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답은 정모단 너
2017.06.11.
모단과의 우연한 만남 이후, 견은 나흘째 집에만 머물렀다.
그녀와 헤어진 이후부터 거짓말처럼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익숙한 조짐이었다. 달이 차오르고, 몸속의 호르몬이 해일처럼 출렁대는 느낌.
일련의 단서를 잡고 희명리조트 오션으로 내려간 섭호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내내 같이 조사하다 먼저 올라온 건데,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별 소득이 없는 듯했다.
‘평일이었으면 출결 사항만 봐도 답이 나올 텐데. 그보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부모님 란이 비어 있어서 뭔가 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부친상이라……. 어머니는 줄곧 빠져 있고.’
처음 목적은 호르몬시터가 맞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찾는 거였는데, 어느새 그녀에 대한 사소한 정보까지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다.
‘부친상으로 결석한 때가 그날로부터 한 달 정도 지난 후였어. 혹시 그때 리조트에서 아버지와 관련된 가슴 아픈 기억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래서 가본 적도 없다고 하고, 직접 묻지도 못하게 한 건가?’
막연히 찾아 헤맬 때에 비하면, 모단이 맞는지 아닌지만 가리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금세 빼도 박도 못 할 뭔가를 찾아내 그녀 앞에 들이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쉽지 않았다.
‘아버지 성함으로 리조트를 예약한 내역도 없었어. 내부 시설만 이용했다 쳐도 연회홀이 있는 층엔 어떻게 올라왔지? 하긴, 아이 혼자였다면 그렇게까지 깐깐하게 통제는 안 했을지도…….’
문득, 견은 자신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여자에 대해서도 이렇게까지 파고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지긋지긋한 의무처럼 여겼다. 비슷한 나이에 미인점이 있고, 그날 리조트에 있었을 가능성이 보이는 여자라면 일단 만나보는 것.
복잡한 조사도 필요 없었다. 보름날 적당히 약속을 잡아 코피가 날 때까지 같이 있으면서, 성적인 의미를 배제한 가벼운 접촉을 한 후에 차로 돌아가 기다렸다.
<울투라날개중형>에 적혀 있는 대로, 출혈이 발생했을 때 호르몬시터와 접촉하기만 해도 몸이 작아지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나 번번이 30분만 지나면 아이가 되었다. 허탈한 동시에 다행이다 싶었다. 애초에 이제 그만 찾았으면 하는 마음 반, 이 여자는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 반이었으므로.
극심한 혼돈을 겪었던 십대 후반과 최근 1년간마저도, 살기 위해 필사적인 것과는 별개로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아닌 것 같은 정보는 묻어버리고 싶고, 조금이라도 맞다 싶으면 어떻게든 끼워 맞추고 싶어졌다.
그야말로 답정너였다.
답은 정모단 너.
“아…….”
끊어질 것 같은 허리에 핫팩을 대고 누워 약도 듣지 않는 두통을 참아내던 견이 주방으로 향했다. 속이 보깨서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않았는데, 입은 계속 당겼다.
식탁 위를 굴러다니던 사탕을 뜯어 입에 물고 이마를 짚었다. 미열이 있는 건지 손이 차가운 건지, 오한이 몸을 훑었다.
‘당장 오늘이 보름인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또 월경을 겪고 싶지 않다. 끔찍한 일주일을 넘어 한 달을 더 기다릴 여유도 없다.
아니, 이번엔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가슴부터 목구멍까지 뜨듯한 피가 울컥 밀려 올라오던 게 떠오르며 현기증이 일었다. 달던 입안이 순식간에 비릿해졌다.
미치도록 불안했다. 곧 추락할 걸 아는데 낙하산이 없는 기분이었다.
“……안 되겠어.”
미친 호르몬이 핏줄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순간에 그녀가 있어야 한다. 그때처럼 살려달라고 말해야 한다. 손끝이라도 스쳐야 한다.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돌아간 견이 손에 잡히는 대로 겉옷을 꺼내 걸쳤다.
똑똑.
“도련님.”
노크 소리와 함께 섭호가 들어왔다.
“왜 이제 와?”
“어디 가십니까?”
“직접 가보려고. 무슨 핑계를 대서 불러낼지는 가면서 생각해 볼 거고.”
또 시작이냐며 붙들어 앉힐 줄 알았던 섭호는 담담히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거 듣고 같이 가시죠.”
“들어? 뭘?”
되물어놓고 깨달았다.
둘밖에 없는데 깍듯한 표준어를 쓰고 있다는 걸.
“당시 리조트에서 정원관리사로 근무하셨던 분이랍니다.”
섭호가 펜 모양의 녹음기를 꺼내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리조트 직원에게 누가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다는 얘길 들었다며 찾아오셨습니다. 정모단 씨 초등학교 졸업사진을 보여주면서 여쭤봤는데…….”
걸걸한 여자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아이구, 17년 전인데 얼굴은 기억 안 나죠. 정확히 얘다, 이렇게 말은 못 하지만은 아마도 맞을 것 같네요. 그만한 여자애가 혼자 있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니까.]
그때 모단은 열세 살,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해 중학교 1학년이었다.
어리지만 마냥 아이는 아닌 어중된 나이.
[그때만 해도 리조트하고 터미널 연결하는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씩밖에 없었거든요. 애가 정류장에 한참을 혼자 앉아 있길래 내가 물어봤었어요. 엄마 아빠 어디 가셨냐고.]
견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급한 일이 있어서 엄마 아빠가 먼저 서울로 가고, 저는 버스 타고 오라고 돈을 줬다는 거예요. 딱 봐도 눈이 새빨간 게 운 얼굴이라 좀 이상하긴 했는데, 애는 야무져 보여서 그런가 보다 했지.]
새빨개진 눈, 울고 있던 얼굴.
[내가 마침 퇴근하던 길이라 터미널까지 데려다줬어요. 혼자 표도 잘 끊고 인사도 똑 부러지게 하고 가더라고. 그래요, 사진 다시 보니까 맞는 것 같네. 그 누구지? 고소영처럼 코에 점이 있길래 내가 너 그 탤런트처럼 예쁘게 생겼구나, 했었거든.]
녹음된 음성은 거기까지였다.
긴 숨을 터뜨린 견은 곧장 뛰어나갔다.
내 호르몬시터.
역시 그녀가 나의 달이었다.
지구를 당기는 힘보다 더 강하게 나를 끌어당겨 줄.
***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모단은 매우 신이 나 있었다.
희명그룹 정책상 수요일은 ‘가족의 날’이라 해서 전 직원 야근 없이 한 시간 일찍 퇴근했다.
당연히 어린이집도, 부모들이 일찍 아이들을 데려가면 최소한의 마무리만 하고 바로 퇴근이었다.
“그래서 수요일엔 사내식당 석식도 안 나오고 7시 넘으면 사무실 불도 다 끄고 그러잖아요.”
“이거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어차피 다른 날에 야근 있고 종일 더 빡세게 일해야 돼서 불만이라던데, 하루라도 칼퇴근 보장해 주는 게 어디야. 안 그래요?”
“그럼요. 원래 퇴근 전에 할 일 다 하고 제시간에 뒤도 안 돌아보고 집에 가는 게 맞죠.”
사내어린이집인지라 야근하는 부모들을 위해 교사들이 돌아가며 야간보육도 하는 마당에 한 시간 일찍 퇴근이라니. 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오랜만에 쇼핑하러 가야겠다. 나 작년 봄에는 홀딱 벗고 다녔나? 왜 계절만 바뀌면 입을 옷이 하나도 없는지 몰라.’
그런데 퇴근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원장에게서 호출이 왔다.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는데, 입사서류에 누락된 게 있다고 잠깐 사무실로 올라오라네요.”
“정말요? 다 제출한 것 같은데…….”
“연경 쌤한테 잠깐 봐달라고 하고 다녀와요. 인사팀 10층에 있어요.”
“네.”
앞치마를 벗어두고 옆 교실에 있던 연경에게 사정을 말한 후, 모단은 어린이집을 나섰다.
출퇴근 때와 옥상에 갈 때 외에는 회사 안을 돌아다닐 일이 없는지라 좀 어색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서 내린 모단은 인사팀 사무실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다들 안에만 있는지 복도에는 한 명도 보이질 않아 물어볼 데도 없었다.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 손목을 잡았다. 백견이었다.
“으앗!”
짧은 비명을 다 내지르기도 전, 잡힌 손목이 끌어당겨졌다.
“나랑 얘기 좀 해요. 급한 일이에요.”
“놔요, 이거! 갑자기 뭔데? 아직 퇴근도 안 했고 볼일도 있다고!”
“그 볼일이 나예요. 내가 전화했어요. 인사팀 아니고.”
“뭐라고요?”
어처구니가 없어 힘이 빠진 틈을 타, 견은 가까이에 있는 빈 회의실로 들어갔다.
모단이 손을 뿌리치려는데 회의실 문이 저절로 닫혔다. 밖에서부터 닫히는 문틈으로 정말 죄송하다는 표정을 한 섭호가 얼핏 보였다.
‘뭐 하자는 거야, 이거?’
저보다 훨씬 큰 남자와 단둘이 갇히다시피 한 데다, 잡혔던 손목에서 미미한 통증까지 올라왔다.
‘미친개한테 제대로 물렸구나.’
할 수만 있다면 백견의 목에다가 ‘개조심’ 팻말이라도 달아주고 싶었다.
‘왜 자꾸 나를 물고 늘어지느냔 말이야. 주변에 물고 뜯을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이쯤 되니 차라리 그날 도를 알려주겠다던 사람들을 따라갈 걸 그랬나 하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할 얘기가 있어요. 오래 걸리지는 않…….”
“이게 사기, 납치, 감금이랑 뭐가 다르죠?”
모단이 견의 말을 딱 자르고 차갑게 찔렀다.
멈칫했던 견이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안 만나줄 것 같아서, 그렇다고 정중히 설득할 시간도 없어서 거짓말했으니까 사기. 힘으로 끌고 왔으니까 납치. 내 얘기 듣기 전까지는 못 나갈 거니까 감금. 맞네요. 아니라고 우기진 않을게요.”
모단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근데 나한테는 지금 그런 거 따지고 가릴 시간이 없어요. 욕을 먹든 얻어맞든 고소를 당하든, 그런 거 겁낼 때가 아니니까.”
형형한 눈빛을 마주한 모단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겁낼 필요가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겁먹어야 할 건 저였다.
솔직히 좀 무섭기도 했다.
조금 전, 두려움을 느낄 만큼의 이성이 남아 있었을 때까지는.
“야, 너.”
예고도 동의도 없이 모단의 말이 확 짧아졌다.
“협박이 취미고 엄살이 특기야?”
“……엄살이요?”
“걸핏하면 아프다느니, 죽는다느니.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건 다 네 사정이잖아!”
“내 사정인 동시에 그쪽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니까?”
극도로 열이 받은 사람과 극도로 예민해진 사람.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아이는 어른이 될 수 있어도 어른은 아이가 될 수 없다고? 매일매일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다 보면 저절로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고? 만약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건데!”
거칠게 쏟아낸 견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게 다 당신 때문이라고 하면 어떡할 거냐고.”
마주칠 때마다 시답잖은 말장난을 던지며 능글거리던 남자는 없었다.
처음 봤을 때의 눈이었다.
나 죽으면 네가 책임질 거냐고 묻던 때의 광기 어린 눈빛.
소름 돋을 만큼 강렬한데, 동시에 엉망으로 흐린 시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그때 못 잡은 멱살이라도 잡고 고함을 치고 싶었다.
모단은 그 모든 걸 꾹 억누르고 씹어뱉듯 대꾸했다.
“그게 왜 나 때문인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지금 당장.”
싸늘한 말투에 얻어맞은 견은 조금 정신을 차렸다.
이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안다. 이럴수록 상황은 더 나빠진다는 것도. 그런데 자꾸만 통제를 잃게 됐다.
견은 제 앞에 서 있는 모단을 삼킬 듯 눈에 담았다.
이 모순적인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이제라도 찾았으니 됐다 싶으면서도, 왜 이제 왔는지 따지고 싶은 마음이 왈칵발칵 뒤챘다. 예쁜데 밉고, 고마운데 원망스러웠다.
마치, 마늘 빠진 갈릭오일파스타나 녹차 말고 그린티나 뜨거운 아이스커피처럼.
‘화내고 싶지 않은데 자꾸 화를 내게 돼. 그러다가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을 때도 있고, 갑자기 미친 듯 외로워질 때도 있어. 세상에 혼자 남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다 증오스러울 때가.’
그녀를 담은 견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것처럼 일렁였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싶지 않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내가 나를 싫어하게 되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보는 것도 싫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도와달라는 말인데. 자꾸 다른 말만 하게 되는 것도 싫어.’
견의 입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린애가 왜 혼자서 거기 있었어요?”
질문이라기보다는 지친 혼잣말처럼 들렸다.
“왜 나한테는 가본 적 없다고, 묻지도 못하게 한 건데.”
모단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17년 전 이맘때, 희명리조트 오션에서 나랑 부딪혔었잖아요. 내가 코피가 나니까 미안하다면서 손을 잡아서 일으켜 줬잖아. 그러곤 가버렸어.”
모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눈빛이 흔들리는 것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내 생일파티가 열렸던 연회홀, 한 층을 통째로 통제하고 있었어요. 초대장 없이는 들어올 수 없었을 텐데, 어떻게 거기 있었죠?”
그 순간, 모단의 안에서 쿵 하고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깊숙이 묻어두고 눌러두었던 음울한 목소리가 튀어 올라 귀를 긁었다.
“초대장 없이는 들어올 수 없었을 텐데. 네가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힘껏 사리문 모단의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은 어깨를 지나 손끝까지 번졌다.
“선을 넘고 앞서 가는 것도 정도가 있다고 했지?”
분노는 두려움을 이긴다.
더구나 그 분노가, 깊고 오래된 상처가 벌어지며 생긴 고통스러운 분노라면 더더욱.
“왜 멋대로 남의 뒷조사를 하는 건데? 그게 왜 궁금한 건데!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이유부터 설명할게요. 믿기 어렵겠지만…….”
“필요 없어. 네 사정 따위 안 궁금해. 네가 죽던 말던 나랑 상관없으니까. 애초에 죽거나 말거나 내버려 뒀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견의 상처가 깊게 찔려 벌어졌다.
“됐고, 원하는 것만 말해. 뭘 어떻게 하면 더 이상 내 앞에 안 나타날 건지만 말하라고.”
딱딱하게 눈매를 굳힌 견이 성큼 다가섰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했을 텐데요. 나 책임져야 한다고.”
“야!”
모단은 회사인 것도 잊고 고함을 질렀다. 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날 나한테 와서 부딪힌 여자 때문에 17년을 괴물로 살았는데 나타나지 말라고? 그럼 계속 이렇게 살거나 죽어야 하는데 그래 줄 것 같아요? 그런 방법은 있지도 않고 있어도 없어.”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한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원하는 것만 말하라고?”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자칫 가슴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지금처럼 내 영역 안에 당신이 있는 겁니다.”
짓누르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는데도……
“항상.”
꼼짝도 하지 못했다.
견이 비스듬히 고개를 틀었다.
“그럼 이제 정모단 씨가 원하는 건 뭔지 들어보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건 빼고. 다른 건 뭐든 해드릴게요. 자원봉사 하시라는 건 아니니까.”
모단은 얄밉도록 매끄럽게 움직이는 견의 입술을 쏘아보았다.
“투잡 한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시급이건 일당이건 부르는 대로 드리는 아르바이트. 한 달에 딱 하루만,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나랑 같이 있기만 하는 걸로 합시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흘려낸 입술 끝이 비뚜름해졌다.
“얼마면 되겠어요?”
다시 한 번, 모단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한참을 서 있던 모단은 손을 들어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꼭 차에 치일 뻔했을 때처럼.
“그래, 얼마면 될까?”
내려다보던 눈길.
싸늘한 목소리.
감추지도 않던 비웃음.
그 말에 나는…….
“정모단 씨? 괜찮아요?”
당황한 견이 그녀를 살피려는데, 모단의 어깨가 크게 올라갔다 내려오더니 눈을 번쩍 떴다.
“괜찮냐고?”
다음 순간, 모단의 무릎이 견의 허벅지를 정통으로 찍었다.
“괜찮겠냐, 이 미친놈아?”
비명도 못 지르고 허벅지를 감싸 쥔 견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앉으려다가 일어났다가 다시 쭈그리기를 반복했다. 앉아도 아프고 일어나도 아파서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별 개 같은 소릴 다 듣겠네. 네가 내 스폰서라도 되냐? 같이 있기만 해도 돈을 주게? 잘도 아무것도 안 하겠다!”
견이 그 와중에도 가까스로 대답은 했다.
“진짜 아무것도 안 할 거…….”
그때, 허리를 반 접고 있던 견의 발치에 새빨간 점이 툭 생겨났다.
툭, 투둑.
점점이 번지는 핏방울을 보고 있던 견은 한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익숙한 피비린내가 훅 끼치며 손안이 뜨듯해졌다.
“미친놈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다리를 맞았는데 코에서 피가 나고.”
한 대 더 차려고 올렸던 무릎을 내린 모단이 제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차라리 진단서 떼고 고소를 해. 변호사끼리 만나게. 도저히 일대일로는 상종을 못 하겠으니까.”
모단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지금 같아서는 문 앞에 섭호뿐만 아니라 경호원들이 줄줄이 서 있다고 해도 다 쥐어뜯어 버리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입니다.”
웅얼대는 목소리가 모단의 뒤통수를 빡 쳤다.
“피 봤으니 이제 만지기만 하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