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깜찍한 또라이
2017.06.07.
“뭐, 뭐, 뭐, 뭐야!”
제 코트를 한 팔에 걸친 견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모단은 얼결에 삿대질까지 했다.
“뭐냐고, 이게 왜!”
“나보고 이거라고 한 거 아니죠? 코트 보고 그런 거죠?”
견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눈 밑의 점이 어김없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언제 코트 생각이 나서 돌아갈까 기다려 봤죠. 모르고 집까지 갔으면 쭉 따라가려고 했는데.”
견이 모단의 코트를 펼쳐서 어깨에 둘러주었다.
놀란 심장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모단은 긴 팔이 제 어깨를 사르륵 감쌌다 사라지는 걸 느끼고만 있었다.
“근데…….”
모단을 내려다보던 견의 입술 끄트머리가 참지 못하고 호선을 그렸다.
“그 핀은 명함 대신 꽂고 나왔어요?”
“으아잇!”
괴성을 내지른 모단이 황급히 해빛의 핀을 빼서 가방에 쑤셔 넣었다. 견이 정색을 했다.
“왜 빼요? 딱 내 이상형인데. 깜찍한 또라이.”
“그럼 나 아니네요!”
“아니기는!”
더 크게 받아친 견이 웃음을 터뜨렸다.
“컨셉 제대로 잡고 나오셨던데. 마늘 싫어하는 사람이 갈릭버섯오일파스타를 그렇게 맛있게 먹어요? 후식은 녹차 말고 그린티나 뜨거운 아이스커피 달라고 할라 그랬죠? 하하하!”
진짜 그럴 생각이었기에 더 약이 올랐다.
“태어나서 그렇게 깜찍한 아재개그 처음 봤어요. 리액션이 좋은 왕은? 우왕∼ 우왕∼”
“그만합시다.”
“그 남자는 부장까지 출세 못 하겠던데요. 어떻게 그걸 듣고 안 웃지? 난 너무 웃겼는데. 왕 시리즈 더 없어요?”
울컥한 모단이 소리를 질렀다.
“뭐 하자는 겁니까? 주말에 사적인 자리까지 나타나는 건 범죄 아니냐고!”
“내가 범죄를 저지르고자 마음먹으면 이렇게 눈에 띄게 안 해요.”
견이 한 손으로 머리를 넘겼다.
“……아무도 모르게 하지.”
손에 잠깐 가려졌다 드러난 눈이 사늘했던 것 같았는데, 어느새 다시 애처럼 웃고 있다.
흡사 마술사의 손놀림처럼 무심히 사람을 홀리는, 알다가도 모를 묘한 얼굴.
“오해하지 마세요. 여기서 만날 사람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모단에게서 눈곱만치도 안 믿는다는 눈빛만 되돌아왔다.
“정말이라니까요? 지난주에도 안 따라다녔잖아요.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정모단 씨 앞에 안 나타나려고 했다고.”
“뭐가 확실해져요?”
“확실해지면 확실하게 말해줄게요.”
또 말장난 시작이냐고 따지려는데, 견이 허리를 숙였다.
“다음엔 내 편식도 고쳐 줘요.”
바로 앞에 잘난 얼굴을 갖다 놓고 아, 하고 입을 벌리는 시늉까지 한다.
“정모단 선생님이 먹여주면 한입은 먹어볼게요.”
“확 숟가락을 세로로 넣어버릴까 보다.”
속으로 하려던 말이 또 겉으로 나와 버렸다.
견이 주먹으로 턱을 짚더니 진지한 눈빛을 했다.
“아까 버섯으로 그 남자 고문할 때도 느낀 건데, 혹시 가학적인 취미 있어요?”
“뭐요? 고문이요?”
“정모단의 50가지 그림자, 뭐 그런 걸 봐버린 게 아닌가 해서.”
그림자보다 더 칙칙해진 모단의 인상을 보고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던 견이 한참 만에 뺨을 몇 번 쓸어내고는 진정했다.
모단은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중얼대며 숨을 골랐다.
“나도 고문당하는 기분이었어요. 시간이 너무너무 안 가더라고.”
도도록하니 올라가 있던 광대가 내려오고, 그윽하다 해도 좋을 법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좋네요, 이렇게 보니까.”
마주친 시선을 먼저 떼어낸 건 모단이었다.
방금 우럭 같은 놈과 맞선을 보고 나왔으니, 아무리 눈 밑에 점이 있고 볼 때마다 속을 뒤집는 놈이라 해도 상대적으로 몇십 배는 나아 보일 타이밍이다. 그러니 더 조심해야 했다.
“나 일주일 동안 너무 무서웠어요. 지금도 무서워 죽겠어요. 정모단 씨가 아닐까 봐.”
코트에 팔을 꿰어 넣고 앞을 여미던 모단이 멈칫했다.
정말 안 보려고 했는데, 또 홀려서는 돌아보고 말았다.
뚫어져라 보는 눈빛에 꿰뚫리지 않을 자신도 없으면서.
“곧 만나러 갈게요. 만약 늦어지면 보름날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
“보름? 아니, 보름이고 뭐고 누가 본다고 했……!”
“다른 약속 없으면 오늘 당장 양송이버섯치즈구이랑 와인 한 잔 했으면 좋겠는데 아까 말씀드렸듯 선약이 있어서.”
잠깐 진지하나 싶더니 또 시작이었다. 족히 3년은 놀려먹을 것 같았다.
‘그 양식우럭 같은 놈은 어쩌자고 약속 장소를 여기로 잡아서는!’
모단은 부득 이를 갈고는 걸음을 뗐다.
“저도 약속 있습니다. 그럼 이만.”
그러나 곧바로 견에게 코트의 허리끈을 붙들렸다.
“안 돼요. 오늘 너무 예뻐서 맘에 안 드니까 집에 들어가세요. 택시 잡아드릴게.”
“대체 뭔 상관!”
“맞다. 내가 왕 재미있는 거 보여 드릴까요?”
견이 다짜고짜 제 휴대폰을 내밀었다.
잘생긴 얼굴이 화면의 절반을 채우고 있었다. 느닷없이 웬 셀카 자랑인가 싶었는데, 배경을 다시 보니 잘 아는 여자가 보였다.
서른 살 앳된 나이에 깜찍이 핀을 꽂고, 논두렁에서 새참 국수 먹듯이 파스타를 후루룩 빨아들이는 옆모습이.
“나 셀카 고자인데 간만에 인생 사진을 건져가지고. 널리널리 자랑하고 싶은데 뒤에 나온 사람 모자이크 하는 방법을 모르겠네?”
모단의 콧구멍이 화기로 폭발할 기세였다. 견은 개의치 않고 허리끈을 말고삐 쥐듯 잡고 모단을 밀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집에 갑시다. 그러게 집은커녕 역까지도 안 바래다주는 남자 만나면서 뭐 하러 그렇게 꾸미고 나와서는.”
길가로 나온 그가 바로 택시를 잡더니 뒷좌석에 모단을 태우고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조수석 창문으로 기사에게 지폐를 건네며 싱긋 웃었다.
“이 아가씨 집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딴 데로 새려는 낌새가 보이면 강남 희명그룹 본사 앞에 내려주고 가버리세요.”
저 미친놈, 소리가 목까지 치밀었다. 견이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내가 열 살 때 미친 듯이 집착했던 게 있었어요. 너무 사랑해서 매일 물고 빨았는데. 뭔지 알아요?”
대답할 리가 없는 모단을 지그시 바라보며, 견이 속삭였다.
“깜찍이 소다.”
“와아이씨!”
견이 잽싸게 물러서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아가씨, 어디로 가면 돼요?”
모단이 새빨개진 얼굴로 집 주소를 불렀다.
“남자친구가 잘생기고 귀여운 데다 착하기까지 하네.”
“남자친구요? 남자친구우우우? 아닌데요!”
“남자친구 아닌데 택시 태워주고 뒤에서 번호까지 확인하고 지켜보고 있나.”
허허 웃은 기사가 사이드미러를 보며 말했다. 모단은 화닥닥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훤칠한 실루엣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신호에 걸려 택시가 멈췄고, 그는 더 이상 작아지지 않은 채 시야에 머물렀다.
‘대체 뭐냐고. 마주치기만 하면 혼이 쏙 빠지는 것 같아.’
곧 확실해진다는 건 뭔지.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건 뭐고, 보름에 직접 확인하러 오겠다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멀리서만 보았다면, 소문으로만 들었다면 아무 의심 없이 사이코에게 잘못 걸렸구나 했을 거다. 미인점 페티쉬를 가진 바람둥이가 제게 개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라고.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았다. 맞닥뜨릴 때마다 뭔가가 맘에 걸렸다.
피범벅이 되어 제게 매달릴 때, 그 눈동자 안에서 본 절박함.
뜨겁고 무겁게 짓누르던 무게.
질척한 피비린내와 가쁜 숨소리.
온 감각을 강렬하게 휩쓸었던 것들이 선연히 남아 지워지질 않았다.
아무리 헛소리를 남발하고 똘끼를 뽐내도, 처음 본 날의 그가 문득문득 그림자처럼 엿보이며 발목을 붙들었다.
‘차라리 만난 김에 진지하게 대화 좀 하자 그럴 걸 그랬나?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대체 뭐냐고…….’
그때였다.
웬 여자가 불쑥 뛰어들더니 견의 팔을 잡았다.
눈에 확 띄는 화려한 차림. 기억이 맞다면 아까 레스토랑 입구에서 잠깐 보았던 그 미녀다.
택시가 다시 출발했다. 고개를 돌린 견이 그 여자 쪽으로 돌아섰다. 팔을 뿌리치지 않은 채로 나란히 걸음을 떼는 두 사람의 모습이 점처럼 작아지더니 사라졌다.
다시 앞을 보고 앉은 모단은 한참 동안 눈만 깜박거렸다.
얼음을 뒤집어쓴 것처럼 머리가 차게 식었다.
“그래도 돈 많고 잘생겨서 사는 데 큰 지장은 없나 보더라. 여자도 수시로 갈아치운다던데?”
은규가 했던 말이 약 올리듯 귓가를 울렸다.
조용히 가라앉히려 해봤으나, 혈압과 분노가 한데 폭발했다.
“아으악!”
분명 미녀를 태웠는데 야수의 소리가 넘어오는 통에 기겁한 택시기사가 뒤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모단은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다.
‘진지한 대화는 무슨, 이유는 무슨! 저 개자식이랑 한 번만 더 말을 섞으면 내가 개다! 아니, 소다! 그러면 깜찍이 소다…… 옘병!’
***
모단을 택시에 태워 보낸 견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가 시킨 일 때문에 섭호가 정신없이 바쁜지라 혼자 나왔다. 오랜만에 한국에 왔다는 금지와 약속을 잡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여자가 들어오는 게 아닌가.
처음엔 닮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했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해서 그런지 매번 최소한의 화장에 수수한 바지 차림이었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확 달랐다.
자리에 앉을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려보니 가슴까지 콩닥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정모단 씨 맞으시죠?”
“네, 안녕하세요.”
그녀가 웬 남자 앞에 마주 앉았을 때, 그러니까 누가 봐도 소개팅 혹은 맞선 자리라는 걸 알았을 때,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어디서 본 것처럼 박력 있게 끼어들어 이 여자는 내 여자다 하고 끌고 나갈까도 생각했으나 그럴 명분이 없었다. 그러고 난 후에 좋은 소릴 듣기는커녕 더 박력 있게 혼날 것 같았다.
사실, 애초에 나설 필요도 없었다.
“아이, 안 되겠다.”
안 어울리게 내숭도 잘 떤다 싶던 그녀가 핀을 꺼내 떡하니 장착한 순간, 너무 재밌어서 끊을 수가 없는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저 말고 다른 남자에게도 철벽 치는 게 어찌나 흐뭇하던지, 웃음 참느라 광대가 쑤시는 걸 참아가며 끝까지 구경했다.
중간에 사진도 한 번 찍었다. 너무 귀여워서.
“사실 남자친구 한 번도 못 사귀어봤어요.”
‘남자들이 가만뒀을 리가.’
듣자마자 그런 말이 치밀었건만, 멍청한 맞선놈은 그걸 믿고 슬슬 헛수작을 부리는 게 참으로 볼만했다.
“따라 해보라고요. 아! 꼭꼭 씹어요, 꼭꼭! 냠냠! 꿀꺽!”
저러다 한 방 먹지 싶었는데, 정말로 된통 먹이던 것도.
우연히 만나졌으니 보긴 봤지만, 그녀가 제 호르몬시터라는 게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만나지 않겠다는 결심대로 끝까지 모른 척하려고 했다. 정말로.
그런데 보란 듯이 코트를 놓고 가는 게 아닌가. 빨리 안 따라오고 뭐 하냐는 듯.
하필 금지마저 들어오더니 두리번대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 정각이었다. 맨날 30분은 예사로 늦는 녀석이 하필이면 오늘 딱 맞춰 올 줄이야.
곰곰이 따져볼 겨를도 없이 의자에 걸쳐진 코트를 챙겨서 몸을 낮추고 금지의 눈을 피해 레스토랑을 나섰다. 그러고는 문 앞에 서 있던 모단의 뒤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모단을 사이에 두고 맞선놈과 눈이 마주쳤다.
들고 있던 코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눈썹에 힘을 주며 입모양으로 꺼지라고 했더니 정말 꺼져 버렸다.
“뭐야, 이거.”
모단이 탄 택시 번호를 외워두고 손목시계를 힐끗 내려다본 견이 중얼거렸다.
잠깐 얘기하고 택시 태워 보낸 것밖에 없는데 벌써 10분이 지나 있다니. 분명 몇 초 같았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때 누군가 팔을 붙들었다.
“오빠!”
황금지. 노블그룹 황만석 회장의 금지옥엽 막내딸.
아버지들끼리 막역한 사이였던지라 어릴 적부터 남매처럼 자랐다.
결혼하면 현모양처가 될 거니까 지금 막 살아야 한다는 묘한 논리를 내세우며 국제적으로 싸돌아다니는지라 자주 볼 일은 없었다.
“왔냐?”
“레스토랑 안에서 보자더니 여기 있으면 어떡해? 전화라도 받든가!”
저만큼 멀어지는 택시를 힐끗 본 견은 걸음을 돌려 다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섭호 오빠는 안에 있어?”
“같이 안 왔는데? 걔 바빠.”
“뭐어?”
잡고 있던 팔을 팽개친 금지가 짜증을 냈다.
“내가 오빠랑 둘이 밥 먹자고 연락했겠어? 눈치가 그렇게 없어서 어떡할래?”
“그럼 나 말고 섭호한테 연락을 했어야지. 누가 비서인지 파악 안 되냐?”
“섭호 오빠 내가 전화하면 안 받는단 말이야!”
“그러게 적당히 들이대라고 했지?”
무심히 말해놓고, 견은 지레 찔려 뜨끔했다.
“일은 오빠나 하지 왜 섭호 오빠까지 시켜어!”
“내가 위섭호 스폰서냐? 옆에 끼고만 다니면서 돈을 주게?”
“그러게 왜 섭호 오빠는 오빠 따위의 비서를 한다고 난린지! 나한테 장가 오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편하게 살게 해줄 수 있다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씩씩대는 금지를 내려다보다가 피곤해진 견이 휘 손짓했다.
“야, 너 다시 비행기 타고 나가. 내 비서 괴롭힐 생각 하지 말고.”
“오빠나 괴롭히지 마! 키도 더 쪼끄만 게!”
“야, 황금지!”
한 달에 한 번씩 고망쥐 난닝구만 해지면서도 꾸역꾸역 180 넘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비서가 189인 탓에 쪼끄맣다는 말을 들어버린 견이 홱 몸을 돌렸다.
“간다. 나도 너랑 밥 먹을 정신 아니야.”
금지가 얼른 쫓아왔다.
“어디 가? 나 혼자 먹으라고?”
“나랑 안 먹는다며?”
“어쩔 수 없잖아. 먹자.”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제멋대로인지.”
“내 거니까 내 멋대로 하지.”
“누가? 뭐가 네 건데?”
“오빠. 백견은 내 오빠니까 내 거야. 내가 인정하는 여자한테 장가보낼 때까지는 내 거.”
“빵꾸똥꾸 같은 소리만 골라서 하고 있네.”
견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내 거야’는 세 살부터 여든까지 갈 것 같은 금지의 입버릇이었다.
“지협이 오빠도 내 거. 섭호 오빠는 진짜진짜로 백천만 년 동안 내 거!”
금지가 잡은 팔을 발랄하게 흔들며 자리로 향했다. 견은 마지못해 끌려가 마주 앉았다.
“섭호 오빠 주변에 여자 없지?”
“있으면?”
“알면서 뭘.”
금지가 잘 익은 자두처럼 발그스름한 볼을 도톰하니 부풀리며 웃었다.
“그 여자보고 둘 중 하나 고르라고 해야지. 한국을 뜨던가, 이승을 뜨던가.”
“불쌍한 섭호 녀석…….”
“좋은데 어떡해.”
다른 때 같았으면 온갖 구박을 퍼부었을 텐데, 견은 처음으로 금지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밀당도 모르냐, 너는.”
맥없이 말해놓고 또 찔렸다. 집착병이 도진 저한테 섭호가 했던 말이다.
“나도 하고 싶어, 그거. 근데 섭호 오빠를 보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바람에 자꾸 말이 먼저 나가고 행동이 먼저 나가는걸. 가짜로라도 안 좋아하는 척, 삐진 척 이런 게 안 된단 말이야.”
“그러게 말이다.”
“응?”
“난 갈릭버섯오일파스타.”
소름 끼치도록 자연스럽게 말실수를 덮은 견이 말을 이었다.
“네가 너무 들이대니까 섭호가 다가갈 틈도 궁금할 겨를도 없잖아. 좋아하기는커녕 기겁하고 질색하고…… 아,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뭐야. 섭호 오빠가 나 밀어내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다 아니까 굳이 말 안 해줘도 되거든?”
툴툴댄 금지가 메뉴판을 보는 사이, 견은 왠지 모를 미안함 속에서 모단을 떠올렸다.
“난 이거 먹을래.”
“그거 말고 이거 먹어. 지금 재료가 제일 신선할 때니까. 음료는 이걸로 하고, 샐러드는 따로 얘기할게. 메뉴에는 없는데 주문하면 만들어줘. 네 입맛에도 맞을 거야.”
직원을 불러 차근차근 주문을 하는 견을 지켜보던 금지가 눈을 찡그렸다.
“갑자기 날 왜 챙겨? 어쩔 때는 옆에만 와도 짜증 내면서.”
월경까지는 모르지만 걸핏하면 견차반으로 돌변한다는 건 금지도 익히 알고 있었다. 원래 까칠한데 더 까칠해지는 건 자주 봤어도 이렇게 살가운 건 처음인지라 당황스러웠다.
“힘내라, 황금지.”
“아파? 미쳤어? 오늘따라 왜 그러는데?”
심각해졌던 금지가 눈을 부릅떴다.
“정말 섭호 오빠한테 여자 생겼어?”
“뭐?”
“그러고 보니 아까도 없다고 안 했어! 내가 알자마자 섭호 오빠 죽일까 봐 어디다 숨겨놓고 오빠만 나온 거 아니냐고!”
견이 어버버 하는 사이, 눈가가 새빨개진 금지가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진짜 그런 거면 오빠도 가만 안 둘 거야! 섭호 오빠가 나 말고 다른 여자 만나는데 가만히 있었단 말이야? 다들 이번 생 아름답게 마무리하게 만들어주겠어. 다 부숴 버릴 거라고!”
“내 인생 이제 막 아름답게 시작할 것 같은데 뭘 멋대로 마무리해?”
혀를 쯧쯧 찬 견이 일행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표정으로 몸을 뺐다.
“섭호 여자 만날 시간도 여유도 없거든?”
“흥부네 부부는 시간과 여유가 있어서 애를 열 명씩 낳았대? 자고로 남녀란 아주 조금의 틈만 있어도 눈이 맞고 또…….”
“거기까지. 다 아니까 생략.”
상큼한 과즙상 얼굴에서 팡팡 터지는 걸쭉한 말들을 딱 자른 견이 물컵을 밀어주었다.
“진정하고 밥이나 먹어.”
뒤이어 의미심장하게 흘렸다.
“먹어야 또 쫓아다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