 다 되도록 눈 한 번 안 뜰 수가 있냔 말유! 화이트 박사님은 그저 괜찮다고만 허시구!”
“일주일?”
“야. 그날 저녁에 병원서 집으로 옮기고 꼬박 며칠을 이렇게 계셨슈. 이게 숨만 쉬는 송장이 아니면 뭣이냐고 그랬는디……!”
섭호가 말도 채 끝맺지 못하고 견을 끌어안았다. 다른 때였다면 서로 정색했을 테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견도 와락 마주 안았다.
“딱 거기까지.”
한창 감격에 젖어 있는데, 지미의 목소리가 두 남자 사이를 갈랐다.
“내가 꽤 열린 사람이긴 하지만, 조카와 비서놈이 침대에서 뒹구는 걸 라이브로 볼 준비까지 되진 않았어.”
“무슨 그런 흉흉한 말씀을 하십니까?”
안긴 했으나 뒹굴 마음은 전혀 없었던 섭호가 정색을 하고 팔을 거뒀다. 그 바람에 안겨 있던 견은 볼품없이 내팽개쳐졌다.
“저 자식이……! 고모오……!”
옆으로 다가온 지미가 견의 머리를 툭 쓰다듬었다.
“헤모글로빈 수치 아직 낮으니까 입 닫고 푹 쉬어.”
견이 고분고분 바로 누웠다. 지미는 동공이며 맥박, 혈압 등을 꼼꼼히 살폈다.
“어디 불편한 데 없어? 조금이라도 이상한 데 있으면 말해.”
“없는 것 같아.”
“머리는? 네가 어디서 어떻게 쓰러졌는지 기억나는 대로 말해봐. 탈주한 건 괘씸하지만 이번만큼은 봐줄 테니까.”
견의 눈동자가 느리게 굴렀다.
연구소를 빠져나왔고, 고모의 차를 끌고 나갔다가 어떤 여자를 칠 뻔했고, 몸이 이상했고, 차에서 내려서 회사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코피가 났고, 입에서도 쏟아졌고, 아팠고, 쓰러지기 직전에 그 여자를…….
거기까지 더듬더듬 기억해 낸 견이 눈을 크게 떴다.
“여자! 어떤 여자를 잡았는데, 내가! 살려달라고 그런 것 같은데!”
“네. 그 여자분께서 전화 받아서 어딘지 알려주신 덕분에 저하고 백 이사님이 바로 갈 수 있었습니다.”
말만 들어도 소름이 쫙 끼쳤다.
멋모르고 응급실로 실려갔더라면 사람들 앞에서 아이로 변할 수도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 여자를 마주쳐 멈춰 서지 않았더라면 운전 도중에 몸이 이상해지고 피를 쏟아서 더 큰 사고가 났을지도 몰랐다.
견은 두 팔로 제 몸을 끌어안았다.
“아아, 생명의 은인……!”
“백 이사님께서 인사드리고 명함도 드렸답니다.”
“형 인사는 형 인사고 내 인사는 내 인사지! 뭐부터 해야 하지? 뭐로 보답하지? 일단 연락해서…….”
“밥 한 끼 가지고는 택도 없을 거다.”
“당연히 나도 알지. 고모는 나를 뭐로 보는 거야? 겨우 그거 가지고 입 닦겠어? 생명의 은인인데.”
“은인이기만 할까?”
“응?”
견이 의아한 눈을 했다.
“잘 들어. 너 여기 누워 있는 동안 아이로 안 변했어. 호르몬 수치 검사는 계속 해봤는데, 월경은 한 게 맞고.”
“뭔 소리야. 했다는 거야, 안 했다는 거야?”
“한 가지 더. 내가 말은 안 했지만 3개월 전부터 너 혈액검사 결과 이상했어.”
“뭐?”
“암 말기 환자들 혈액에서 나타나는 단백질 분자가 있는데, 그 수치가 엄청나게 높게 나왔어. 당연히 암은 아니고. 근데 다른 환자들한테서 그렇게 나왔으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봤을 거야.”
“아…….”
“근데 너 쓰러지고 나서 검사해 봤더니 완전히 정상 수치로 돌아와 있었어. 오늘까지도 변화 없고.”
“그게…… 그게 무슨 뜻이야?”
갑자기 지미가 견이 입고 있던 옷의 앞섶을 쥐더니 옆으로 쫙 벌렸다.
“뭔데, 갑자기! 아무리 고모라도 성희롱이야, 이거!”
“어렸을 때 똥기저귀까지 갈아준 사람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구만. 여기 봐봐.”
지미의 손이 왼쪽 가슴을 꾹 눌렀다. 고개를 내렸던 견의 눈이 튀어나오려 했다.
“어, 어디 갔어?”
“쓰러지고 나서 보니까 없던데.”
초경 이후 늘 남아 있던 얼룩, 새카매지기까지 했던 그 흔적이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피가 터졌을 때 어떤 여자 도움을 받았는데 아이가 되지도 않고 오늘내일하던 몸뚱어리도 멀쩡해졌다. 무슨 뜻일 것 같아?”
곱씹어보던 견의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스쳤다.
무려 17년을 품고 떠안고 짊어지고 되새긴, 인생의 저주이자 유일한 구원.
“호르몬시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