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14화 (14/86)

#14. 일곱 살짜리가 할 법한 말

2017.06.18.

견이 어린이집에 가겠다고 선언한 후, 섭호는 바로 본가에 들어 백 회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나이도 있고 지병도 있어 큰 충격이 갈 만한 이야기는 되도록 삼가는 탓에, 지난달에 견이 쓰러졌다는 것이나 호르몬시터를 찾은 것 같다는 얘기도 백 회장에게는 아직 전하지 않았다.

백 회장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몇 번이나 되물었다.

“정말 견이가 그랬단 말이냐?”

“예. 인생의 4분의 1을 그저 흘려보내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드셨다고 합니다. 가능하다면 어린이집에 있으면서 이것저것 관찰해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도련님께서 구상하시는 사업의 주요 고객층이기도 하니까요.”

고개를 주억거린 백 회장이 눈가를 훔쳤다.

“고맙다, 섭호야. 네 덕분에 견이가 사람답게 사는구나.”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도련님 의지로 하시는 일인데요.”

월경을 할 때면 집 밖은커녕 방에서도 잘 나오지 않고, 가족들조차도 보지 않던 견이 밖으로 나오겠다고 한 것 자체가 백 회장에게는 큰 감동이었다.

한동안 방황했음에도 일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안쓰럽고 기특했다.

본래 돈도 권력도 어긋나게 쓰지 않는 백 회장이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사내어린이집 원장에게 직접 연락해 하루 만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당장 내일부터 어린이집에 가도 된다는 말을 들은 견은 섭호에게 쇼핑을 부탁했다. 그동안은 나갈 일이 없어 최소한의 몇 벌로 충분했는데, 제대로 된 옷이 필요해졌으니까.

그러나 섭호가 사들고 온 옷을 보자마자 견의 입이 닷 발 튀어나왔다.

“진짜 애 같은 옷을 사오면 어떡해?”

“얼라들 옷이 다 거기서 거기쥬. 그래두 캐릭터 없는 걸루 사왔구만은.”

“내 취향 아니야.”

“밥투정으루두 모질라서 옷투정까지, 참말로 가지가지 하는구먼. 영 안 내키믄 직접 가서 골라 입으시던가유.”

그때부터 견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막상 이 모습으로 밖에 나가려니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어린이집은 익숙한 회사 안에 있는 데다 모단이라는 목적이 있으니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외의 곳은 아직 넘기 힘든 관문이었다.

“퍼스널 쇼퍼를 부를까?”

“장담허는디 도련님 까탈스런 취향 맞출 사람은 도련님밖에 없구먼유.”

“그렇긴 해. 쇼핑은 직접 하는 게 내 모토이긴 하지. 그럼 백화점 문 닫은 다음에 아동복 매장만 잠깐 열라고 할까?”

“워디서 본 건 있어가지구……. 그런 돈지랄을 혔다가 회장님이 아시믄 경을 치실 거구먼유.”

한참을 더 망설였으나, 결국은 똥고집이 두려움을 이겨냈다.

“안 되겠다. 나가자.”

“거참, 사람 성가시럽게 하는 디 뭐 있는 양반이여. 일찍 말혔음 좀 좋아유? 백화점 문 닫을 시간이구먼.”

섭호가 툴툴대며 차 키를 챙겼다.

폐점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백화점에 도착한 견은 습관처럼 남성복 매장으로 향했다가 급히 방향을 꺾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도 자꾸 시선이 느껴져서 신경이 곤두섰다. 남들 눈에도 제가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건가 싶어서.

하지만 사람들이 힐끗대는 이유는 훨씬 단순하고 당연한 거였다.

‘무슨 애가 벌써부터 저렇게 잘생겼대?’

누구의 손도 잡지 않고 도도하게 매장을 활보하는 것은 물론, 경호원처럼 보이는 덩치의 남자가 몇 걸음 뒤를 따르고 있어 더 눈에 띄었다.

유아동복이 있는 층에서 블랑아이 매장을 발견한 견이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꼈다.

“의리로라도 매출을 올려줘야 되겠지?”

“일전에 카탈로그 보셨을 때는 이딴 걸 누가 입느냐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어차피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니까 난 상관없어. 아, 고민되네. 입었다 하면 완판인데 블랑아이를 입어야 하나, 다른 브랜드를 입어서 변 대표를 한 방 먹여야 하나…….”

견이 중얼대며 블랑아이 매장으로 들어섰다. 한 방 먹여주고 싶을 만큼 얄미운 뒷모습을 향해 입을 죽 내밀었던 섭호는 전화가 오는 바람에 멈춰 섰다.

통화를 마치고 견을 따라가려는데, 낯익은 여자가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웬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정모단 선생님?”

무심코 불러놓고, 섭호는 움찔했다. 뒤늦게 척추의 통증이 되살아났다.

‘이렇게 아는 척을 할 사이는 아닌데…….’

아니나 다를까, 모단 역시 대놓고 안 반가운 기색이었다.

잔뜩 긴장한 모단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너무 방심했던 건가, 퇴근길에 또 뒷조사를 당한 건가, 등등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어제는 무척이나 실례가 많았습니다. 많이 놀라셨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섭호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모단은 대답 대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도련님과 같이 온 거 아닙니다. 선생님을 따라온 것도 아니고요. 그랬으면 제가 이렇게 인사를 드렸겠습니까?”

그건 그랬다. 모단의 어깨에서 얼마간 힘이 풀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공적으로 뵐 일이 있었습니다. 내일부터 어린이집에 신입 원아가 한 명 등원할 텐데, 제가 보호자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모단의 입이 스르르 벌어졌다.

오늘 오후에 원장에게 듣긴 했다. 내일부터 바다반에 한 명이 더 오게 될 거라고.

원래 교사 대 유아 비율을 낮추기 위해 법정 정원보다 적은 아이들을 받았던지라 한 명 더 늘어난다고 크게 힘들 건 없었다.

하나 부담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원장이 해쓱한 얼굴을 하고선 ‘회장님이 직접 각별히 부탁하셨다’는 말을 꺼낸 거였다. 새로 올 아이가 회장님 최측근 중 한 분의 아들이라며.

선입견은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어쩐지 떠받들어지는 데 익숙한 애일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그런 아이들은 친구들과 뭔가를 나누는 것이나 저 말고 다른 아이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을 못 견뎌하는 경우가 많았다.

드문드문 온다는 점도 걸렸다. 쉬었다가 다시 오면 처음부터 또 적응시켜야 하는 경우가 태반인지라 몇 배는 힘들었다.

‘대체 어떤 아이고 어떤 부모일까 궁금했는데.’

모단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섭호를 보았다.

‘그래,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겠어.’

백견의 비서. 딱 봐도 극한직업 아닌가. 회장님이 특별 지시쯤은 내려줄 법했다.

“너무 젊어 보여서 아이가 있으신 줄 몰랐네요.”

“예?”

“방금 보호자라고 하셨잖아요. 위 비서님 자녀분 아닌가요?”

눈썹을 치켜 올렸던 섭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 미혼입니다. 저와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말 그대로 보호자입니다.”

멀쩡한 총각을 순식간에 애아빠로 만들어 버리다니. 모단의 얼굴이 빨개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를 했네요.”

“죄송은요. 어제도 오늘도 당연히 오해하실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저야말로 어제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

“도련님께서 지금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셔서 직접 찾아뵙고 사과는 못 드리지만, 많이 미안해하고 계십니다.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약속드립니다.”

시종일관 정중한 태도에 조금쯤 마음이 놓이는 것도 같았다. 아프다는 말에 조금, 아주 조금 신경이 쓰이려고도 했다.

모단은 눈을 질끈 감고 두어 번 고개를 내저었다.

해빛이 잡고 있던 모단의 손을 흔들었다.

“이모, 나 저기 잠깐만 가봐도 돼? 구경만 할게.”

“아, 아니야. 이모랑 같이 가. 길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해빛의 손을 고쳐 쥔 모단이 섭호를 돌아보았다.

“어제 본의 아니게 다치게 한 건 저도 사과드릴게요. 이걸로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조용히 회사 다니면서 평화롭게 사는 게 제 바람입니다. 그럼 이만.”

모단이 해빛을 데리고 돌아섰다.

작게 한숨을 내쉰 섭호는 얼른 블랑아이 매장으로 향했다. 카랑카랑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입을 옷이라서 내가 보러 왔어요. 부모님은 안 계시지만 결제할 카드는 있으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혼자 들어와 유유히 매장을 훑는 아이에게 부모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던 직원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을 듣고 혼돈에 빠졌다.

“기본 아이템은 어디 있죠?”

“어…… 기본 아이템이라고 하면, 입고 벗기 편한 상하복 같은 거……?”

“아니요. 무늬 없는 티셔츠랑 청바지, 핏 잘 잡힌 셔츠하고 니트, 코트 같은 거.”

기가 막히고 말문도 막힌 직원은, 묘한 카리스마를 장착하고 옷을 스캔하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네킹에 입혀둔 걸 빼면 나머지는 너무 별론데. 디자인 팀이 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혼잣말을 흘린 아이가 몇 벌의 옷을 골라냈다. 가격도 라벨도 보지 않았는데, 기가 막히게도 가장 비싸고 좋은 소재를 쓴 프리미엄 라인만 뽑아놓았다.

“다 같은 사이즈로 준비해 주세요.”

해주자니 황당하고, 안 해주자니 기에 눌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직원 앞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계산은 이걸로 해주십시오.”

“아, 네!”

카드를 내미는 섭호를 본 직원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제대로 된 어른 보호자가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기쁜데, 외국 모델처럼 근사하게 생겼기에 더 흐뭇했다.

“저, 근데 코트 같은 경우는 한 해만 입히기 아까우니까 보통 한두 사이즈 크게 사시거든요. 이 사이즈로 드려도 괜찮을까요?”

직원은 섭호를 보고 물었으나 대답은 견이 했다.

“그건 해마다 크는 애들 얘기고. 패션의 생명은 핏이니까 정사이즈로 주세요.”

질렸다는 표정을 한 직원이 옷을 찾으러 창고로 들어갔다.

“도련님.”

“왜.”

“TPO에 맞는 어휘를 구사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 시간에 백화점에 있는 일곱 살짜리가 할 법한 말만 하라고?”

작아진 제 몸을 힐끗 내려다본 견이 국어책 읽듯 무표정하게 읊었다.

“이잉. 시러시러. 여기는 맘에 드는 신발이 하나도 없쪄. 안 사주면 드러누워서 울 거야. 때찌하면 양치 안 할 거야. 일찍 안 잘 거야.”

꿈에 들을까 무섭다는 표정을 한 섭호가 날벌레라도 날아든 양 귀를 몇 번 털어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알면 됐어.”

“신발만 사고 얼른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양치하고 일찌감치 코 주무셔야죠. 내일 어린이집 가려면.”

때마침 직원이 창고에서 나오는 바람에 견은 ‘이 자식’을 내뱉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직원이 새 옷들을 차곡차곡 쇼핑백에 담아 건넸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근데 왜 늦게 왔어?”

“오다가 누굴 만났습니다.”

“누구?”

“정모단 선생님이요.”

“뭐야? 정말?”

견의 목소리가 불쑥 커졌다.

“조카로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계시더군요. 만난 김에 정중히 사과도 드렸고요. 내일 등원하는 아이의 보호자라고 인사드렸더니 조금 누그러지신 것 같았습니다.”

“다행이다…….”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던 견이 홱 고개를 들어 섭호를 올려다보았다.

본인은 모르고 있었으나,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장화 신은 고양이 뺨치게 애교스러운 눈망울이었다.

“한 번만 보고 가자. 오늘도 정모단 씨는 내 운명인 것 같은데.”

“오늘 두 번이나 마주치면 저랑 운명이라고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 자제하시죠.”

“넌 백 번 마주쳐도 정모단 씨 취향 아니야.”

“어제 이후로 취향이 ‘백견 아닌 남자’로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뭐! 내 호르몬시터한테 관심이라도 있다는 거야?”

“물론 관심은 있습니다. 공적으로요. 사적으로는 좀 더 작고 귀여운…….”

“황금지 같은?”

“그게 누구죠? 전 그런 사람 모릅니다.”

철벽을 넘어 아예 모르는 사람 취급을 한 섭호가 손을 올렸다.

“저쪽으로 가셨습니다. 가보긴 하겠지만 만날지 못 만날지는 모릅니다.”

“알았어.”

견의 운명 타령이 영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닌 듯, 운동화를 사러 간 매장 안에 모단 일행이 있었다. 견과 섭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엄마는 그거 말고 이게 더 예쁜 것 같은데, 해빛아.”

“아니야. 분홍색이 예뻐.”

“골라도 하필 그렇게 밝은 색을 고르냐. 빨기 힘들게.”

새윤이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해빛은 연분홍색 운동화를 신고 폴짝거리며 신이 났다. 모단이 계산대에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해 주세요. 신고 갈게요.”

“야, 정모단! 뭘 신발까지 사주고 그래! 아까 핀도 사줬으면서. 안 돼, 하지 마.”

“내가 조카가 해빛이밖에 더 있냐? 네 신랑 덕에 들어간 회사니까 안 그래도 월급 받으면 뭐라도 쏘려고 했어.”

“무슨 월급을 받지도 않고 턱부터 낸대?”

미안한 눈을 한 새윤이 해빛의 뺨을 콕 찔렀다. 헤헤 웃으며 이모 고맙습니다, 한 해빛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이모, 근데 아까 이모랑 얘기한 키 크고 잘생긴 아저씨는 누구야?”

“뭐어? 키 크고 잘생긴 아저씨? 진짜야?”

흥분한 새윤의 목소리가 커졌다.

맞은편 매장 직원의 수상한 시선을 받으며 마네킹 근처에서 알짱대고 있던 섭호와 견이 허둥지둥했다.

선물 사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며 구시렁거린 모단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회사 사람 우연히 만나서 인사한 거야.”

“회사 사람이라니? 어린이집에는 남자 없잖아. 회사에 알 사람이 누가 있는데?”

“어쩌다 알게 된 사람 있어. 말 그대로 그냥 알기만 하는 사람.”

새윤은 영 수상하다는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모단이 다 샀으면 나가자고 말을 돌리려는데 갑자기 해빛이 외쳤다.

“어! 저기 저 아저씨야!”

“뭐?”

모두가 매장 밖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박해빛. 엄마가 양치기 소년 그림책 읽어줬던 거 기억 나, 안 나?”

“거짓말 아니야! 방금 저 앞에서 나와서 지나갔는데…….”

해빛이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이렇게까지 눈썰미가 좋고 적극적일 줄은 몰랐기에 섭호도 견도 당황했다. 특히나 섭호는 워낙 커서 어디 숨기도 곤란했다.

“너 일단 빨리 차로 가.”

섭호의 등을 떠민 견이 그 자리에 섰다. 어리둥절했던 섭호는 해빛의 뒤를 따라 새윤도 나오는 것을 보고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후다닥 피했다.

“애기야, 잠깐만.”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하는 김에 키 큰 아저씨를 추격하던 해빛이 끼이익 멈췄다.

난 이제 애기는 아니지만 혹시나 싶어 돌아보았던 해빛의 눈동자가 몽롱하니 풀어졌다.

“우와아…….”

7년을 살면서 처음 보았다.

사람에게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광경을.

‘말도 안 돼. 아빠보다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니!’

동화 속 왕자님처럼 생긴 남자아이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어깨를 짚었다 뗐다.

“뛰지 마. 위험해.”

“으, 으응…….”

“그래. 뛰지 말고 여기 딱 서 있도록 하자.”

더 이상 섭호를 쫓지 못하게 붙들어두는 것이었지만, 영문 모르는 해빛은 그저 황홀할 따름이었다. 키는 조금밖에 안 큰데 너무 멋있어서 오빠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근데…….”

해빛의 머리에 꽂혀 있는 깜찍이 핀을 본 견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이제야 모단이 맞선 때 꽂고 나온 스페셜하고 럭셔리한 핸드메이드 핀의 출처를 알 것 같았다.

“그 핀 네 거야?”

“응.”

“예쁘다.”

해빛의 뺨이 새 신처럼 예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헉헉대며 온 새윤이 해빛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쪼그만 게 왜 이렇게 빨라? 너, 그러다 엄마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마음대로 막 뛰어가!”

바로 뒤따라온 모단과 눈이 마주친 견은 마른침을 삼켰다.

당연히 못 알아볼 테지만, 가슴이 쿵쿵 뛰었다.

견이 주춤 뒷걸음질을 하는데, 해빛이 쏙 다가들었다.

“있잖아, 너 몇 살이야?”

“스무…… 아니, 일곱 살.”

“우와, 나랑 친구다! 이름은 뭐야? 나는 박해빛이야!”

“잠깐만, 해빛아. 지금 뭐 하는 거야?”

좀 있으면 번호도 딸 것 같은 딸내미를 뜯어말린 새윤이 견을 돌아보았다.

“꼬마야, 부모님은 어디 계셔? 혹시 우리 해빛이랑 부딪혔니? 어디 다쳤어?”

“아, 아니요!”

손을 내저은 견이 얼른 물러섰다. 어색하게 인사하고 얼른 몸을 돌려 도망쳤다.

“안녕히 계세요!”

특이한 애네, 하고 중얼거린 새윤이 몸을 일으켰다.

“뉘 집 자식인지 귀티나게도 생겼다. 아역배우 아니야? 저런 아들 낳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하나 더 낳겠다.”

“언제는 둘째의 둘 소리만 나와도 은규 입을 쥐어뜯으려고 들더니.”

“그냥 하는 말이지. 해빛이 하나 잘 키우기도 벅찬데 아들은 무슨.”

해빛의 손을 잡은 새윤이 이만 가자며 앞장섰다. 모단은 걸음을 옮기다 갸웃했다.

‘방금 걔, 어디서 본 것 같았는데? 정말 아역배우인가?’

조금 더 생각을 더듬어보려 했으나, 앞에서 들려오는 해빛의 말이 워낙 강력해서 다 잊고 말았다.

“엄마.”

“응?”

“나 방금 사랑에 빠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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