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안녕하세요, 백무탈입니다
2017.06.21.
다음 날 아침, 직접 고른 꼬까옷을 차려입은 견은 얌전히 섭호 앞에 앉았다.
“회장님 비서진 중 한 분의 아들이라고 해뒀슈. 본사허구 해외 지사를 오가는디 한국서 일할 때만 며칠씩 댕긴다구유. 이름은 급허게 서류를 내다 보니께 의논드릴 시간이 없어서 일단 지가 적어 냈슈. 백무탈이라고.”
“뭐? 이름을 백무탈이라고 했다고?”
“그럼 백견이라고 헐까유?”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
“근데 왜 하필 무탈이야?”
“사고 치지 말구 무탈허게 잘 댕기시라구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대충 지은 거 아냐? 옴므파탈이라는 말은 자주 들어봤어도 무탈이는…… 잠깐.”
견이 입을 다물었다.
섭호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어린 시절, 위 비서 아저씨의 본가가 있는 시골에 내려가서 본 적이 있었다.
본래 이름은 윤호였는데 가족들도, 동네 어른들도 모두 무탈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워낙 몸이 약해서 다들 그렇게 불러 주는 거라고 했다.
“괜찮겠어?”
섭호는 헛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만한 아이를 보면 생각나는 이름이 하나밖에 없어서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담담한 표정과 깍듯한 말투 뒤로 꼭꼭 숨어버리는 섭호를, 견은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서류는 바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됐어. 그냥 둬.”
본래 키였다면 어깨를 두드려 줬을 텐데, 지금은 팔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견은 조막만 한 주먹으로 그의 팔을 툭 쳤다.
“건강하고 씩씩하게 친구들하고 잘 뛰어 놀 것 같은 이름이네. 좋아.”
입술을 꾹 말아 문 섭호가 작게 답했다.
“……감사합니다.”
“내가 고마워. 넌 참 좋은 형이야.”
견이 이만 가자, 하고 몸을 일으켰다.
“백견은 네 형이지만, 무탈이는 네 동생이니까 형이라고 부를게.”
한 손으로 눈가를 슬쩍 훔친 섭호가 은근한 도발을 흘렸다.
“형이랑 손잡고 갈까?”
“너 하루살이야? 오늘만 사니?”
얼마 후.
어린이집 문 앞에서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견은 섭호의 손을 꼭 붙들고 매달렸다.
“이 손 놓으십시오. 저는 하루살이가 아닙니다.”
“내가 잡고 싶어서 잡는 것 같아?”
“이왕 잡았으니 이대로 가시죠, 도련님.”
“잠깐만, 나 마음의 준비가!”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가는 광경이 너무 낯설었다.
차마 거기 섞일 용기가 나질 않아 버티고 있는데,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 큰 아저씨! 그리고 내 사랑!”
“뭔 소리야, 이거?”
돌아본 순간, 견의 눈앞으로 뭔가가 휙 날아들었다.
“해빛아!”
처음 보는 남자아이를 덥석 끌어안는 딸을 보고 기겁한 은규가 급히 뛰어왔다.
가뜩이나 정신없는 와중에 강렬한 포옹까지 당한 견은 뿌리칠 생각도 못하고 해빛에게 목덜미를 내준 채 이리저리 나부꼈다.
“우리 어제 백화점에서 만났지, 그치? 우와! 달님이가 내 소원을 들어줬어!”
“저기, 애기야, 이것 좀……!”
견의 눈에는 충분히 애기라서 애기라는 말이 튀어나온 건데,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나 애기 아니야! 해빛이야!”
이만하면 많이 컸다고 믿고 있는 7세 아이에겐 모욕적이겠지만, 드라마 좀 봤다 하는 어른들에겐 스위트하다 못해 오글거리는 호칭이 아닌가. 남들 눈엔 둘 다 애기라서 더 그랬다.
“어, 그래. 미안하다, 해빛아. 이것 좀 놔줄래?”
“그래. 근데 너 이름이 뭐야? 우리 아빠 회사에 왜 왔어?”
‘법적으로는 우리 할아버지 회산데. 물론 오너만의 것은 아니지만은.’
그사이, 섭호와 은규가 얼른 다가왔다. 전에 블랑아이에서 함께 일했던 은규를 알아본 견은 어어, 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애들 눈에는 너무 커서 무서워 보일세라 몸을 낮춘 섭호가 싹싹하게 말을 건넸다.
“벌써 친구가 생겨서 다행이네. 얘는 백무탈이야. 오늘부터 여기 다닐 거야.”
해빛이 가방 끈을 꼭 쥐며 환히 웃었다.
“정말요? 그럼 무탈이도 바다반이에요?”
“응. 같은 반이구나? 잘 부탁해.”
“말도 안 돼! 너무 좋아!”
해빛이 견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단숨에 문 앞까지 끌고 갔다. 여기서 거길 못 가서 한참을 실랑이했던 섭호 입장에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선생님! 어제 그……!”
현관에 나와 있던 모단이 황급히 해빛의 말을 막았다.
“해빛이 왔구나! 잘 잤어? 좋은 꿈 꿨니? 아침은 먹었니? 새로운 친구도 함께 왔네? 반갑다. 어서 와.”
뒤따라온 섭호가 공손히 인사를 했다. 모단도 직업정신 투철한 미소로 화답했다.
다른 학부모들이 힐끔거렸다. 개중엔 섭호가 견의 비서라는 걸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알건 모르건 누가 보아도 눈에 띄었다. 아빠라기엔 너무 젊고 잘생긴 보호자와, 눈에 확 띄는 아이의 조합은.
섭호가 반쯤 넋이 나간 견의 머리를 꾹 눌렀다.
“선생님께 인사 안 해? 안녕하세요, 백무탈입니다, 해야지.”
‘너 이따 두고 보자.’
속으로 부들거린 견이 입술을 오므렸다. 사정 모르는 이들의 눈에는 낯을 가려서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탈아, 안녕?”
쭈그리고 앉은 모단과 눈이 마주쳤다. 견은 손끝에 닿은 옷자락을 꼭 쥐었다.
백견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다정한 미소가 바로 앞에 있었다. 따뜻한 진심이 느껴지는 눈빛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대로 백견을 마주 봐주는 광경을 상상해 버린 탓이다.
뚫어져라 보는데, 문득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이 보였다.
“오늘부터 너랑 같이 놀게 된 정모단 선생님이야. 만나서 반갑다.”
상상은 산산이 부서져 날아갔다. 가슴도 가라앉았다. 견은 고개만 까닥했다.
“친구들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얼른 들어와. 신발 혼자 벗을 수 있지?”
‘나 참. 신발만 잘 벗는 줄 아나.’
아이로 보이니 아이 취급하는 게 당연한 거고 짐작도 했지만, 막상 당해보니 기분이 꿀꿀했다. 정말 아이라도 된 것처럼 심술이 돋았다.
“신발장에 무탈이 이름도 붙여놨어. 여기다가 놓으면 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으로 신발을 벗어 올려둔 견이 우아하게 한 걸음 들어섰다.
몸을 일으킨 모단이 섭호와 짧은 인사를 나눴다.
“무탈이 형…… 께서 등하원 시켜주시는 거 맞죠?”
“네.”
“가방은 오늘 하원할 때 나갈 겁니다. 자세한 전달 사항은 저녁에 따로 연락드릴게요.”
모단이 견을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무탈아, 형아한테 다녀오겠습니다, 해야지.”
견이 섭호를 향해 눈총을 쏘았다. 인사 받을 생각 말고 빨리 가라는 시선이었으나 섭호는 꿋꿋이 서 있었다.
“무탈아?”
모단을 한 번 올려다보고, 배꼽인사를 하는 다른 아이들을 힐끗 본 견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다, 다녀오겠습니다…….”
“크읍.”
주먹으로 입을 꾹 눌렀다 뗀 섭호가 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인사 잘하네. 사고 치지 말고 잘 놀다 와라.”
견의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네, 형.”
어금니를 꽉 깨물고, 천진난만하게 웃어주었다.
“집에 갈 때 봐요.”
이번에는 섭호의 동공에 지진이 났다. 모단에게 인사를 한 그는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가자, 무탈아.”
모단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움찔했던 견은 조금씩 손에서 힘을 뺐다.
아마 원래는 제 손보다 훨씬 작을 테지만, 지금은 참 크고 든든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다른 사람과 가만히 손을 잡아보는 것도 얼마만인지 가물가물했다.
기분이 이상해지려고 해서 일부러 생각을 돌렸다.
‘코피 날 때 이렇게 한 번만 잡아주지. 그럼 이번 달에도 월경 따위 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 속도 모르고, 모단은 상냥하게 물었다.
“무탈아, 혹시 다른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도 다녀본 적 있어?”
22년 전에 다녔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견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럼 아빠가 일하실 땐 누구랑 있었어?”
“혼자 집에 있죠.”
모단이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중고등학생도 아니고 고작 일곱 살인데 혼자 집에 있었다고? 엄마는? 베이비시터를 못 쓸 형편도 아닐 텐데?’
일곱 살은 종일 혼자 두기엔 한참 어린 나이라는 걸 가늠하지 못한 견은 무슨 문제 있느냐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모단의 눈에는 그게 더 놀라웠다.
‘아무렇지도 않게 얘길 하네. 그만큼 혼자 있는 게 익숙하다는 건가?’
“심심할 때도 있었을 것 같은데. 혼자 뭘 하고 놀았어?”
블랑아이 대표로 있을 때는 어려진다 해도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업무 처리를 했었다. 그러나 그 시절을 제외하면 모단의 말대로 심심의 끝을 달리는 외로운 시간이었다.
현실 도피도 할 겸 자는 데까지 자보고 허리가 아프면 일어나서 국내에 발간되는 모든 신문을 정독한 후에 책을 읽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집에서 할 수 있는 온갖 취미를 섭렵했다.
저는 그랬는데, 요즘 일곱 살들은 뭘 하고 노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견은 가장 그럴싸한 것을 골라 답했다.
“책 읽고…….”
“책은 누가 읽어줬는데?”
“혼자 읽죠.”
“정말? 한글을 다 아는구나?”
영어와 중국어는 비즈니스까지 가능하고 일본어와 스페인어도 중급은 되는데 한글을 아느냐니. 순간 울컥한 견이 제 상태도 잊고 대꾸했다.
“요즘 일곱 살들 한글 몰라요? 학교 가기 전에 안 떼나?”
그리고 다음 순간, 제 입을 쥐어뜯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조마조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모단은 그저 웃어주었다. 다행히도 그녀에겐 발달이 좀 빠른 아이의 귀여운 허세쯤으로 보였기에.
“학교에 가서도 배울 수 있으니까 꼭 미리 다 알 필요는 없어. 그래도 벌써 책을 혼자 읽는다니 멋지네. 책 말고 또 좋아하는 건 없어?”
“……만화도 봐요. 퍼즐도 하고. 조립 같은 것도요.”
‘다 혼자 하는 놀이잖아. 놀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TV만 틀어준 건가?’
모단의 눈동자 가득 걱정이 들어찼다.
‘요즘 돈도 있고 빽도 있는 집에선 베이비시터에 학습교사에 원어민 교사에 놀이교사에 다 따로 두고 잠잘 시간도 없이 굴린다는데, 얘는…….’
그 만화가 말하는 펭귄이나 버스 대신 베이글한 미소녀들이나 살인사건을 몰고 다니는 탐정이나 해적왕을 꿈꾸는 소년 등이 등장하는 만화이며, 퍼즐은 최소 3,000조각짜리이며, 값비싼 한정판 프라모델을 조립한다는 걸 알았다면 모단의 근심은 몇 배로 커졌을 터였다.
“만화도 재미있지만, 선생님이랑 친구들이랑 같이 노는 게 훨씬 더 재미있을 거야.”
허리를 굽힌 모단이 견의 뺨을 두 손으로 가볍게 감쌌다가 놓았다.
“선생님도, 바다반 친구들도 오늘 무탈이가 온다고 해서 굉장히 많이 기대했거든. 얼른 들어가자.”
발그레해진 견과 모단이 막 교실 앞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 다다다 소리가 났다. 은규에게 단단히 주의를 받고 들어온 해빛이었다.
“내가 교실 구경 시켜줄게!”
모단이 말릴 틈도 없이, 해빛이 견의 손을 꼭 잡고는 교실 문을 열어젖혔다.
“얘들아! 새로운 친구가 왔어!”
도떼기시장 같던 교실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길게는 기저귀 찰 시절부터, 최소 작년부터는 함께 지낸 탓에 서로 익숙하다 못해 식상해진 희명어린이집의 말년병장들 앞에 등장한 뉴 페이스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투둑.
누군가 들고 있던 요구르트 병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뒤이어 초은이가 짧고 강렬한 평을 남겼다.
“헐, 존잘.”
모단이 헛기침을 했다. 고등학생 언니가 있는 초은이는 가끔씩 모단도 잘 안 쓰는 신조어를 툭툭 던질 때가 있었다.
“존잘이 뭐야?”
“옛날 옛날에 존이라는 아주아주 멋진 왕자님이 살았대. 그래서 잘생긴 남자를 보면 존처럼 잘생겼다는 말을 줄여서 존잘이라고 부르게 되었대.”
‘언니한테 또 속았구만.’
이마를 짚은 모단이 넌지시 말해주었다.
“비슷한 뜻이긴 한데 예쁜 말은 아니야. 초은이도 친구들도 따라 하면 안 되는 말이니까 앞으로는 쓰지 말자. 응?”
“네!”
갸우뚱하긴 했으나, 애초에 제대로 알고 쓴 것도 아니었기에 초은이는 선선히 답했다.
가뜩이나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견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너 파워봇 좋아해?”
“어…… 파워봇?”
“그럼 무적레인저는?”
“무적레인저?”
“터닝몬스터 카드 있어? 나 여덟 개 있는데. 네 것도 가져와서 나랑 대결하자!”
애초에 대답 따윈 필요 없었다. 여기저기서 던져 대는 7세들의 아무질문 대잔치에 휩쓸린 견은 혼돈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근데 이름이 뭐야?”
“백무탈!”
“왜 박해빛 네가 얘기하냐?”
“내 남자친구니까!”
해맑게 전자발찌 채우는 소리를 들은 견이 눈을 부릅떴다.
아이들도 일순 조용해졌다. 특히 동후가 가장 충격받은 듯했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을 한 동후가 한 걸음 다가섰다.
“야. 너 무슨 띠야?”
“띠?”
‘무슨 애가 띠로 나이를 물어? 애초에 다 동갑이니까 이 교실에 있는 거 아니야? 근데 일곱 살이면 무슨 띠지?’
“나는 빨강띠다! 좀 있으면 품띠 된다!”
‘태권도 띠를 말하는 거였냐? 애기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네.’
겨우 정신줄을 잡은 견이 처음으로 대답다운 대답을 내놨다.
“나는 태권도 안 다녀.”
3단까지 따서 지금은 안 다닌다는 말은 생략했다.
“그럼 무슨 학원 다녀?”
“아무 데도 안 다녀.”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조건 이길 기세이던 동후의 눈빛이 확 수그러들었다.
“칫. 부럽다.”
“앗, 무탈아!”
태권도쯤 못 하면 어떠냐, 내가 지켜주면 되지, 하는 눈으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해빛이 불쑥 나섰다.
“너 여기 김 묻었어.”
설마 잘생김, 까지 떠올렸을 때였다.
해빛이 제 손가락에 날름 침을 묻혀 견의 눈 밑을 슥슥 문질렀다. 그러고는 한마디 했다.
“아, 점이구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던 모단은 헉 했다.
울거나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다행히 무탈이는 무반응이었다. 실은 충격이 지나쳐 넋이 나간 거였지만.
모단도 어제 백화점에서 봤을 땐 몰랐는데, 아까 첫인사를 하며 무탈이의 점을 보았다. 저절로 백견이 떠올라 기분이 얄딱구리해졌다.
‘그러고 보니 성도 백씨고. 최측근이 아니라 친척 아냐? 근데 점도 유전이던가? 에이, 꼭 알아야 될 게 아니면 가족사까지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지.’
모단은 의식하지 않기로 재차 다짐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를 보는 눈에 떨떠름한 기색이 비치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그사이, 견은 간신히 아이들 틈에서 빠져나와 교실 끝 화장실로 향했다.
잠깐이라도 혼자 있고 싶었다. 여기서 멘탈이 더 털리면 우리 형 불러 달라고 외칠 것 같았다.
“잠깐만, 무탈아.”
어느새 화장실 앞에 와 있던 모단이 견의 바지를 가리켰다.
“입고 벗기 불편해 보이는데. 선생님이 바지 내리는 거 도와줄까?”
‘뭐…… 뭘 도와줘?’
견의 얼굴이 시뻘개졌다가 푸르뎅뎅해졌다가 희게 질렸다가 누렇게 떴다.
온갖 번뇌를 겪어낸 그가 허리춤을 꼭 움켜쥐고 외쳤다.
“아니요! 절대 그러지 마세요! 내가 알아서 해요!”
성교육 한번 야무지게 받은 듯한 대답에 모단은 내심 기특해했다. 한편으로는 뭐 보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 취급을 받은 것 같아 떨떠름하기도 했다.
“혼자 잘할 수 있겠어?”
“얼마든지요!”
얼른 화장실로 들어와 문을 닫은 견이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온 김에 정말로 볼일이나 보려던 견은, 쉬야가 떨어지는 곳에 앙증맞은 물레방아가 달린 개구리 모양 소변기를 보고 벽에 이마를 박았다.
“집에 가고 싶다…….”
***
그날 저녁, 모단이 섭호에게 전화를 했다.
[첫날이라 걱정 많이 하셨을 것 같아서 전화 드렸어요. 생각보다 굉장히 적응을 잘하더라고요. 친구들하고도 잘 어울리고, 활동도 잘 따라왔어요.]
“그랬습니까?”
[점심도 편식 없이 흘리지도 않고 잘 먹었고요, 화장실도 혼자서 잘 가고요.]
우리 도련님, 나이 스물아홉에 이런 칭찬 받기 쉽지 않은데.
섭호는 휴대폰을 잡지 않은 손으로 제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
[혹시 월요일에 가기 싫다고 한다거나 힘들어해도 너무 걱정 마시고 보내주세요. 첫날에는 뭐가 뭔지 모르고 왔다가 뒤늦게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변덕 대마왕인 견이 하루 만에 때려치울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의외로 안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무탈이는 원에 대해서 얘기 안 하던가요?]
“하루가 금방 갔다고 그러더군요. 그리고…… 선생님이 무척 좋다고 했습니다.”
모단의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다행이네요. 혹시 지금 무탈이랑 통화할 수 있나요?]
“어쩌죠? 이런 외출이 처음이라 많이 피곤했나 봅니다. 벌써 잠들었습니다.”
[그랬구나. 아쉽네요. 그럼 주말 잘 보내시고요. 참, 월요일엔 옥상 텃밭에 감자 심기를 할 거니까 편한 옷을 입혀서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과연 입을진 모르겠지만…….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섭호가 옆을 돌아보았다.
터닝몬스터 노래가 나오는 TV 앞, 견은 소파에 엎드린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씻고 저녁을 먹자마자 애기들이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며 웬 만화를 찾아 틀더니, 얼마 보지도 못하고 곯아떨어졌다. 종일 기를 쪽쪽 빨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리모컨을 찾아 TV를 끈 섭호가 작은 몸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눕혀주고 목 끝까지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정말 아이처럼 새근새근 잠든 견을 얼마간 내려다보던 그는 투박한 손길로 이불 위를 다독였다.
“……도련님 덕에 지가 형 노릇을 다 해보는구먼유.”