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선을 넘어야겠어
2017.05.31.
오전 간식을 먹고 간단한 활동을 한 후, 모단은 바다반 아이들을 데리고 옥상으로 향했다.
“선생님 앞으로 두 줄 기차 해보자. 옆에 있는 친구 손 잡고. 그래.”
회사 복도를 따라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나란히 걸어가는 광경을 본 직원들 사이에 미소가 번졌다. 그 와중에 남직원들의 시선은 모단을 힐끔힐끔 좇았다.
아이들은 바삐 일하는 어른들 사이를 지나가는 게 어색하기는커녕 재밌기만 한 눈치였다. 몇몇은 까치걸음을 하며 엄마 아빠를 찾기도 했다.
“선생님! 초은이가 자꾸 손 안 잡는다고 해요!”
“야, 김동후! 난 네 손 안 잡아도 혼자서 잘 갈 수 있거든?”
“선생님이 잡으라고 했잖아아!”
“선생님∼ 잡기 싫으면 안 잡아도 되지요오?”
“너어!”
동후가 초은이를 밀치려던 순간, 모단이 잽싸게 끼어들어 동후의 손을 잡았다.
“동후야, 초은이가 자꾸 손을 안 잡는다고 해서 기분이 안 좋았어?”
“계속계속 싫다고 하고 밉게 말하고 그러니까.”
“그렇다고 친구를 때리면 안 되는 거야.”
모단이 옆을 돌아보았다.
“초은아, 초은이가 친구 손을 잡으려고 하는데 싫다고 뿌리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새초롬하니 입만 비죽이던 초은이가 고개를 돌렸다. 모단은 다른 손으로 초은이의 손을 잡았다.
“지금은 손 안 잡고 혼자 가고 싶어, 하고 부드럽게 말해주면 친구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알았다고 할 거야. 그래도 계속 귀찮게 하거나 화를 내면 그땐 선생님한테 얘기해 줘. 알았지?”
“네.”
“다른 친구들이 기다리니까 지금은 선생님 손잡고 가자.”
동후와 초은의 손을 잡은 모단이 다시 아이들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15층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옥상이었다.
“차례차례 조심해서 올라가자. 난간 잡고, 그렇지.”
“우와아!”
“조심, 조심!”
놀이터를 보자마자 잔뜩 신이 나서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모단은 미소를 지었다.
실외 시설도 실내 환경만큼이나 좋아 보였다. 감탄 어린 눈으로 놀이터와 텃밭을 둘러보던 모단의 시선 끝에 뭐가 턱하니 걸렸다.
‘뭐지? 이 불길한 느낌은?’
고개를 더 돌리자, 낯익은 실루엣이 난간에 기대서 있는 게 보였다.
회사보다는 클럽이나 파티에 훨씬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화사한 슈트 차림의 견이었다.
‘저기서 뭐 한대?’
옆에는 어김없이 섭호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동후와 초은이가 서 있었다.
“아저씨, 누구세요?”
“섭호 너 부르잖아.”
“아닌데요? 아저씨 보고 물어본 건데요?”
“와, 나 태어나서 아저씨 소리 처음 들어봐.”
동후의 말을 들은 견은 진심으로 충격받은 듯했다. 옆에 있던 초은이 눈을 흘겼다.
“야, 김동후. 너 이렇게 잘생긴 아저씨 봤어? 우리 언니가 그러는데 잘생기면 다 오빠랬어. 오빠, 누구세요?”
“그렇다고 또 오빠 소리 듣기엔…….”
웅얼거린 견이 섭호 뒤로 반쯤 몸을 숨겼다. 아저씨고 오빠고 아이들이 말을 거는 상황 자체를 난감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너는 누군데?”
“저는 이…….”
“선생니이임! 모르는 아저씨가 이름 물어봐요오!”
“뭐? 야!”
“근데 이초은이 막 대답하려고 했어요! 절대로 알려주면 안 되지요오? 그치요오?”
쏜살같이 일러바친 동후가 모단 쪽으로 뛰어갔다.
네가 지금 알려줬잖아, 하고 째려보려다가 모단과 눈이 마주친 견은 순식간에 몸을 내밀고 눈부신 웃음을 머금었다.
“안녕하세요.”
“네.”
모단은 까닥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아이들이 호기심이 많아서요. 초은아, 놀이터 안으로 들어가서 놀까?”
“네…….”
초롱초롱한 눈으로 견을 올려다본 초은이가 방긋 웃고는 놀이터 쪽으로 뛰어갔다. 모단의 손을 꼭 붙잡고 있던 동후도 뒤를 따라가 버렸다.
“주말 잘 보냈어요?”
견이 말을 더 건네려고 했으나, 모단은 놀이터 쪽에 신경을 쏟느라 더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잠시만 한눈팔아도 애들이 다치는 수가 있어서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들어가세요.”
“…….”
모단과 제대로 말 한마디 섞어보지도 못하고 7세들에게 수치플레이만 당한 견의 뒷모습이 출근하는 주인 배웅하고 난 강아지처럼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힐끔거리던 연경이 넌지시 물었다.
“저 남자 회장님 손자 아닌가? 아는 사이예요? 둘이 얘기하는 것 같던데.”
모단은 태연히 답했다.
“아뇨. 동후랑 초은이가 말을 걸어서 당황하신 것 같더라고요. 애들 데려오면서 사과드린 거예요.”
“그랬구나.”
모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이들에게만 집중했다. 신나게 놀아주고, 놀이에 몰입하면 적당히 빠져 주기도 했다.
견은 아까 여직원들이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단에게 언뜻 흘렸던 말처럼, 월경이 시작되고 아이가 되면 견은 절대 밖에 나가지 않았다. 거울조차 제대로 보지 않았다.
월경을 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나가는 예닐곱 살들만 봐도 흠칫하게 되는 건 물론, 심할 때는 일곱 살이라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가라앉곤 했다.
한데 오늘은 왠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가댁질하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어색하긴 해도 거슬리진 않았다. 어쩌면 그 사이에 간간이 섞여 넘어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때문인지도 몰랐다.
“해빛아, 그네 열 번 탔으니까 다음 친구한테 양보해 줄까?”
“초은아, 이리 와봐. 머리카락 불편하지 않아? 선생님이 묶어줄게.”
견은 늘어지듯 테이블에 기대 팔을 세우고 머리를 받쳤다.
‘따뜻해 보여.’
햇살이 유난히 좋아서인지, 아이들의 밝은 에너지 덕분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놀이터 쪽이 유난히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나 같은 가짜 일곱 살하고 비교하면 안 되는 거겠지. 쟤들은 저렇게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다가 어른이 될 아이들이니까. 한 달에 한 번씩 억지로 되감아지는 게 아니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살고 있는.’
한 남자아이가 놀다 말고 모단에게 뛰어가더니 뭐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쭈그리고 앉아 눈을 맞춘 채로 다 들어주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견의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번졌다.
“……예쁘네.”
섭호가 나비눈을 흘겼다. 견은 태연히 응수했다.
“왜? 뭐? 보기 좋은 광경 맞잖아.”
재잘대던 아이가 다시 친구들에게로 가나 싶더니, 저만치서 다른 아이가 넘어져 울음을 터뜨렸다. 모단이 얼른 뛰어가 안아주는 것을 본 견이 낮은 소리를 흘렸다.
“……음.”
“겁나게 부러운가 보구만유.”
“뭘 또 저만한 꼬맹이가 부럽기까지.”
“도련님도 한번 자빠져 보시지 그류? 거들떠도 안 보실 것 같지만은.”
“그렇겠지.”
“도련님 말씀이 맞네유. 짱하게 보기 좋구먼유. 저 선상님이 저렇게 상냥하게 웃으시는 걸 다 보구. 누구 볼 때는 성가시럽게 구는 벌거지(벌레) 떨궈내듯 하시드만은.”
견이 혀로 볼을 밀며 불량스레 인상을 구겼다.
“벌거지라니, 말이 심하잖아. 난 자존심도 없는 줄 알아?”
“참말로 놀랍구먼. 자존심이 있는 작자가 여적(이제껏) 그러고 들이댔던 겨?”
“제발 혼잣말은 안 들리게 해. 그리고 넌 너무 예리한 게 탈이야.”
견은 다시 모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한 팔로 아이의 등을 안고 다른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때 그렇게 울던 여자애가 저렇게 컸단 말이지.’
서류에 적힌 바로는 서른 살, 그녀는 견보다 한 살 많았다.
‘그럼 그때는 열세 살…….’
눈물범벅이던 뺨, 코피를 보고 놀란 듯 커져 있던 눈, 자그마한 코끝의 점.
조각조각 나눠진 기억들인 데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뎌져 한데 꿰맞추기가 어려웠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모단이라는 짐작을 갖고 보니 한 그림으로 모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견은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식은 손가락 끝이 손바닥에 닿는 것이 선득했다.
‘그 손도 이렇게 차가웠었나?’
미안하다고 울먹이면서 먼저 내밀던 손.
그 손을 잡았던 순간의 다른 감각들이 너무 생생해서 온도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발버둥 치는 것처럼 팔딱대던 느낌. 짧고 강하게 온몸을 훑어내던 전율.
그리고, 정신없이 멀어지던 뒷모습.
나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손에 쥔 모래처럼 자꾸만 새어 나가려는 기억들을 애면글면 붙잡고 있었는데. 당신은 거기 있었던 것조차 잊어버렸다고?
‘설마, 정말로 아닌 걸까?’
마른 입술 위를 붉은 혀가 길게 훑고 지나갔다.
“섭호야.”
견을 돌아보았던 섭호는 얼김에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아무래도 선을 넘어야겠어.”
모단을 주시하는 견의 시선에 아까와는 다른 진득함이 어려 있었다.
“어둠의 경로든 뭐든 좋아. 저 여자, 17년 전 내 생일에 뭐 했는지 샅샅이 조사해 봐.”
견의 고개가 느릿하게 틀어졌다. 윗입술을 훑은 혀가 송곳니 사이에서 잘근 씹혔다.
“정말로 거기 없었는지.”
지협의 말이 맞았다. 확신이 필요했다.
자존심을 버려도 되는 사람인지.
마음껏 집착해도 좋은 사람인지.
“최대한 빨리.”
마음이 재미의 선을 넘어버리기 전에.
***
“아흐, 머리야.”
아이들이 하원한 후, 교실에 남은 모단은 쓰고 있던 관찰일지를 밀어두고 서랍에서 두통약을 꺼내 삼켰다.
간밤에 꾼 꿈자락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가끔 그때로 되돌아가는 꿈을 꾸고 나면 오늘처럼 종일 머리가 아팠다.
열세 살, 어리지만 마냥 아이는 아닌 어중된 나이.
인생에서 가장 불행했던 해.
견고하게 내 세상을 감싸주던 것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던 해.
꿈속에서도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줄곧 울고 있어서 눈앞이 흐릿한 것마저도 똑같았다. 그러다 누군가와 부딪혔던 것도.
아팠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는데 심장이 크게 뛰었었다. 온통 뿌연 눈앞에 시뻘건 게 번져서 눈을 문지르고 다시 봤더니 상대방의 얼굴에 코피가 나고 있었다. 놀라 일으켜 줬던 것도 떠올랐다.
꿈에서 그 아이의 손을 잡는 순간 번쩍 눈이 뜨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뒤통수가 지끈거렸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
코피 때문이었을까. 문득 백견이 떠올랐다.
월요일부터 들이닥치기에 이번 주도 망했구나 했는데, 금요일인 오늘까지 보이지 않았다.
신나게 들쑤셔 놓을 때는 언제고 갑작스레 코빼기도 안 비치다니, 시원한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생명의 은인은 무슨. 역시 심심해서 장난질 친 거였어.’
그때도 너무 황당해서 심각하게 듣진 않았지만, 지금은 더더욱 와 닿지 않았다.
‘살려줘서 고마우니까 책임지라고 했던가?’
책임이라는 말을 그렇게 무책임하게 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두어 번 찍어봐서 넘어오면 적당히 놀고,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면 미련 없이 버릴 놈이라는 걸.
두통약 껍데기를 습관적으로 앞치마 주머니에 넣으려던 모단이 멈칫했다.
‘잠깐. 그냥 안 나타나는 게 아니라 혹시 또 아픈 건……. 아, 나 왜 이래! 이렇게 호구 같으니까 그딴 놈이 재밌다고 쫓아다녔지!’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찰싹 때린 모단은 책상 아래 휴지통을 끄집어냈다. 약 껍데기를 버리는 김에 앞치마 주머니 안에 있던 것들도 죄다 꺼냈다.
점심식사 후에 아이들에게 먹인 감기약 봉투들이며 교실 바닥에서 주운 종잇조각들을 버리고, 언제 왜 넣은 건지도 모를 작은 장난감들은 제자리에 돌려놓고, 아까 아이들에게 선물 받은 색종이 꽃들은 서랍에 잘 챙겨두고 나니 기분이 한결 개운해졌다.
쓰던 일지를 얼른 마무리한 그녀는 유희실로 향했다. 다음 주부터 옥상 텃밭 가꾸기 활동을 하게 되어서 교사들이 함께 필요한 것들을 만들기로 했다.
“모단 쌤도 오셨네요. 여기 앉아요.”
“저는 뭐 할까요?”
“이거 오려서 팻말에 붙여주실래요?”
모단은 감자, 고구마, 방울토마토, 오이 등의 사진을 프린트한 종이와 가위를 건네받았다. 자리에 앉으려다가 다시 일어나 아크릴물감과 붓을 가지고 나왔다.
“그림까지 그리게요? 힘들지 않겠어요?”
“좀 허전할 것 같아서요. 대충 보기에 나쁘지 않게만 그려볼게요. 읏차.”
모단이 팔을 걷어붙였다. 옆에 있던 6세 샘물반 담임인 유효림 교사가 웃으며 툭 쳤다.
“모단 쌤 되게 웃겨. 얼굴은 청순한데 가끔씩 아재 같지 않아요?”
“맞아, 맞아. 걷는 것도 터프하게 걷고, 지금도 앉은 거 봐봐. 완전 파이팅 넘치잖아.”
소위 쩍벌 자세로 앉아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가위질을 하던 모단이 흠칫 다리를 오므렸다.
깔깔거린 교사들은 편하게 잡담을 주고받으며 제각기 손을 놀렸다.
“참, 월요일날 회사에 백견 왔었다면서요?”
“나랑 모단 쌤이랑 옥상에서 봤어. 비서랑 같이 와서 한참 있다가 가던데.”
“정말요?”
얼른 나서는 연경과는 달리, 모단은 묵묵히 붓질만 했다.
다른 교사들, 특히 젊은 미혼 교사들 사이에 폴싹 소란이 일었다.
“아이, 나는 한 번도 못 봤는데.”
“그럴 줄 알았으면 누리반이 월요일에 옥상 산책 간다고 할 걸 그랬어요.”
“근데요, 그 사람이 백지협 이사님보다 잘생겼어요?”
효림이 얼른 끼어들었다.
“백지협 이사님이 더 잘생겼죠! 제가 오죽하면 사내 자원봉사 동호회까지 들어갔겠어요? 솔직히 거기 있는 여직원들 다 이사님 보려고 들어간 걸걸요?”
“난 아무리 그래도 동호회까지는 못 하겠더라. 너무 피곤해.”
“한 달에 한두 번만 하는데요, 뭐. 나름 재미도 있어요. 백 이사님 얼굴 보면 일주일치 피로가 싹 풀리던데요?”
효림은 좋아하는 남자 배우 이야기를 하듯 지협에 대한 관심을 즐겁게 털어놓았다.
“효림 쌤은 젊어서 체력이 되니까 그렇지. 보육원도 간다며? 아유, 난 낮에는 여기서 애들 보고 집에 가면 우리 애들을 또 봐서 그런가, 엄두도 안 나.”
“보육원만 가는 건 아니에요. 이것저것 많이 해요. 맞다, 모단 쌤도 주말에 따로 하시는 일 없으면 동호회 같이 하실래요?”
“네? 저요?”
백견이고 백지협이고 못 들은 척하고 있던 모단이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 남자친구?”
“존재하지 않는 자가 전화를 할 리가요. 초은이 어머님이시네요.”
“초은이?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싸우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았는데…….”
말끝을 흐린 모단은 얼른 유희실 밖으로 나갔다. 학부모와의 통화는 하는 것도 받는 것도 긴장이라 목과 마음을 한데 가다듬었다.
“네, 어머니. 바다반 담임입니다.”
[선생님, 초은이 엄만데요. 뭐 하나만 여쭤볼게요.]
“네, 말씀하세요.”
[초은이가 며칠 전부터 이상한 소리를 해서요. 옥상에서 왕자님을 만났다는 얘기를 자꾸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옥상에서 왕자님을 만났다고요?”
어리둥절해졌던 모단은 금방 누군가를 떠올렸다.
옥상 난간에 기대서 있던 백견.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노는 내내 곁눈에 걸리던 시선.
초은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견을 올려다보며 누구냐고 물었더랬다. 아이의 눈에는 큰 키에 멋진 정장을 입고 있던 그가 동화 속 왕자님처럼 보인 모양이다.
‘이걸 뭐라고 한다. 따님께서 재벌 3세를 한눈에 알아보고 반한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없고.’
게다가 초은이 엄마는 성격이 그리 유한 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깐깐한 쪽에 가까웠다.
아무리 신원이 확실하고 개방된 공간이라지만 낯선 사람이 아이들이 노는 데 가까이 와서 말까지 나눴다고 하면 따질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솔직한 게 정답인 법. 모단은 있는 그대로 답하기로 했다.
“월요일에 옥상놀이터에 올라갔을 때 회장님 손자라는 분이 계셨는데, 초은이가 누구냐고 묻더라고요. 다른 직원분들보다 더 젊고 옷도 화려해 보이니까 왕자님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회장님 손자라는 말에 움찔했는지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초은이가 평소에도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 친구들 옷이나 액세서리 같은 데도 관심을 많이 갖고 공주님 같다거나 하는 칭찬도 해주고 그러거든요.”
[그렇죠. 아이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바로 수긍하는 것을 보니 그 손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무사히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은 모단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픽 웃었다.
아이다운 깜찍한 표현이 귀여워서, 동시에 묘하게 적절하다 싶어서.
‘요샌 가진 사람이 왕이니까 왕자는 왕자겠지. 그렇다고 정의와 매너로 똘똘 뭉쳐서 용이나 마녀를 물리치는 유의 왕자는 아닌 것 같지만.’
굳이 갖다 붙여야겠다면 신데렐라에 나오는 왕자쯤 되겠다.
밤이 늦었으니 집에 가겠다는 여자를 뭔 속셈인지 굳이 붙들고 늘어지는 바람에 무려 유리로 만든 하이힐을 신고 뛰게 만든 왕자. 결국은 구두 한 짝 가지고 찾아내겠다며 온 나라를 들쑤시는 미친 집착을 선보인 왕자.
‘그러고 보니 진짜 비슷하게 돌았는데? 그 왕자도 신데렐라를 보자마자 네가 무도회에서 튀는 바람에 흥이 깨져 버렸으니 책임지라며 꼴통지랄을 떤 거 아냐?’
모단이 한 손으로 제 이마를 툭 쳤다. 망상이 길었다.
“보통 애들 눈이 어른 눈보다 더 정확하다던데. 초은이 요 녀석은 벌써부터 얼굴에 넘어가면 어쩌자는 건지. 이번 달 안전교육 주제를 바꿔야 하나? 나쁜 사람들이 다 험상궂게 생긴 건 아니에요, 이런 걸로.”
모단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유희실로 향했다.
“무슨 일이에요? 어디 다쳤대요?”
“아니에요.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하셨다네요.”
효림이 조금 전 모단이 그림을 그려놓은 팻말을 가리키며 박수를 쳤다.
“모단 쌤! 그림 정말 잘 그리시네요. 그냥 슥슥 그리시는 것 같더니 대박.”
“그러게. 유아교육이 아니라 미술 전공하셨다고 해도 믿겠어요.”
“정말 자원봉사 동호회 안 들어오실래요? 1사1촌 맺은 동네에 가서 벽화 그리기 같은 것도 하고 아동센터 교재교구도 만들어주고 그러는데, 모단 쌤 솜씨면 엄청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웃기만 하던 모단은 다시 자리에 앉아 붓을 쥐었다.
“재미있을 것 같네요. 조금만 더 적응하고 생각해 볼게요.”
넋이 빠져나가기 딱 좋은 금요일 밤의 퇴근길.
모단은 혼자 정류장에 서 있었다. 집에 가는 버스를 놓치지 않을 만큼만 남겨두고 정신을 놓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를 톡톡 쳤다.
“트헉!”
놀라 돌아보는 짧은 순간, 얼굴 하나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저보다 더 놀란 눈으로 서 있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남학생이었다.
“죄송합니다. 버스 좀 물어보려고…….”
민망해진 모단이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어디로 가려는데 몇 번을 타야 하느냐는 물음에 건너가서 몇 번 타시라고 알려준 후에 심호흡을 했다.
“어흐, 짜증 나네.”
길 물어본 학생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정확히 뭔지 모르겠는데 찜찜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